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에 대한 바른 이해
능력에 대한 바른 이해
7. 능력에 대한 바른 이해
능력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1. 능력의 구분
가. 성경에서는 능력이나 권능은 기사와 이적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성령의 능력이 귀신을 쫓고 병을 낫게 한다(마 12:28; 눅 4:18). 성령의 권능이 임할 때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폭발적인 증인이 된다.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기 전에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증거하기를 주저하거나 두려워한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 앞에서나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사실을 담대히 증거한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영이기 때문이다(요 15:14).
나. 말씀을 통하여 불신자를 거듭나게 하는 능력이 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롬 1:16).
성령의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아의 굳은 반석을 깨는 불방망이가 되고(렘 23:29), 혼과 영과 마디와 골수롤 쪼개는 좌우에 날선 예리한 검이 된다(히 4:12). 성령 충만을 받은 설교가 듣는 자의 마음을 찔러 회개하게 만든다(행 2:4, 37-38).
다. 성화를 이루는 능력이 있다.
신자들의 심령 속에서 역사하여 삶이 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성품과 행동―을 닮아가게 하는 능력이다.
\"그 크신 힘의 능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9).
신자들이 육신의 소욕을 쫓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쫓아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는 성화를 이루는 능력이다(갈 5:16-26).
2. 능력의 균형
오늘날 이 세 가지 능력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아서 많은 혼란을 일으킨다. 기사와 이적 같은 현상들이 일어나야만 능력이 나오는 줄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이런 능력자(?)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한다. 이들은 화끈하고 센세이셔널한 현상들이 나타나야 능력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성경의 이사와 이적은 그 주인인 예수를 증거하며 말씀을 통해 거듭나는 것을 확증해 주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지 기사와 이적 그 자체에 의미를 준 적은 없다.
또한 이러한 능력을 받은 사람들의 가르침이 반드시 옳거나 신앙이 성숙한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 능력과 은사를 가장 많이 받은 고린도교회가 교리나 윤리적으로 가장 많은 말썽을 일으킨 교회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성령의 외적인 능력을 가장 크게 받은 구약의 삼손의 윤리의식이나 내적인 영성은 형편없었다. 이러한 능력자를 \'거짓선지자\'라고 부르는 것은 지나친 속단이지만 시간을 두고 그들의 가르침과 성품의 열매를 성경에 비추어서 분변해야 한다.
또한 이런 능력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의 심령 속에서 은밀히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성화를 위한 능력)을 외면하거나 경시합니다. 이러한 것을 능력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하나님 말씀의 강해를 \"이론\"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한 능력은, 비록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성화의 능력에 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온갖 기사와 이적을 행하고 천국 구경한 것은 마지못해 자랑했지만(고후 12:1-4), 환난과 핍박과 고통을 받는 자기의 약한 것들은 보다 담대하게 자랑했다(고후 12:5).
하나님의 능력은 기사와 이적이나 환상이 아니라 내가 약한 그곳에서 온전해 지기 때문이다. 내가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속에 머물기 때문이다(고후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후 12:9).
은사도 마찬가지다. 기적을 행하는 은사는 주로 전도와 회심을 위한 것이지만 기나긴 신앙 여정을 걸어가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면서 교회의 화목을 유지하고 덕을 세우는 것은 오히려 남을 잘 섬기고 권면하고 위로하며 성실하게 구제하고 부지런히 다스리는 은사들이다(롬 12:6-8).
외적인 능력(체험적, 관계적)만을 중시하고 내적인 능력(신분적, 성화적)을 경시할 때 신앙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은둔적이고 환상적이 된다. 곤란에 처한 형제나 주변 문제에 무관심해 지고, 겸손과 자비와 인내와 용서와 희생적인 헌신의 덕목은 등한시되며, 나의 뜨겁고 황홀한 체험과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축복만이 중시된다.
그래서 대인관계나 일상생활에서의 공중도덕에 무관심한 개인적인 기복신앙을 낳는다. 또한 은혜와 축복만 강조한 결과 시험이나 환란의 때가 닥치면 주저앉거나 맥없이 쓰러지는 것을 많이 본다.
한편 말씀을 통하여 신자들의 심령 속에서 조용히 은밀하게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은사나 강한 체험을 동반하는 외적인 성령의 능력을 못 마땅해 한다. 이런 사람들은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성령의 능력은 자동적으로 따라 오는 것으로 잘못 생각한다.
유의해야 할 사항은 말씀은 성령이 사용하는 도구(엡 6:17)라는 사실이다. 말씀이 성령과 함께 역사해야 혼과 영과 마디와 골수를 쪼개는 능력의 말씀이 된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말씀은 듣는 자에게 한낱 지식적이고 도덕적인 가르침에 지나지 않는다. 죄인을 일깨워서 회개시키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없다.
많은 경우 극적인 체험이 없는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내 속에서 기쁨과 감격이 분출되어 신나고 자발적인 마음에서가 아니라 의무감이나 충성심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체험\"을 한 후 요한 웨슬레는, \'그 이전에는 종으로서 하나님을 섬겼지만 이제는 아들로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했다.
많은 경우 이런 사람들은 지엽적이고 사소한 율법의 규정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정죄한다.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저버리고, 이지적이고 사변적인 바른 교리, 신앙의 전통, 배경, 연륜, 전력(前歷), 이런 공부나 저런 훈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대신한다.
그래서 모든 것이 옳고 모든 것이 형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것밖에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는 바리새인이 되기 쉽다(눅 18:9-14). 아무 자격이 없는 죄인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믿지만 전 실존(全 實存)을 뒤흔드는 뜨거운 산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부족한 자들을 들어서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듦으로써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고전 1:26-29)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바른 신앙을 위해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