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예수가 되십시오

작은 예수가 되십시오
누가복음 2장 1-7절

<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

크리스마스의 뜻은 무엇일까요? 영어로 메시아를 뜻하는 ‘그리스도(Christ)’와 축일을 뜻하는 ‘마스(Mas)’의 합성어입니다. 즉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요새는 ‘그리스도’가 빠진 ‘크리스마스’가 되고 있습니다.

요새 미국에서는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쓰는 것을 점차 꺼려해서 불신자들은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라는 말보다 ‘해피 할러데이스(Happy Holidays)’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이런 때에 우리의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가 없는 크리스마스’를 ‘그리스도로 가득 찬 크리스마스’로 만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공휴일’이란 의미의 ‘할러데이(Holiday)’를 다시 ‘거룩한 날’이란 의미의 ‘홀리데이(Holy Day)’로 만들어야 합니다.

크리스마스는 이 세상에서 가장 신비하고 영광스런 날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초의 성탄절은 사람의 눈에는 영광스럽게 보이지 않고 너무 인간적이었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면 성탄절은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이었습니다. 즉 성탄절은 로마 황제(가이사)인 아구스도가 인구조사를 할 때 있었고, 그 인구조사는 구레뇨가 수리아의 총독이었을 때 했던 첫 인구조사였습니다. 그 인구조사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원 고향으로 돌아갈 때 갈릴리 나사렛에 살던 요셉도 다윗 후손이기 때문에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원 고향인 유대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해산일이 되었는데 인구조사로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많아 베들레헴에서 여관을 잡지 못해 마구간에서 맏아들을 낳고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전혀 신비한 모습이 아닙니다. 진짜 기적은 기적이 아닌 것 같은 것에 있고, 진짜 신비는 신비가 아닌 것 같은 것에 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은 날 때도 평범하셨고, 성장할 때도 평범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장 21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산모 정결 규례에 따르면 남자를 낳으면 40일, 여자를 낳으면 80일 동안 부정하게 여겨졌습니다(레 12:1-5). 그 기간이 지나자 누가복음 2장 22-23절 말씀을 보면 요셉 부부는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아기 예수님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때 누가복음 2장 25-39절 말씀을 보면 성전에서 시므온이라는 의로운 남자와 과부가 된 후 84년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않았던 안나라는 할머니 선지자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금방 아기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시므온은 평소에 메시야를 보기 전에 죽지 않을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는데 그는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리고 안나도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그 뒤 약 6-20개월쯤 되었을 때 페르시아의 점성학자인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제왕지운을 가진 아기가 태어났다고 말해서 결국 메시아가 태어날 곳으로 예언된 베들레헴 경내의 2살 이하의 모든 남자아이들이 헤롯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그처럼 유아기에는 특이한 사건들이 있었지만 그 이후의 예수님의 삶에 대해서는 성경이 거의 얘기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신격화하려고 어린시절에 관한 신기한 얘기를 꾸며냅니다. 그러나 주님에 대한 잘못된 신격화를 주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도마의 유아 복음(The Infancy Gospel of Thomas)’에는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린 예수님이 5살 때, 개울에서 놀면서 그 물을 한데 모아 깨끗하게 만들고, 부드러운 점토를 만들어 12마리의 참새를 빚어내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손바닥을 치고 참새에게 ”가라!“고 소리치자 참새들이 날갯짓을 하고 짹짹거리며 멀리 사라졌다.” 결국 성경이 인정하지 않는 얘기를 만들어내서 도마 복음은 성경에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 성육신이 주는 의미 >

예수님은 온전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온전한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오셔야 했습니까? 성육신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성육신이 우리에게 주는 많은 의미가 있는데 그 중에서 이 시간에는 3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낮아지는 삶의 중요성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말구유에 놓이신 것과 누가복음 2장 24절 말씀에 나오는 대로 요셉 부부가 아기 예수를 바칠 때 양 대신에 약 10분의 1 가격인 비둘기를 제물로 드릴 정도로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신 것 등은 높은 마음을 품지 말라는 뜻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이 되심으로 울기도 하셨고, 피를 흘리시기도 하셨고, 가족에 의해 배척당하기도 하셨고, 누가복음 4장 29절 말씀을 보면 고향 사람들에 의해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때 주님은 더 강해질 수도 있었지만 더 강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진짜 강함은 외적으로는 약함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 안에서는 약한 것이 강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에게는 간질병으로 추정되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 가시를 없애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을 때 고린도후서 12장 9절 말씀을 보면 그는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게 됩니다. 주님은 성육신으로 그 진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은 “어떻게 메시아가 저렇게 약하고 허무하게 죽을 수 있는가?”고 절망하고 좌절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죽음이 사단과 사망에게 죽음의 카운터펀치를 날린 것을 몰랐습니다. 만약 주님의 죽음이 없었다면 부활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죽음은 최대의 능력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능력과 복의 개념을 수정해야 합니다. 요새 뜨는 사람들의 간증을 보면 육신의 병을 고친 간증만 있고 마음의 병을 고친 간증은 없습니다. 돈을 많이 번 간증만 있고 돈이 없어도 행복하게 사는 간증은 없습니다. 높아지고 유명해진 간증만 있고, 낮아지고 무명해도 만족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는 간증은 없습니다. 사실 진정한 능력과 축복은 높은 삶에 있지 않고 낮아질 줄 아는 삶에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복된 존재가 되려면 지금보다 능력은 부단히 키우되 자세히 부단히 낮춰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실 때 천사가 그 소식을 제일 먼저 알려준 사람은 부자나 권력자가 아니라 밤에 양떼를 지키던 비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그 사실은 물질과 자리보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한 자에게 찾아오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가난해도 영적으로 교만하면 주님이 찾아오시지 않고, 부자라도 주님이 없으면 못 산다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면 주님은 찾으십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겸손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아무리 높은 척 해도 지금이라도 하나님이 부르면 갈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어느 날, 성 프랜시스가 40일 금식기도를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39일만 금식하고 밥을 먹었습니다. 제자들이 안타깝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하루만 더 하시지 왜 금식을 푸셨어요. 힘드셨어요?” 그때 프랜시스가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하셨는데 내가 어찌 예수님과 같은 경지에 설 수 있는가?” 그래서 그는 진짜 성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낮은 땅에 물이 고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도 겸손한 심령에 쌓이게 됩니다.

2. 이해하는 삶의 중요성


우리는 주님의 성육신을 통해서 무엇을 느낍니까? “예수님이 사람의 처지와 마음상태를 잘 이해하시겠구나!”하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만약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시지 않았다면 살기 힘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내가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정말 아실까?”하는 의문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물론 다 아시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사람의 상태를 잘 알고 이해하신다는 의미로 주님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상태를 잘 아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두 가지 도전을 줍니다. 하나는 “조금 더 힘을 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서러운 처지와 형편도 알고 계시고, 우리가 당하는 상처도 알고 계십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알아주신다면 어떤 힘든 일을 당해도 너무 서러워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고난 중에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16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예수님은 우리처럼 연약해지셨습니다. 때로 유혹도 받고 시험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형편과 마음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 받을 수 있고, 긍휼함을 받을 수 있고, 때를 따라 가장 적절하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들고 비천한 상황에 처해도 결코 낙심하지 말고 힘을 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예수님이 인간의 상태를 잘 이해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조금 더 이해하라!”는 도전을 줍니다. 사랑은 이해하는 것입니다. 내 편이 아닌 상대편에서 보는 것이 사랑이고, 그 이해의 깊이가 사랑의 척도입니다.

요즘 남편들이 제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디 바쁘게 가야 되는데 화장대 앞에 아내가 너무 오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한 마디 합니다. “발라봐야 소용없어!” 심은 대로 거둡니다. 나중에 보면 그런 남편들은 늙어서 구박 받습니다. 여자에게 화장은 절대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남자들은 아무리 바빠도 “최대한 예쁘게 해요.”라고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반면에 아내는 남편의 자존심을 이해해야 합니다. 남편의 자존심을 꺾어서 잘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명예와 자존심을 짓밟고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천하의 미모를 가진 미스코리아라도 남편의 자존심을 짓밟으면 남편은 더 반발합니다. 반대로 조금 자존심과 명예를 높여주면 남자처럼 다루기 쉬운 사람도 없습니다.

요새 자녀 교육이 힘들다고 하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결국 부모의 이해심 부족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이해와 깊은 관심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답답하다고 가슴을 치지 말고 아이를 이해하려고 가슴을 열어야 합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왜 가끔 속이 터집니까? 아이를 아이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교회에서 내려오는데 은혜가 1층 버튼을 누르려고 하는데 아내가 그냥 먼저 눌렀습니다. 그러자 자기가 누르지 못했다고 그때부터 집에 갈 때까지 서글프게 웁니다. 아무리 달래고, 차근차근 설명을 하고, 먹을 것으로 유혹해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게 울 일입니까?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속이 터집니다. 그러나 그때는 매를 들지 말고 이해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사랑의 매는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함부로 매를 들면 안 됩니다. 부모는 자녀가 부모의 명령 및 권위에 의도적으로 거역할 때만 매를 들어야 합니다. 속이 터져서 드는 매는 아이들의 동심에 상처를 입합니다. 1층 버튼을 내가 눌러 보겠다는 소박한 꿈을 이루지 못해서 우는 아이를 속이 터진다고 때리면 아이는 꿈이 꺾인 아이가 될 것입니다.

가끔 자녀가 묻습니다. “엄마! 잔디가 왜 파래?” 어른들 입장에서 보면 정말 이해가 안가는 질문이니까 귀찮아서 퉁명스럽게 말합니다. “파라니까 파랗지! 학습지나 해! 쓸데없는 질문 하지 말고...” 그런 일을 당하면 자녀들 마음에 분노가 생깁니다. 그 분노를 부모에게 마음껏 표현하지 못하니까 결국 그 분노가 자신을 향하면서 우울증이 생기게 됩니다.

어느 날, 아이가 길가다가 예쁜 꽃을 보고 엄마 생각이 났습니다. “아빠한테 선물해야지.” 그래서 꽃을 뽑아 정성스럽게 가지고 집에 왔는데 엄마가 짜증을 냈습니다. “야! 너 그게 뭐니! 기껏 청소했는데. 빨리 버려!” 그런 말을 들으면 얼마나 아이가 상심되겠습니까? 그런 일이 반복되면 아이가 엄마에 대한 미움을 가지게 되고, 그 순간부터 그 아이는 점차 살아갈 자신과 희망과 기쁨이 없는 우울한 삶을 살게 됩니다.

부모의 퉁명스러움과 짜증은 일종의 매 없는 아동 학대입니다. 아이의 마음을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더 이해하려고 하십시오. 또한 그런 폭넓은 마음을 가져서 남의 심정도 한 번 더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성육신은 그런 이해심의 폭을 넓히라는 도전입니다. 우리가 이해의 폭을 넓힐 때 은혜의 폭도 넓어질 것입니다.

3. 함께 하는 삶의 중요성

살면서 사람을 잘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이해하는 것에서 끝나지 말고, 더 나아가 함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멀리 계신다면 아무리 사람을 잘 이해하셔도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의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하늘에만 계시지 않고 이 땅에 오셨고,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가장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17장 24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고 그 영광을 같이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사랑과 애정의 정수는 ‘그 사람처럼 되어 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 갓난아기가 하나 있으면 모두 그 아기처럼 됩니다. 그때 공용어는 “진지 잡수세요”가 아니라 “맘마!”입니다. 아가도 “맘마!”하고 부모와 할부모도 다 “맘마!”라고 합니다. 아기가 알아듣도록 다 아기처럼 된 것입니다. 바로 그때 천국 가정이 펼쳐지게 됩니다.

갓난아기 때는 대기업 회장으로 있는 할아버지도 방바닥을 벌벌 기면서 아기의 말 역할을 합니다. 머리를 잡아도 즐겁게 웃고, 잘못과 체면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방과 같아진 것입니다. 그러다 그 아이가 성장하면서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이제는 거꾸로 부모와 할부모의 심정을 이해하고 그 곁에 서주려고 합니다. 그것이 행복한 인생의 행로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내가 얼마나 나를 버리고 상대방처럼 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 쓴 “킹 아더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A Connecticut Yankee in King Arthur’s Court)”란 소설이 있습니다. 그 얘기는 19세기에 살던 코네티컷 양키가 아더 왕이 다스리던 중세 세계로 이동해서 벌어진 모험을 그리고 있는데, 그 중에 ‘천연두 오두막(The Smallpox Hut)’이란 제목의 장에 이런 얘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어느 날, 왕이 농부의 복장을 하고 거지의 오두막에 나타났습니다. 남편은 죽은 상태로 누워있었고, 아내는 왕에게 자신이 있는 곳이 저주받은 장소라고 들어오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왕이 대답했습니다. “나를 들어가게 하라.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그 말을 듣고 여인은 왕에게 다락방 안으로 들어가 아이를 살펴보도록 요청합니다. 그곳은 치명적인 장소였고,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양키가 보니?그곳으로 들어가면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도 왕은 소녀를 보기 위해 사다리 위로 사라졌습니다. 조금 후에 다락방에서 왕이 내려오는데, 그의 한 팔에 무엇인가를 안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보니까 왕의 품에는 15세의 가냘픈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의식이 희미한 상태에서 천연두로 죽어가고 있었는데, 그때 왕의 모습은 너무 고귀한 모습이었습니다. 마치 아무 무장도 하지 않은 채 사랑으로 죽음에 도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도전에는 어떤 보상이나 칭찬도 없었고, 영웅주의나 모험주의도 없었습니다. 그저 그 모습을 보기만 해도 사람에게 평안을 주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왕은 용감했습니다. 철갑옷을 입고 다른 기사와 싸울 때보다도 더 용감했습니다. 그때 왕은 철갑옷을 입지 않고 보통 사람의 복장을 했지만 너무 장엄할 정도로 위대하게 보였습니다.

그처럼 천연두로 죽어가는 소녀를 품에 안은 아더 왕의 모습이 예수님으로 오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왕의 영광과 초자연적인 능력을 버린 채 이 땅에 오셨습니다. 즉 양팔로 죽음의 십자가를 안으시는 끔찍한 고통을 아시면서도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희망을 주셨습니다. 그처럼 우리도 작은 예수가 되어 누군가 죽어가는 자의 곁에서 그를 붙들어주어야 합니다.

< 작은 예수가 되십시오 >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고 계십니다. 본문 7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님의 성육신을 생생하게 만드는 두 가지 상징물이 나옵니다. 바로 ‘강보’와 ‘구유’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땅에 아기로 오셔서 강보에 싸인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그때는 누군가 돕고 돌보아주어야 예수님은 살 수 있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누군가 사람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는 말씀이 얼마나 역설적인 말씀입니까?

우리는 그 동안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손길만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강보에 싸인 주님은 우리에게 “나는 너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돕는 손길을 체험했으면 이제는 하나님을 돕는 손길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축복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사명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해주시는 것은 은혜와 축복이 아닙니다. 진짜 은혜와 축복은 하나님의 일에 우리를 동참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은혜 받는 것도 축복이지만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은 더욱 큰 축복입니다. 세상에서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축복이지만 거룩한 일을 위해 돈을 많이 쓰는 것은 더욱 큰 축복입니다. 우리는 항상 선교와 구제에 최대의 관심을 두고 그 일에 몸과 마음과 물질로 동참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제 강보에 싸인 주님을 생각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드리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멋있게 성취하겠다!”는 꿈을 품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강보로 덮듯이 우리의 따뜻한 체온으로 예수님의 뜻을 품을 때, 우리는 진짜 은혜와 축복이 무엇인지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놓인 구유는 비천한 자리를 상징합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높은 자리를 좋아합니다. 그처럼 높은 곳만 쳐다보면 그리스도가 없는 크리스마스가 됩니다. 성탄절은 낮은 데로 오신 예수님을 새롭게 발견하고 낮은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날입니다. 바로 그때 주님의 따뜻한 미소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요새 가장 많이 부르는 복음성가 중의 하나가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축복송입니다. 우리는 사랑 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축복송이 진정한 축복송이 되려면 ‘우리는 사랑 주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야 합니다. 특별히 연약한 사람과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무시하지 말고 자기를 최고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 외에는 모든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살다보면 미운 사람이 있지만 그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하나님 앞에서 밉게 행동했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또한 살다보면 도저히 용서하기 힘든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고, 저주하고 싶습니다. 바로 그때 축복송을 부르면서 “그 사람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지!”라고 생각하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려고 하면 용서하는 마음도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느 누구도 가볍게 보지 말고, 무시하지 말고,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린이들을 존중하고, 어르신들을 존경하고, 가난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성격이 괴팍한 사람도 “요새는 저렇게 개성이 강한 사람도 필요해!”라고 인정해주고, 장애인들을 천사처럼 대해주어야 합니다. 그처럼 성육신의 삶을 실천하는 작은 예수가 되어 세상의 빛이 되고 주님의 은혜와 축복을 얻어 누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