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람을 찾는 하나님

한 사람을 찾는 하나님

누가복음 15장 1-7절


<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주님 >


  어떤 목사님이 한 사진 전시회에 초청되어 갔습니다. 전시된 사진들에는 도시민들의 애환이 잘 나타나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진은 사람들이 복권을 동전으로 긁는 사진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은 피곤에 찌들었지만 복권을 긁는 그때만은 표정이 환했는데, 그 환한 표정에는 오히려 절망감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목사님은 그들에게 예수님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은 연말입니다. 대개 이맘때쯤이면 사람들은 마음이 허전해 어딘가 기댈 곳을 찾습니다. 사람들이 복권에 당첨되기를 가장 바라는 시기도 바로 이때입니다. 이때 주님이 외로운 마음에 찾아오시면 얼마나 그 마음이 풍성하게 되겠습니까? 특히 연말을 풍성하게 맞이하려면 무엇보다 주님처럼 마음이 따뜻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겸손한 마음에 찾아오십니다. 그러므로 ‘성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겸손하게 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살면서 누가 제일 정감이 가고 가장 사귀고 싶습니까?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성공하고, 불안과 불평이 없고, 항상 만족하고 감사하며, 고난조차 내 죄와 허물에 비하면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믿음 생활에서도 한결같이 겸손한 사람들이 잘 믿고, 참 사랑도 겸손한 마음에서 꽃핍니다.


< 사랑이 무엇일까요? >


  본문에 나오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는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줍니다. 사랑이 무엇일까요?


1. 가능성을 보는 것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중에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잘 듣는 사람들은 주로 세리와 창기, 못난이들과 범법자들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즐겨하셨습니다. 그런 모습을 누가 제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얼마나 오만한 말입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남을 정죄하며 남의 천국 문을 막아섰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죄입니까? 그들은 가장 무서운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황폐한 영혼에 대해서는 눈이 멀어 있었습니다.


  완전히 침몰한 배는 다른 배의 항해에 방해가 되지 않지만 절반쯤 침몰한 배는 다른 배의 방해가 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영적인 방해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알량한 자신의 의와 어설픈 지식을 휘두르면서 자기도 손해보고 남도 상처를 주는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처럼 내적으로 황폐하게 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신 참된 목적을 알려주기 위해 본문의 비유를 하신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부족한 양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족한 양을 찾으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다른 모든 종교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사람을 찾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종교적인 열심과 노력으로 구원받지 않고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열망에 대한 ‘사람’의 응답으로 구원받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처음부터 소외된 사람들, 즉 죄인, 병자, 과부, 고아 등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본문 1절에 나오는 세리는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걷는 자’입니다. 당시 로마의 통치를 받던 이스라엘에서는 백성들의 세금을 걷어다가 로마에 바치는 세리들을 매국노처럼 큰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말씀을 들으러 오니 당시 유대 지배계층에 속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세리와 같은 죄인들을 따뜻이 맞이하고 그들과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원망한 것입니다.


  요새도 그런 원망과 불평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면서도 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목격하고 “어떻게 저런 사람이 교회에 다닐까?” 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교회는 건강하고 문제가 없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문제가 많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인 중에 인격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들도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전도하다 보면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왜 기독교에는 그렇게 교파가 많고, 왜 교인들 중에 그렇게 위선자가 많습니까?” 그들의 말은 어느 정도 공감이 갑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는 위선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위선자들이 모방하려고 애쓰는 참된 신자도 많습니다. 값싼 모조품은 항상 진품을 모방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위선자들이 많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변화된 인격자들이 많다는 뜻도 됩니다.


  이제 사람에 대해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실망을 주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십시오. 주님의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도 사랑하지만 인격적으로 미숙한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인간은 어떻든지 미완성 작품입니다. 그러므로 인격적으로 부족한 사람이 교회에 있어도 교회 자체를 부정하지 말고, 믿음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부족해 보이는 사람도 그 안에 있는 가능성을 보십시오.


2. 한 사람을 중시하는 것


  본문의 비유에 나오는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양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은 방향감각이 없는 동물입니다. 개나 고양이나 말은 자기 집을 찾지만 양은 자기 집을 찾지 못합니다. 또한 양은 자기를 보호하는 자구책이 없어서 외부의 공격 앞에 완전히 노출되고, 스스로는 자기 먹이하나 제대로 발견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팔레스타인 고원은 험하니 얼마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겠습니까?


  결국 목자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잃어버린 양 하나를 찾아 나섭니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바로 ‘양’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가끔 양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염소처럼 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반항하려고, 때로는 쾌락과 성공주의에 유혹되어 가출합니다. 그때 무조건 찾기만 하면 더 사나운 염소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기도하면서 기다릴 필요도 있습니다.


  탕자가 집을 나갈 때 아버지가 어떻게 합니까? 아무리 사랑이 많은 아버지도 그때는 먼저 찾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탕자가 환경의 채찍을 맞고 잃어버린 양의 모습을 하고 돌아오자 비로소 아버지가 버선발로 아들이 맞이합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찾을 기회를 잘 포착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신뢰하고 가만히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염소 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선택한 자녀는 언젠가 반드시 양처럼 됩니다. 여러 환경채찍과 고독의 아픔을 겪으면서 비로서 양의 성품과 사고가 생깁니다. 그때는 정말 양처럼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방향감각이 없었구나! 나는 집도 제대로 못 찾는 존재였구나! 나는 아무 능력도 없고 자구책도 없는 존재였구나!” 그런 사람이 바로 잃어버린 양입니다. 그런 잃어버린 한 마리 양들을 찾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도 가끔 힘들어서 인터넷 말씀 사역을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잃어버린 양을 찾는 데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실제로 이 사역을 통해 많은 불신자들이 믿게 되었고, 교회를 멀리했던 사람들이 다시 교회를 찾았고, 이단에 빠졌던 사람들이 돌아왔고, 우울증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평안을 찾았고,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교회에 정착했습니다. 그런 일들을 생각하면 포기하려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전심전력 하십시오. 그러면 나머지 99마리의 양 중에 일부 양은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 원망하는 양들이 누구입니까? 본문의 비유를 주님께서 하신 문맥을 정밀하게 살펴보면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불평하는 99명의 의인을 자처하는 양보다 자신이 죄인인 줄 알고 주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붙들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1명의 양을 더 귀하게 보십니다.


  결국 주님의 수학은 ‘99대 1의 수학’이고, 그 주님의 수학은 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주님 말씀과 의미가 상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숫자에 대한 맹신을 버려야 할 것을 성경 말씀 곳곳에서 강조하셨습니다. 예레미야 5장 1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한 사람의 의인이 있어도 예루살렘 성을 사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도 숫자에 연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은연중에 숫자를 제일 중시합니다. 물론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사람 숫자가 많고, 재물이 많고, 지위가 높은 것은 성공의 판단기준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성공 기준은 그런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 바로 ‘99마리 대 1마리의 양의 비유’가 말해주는 원리입니다. 물론 숫자와 돈과 지위를 억지로 배척할 필요는 없지만 그런 것들은 따라오면 좋고, 따라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 사명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요새 교인들의 최대 교회 판단기준도 숫자입니다. 그런 시류 때문에 20세기 중반에 역사상 듣고 보지도 못한 ‘교회성장학’이란 학문이 생겨났고, 교회는 경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교회성장 세미나가 숫자적인 성장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히려 한국교회 전체가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숫자적인 후퇴도 필요합니다. 숫자의 후퇴는 오히려 깨달음의 기회이고, 내면으로 시선을 돌리는 절호의 기회가 됩니다.


  이제 숫자에 지나치게 매이지 마십시오. 주님의 목회를 생각해보십시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수천 명이 주님을 따르려고 할 때 주님은 이 땅의 떡이 아닌 생명의 떡에 관한 말씀을 통해 수천 명의 군중 속에서 참된 제자를 걸러내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걸러낸 제자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두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영향력이 확대되어 지금의 기독교가 된 것입니다. 진짜 목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존경심과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의 설교로 수천 명이 돌아와 크게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가지고 흩어지지 않으니까 하나님은 큰 고난과 핍박을 통해 제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 ‘모으는 것’보다 ‘보내는 것’을 잘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고, 그것이 전체적인 의미에서는 진정한 성장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처럼 한 사람과 소수에 대한 열린 시각을 가진 사람이 바로 사랑의 의미를 아는 사람입니다.


3. 오래 참는 것


  본문의 비유에서 잃어버린 1마리의 양은 ‘소외된 사람’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허물이 많고, 사회적으로 욕을 먹고, 정신적으로 병든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그 1마리의 양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인내와 용납을 상징합니다. 또한 우리가 지금 멀쩡히 살아 있는 것도 하나님의 무한한 인내와 용납의 증거입니다. 그 하나님의 인내하심은 우리의 인내를 도전합니다. 그런 인내심이 있어야 영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실 영혼을 찾아나서는 일은 인간적으로 제일로 하기 싫은 일입니다. 그 일이 얼마나 외로우며 그 행위가 얼마나 고독한 것인가 하는 것은 그것을 경험한 자가 아니면 모릅니다. 전도는 세상에서 가장 반대 받는 일이요 물질적으로나 현실적으로는 아무 이득이 없는 일입니다. 공연히 스스로를 상대방의 공격 대상물로 내주는 것이 쉽습니까? 어느 누가 남들로부터 “이상하다! 광신자 같다!”는 소리를 듣고 싶겠습니까?


  이번에 장인 어르신의 장례를 치를 때, 옛날에 친하게 지냈던 고등학교 동창 한 명이 찾아왔습니다. 경제적으로 꽤 성공한 친구입니다. 학생 때 교회를 열심히 다녔던 친구라서 교회를 다니라고 하니까 웃으면서 얘기합니다. “나는 환자가 되기 싫다!” 성도를 환자라고 하는 말에 속이 울컥 했지만 나도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네 말을 듣고 계신다. 큰 문제가 생기고 건강하니까 그런 말이 나오는 것 같다.”


  주님을 반대하는 사람과 만나 대화하는 것은 정말 싫습니다. 그래도 영혼 구원에 관한 열정과 관심을 항상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것을 원하시고, 지금도 참된 사랑과 참된 교인의 모습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참고 인내하며 전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그 삶과 가정을 기억해주시고, 천국에서의 보상도 찬란하게 될 것입니다.


  옛날에 은혜가 어렸을 때 은혜를 잃어버린 꿈을 꾸었습니다. 교인들과 함께 정신없이 은혜를 찾으러 다녔는데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뒷동산을 찾아보라는 영감을 주셨습니다. 다행히 그곳에서 벌벌 떨고 있는 은혜를 찾아 꼭 껴안다가 잠에서 깨었는데 깨어보니까 정말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그때 자녀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심정을 생생하게 느꼈습니다. 그런 심정을 가지고 영혼을 찾아 이 땅에 내려오신 사건이 바로 성육신의 사건입니다.


  성육신에는 사람에 대한 주님의 끊임없는 사랑과 인내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 성육신의 사랑을 가지고 인내함으로 끊임없이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를 힘써야 합니다. 결국 잘 믿을수록 나타나는 현상은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인내하고 참아주는 것입니다. 인간관계를 하면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분을 만납니다. 그런 분들은 대개 인내와 겸손이 몸에 밴 분들입니다. 그처럼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 결국 성육신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결혼 생활에서 가장 훌륭한 배우자는 어떤 배우자일까요? 뭐니 뭐니 해도 편하게 해 주는 배우자가 최고입니다. 어떤 아내가 이런 수기를 썼습니다.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화난 얼굴로 남편을 대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아내입니까? 화난 얼굴로 배우자와 자녀를 대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최대한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직장에서 사장한테 야단맞아도 집에 와서는 미소 짓는 사람이 믿음과 말씀대로 살려는 사람입니다.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면 사람과도 잘 지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은 사람이고,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도 사람이고, 이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것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과 잘 지내지 못하면 귀함과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다 잃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 대해 너무 쉽게 실망하지 마십시오. 누군가에 대해 실망이 되거든 항상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진지하게 살펴보십시오. 나를 진지하게 성찰할수록 남에 대한 실망도 줄어들 것입니다. 


  자세히 보면 사람들은 대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좋은 사람들입니다. 누가 나쁘다는 사람도 가까이 가서 만나보면 듣던 것보다 훨씬 좋은 사람들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어떤 분은 평판이 좋지 않았습니다. 예의 없고, 인상 나쁘고, 말투가 거칠다고 말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만나보니 성격은 강해도 마음은 따뜻한 분이었습니다. 그처럼 많은 분들이 듣는 것 이상으로 훌륭한 분입니다. 그런 시각으로 사람을 좋게 보면 행복의 크기도 커집니다.


  천하를 얻고도 사람을 잃으면 결국 실패자입니다. 최고의 인격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인격입니다. 하나님의 관심 중의 관심도 사람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보면 마지막 장면에서 유대인 대표가 쉰들러에게 반지를 빼 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세상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한 영혼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이 세상을 구하는 것이고, 그것이 가장 잘 믿는 징표이고,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 영혼을 실족시키지 마십시오 >


  영혼을 구하는 것은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을 실족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알면 한 영혼을 실족시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실족시키지 않도록 언어와 행실을 잘 지키고, 도덕과 윤리도 중시하고, 상식과 법도 최대한 존중하고, 의리도 지키고, 감정도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실제적인 원리로서 교인들끼리 돈 거래 하는 것을 지극히 주의하고, 교인들에게 돈을 꾸거나 빚보증을 서달라고 하지 말고, 이성 관계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결혼 안 한 청년들은 교회 청년회를 미팅장소로 만드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영혼을 실족시키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십시오. 그러나 그렇게 주의해도 남을 실족시킬 수 있기에 끊임없이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한 교회 권사님이 고 3이 된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을 학원에 보내는데 마침 주일도 공부하는 학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얘야! 대학에 가서 두 배로 교회를 다녀도 되니까 교회를 빠지고 학원에 가라.” 그것이 사랑하는 아들에게 할 일입니까? 그 죄의 심각성을 모릅니다. 그때 참된 부모는 이렇게 말해주어야 합니다. “얘야! 대학에 못 가는 한이 있어도 주일예배를 빠지면 안 된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자녀로 삼아주셨다면 그때부터 그 아들은 자신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인데, 어떻게 그 아들을 그렇게 실족시킵니까?


  그 아들은 어머니 말대로 교회를 다니지 않고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불안하니까 공부를 더 못하게 되었고 결국 낙방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힘드니까 술을 마셨는데, 어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욕을 해댔습니다. 그 아들은 어머니의 욕이 듣기 싫다고 집을 뛰쳐나와 술을 먹고 무단횡단 하다가 차에 치어 죽었습니다. 장례식 날, 그 권사님은 자기가 아들을 죽였다고 목사님을 붙들고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영혼을 실족시키지 않도록 노력하고 훈련하십시오. 살면서 감정이 상할 수도 있고 상처받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모든 것을 풀고 축복을 빌어주어야 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입니까? 그래서 약점을 찾으면 한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단점을 찾기보다는 장점을 찾고, 서로 연약함을 알고 서로 축복기도를 해주십시오.


  어떤 아내가 부부세미나에 참석했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새 부부는 대화가 너무 부족합니다. 남편과 장단점을 다 나누십시오.” 그 날 아내는 집에 와서 남편에게 서로 부족한 점을 번갈아 나눠보자고 했습니다. 남편이 주저하다가 마지못해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금방 아내 입에서 남편의 단점이 쏜살같이 나왔습니다. “당신은 먹을 때 호로록호로록 소리를 내고 먹는데 이제 주위 사람도 생각해서 앞으로는 좀 교양 있게 좀 드세요.”


  이제 남편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손을 턱에 대고 아내의 얼굴을 보면서 한참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편의 얼굴을 보는데 남편 입에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까 옛날 연애하던 시절의 멋진 남편의 모습이 나왔습니다. 한참 그렇게 보고 있다가 마침내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아무리 생각해도 별로 생각나지 않아.”


  누가 이긴 것입니까? 사실상 남편이 케이오로 이긴 것입니다. 지적하려면 한두 개 있겠습니까? 한도 끝도 없습니다. 백화점 가서 바가지 쓴 것, 가스 안 잠그는 것, 집 열쇠 잃어버리는 것, 어디서 자동차 들이받고 온 것, 자동차 열쇠를 안에 놓고 잠근 것 등 지적할 것이 많지만 “별로 생각나지 않는데.”라고 하면서 말을 안합니다. 얼마나 믿음 좋은 남편입니까? 그런 자세만 있으면 어떤 환경도 천국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영혼을 살리려고 할 때 내 영혼이 살아나고, 영혼을 찾으려고 할 때 내가 바른 길을 찾습니다. 영혼을 세워줄 때 내 영혼이 세워지고, 영혼의 허물을 덮어줄 때 하나님은 내 허물을 덮어주시고, 열심히 축복해줄 때 내가 풍성한 축복을 받습니다. 축복의 원리는 너무 단순합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것은 사단을 케이오로 이기는 길이고 가장 축복받는 길입니다. 이제 더욱 사랑의 폭을 넓힘으로 축복의 폭을 넓히는 복된 심령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