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2장 28-34절
< 사랑의 눈을 맞추십시오 >
어느 날, LA에 사는 한 남편 집사가 몇 주간 교회에 지각했습니다. 목사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집사님! 다음 주에는 지각하지 마세요.” 목사님은 웃으면서 말했지만 본인은 자존심이 심하게 상했습니다. “자존심이 상했다!”는 말은 “놀림감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남에게 놀림감이 된 것’을 ‘남에게 기쁨을 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상처 입은 자존심을 얼마든지 믿음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데, 이 남편 집사가 그것을 못했습니다.
다음 주일이 되었습니다. 그 부부가 교회에 일찍 가려고 준비하는데 그날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남편이 급한 마음으로 “얼른 나와!” 하고 짜증을 내며 집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마당에 세워둔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습니다.
어린 아이들도 곧 후다닥 따라 나왔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1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화를 내며 방문을 걷어차고 들어가자 그때 아내가 눈썹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소리쳤습니다. “당신! 왜 그렇게 만날 늦어! 조금 일찍 서두르면 안 돼!” 남편의 불같은 성격을 아는 아내가 말했습니다. “알았어요. 그냥 가요!”
곧 아내가 코트를 손에 걸치고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눈썹은 한쪽만 그린 상태로 차에 탔습니다. 그런데 차를 운전하면서도 남편은 분이 풀리지 않아서 화장하는 아내에게 비아냥댔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행동하니까 교회에서 얼마나 창피한 줄 알아! 왜 그렇게 미련하게 행동해! 좀 바꿀 수 없어!”
계속 조롱하니까 아내도 폭발했습니다. “당신! 애들 보는 앞에서 꼭 그래야 돼? 당신 오늘 아침에 뭐했어! 내가 지어준 밥 먹고, 그냥 옷 입고 나왔잖아!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 준비하고, 식사하는 틈에 아이들 목욕시키고 옷 입히고, 당신이 막 나갈 때 겨우 설거지 했어. 그래서 세수도 제대로 못하고, 머리도 제대로 감지 못하고, 화장도 제대로 못하고,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했어. 당신이 뭘 잘했다고 아침부터 그래.”
남편도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말했습니다. “미련 곰탱아! 미련하면 입이라도 닫고 있지, 왜 입만 살아서 나불거려!” 그러다가 손을 한번 뻗었는데 잘못해서 아내의 얼굴에 손이 닿았습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내가 말했습니다. “그래! 나도 많이 참았다. 이제 헤어져! 나쁜 놈!” 그리고 흥분해서 차에서 뛰어내렸는데, 바로 그때 뒤에서 오던 차에 의해 그 아내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주일에 교회에 가다가 그런 일이 생겼으니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입니까? 현대인에게 가장 흔히 나타나는 성품이 있습니다. 바로 짜증내는 성품입니다. 너무 바쁘고, 목표는 저 앞에 있고, 일이 제대로 안 되는 것 같으면 작은 일에도 짜증이 납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사명이 약화되고 사랑이 약화된 것이 문제입니다.
기쁘고 행복하게 살려면 사명감과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랑이 넘치면 수고를 해도 기쁩니다. 사랑하면 시간도 빨리 가고, 미래가 불안하지 않습니다. 가끔 보면 이런 탄식이 나옵니다. “요새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것 같다!” 그 말은 사실 나쁜 말만은 아닙니다. 군대에 있을 때 얼마나 시간이 늦게 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삶을 사랑하고,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시간도 빨리 갑니다.
이제 삶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배우자를 사랑함으로 시간이 빨리 가는 체험을 하십시오. 그래야 성공적인 삶을 사는 에너지도 생기고, 행복도 넘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랑을 지키는데 목숨을 걸고, 퇴색된 사랑을 회복하는데 목숨을 거십시오.
일전에 한 부부 세미나에서 강사가 말했습니다. “이제 서로 좋았던 일을 회상하며 마주 앉아 눈을 맞추세요.” 그래서 참석한 부부들이 10분간 눈을 맞추었는데 그때 상당히 많은 부부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어떤 연구에 의하면 몇 십 년 부부로 산 사람들도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눈을 맞추고 바라본 시간은 총 3분도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부가 정말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10분간 눈을 맞추기만 했는데 많은 부부들이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과도 예배 중에 영적으로 그렇게 눈을 맞춰보십시오. 그러면 곧 사랑의 불꽃이 튀고 감격의 눈물이 나올 것입니다. 성도의 힘의 원천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사랑’은 행복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살기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본문이 그 사실을 잘 알려줍니다.
< 축복받는 하나님 사랑법 >
어느 날, 한 서기관이 주님께 진지하게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모든 계명 중에 첫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그 질문에 주님은 첫째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나 그 사실을 잘 알지만 문제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까? 축복받는 하나님 사랑법은 무엇입니까?
1. 오직 하나님만
본문 29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하나님은 ‘유일한 주님’이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 외에는 어떤 것도 숭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절대 점을 치지 말아야 하고, 자녀를 사랑해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 말고, 사업체를 사랑해도 가정이나 교회보다 더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처럼 무엇이든지 하나님보다 앞세우는 우상숭배는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일전에 식사하러 갈 때 엄청나게 큰 돼지 두 마리를 실은 포터가 제 차를 추월하고 갔습니다. 그때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야! 정말 엄청나게 큰 돼지다!” 그런데 그 돼지들이 우리가 식사하러 간 곳에 미리 와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어떤 건물을 짓는데 그 돼지를 잡아 고사를 지내려고 돼지를 싣고 온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돼지 머리 앞에서 빈다고 건물이 잘 지어집니까?
고사지낼 때 쓰는 돼지머리를 보면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돼지머리가 야릇하게 웃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웃는 모습을 합니까? 어떤 책을 보니까 돼지 머리가 웃은 이유는 너무 기가 막혀서 웃는다는 것입니다. 언제는 자기를 인정사정없이 무참히 죽여 목까지 자르고는 다시 자기를 부활시켜 자기 앞에 비는 것을 보고 너무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는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어처구니’란 한국말로 ‘맷돌을 돌리는 손잡이’를 말합니다. 결국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은 “조종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자기를 조절하는 ‘어처구니’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선후를 판단한 줄 알고, 사리를 판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욕심에 빠져서 하나님을 후순위로 밀고, 교회를 후순위로 밀어내면 머리가 되는 축복에서도 밀리게 될 것입니다.
2. 진실한 마음으로
본문 30절 말씀을 보십시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이 말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깨끗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레위기를 보면 대제사장은 과부나 창녀와 결혼해서는 안 됩니다. 과부와는 첫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고, 창녀와는 온전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깨끗하고 진실한 사랑을 원하십니다.
특히 하나님보다 복에 더 관심을 두는 기복주의를 멀리하십시오. 하나님은 축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축복과는 상관이 없이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일 때 더욱 가까이하시고 더욱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신하가 알렉산더 대왕에게 물었습니다. “폐하! 폐하에게는 헤페스티온과 크라테루스란 두 친구가 있는데, 왜 시간이 지나면서 헤페스티온만 가까이 하십니까?” 그때 알렉산더가 말했습니다. “헤페스티온은 알렉산더라는 사람을 사랑하지만, 크라테루스는 알렉산더 대왕을 사랑하기 때문이네.”
사람 자체를 보고 사랑하는 사람은 정이 가지만 사람의 조건을 보고 사랑하는 사람은 정이 떨어집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으려고 사랑하는 사람보다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정을 주십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손길보다 하나님의 존재를 사랑하십시오. 진짜 사랑은 유익을 구치 않듯이 하나님을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는 것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더욱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축복을 주시는 분보다 축복 자체를 더 추구합니다. 그러나 복 자체보다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추구해야 합니다. 은혜로운 선물인 ‘은사(恩賜,gift)’보다 은혜를 주는 위대한 스승이신 ‘은사(恩師,Giver)’에게 집중하고 계산이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진짜 복을 받습니다. 그처럼 대가를 바라지 않고 충성하고 헌신할 때 하나님은 더욱 큰 축복으로 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3. 뜨겁고 변함없이
본문 30절 말씀을 보면 ‘다하고’란 말이 4번이나 나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뜨겁게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징벌은 언제나 우리의 죄보다 가볍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해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것을 생각하며 항상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모습은 예배할 때 어떤 자세를 가지고 예배하는가에 따라 잘 드러납니다. 주일예배 때는 몸을 깨끗하게 씻고,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헌금을 사전에 미리 준비하고, 예배 시간 전에 조금 일찍 도착해 기도로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자세 하나하나에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처럼 마음을 다해 드리는 한 시간의 예배가 전체 인생과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은 예배하는 자세뿐만 아니라 교회를 사랑하는 자세를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교회를 위해 힘든 일을 하고 교회생활을 하면서 힘든 일을 당해도 결코 힘들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창세기 29장 1-10절 말씀을 보면 야곱이 외삼촌인 라반의 딸 라헬을 만날 때 그만 첫 눈에 반합니다. 그래서 라헬 대신 라헬의 양떼에게 물을 먹입니다. 그때 돌로 막은 우물 입구에서 돌을 옮기려면 여러 목자가 필요한데 야곱은 혼자 그 돌을 옮겼습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습니까?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또한 나중에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서 7년씩 두 번, 즉 14년을 봉사합니다. 그렇게 봉사를 해도 7년을 수일 같이 여겼습니다.
사랑하면 힘든 봉사를 해도 힘들다고 하지 않고, 더 일해주고 싶고, 무거운 돌까지 들고 싶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는 것은 보통 성도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을 비유하는데, 왜 교회봉사가 힘들어도 힘들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은혜와 사랑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 교회를 위해서 힘든 일도 기쁘게 합니다.
가끔 보면 뜨거운 사랑은 쉽게 식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이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은 맥박처럼 천국에 갈 때까지 지속되어야 합니다. 가끔 사랑에 장벽이 생기고 어려움이 생겨도 그 어려움조차 삼켜버리고, 심지어는 죽음도 불사함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왕겨나 깃털은 가벼운 바람에도 날아가 버리지만 뿌리 깊은 나무는 어떤 폭풍우에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어떤 어려움과 역경도 다 견뎌냅니다. 진정한 사랑은 끝이 없고 영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저의 사랑이 영원한 사랑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아들인 이삭까지도 바치려고 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뜨겁게 계속 사랑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4. 이웃사랑을 나타내며
본문 31절 말씀에서 주님은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축복받으려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힌 담이 없고, 이웃과 나 사이에 막힌 담이 없어야 하고, 누군가 미워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결국 이웃 사랑은 이웃만 좋으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우리를 축복하시려고 하신 말씀입니다.
사랑과 미움은 부메랑과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미움을 던지면 내게 미움과 저주가 돌아옵니다. 반대로 누군가를 사랑하면 내게 사랑과 축복이 돌아옵니다. 살다 보면 미운 사람이 보입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이 죽어 마땅한 우리를 아무 대가 없이 용서해준 것을 기억하고 우리도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면 축복의 문도 열리고 그 전에 자신의 마음이 행복해집니다.
어떤 때는 내게 해를 끼친 사람만 생각해도 자존심이 상하고, 그 기억이 계속되고 분이 풀리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정신을 번쩍 차려야 합니다. “아! 내가 마귀의 장난에 속고 있구나! 안 돼지! 내가 왜 이렇게 잘 속을까? 다 부족한 사람이니까 그렇게 할 수 있지. 그를 이해하고 용서하자!” 그렇게 생각하면 얼마나 마음이 편합니까? 그리고 마음이 편한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 다음부터 복된 일이 연속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항상 기도 중에 속으로 미움 때문에 용서하지 못한 사람을 생각하고 먼저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저에게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그런 기도를 드리는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이고, 그런 기도를 먼저 드리고 간구할 때 그 기도가 어떤 기도보다 능력 있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특히 본문 31절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계산을 초월해서 이웃과의 나눔을 실천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입으로는 사랑하는데 손으로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 사랑은 무용지물이고,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면 꽉 쥔 손을 펼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이 나누라고 감동을 주신 이웃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눠줄 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혀끝에서 끝나지 않고 손끝까지 가야 합니다. 사랑에는 ‘자비로운 마음’도 있지만 ‘자선하는 손길’도 있습니다. 사랑하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손을 펴게 됩니다. 사랑으로 마음 문이 활짝 열렸는데 어떻게 손을 꽉 쥡니까?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교인들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힘에 부치도록 자원해서 도운 것을 크게 칭찬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이웃을 향한 후한 손길로 나타나야 합니다.
요새 선교사님들이 너무 어렵습니다. 며칠 전에 한국에 세미나 차 왔던 대만의 황수 선교사님이 저의 교회를 방문해 말했습니다. “목사님! 요새 미국 선교본부에서 오던 후원도 20% 이상 삭감되고, 미국과 한국에서 개인적으로 오던 후원이 거의 다 끊겼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마음이 아파서 저희가 지출해야 할 것을 후순위로 미루고 급히 황수 선교사님에게 후원금을 드렸습니다. 그때 더 많이 후원하지 못해서 미안했습니다.
이틀 전에는 여승훈 선교사님으로부터 더 급박한 메일이 왔습니다. 프랑스에서 장기체류 비자가 거절되어 어쩔 수 없이 3월 31일까지 귀국해야 하는데 귀국할 비행기 티켓 비용과 이사비용이 없어서 쉘부룩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형편이 되었다는 메일이었습니다. 큰 뜻을 품고 선교하러 나갔다가 돈이 없어서 불법체류자가 될 형편이 된 것입니다.
편지 끝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현재 저희 비자로는 이곳에 3월 31일까지 머물 수 있습니다. 이제 귀국하려면 3명분 비행기 티켓 비용과 이사비용이 필요합니다. 현재 저희에게는 200$도 없습니다. 그 돈으로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함께 기도해 주시는 온라인 기도식구들에게 후원요청을 해주세요. 비행기 티켓은 성인 1명에 860$ x 2명=1,720$ 어린이 1명 710$, 이삿짐 비용 800$ 해서 3230 $ 정도가 소요됩니다. 어려우시겠지만 꼭 부탁드립니다. 빠른 시일 내에 필요합니다.”
너무 마음이 아팠지만 일단 이런 답장을 보냈습니다. “여 목사님! 지난주에 저희 선교연맹에서 몽골로 파송한 리사 리버다 선교사님의 발목이 3군데가 골절되어 온라인 새벽기도 식구들에게 후원요청 소식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연이어서 후원요청 소식을 하면 사람들이 온라인 새벽기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솔직히 너무 부담되고, 시일도 촉박하고 한국 돈으로 5백만 원이 넘어서 금액이 너무 많네요. 그래도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길 간절히 기도할게요.”
여 목사님 메일을 받고 마음을 짓누르는 부담 때문에 지난 이틀간 계속 그 생각뿐입니다. 요새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선교사님들이 모두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묵상하며 특히 여승훈 선교사님의 절망적인 상황이 잘 극복되도록 기도해주십시오.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지금처럼 어려운 때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없다면 삶은 얼마나 더 힘들겠습니까?
< ‘하나님을 사랑함’의 축복 >
어떤 사모님의 수기에 나온 글입니다. “남편은 하늘이라 말하고 아내는 땅이라고 말하는데, 저의 남편은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원망스런 하늘이었고, 땅은 메마르고 갈라지는데도 그 사정을 모르는 무심한 하늘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하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새 하늘로부터 내리는 은혜의 단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의 단비로 저의 심령은 사막이 되지 않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이제까지 살아왔습니다.”
아마 많은 한국 남편들이 이런 원망스런 하늘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느 인간 남편이 하늘의 역할을 잘 할 수 있고, 어느 인간 아내가 남편이 원하는 만큼 잘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새로운 하늘이신 예수님이 필요하고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요한계시록 21-22장에는 놀라운 천국묘사가 나옵니다. 수정 같이 맑은 성, 열 두 보석으로 이루어진 기초석, 열 두 진주 문, 맑은 유리 같은 정금 길,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 강 좌우에 달마다 12실과를 맺는 생명나무 등 찬란한 천국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처럼 천국이 찬란한 곳이기 때문에 천국입니까? 아닙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사모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 한 분만 진실하고 뜨겁게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어떤 축복이 있습니까? 수많은 축복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다음과 같은 4가지 축복을 명쾌하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첫째, 마음의 소원이 이뤄집니다. 시편 37편 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하나님은 ‘우리의 대단한 행위’보다 ‘우리의 하나님 사랑’을 더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이뤄주실 것입니다. 결국 제일 능력 있는 기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둘째, 자손이 축복받습니다. 출애굽기 20장 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손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진정 축복 받기를 진정 원한다면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셋째, 축복을 넘치게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처럼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고, 생각을 초월한 넘치는 축복을 예비하시고 때가 되면 그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넷째,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룹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어떤 고난과 십자가에서도 반드시 길이 생깁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회복되면 모든 것이 회복됩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첫째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 마음의 진심을 담아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하고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오늘부터 십자가조차 축복의 도구로 변하고 새롭고 복된 길이 열릴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회복하고 삶의 모든 분야에서 은총과 축복을 얻는 복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