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
마가복음 1장 16-20절
< 부르심을 따라 사십시오 >
지난 주일에 OO 지역에서 병원을 운영하시는 한 권사님이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저희 교회에 좋은 목사님 한 분 추천해주세요.” 제가 그 교회 장로님과 권사님 몇 분을 알고 있습니다. 한 권사님은 인터넷 사역으로 말씀 안에서 거의 10년째 교제하고 있습니다. 좋은 분들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분들이 섬기던 교회의 담임목사가 사임해서 지금 담임목사를 찾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그 얘기를 듣고 솔직한 심정으로는 좋은 목사님을 추천하기보다는 저 자신이 그곳으로 가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신도시 입구에 1000석 되는 예배당을 갖춘 교회니까 아마 많은 목사님들이 그런 교회로 부임해 꿈을 펼쳐보고 싶어 할 것입니다. 저도 저의 꿈과 비전을 생각하니까 그런 교회로 부임할 수 있다면 한국교회와 세계선교를 위해서 더욱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슬쩍 스쳐지나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에 대해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왜 이런 욕심이 생길까요?” 회개했지만 계속 또 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또 회개했습니다. 그날 저녁 늦게까지 가만히 앉아서도 그 생각을 하고, 차를 타고 가면서도 그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 왜 자꾸만 이런 마음이 생깁니까?” 그 마음을 진정시키느라고 혼났습니다. 그리고 빨리 좋은 목사님을 추천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급히 그 교회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교회 사정을 죽 듣고 마음속에 품던 두 명의 목사님 중에 그 교회에 맞을 것 같은 목사님 한 명을 추천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 수요일에 그 장로님과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서 만났습니다. 꿈과 비전을 공유한 좋은 만남이었습니다. 다른 특별한 상황이 생기지 않으면 좋은 결과가 생길 것 같았습니다.
그 만남이 끝나고 좋은 교회를 소개할 수 있는 자리에 있게 하신 것과 동시에 지난 18년 동안의 한국 사역에서 많은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 솟아났습니다. 처음에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C&MA) 목사로 한국에 들어왔을 때는 한국의 많은 목사님들조차 우리 교단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단이 아닌가 하는 오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 교단은 필리핀, 대만, 홍콩에서는 한국의 장로교와 같은 메인 교단이고, 베트남에서는 현지인 교회의 90% 이상이 우리 교단 소속 교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만 유독 우리 교단을 모르는 이유는 약 100년 전에 일본의 동양선교회를 통해 공부한 몇몇 한국 목사님들에 의해 저희 교단의 4중 복음을 전하는 성결교단이 한국에 자생적으로 생긴 것을 보고 우리 교단에서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지 않고 일본을 거쳐 바로 대만으로 내려갔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다가 제가 1992년 최초로 인천에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 교회를 세움으로 한국에 생긴 최초의 기독교 선교연맹(C&MA)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뒤 조금씩 발전해서 지금은 우리 교단 소속 교회가 한국에 5개가 되었고, 교파를 초월해서 교제하는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 선교연맹(KECMA)’ 소속 목사님도 40명이 넘었습니다. 또한 인터넷을 통해 저의 설교파일을 구입한 목사님이 한국 전체 목사님 중에 1% 정도가 되었습니다.
요새 온라인 새벽기도를 하면서 그 숫자도 점점 늘고 있고, 미션퍼블릭에서 나온 책과 파일도 점점 많아지고 있고, 한국의 영어교육 체계를 크게 바꾸려는 원대한 비전을 가진 네트영어도 그 방대한 데이터가 계속 축적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번에 무한한 잠재가능성을 가진 1000석 규모의 예배당을 갖춘 교회와도 보다 깊이 교제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연약합니다. 그러나 앞으로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믿습니다. 오프라인에서도 온라인에서처럼 한국교회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현재만 해도 1991년 아무 것도 없이 귀국할 때와는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요새는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더욱 실감하며 사역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부르심을 따라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미래는 반드시 그의 편이 될 것입니다.
<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 >
본문에는 주님이 4명의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불러 사용하시는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불러 사용하실까요?
1. 성실한 사람
주님이 4명의 제자를 부를 때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본문 16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던지고 있었고, 본문 19절 말씀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노는 사람보다 항상 성실한 사람을 부릅니다. 그러므로 크게 되기를 원하면 자신을 준비시키고, 자리 자리에서 열심히 땀을 흘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현재의 일에 충실한 사람을 불러서 사용하십니다.
제가 신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좌우명처럼 여기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주어진 자리에 충실하면 내일은 더 많은 것이 주어진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성실한 땀은 내일의 축복으로 귀결됩니다. 지금의 작은 일에 충실하지 못하면 큰일에서도 결코 충실하지 못합니다. 위대한 사람들은 모두 작은 일에 열심히 일한 사람들입니다. 그처럼 보잘것없는 일이라도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꾸준히 감당하는 것이 위대함입니다.
1950년대 서울의 한 교회에 30년 동안 교회의 종을 치던 한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정말 꾸준히 무급으로 매일 교회의 종을 쳤습니다. 하나님은 성실하신 하나님이기에 성실한 사람에게는 하늘냄새가 납니다. 30년 동안 그 집사님은 교회의 종치는 봉사만 했지만 그분에게는 하늘 냄새가 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분을 보잘것없게 보았지만 담임목사는 그분을 성자로 보았습니다. 하나님도 그를 어떤 사람보다 위대하게 보셨을 것입니다.
어느 날, 그분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장례를 치렀는데 수많은 높은 분들이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보고 교인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알고 보니 그 보잘것없는 집사의 아들이 그 당시 장관이었던 것입니다. 아들이 장관이었지만 교인들은 전혀 그 사실을 모르고 그저 묵묵히 종만 치는 집사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 소리 없는 봉사가 천국에서는 큰 소리가 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것입니다.
남들이 수고를 몰라주어도 맡겨진 자리를 꾸준히 지키십시오. 그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조금 시류에 느린 것 같아도 자기 자리를 변함없이 지키는 사람이 결국 승리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십시오! 얼마나 상식을 초월한 시류에 늦은 수단입니까? 그러나 그 십자가를 통해 인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자기 자리에 충실한 사람에게 더욱 복된 자리를 허락하십니다.
2. 비전을 가진 사람
본문 17절 말씀을 보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비전을 주셨습니다. 비전은 성도를 가장 성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비전’의 반대말은 ‘비천’입니다. 비전을 가진 사람은 결코 비천하게 되지 않습니다. 비전은 비천한 인생도 최고의 인생으로 만듭니다. 불신은 ‘비전 없는 끝(end without vision)’을 보지만 신앙은 ‘끝없는 비전(vision without end)’을 봅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위치와 신분이 아니라 비전입니다. 본문에서 부름 받은 4명은 모두 보잘것없는 시골의 어부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살던 수많은 지식인과 높은 사람들을 부르지 않고 갈릴리 어촌에 살던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능력 있는 사람을 부르지 않고, 먼저 부르셔서 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현재 모습이 어떠하든지 시선은 항상 미래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나 현재의 신분에 대해선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짜 관심은 우리의 가능성과 내일입니다. 그 가능성을 보시고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아무리 평범한 존재도 비전이 있으면 비범한 존재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눈으로 자신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면서 큰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비전에 따라 미래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과거를 생각하면 저는 결코 목사가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심리적 가로막 현상 때문에 남 앞에 서기만 하면 할 말을 다 잊고 말을 심하게 더듬었습니다. 기도할 때 눈을 감으면 모든 기도제목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목사가 됩니까? 그래도 목사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말을 더듬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역사가 놀랍습니까? 자신을 어떤 한계 안에 가두지 마십시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특별한 목적을 가진 어떤 존재’로 보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일을 크게 하겠다는 큰 비전과 사명감을 가지고 사십시오. 하나님은 안전한 착륙의 축복을 약속하셨지, 날지 않는 삶의 축복을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의미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 주님이 부르셨고, 지금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제 비전을 새롭게 하십시오. 비전은 고난 중에서도 낙심하지 않게 만듭니다. 비전은 선한 일을 하게 하고, 생명력을 넘치게 합니다. 그리고 비전은 전염이 됩니다.
미국에 ‘유진 랜드’란 자수성가한 한 백만장자가 있습니다. 어느 날, 그가 할렘가에 있는 한 초등학교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학교관계자로부터 6학년 학생 중에 극소수만 중학교에 진학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삶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비전을 학생들에게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만약 너희들이 끝까지 학교에 남아 졸업하면 내가 대학교육을 시켜줄게.”
그 말에 아이들은 난생 처음으로 비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자기 앞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어떤 축복을 기대하자 사는 맛이 생기고 너무 기뻤습니다. 결국 그 학교 6학년 학생 중에 90%의 학생이 중학교에 진학했습니다. 비전은 전염됩니다. 비전은 삶에 생동감을 줍니다. 결국 비전은 모든 것을 바꿉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명적인 비전과 이기적인 욕심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욕심은 오히려 참된 비전을 망가뜨립니다. 그러므로 비전을 가질 때 그 비전이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비전인지, 아니면 자신의 생계수단과 명예심과 욕심을 위한 야망인지를 성찰해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비전을 가져야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많은 부모들이 자녀 교육환경의 문제를 내세워 이민을 계획합니다. 그러나 자녀 교육에서 교육환경의 문제보다 더욱 큰 문제는 부모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새는 바가지는 미국에 가서도 새고, 한국에서 튼튼한 바가지는 미국에 가서도 튼튼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면의 바가지를 튼튼하게 해서 부모가 욕심이 아닌 비전을 따라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욕심이 있으면 남들은 몰라도 자녀는 부모 마음속에 있는 욕심과 이기심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욕심을 따라 살면 자녀도 욕심쟁이가 되지만 부모가 비전을 따라 살면 자녀도 큰 비전을 가지게 됩니다. 결국 자녀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도 부모가 비전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처럼 비전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면 무수한 축복이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3. 순종하는 사람
본문에 나오는 4명의 제자들은 주님이 “나를 따라 오라!”고 말씀하자 즉시 순종하고 따랐습니다. 복된 존재가 되려면 비전만큼 중요한 것이 순종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보다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사실이 더 큰 축복을 불러옵니다. 하나님의 선택이란 사명을 맡기는 선택이지 물질과 지위를 주는 선택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의 선택을 잘못 이해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선택받은 것 때문에 더 고난을 당합니다.
축복은 ‘선택된 사람’보다는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선택받고 불순종하는 사람보다 선택과 상관없이 순종하는 사람을 더 기뻐하십니다. 사람은 말씀에 순종해야 잘 살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말씀은 비행기의 항로와 같습니다. 아무리 큰 비전을 가지고 솟아올라도 말씀에서 이탈하면 언제 충돌하지, 언제 미사일에 맞을지 모르는 불안한 인생이 됩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결국 비전도 이룰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밀림에 있는 뱀의 꼬리가 머리에게 그 동안 항상 가졌던 불만을 쏟아냈습니다. “야! 머리야! 왜 너는 항상 너 가고 싶은 곳으로만 가냐? 너무 불공평하다!” 꼬리가 끊임없이 불평하니까 하루는 머리가 말했습니다. “야! 꼬리야! 그럼 이제부터 네가 가고 싶은 대로 가봐!” 그러자 꼬리가 신이 나서 열심히 갔습니다. 그러다가 가시덤불로 들어가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심하게 고생했다고 합니다.
꼬리는 머리를 따라가야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똑똑해도 말씀에 앞서려고 하면 반드시 피투성이가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를 원하면 말씀대로 살려고 하십시오. 가끔 억울하고 속상한 일을 당하면 사람을 용서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은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문제가 해결되게 하시고 더욱 큰 축복으로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특별히 순종할 때도 본문의 제자들처럼 즉각 순종해야 합니다. 토론 후에 순종하는 것은 순종이 아니고, 변명하고 순종하는 것도 순종이 아니고, 한참 지체하다가 순종하는 것도 참된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감동 주시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 일에 즉각적으로 기쁘게 순종해야 합니다.
어떤 성공학 연구가가 성공한 사람들에 대해 면밀히 연구를 했습니다. 그리고 성공의 최대 요인을 ‘순종’이라고 결론 냈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결국 성공적인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삶이 지루하고 답답하게 느껴지면 더욱 헌신과 순종을 다짐해보십시오. 순종은 축복을 가져다줍니다. 더 나아가 순종하는 마음을 가진 것 자체가 큰 축복입니다.
4. 희생하는 사람
주님의 부르심에 베드로와 안드레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본문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 야고보와 요한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본문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 가니라.” 그들은 자기의 소중한 것들과 인간관계를 희생하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처럼 복음과 주님을 위해서 나의 소중한 것을 포기하는 희생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위대한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주님과 복음을 위해 ‘포기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행 4:32), 그런 삶이 능력 있는 삶이고, 그런 마음을 가진 것이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소유의 기쁨으로 사는 사람이 나눔의 기쁨으로 사는 사람이 되었으니 얼마나 큰 기적입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면 치유나 기적이 있어야 능력인 줄 압니다. 그러나 진짜 기적은 돈과 소유가 우상이 된 이 시대에서 욕심 많은 사람이 기쁘게 자기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드릴 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복된 삶을 살려면 호주머니를 잘 비우는 삶을 끊임없이 훈련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물질과 관련된 교훈이 참 많습니다.
성경 전체에 기도에 관한 말씀이 약 500구절 나오고, 믿음에 관한 말씀도 약 500구절 나오고, 사랑에 관한 말씀이 약 700구절 나오는데 돈과 소유에 관련된 말씀은 2000구절 넘게 나옵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의 6분의 1이 돈과 소유에 관련된 말씀이고, 예수님이 하신 가장 위대한 산상수훈의 3분의 1이 돈과 소유에 관련된 말씀이며, 예수님이 하신 비유 38개 중에서 돈과 소유에 관한 비유가 17개나 있습니다.
왜 성경에 그렇게 물질문제와 관한 말씀이 많습니까? 참된 제자가 되려면 씀씀이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그 희생은 희생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얻게 한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일에 돈을 내는 재미를 훈련하십시오.
어떤 분은 십일조 내는 재미로 사업을 합니다. 그분에게는 십일조를 더 많이 내는 것이 매달의 꿈입니다. 십일조 더 내는 것은 결국 그만큼 축복을 받았다는 말도 되니까 그 삶이 얼마나 재미있고, 그 사업이 얼마나 재미있겠습니까? 결국 십일조를 내면서 엔돌핀이 마구 솟아오릅니다.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돈 씀씀이는 가치관과 삶의 질을 보여줍니다. 돈을 의지하면 쌓아놓는 것을 좋아할 것이고, 쾌락을 좋아하면 돈을 쾌락에 사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쓸 것입니다. 그처럼 희생정신을 가지고 복음을 위해, 그리고 주님을 위해 손을 펴고 호주머니를 비울 때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더 크신 축복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 넉넉하게 손을 펴십시오 >
17세기에 할레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는 아우구스트 프랑크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고아들 먹일 돈이 없어 고민하는데 한 거지 과부가 찾아와 돈 좀 달라고 있습니다. 마음은 아팠지만 도와줄 여유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과부는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것처럼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그는 너무 마음이 아파서 곧 골방으로 가서 무릎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러자 마음속에 신비한 평화가 임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도 한 끼 정도는 굶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골방에서 나가서 남은 마지막 금화 하나를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곧 이어서 아이들에게 거기 과부에게 금화를 주어버린 사정을 알리고 “한 끼만 금식하자!”고 했습니다. 아이들도 다 찬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아이들을 굶기지 않으셨습니다. 바로 그날, 그는 한 부자로부터 금화 12개를 받았고, 스웨덴의 친구로부터 금화 2개를 받았고, 곧 이어 그들의 필요를 들은 근처의 한 영주로부터 금화 500개를 기부 받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프랑크의 눈에는 감사의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희생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공과 행복을 원하면 먼저 희생하십시오. 모든 위대한 성취 뒤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희생이 없으면 성공도 없지만 희생이 크면 축복도 커질 것입니다.
특히 희생할 때 어쩌다 알려지면 기쁘게 그 일을 수용하되 자신의 헌신을 스스로 광고하지는 마십시오. 그 희생을 친구나 교우나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말고, 심지어는 자신도 자신이 희생했다는 사실을 철저히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희생은 공로의식으로 발전해서 오히려 축복의 길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한 달 동안은 선교사님들의 어려운 소식을 연속으로 들었습니다. 그 어려움에 온라인 새벽기도 식구들 몇 분이 물질로 동참해주셨습니다. 대개 얼굴도 모르는 분들인데 매일 말씀으로 은혜를 받은 것이 감사하다고 소리 없이 헌신해주신 것입니다. 어떤 분은 매달 십일조까지 보내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목사님! 매일 새벽기도 메일을 통해 얼마나 힘이 나는지 아세요? 저의 작은 정성이 목사님의 문서선교 사역에 보탬이 되면 좋겠어요.”
그런 메일을 받을 때마다 사역을 하며 생기는 모든 피로가 씻은 듯 사라집니다. 또한 감사한 일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헌신의 손길을 펼치는 그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저희들도 눈물로 그분들을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 조용한 헌신을 통해 저희의 문서선교와 선교사 후원사역이 지탱되고 있습니다. 그처럼 주님의 뜻을 따라 조용히 내 것을 희생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희생한 것 이상을 되돌려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희생하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때 차오르는 묘한 영혼의 기쁨은 어떤 세상적인 누림보다 사람에게 행복과 보람과 축복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이 우리를 어떤 일로 부르실 때는 반드시 우리 인생을 최상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가지고 부르셨음을 믿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십시오. 그처럼 주님의 부르심에 힘들어도 순종하고 주님만 끝까지 따름으로 하나님 앞에 멋지게 쓰임 받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