무엇을 바라보며 살까?
□ 무엇을 바라보며 살까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
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
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
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
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
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
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믿음으로 칠일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도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
이 부족하리로다) (히 11:23-32)
이제 7월이 되었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라면서 한 여름 장마가 지나면 흰 뭉게구름이 탐스럽게 하늘을 수놓을 때, 소똥벌레들이 먹
을 양식을 빚어 운반해 가는 것을 보곤했습니다.
소똥벌레 부부는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면서 소똥을 새알처럼 빚어서 어디론가 굴려갑니다. 가다가 가다
가 자기들의 생각대로 저장해 둘 곳을 찾습니다.
소똥벌레가, 떠 있는 뭉게구름을 바라보면서 그 구름을 표적삼아 묻어둔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걱정 없이 그
늘에서 쉬다가 다시 자기들이 저장해둔 곳을 찾아보려고 하나, 구름은 온데 간데 사라져버렸으니, 이것을 빗
대어 소똥벌레 구름 쳐다 보듯 한다는 말까지 등장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오늘 우리의 인생을 풍자한 말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태어나 짧은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행복을 꿈 구며 살아가는 모습들이 어쩌면 소똥 벌레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뜬 구름에 표적을 삼고 행복을 그리며 사는 인생들인지도 모릅니다.
1. 사람들은 제각기 그 무엇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성공(成功)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성공(成功)이라는 뜬 구름을 바라보며 삽니다.
그 성공의 내용이 물질(物質)일 수도 있고, 명예(名譽)일 수도 있고, 권력(權力)일 수도 있고, 자식(子息)일 수도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가 추구하는 바를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이나, 불신자들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도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면서 사는 것을 따라 우리도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믿는다’는 우리들도 모두 바라보며 사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만일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과 꼭 같은 것을 바라보며 산다면,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용어(用語)에서부터 구별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믿는 사람>, <신앙인>이란 말이 항상 붙어 다닙니다.
이런 것 없이 사는 사람들을 일컬어 <불신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이란 무엇을 믿고 산다는 말이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를 믿고 사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예수가 누구길래 믿는다는 것입니까?
또 예수의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란? 세상 일반 불신자들처럼 땅에 것만 추구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의식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즘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름만 명목상의 믿는 사람이란 말만 듣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란 구별이 단지 교회에 다니는 것뿐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 외에는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는 경우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더 영악스럽고,
더 탐심과 더 물욕에 강하고,
더 이해관계에 약삭빠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서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전도를 합니까?
아니면 봉사를 합니까?
아니면 남에게 덕을 끼칩니까?
그렇다고 남을 대접을 할줄 압니까?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이 무엇을 바라보면서 살겠습니까?
자연히 보이는 땅에 것만 바라보면서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믿는다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바라보지 않고 산다면 땅에 사람들이요,
그것이 육에 속한 세상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2. 그래서 모세의 신앙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었습니다.
당시 애굽은 땅에 모든 보화를 다 지니고 있던 강대국입니다.
그런 나라의 왕의 공주의 아들이니 무엇이 더 부러울 것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과 특혜를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더 좋아해서 그것을 택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그는 <더 나은 것>으로 알고 그렇게 했다고 하였습니다.
자, 여기에서 바라보는 것의 차이가 있습니다.
모세에게도 현실적인 갈등이 컸을 것입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그대로 사느냐? 그것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 선택의 고민이 왜 없었겠습니까?
이렇게 신앙은 현실에서 언제나 갈등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신앙의 선택에는 고민이 따릅니다.
또 더 나은 것을 선택할 때는 버리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버리는 아픔이 있어야 더 나은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떠나는 아픔, 버리는 아픔, 포기하는 아픔이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더 나은 것을 볼 줄 아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모세는 바로 그런 눈을 가졌습니다.
모세는 순간적인 쾌락과 영원의 가치를 구별할 줄 알았습니다.
순간적 쾌락보다 영원한 가치의 세계를 보았습니다.
육의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여기에서 실패합니다.
그 대표자가 에서였습니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렸습니다.
그것이 죄를 범한 모든 사람들의 행위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고난 받는 것을 애급의 모든 부귀영화보다 더 나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상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요셉도 바로 그것을 바라보았던 인물입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것은 상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무엇을 바라보며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세상 속어에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쾌락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평생을 바람 피우는 사람들은 그 바람 속에서 죽어갑니다.
평생을 <돈>만 보고 사는 사람들은 돈 때문에 죽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좋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good)보다 더 좋은 것(best)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곡성 다니엘 기도원 원장이고 안디옥 교회 장로인 박영문 장로의 <내가 본 천국과 지옥> 이란 책을 읽어본 분들은 알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그는 생생하게 보고, 본 그대로 기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본래 철저한 불신자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이유 없이 미워했습니다. 둘째형님이 목사이었지만, 예수 믿는다고 아예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다니지도 않았습니다. 어느 날 자기를 버리고 나간 아내를 찾다가 처갓집 여덟식구들을 몰살 시키고 자기도 죽으려고 작정을 하고 행동으로 옮기려던 전날 밤에 초자연적인 힘에 의하여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그 간증을 다 말할 수 없지만, 요지는 결국 자기처럼 완악한 자를 선택한 하나님은 놀라운 하나님이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것은 ‘네가 본 그대로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라’, ‘두고 보리라’는 말을 듣고 정신을 들게 하였다는 내용입니다.
그런 신비로운 경험을 하고 형님 목사를 찾아갔더니 내가 너를 위해 18년간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 주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 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천국과 지옥은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박영문 장로의 간증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 경청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천국은 밭에 감추어져 있는 보화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들은 모든 것을 팔아 감추어진 보화를 사는 것처럼 그렇게 사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3. 고로 믿음으로 산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다’고 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생활입니다.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믿으며 사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없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이기에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제자 중 빌립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시옵소서 할 때 주님은 ‘나를 본 자는 내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이후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이 있을 찌로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나는 무엇을 바라보면서 살고 있습니까?
무엇에 소망을 걸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뜬 구름과 같은 세상의 것들,
없어질 땅에다 소똥벌레 처럼 모든 노력을 투자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는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미국사람들이 뭐니 뭐니 해도 우리와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들은 더 나은 것이 무엇인지 신앙으로 다져진 사람들임을 볼 수 있습니다. 청교도들이 다져놓은 신앙의 바탕 위에서 축적된 부(富)이기 때문에, 저들은 돈을 사회에 환원시킬 줄 압니다.
땅에 것만 바라보는 가치관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번에 미국에서 두 번째로 부자인 <워렌 버핏>이 자기의 재산을 무조건 사회에 내 놓았다고 신문에 난 것을 보았습니다.
374억불이란 재산을 아무런 조건 없이 내 놓았습니다.(37조 4억원)
우리나라의 크리스천 재벌들도 천국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일들이 일어나야 할 줄 압니다. 강제적 수단으로 빼앗기듯 하지 말고, 스스로 조건 없이 사회에 환원시킬 수 있는 그런 날이 속히 도래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러했기에 모세의 어머니는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고, 그러했기에 하나님의 백성 된 이스라엘이 애급에서 나와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고, 그러했기에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고, 그러했기에 여리고성을 무너뜨렸고, 그러했기에 믿음으로 기생의 몸이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을 숨기어 줄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살 고간 사람들을 어찌 다 열거할 수 있겠는가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을 볼 때,
우리는 너무나 땅만 바라보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앞서간 성도들은 그토록 어려운 생활에서도 주일을 성수했고, 말씀대로 교회를 사랑했고, 직분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모두 무엇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보십니까?
더 나은 것을 바라보았고, 상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이 시간 자신을 반성하는 가운데, 하늘을 바라보고 더 나은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아 나의 가치관과 생활관이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