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성도 에게 가장 복된일

성도에게 가장 복된 일
마태복음 28:18-20절

< 한국 교회의 선교 사명 >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2개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요한복음 13장 34절에 나오는 새 계명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새 계명은 사랑의 계명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오늘 본문 19-20절에 나오는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남긴 최후의 대 계명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대 계명은 “모든 족속에게 선교하라!”는 선교의 계명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일과 선교하는 일은 성도의 가장 중요한 2대 목표이고, 가장 복된 일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선교는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빌립 집사를 통해 사마리아 선교가 이루어졌고, 사도 바울을 통해 유럽 선교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복음은 서진하면서 각 시대마다 로마와 독일, 영국과 스페인, 그리고 미국이 선교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나라가 선교의 중심지 역할을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 복음을 모르는 나라는 대부분 제 3세계 국가입니다. 우리가 일본을 싫어하듯이 그들은 서구 열강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서구 열강의 선교사들과 기독교를 배척하고 있고, 게다가 미국과 유럽 교회는 많이 변질되고 쇠퇴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많은 세계 선교사들은 종종 “이제 세계선교를 위해서는 한국밖에 희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요새는 열정이 많이 식었지만 약 20년 전만 해도 한국 교회의 열기는 대단했습니다. 당시 한국 교회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놀라운 부흥을 이뤘습니다. 그때는 “섰다!”하면 교회요, “왔다!” 하면 목사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또한 교회가 부흥하니까 수많은 청년들이 신학교로 몰려들었고, 기도의 열기도 뜨거워서 수도권에는 산마다 기도원이 있었습니다. 군대에서는 수천 명이 한꺼번에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 한국이 선교의 중심 국가가 될 요건이 많습니다. 첫째, 한국 사람은 제 3세계 나라에 백인보다 거부감이 훨씬 적습니다. 둘째, 한국 사람은 먹성이 좋아 선교지 음식을 잘 먹으니까 선교지 주민과 쉽게 가까워집니다. 셋째, 한국 사람은 여름과 겨울이 뚜렷해 웬만한 기후에는 다 적응합니다. 넷째, 한국 사람은 남의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어서 그 얘기를 하면 금방 마음이 통합니다.

게다가 한국 사람은 영력과 열정이 있고, 고난 중에 살았기 때문에 말씀의 깊이도 있고, 교육수준도 높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면을 볼 때 우리는 선교의 중심 국가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축복을 생각하면 한편으로 기쁘지만 한편으로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요나나 예루살렘 교회처럼 사명을 버리면 더 큰 진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왜 선교를 후순위로 둘까요? >

우리는 선교를 무엇보다 중요한 사명으로 여겨야 합니다. 가끔 선교를 신앙생활의 후순위로 두는 분들을 만납니다. 왜 그럴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다 맡기자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할 사람으로 예정하셨다면 다 구원하실 텐데 뭘 그렇게 선교를 위해 열심히 뛰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예정된 자라도 우리가 전도하고 선교해야 구원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둘째, 선교보다 행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믿는 사람은 믿는 사람답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행위만 보여주지 말고 최종적으로 말로 전도하고 손을 잡아 교회로 이끌어야 합니다. 행위만 보여주는 것은 축구를 할 때 볼 점유율은 높지만 골 결정력이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얼마나 속이 터집니까? 그처럼 선교가 없는 신앙은 속 터지게 하는 신앙입니다.

셋째, 이웃부터 전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선교를 막습니다. 어떤 분들이 말합니다. “국내에도 도울 곳이 많은데 해외까지 선교하느냐?” 그러면 평생 해외선교를 못합니다. 또 어떤 분은 말합니다. “내 가족도 구원 못했는데 거창하게 무슨 선교냐?” 물론 가족 구원이 중요하지만 동시에 선교도 해야 합니다.

넷째, 영성훈련에 치우친 생각이 선교를 막습니다. 물론 영성훈련도 중요하지만 밤낮 기도만 하고, 큐티만 하고, 성경 공부만 하면 안 됩니다. 군인과 선수가 아무리 많은 훈련을 해도 실전에 뛰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영성훈련의 최종 목적은 주님의 증인이 되고 선교 특공대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다섯째, 요새 선교가 힘들다는 생각이 선교를 막습니다. 물론 전도와 선교가 힘들지만 그래도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자기 암시에 빠져 아예 선교를 포기하면 안 됩니다. 무엇을 하든 안 된다고 하면 안 되지만 된다고 하면 됩니다. 성경은 “네 믿음대로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큰 꿈과 희망을 가지고 선교해야 합니다.

< 선교를 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 >

마태복음 24장 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면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말세 성도의 가장 중요한 과업입니다. 그 선교를 잘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요?

1. 성령 충만

오늘날 한국 교회가 가장 오해하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삶’에 대한 개념입니다. 많은 분들이 성령 충만을 ‘영적으로 높아지는 것’이나 ‘성공의 문으로 들어가는 디딤돌’로 오해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다는 사람을 보면 은근한 영적 교만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원하면 경제적 교만, 신분의 교만, 지적 교만을 버리고, 특히 영적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잘못 오해하면 수많은 부작용이 생깁니다.

어느 날, 한 목사님이 집회를 갔더니 그 교회에 반창고 붙인 사람이 유난히 많았습니다. 목사님이 이유를 물었더니 며칠 전에 그 동네에 산에서 한 신령한 목사님이 내려왔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러자 여선교회 회장이 담임목사님 몰래 성도들을 다 데리고 갔는데 그 신령하다는 목사가 성령 받으라고 막 때리고 쥐어박아서 멍이 들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런 몰상식한 일들이 아직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한 할머니는 눈이 시뻘겋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할머니, 눈이 왜 그래요.”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부끄럽네요. 사실 성신 받다가 그랬어요.” “성신 받는데 왜 눈이 시퍼렇게 됩니까?”하고 자세히 물어보니까 어떤 장로가 산에서 40일 금식기도 하고 내려와서 성신 받고 싶은 사람들을 다 나와서 눕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할머니도 누웠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가 안찰을 하면서 맨 처음에 발목부터 누르고, 무릎을 누르다가 배꼽을 누를 때는 그곳에 죄가 많이 모인다고 심하게 배를 때리고, 더 나아가 가슴도 누르고 목까지 졸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방언을 받으라고 입술을 자꾸 때렸고, 눈에 마귀가 있다고 눈을 자꾸 눌렀다고 합니다. 그래도 성신 받으려고 참았는데 집에 와보니까 성신은 받지 못하고 눈이 시뻘겋게 되었다는 얘깁니다.

신앙적인 열정은 필요하지만 억지 신앙은 피해야 합니다. 안찰을 한다고 동성도 아닌 이성을 눕혀놓고 몸을 주무르고 때리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때려야 은혜가 통하고, 맞아야 은혜가 느껴진다고 합니다. 그런 것들이 다 영적인 교만 때문에 생기는 부작용들입니다.

그런 잘못된 성령론으로 한국 교회는 홍역을 많이 앓았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와 능력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분들도 많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성령 충만을 추구해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 큰일을 한 사람은 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고, 특별히 전도와 선교는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저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처음 5년은 엉터리 신자였습니다. 그때는 저 자신의 변화되지 못한 모습 때문에 얼마나 고민이 많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고민이 있을 때마다 가장 많이 듣는 얘기가 “성령 충만해야 된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성령 충만을 추구했지만 성령 충만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분은 성령 충만의 체험으로 “방언을 한다! 예언을 한다! 사람 마음을 읽는다!”고 하지만 그분들의 삶은 별로 성령 충만한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대학 3학년 때, 아무리 전도해도 안 믿던 친구가 방학 중에 완전히 180도 변했습니다. 방학 때에 한 교회의 금요 집회에 참석했다가 윤복희 집사 초청 간증집회를 듣고 변화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이 친구는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전도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성령 충만인 줄 알고 너무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렸습니다. 왜냐하면 조용한 도서관에서 큰 소리로 전도했고, 밤에 잠잘 시간에도 큰 소리로 찬송을 불렀기 때문입니다. 주위 친구들이 그 친구가 미친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때 “이것도 성령 충만이 아니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러다가 1984년, 저는 하나님 앞에 헌신을 결단했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삶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주일을 철저히 지켰고, 새벽기도를 꾸준히 했고, 십일조 생활도 철저히 했고, 교회의 모든 모임에 적극 참여했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 선교의 비전도 생겼습니다. 그때의 체험을 통해서 저는 성령 충만을 ‘헌신의 결단’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성령이 임하면 공부 잘한다! 은사를 받는다! 성공한다!”고 하시지 않고, “증인이 된다”, 즉 “선교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성령 받은 최대의 표적은 증인이 되고 선교하는 모습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령 받으면 소매상 하다가 도매상 하는 줄 알고, 대리하다 과장하는 줄 알고, 가난하게 살다가 부자 되는 줄 오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성령 받아서 세상적인 복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성령 받으면 그때부터 복음의 비전을 들고 고생문을 찾게 됩니다. 그런 고생이 싫은 사람은 성령 받으려고 하면 안 되고, 성령 받을 수도 없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선교해야 하고, 반대로 선교를 잘하려면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2. 빚진 자 의식


역사를 살펴보면 선교하는 인생도 축복받고 선교하는 나라도 축복받았습니다. 스웨덴이나 노르웨이는 원래 바이킹 해적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1050년경에 그 나라들이 프랑스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기독교 국가로 변신하면서 일등국가로 변했습니다. 그처럼 선교 받은 국가도 복을 받았지만 선교하는 국가는 더 복을 받았습니다.

18-19세기에 영국은 산업혁명 후에 사회가 극도로 혼란했고, 퇴폐, 경제적 타락, 그리고 향락주의가 팽배했습니다. 음주량은 극에 달했고, 감옥은 초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영국은 희망이 없다!”고 절망할 때 요한 웨슬레, 조지 휫필드 등의 교회 지도자들이 복음을 전파함으로 영국을 살려냈습니다.

미국도 1865년 남북전쟁 후에 극도로 혼란에 빠졌습니다. 반목과 갈등, 불경기와 불신, 그리고 합리주의가 팽배할 때 무디(D. L. Moody)와 저희 교회가 속한 기독교 선교연맹(CMA)의 창시자인 심슨(A. B. Simpson)이 나타나서 복음으로 국가를 살렸습니다. 선교는 국가가 잘되게 합니다. 또한 선교하면 개인의 영혼도 잘 되고, 삶에 보람과 기쁨이 넘치게 되고, 자녀도 잘 되고, 축복의 지경이 넓혀지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우리나라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선교사들로부터 사랑의 빚을 많이 졌습니다. 저는 복음 때문에 우리나라에 이만큼 살게 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런 사랑의 빛을 졌으면 이제는 갚아야 합니다. 빚을 지고 빚을 갚지 않는 사람은 사실 도둑입니다. 그처럼 선교 받고 선교 안 하면 도둑입니다. 은혜 받았으면 헌신해야 합니다.

저는 처음에 선교사가 되려고 미국에 갔습니다. 그런데 공부하면서 점차 선교사로서 자질이 부족함을 깨닫고, 전방 선교사를 보내는 후방 선교사가 되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귀국했습니다. 그리고 많이는 보내지 못해도 100명 정도의 선교사를 감당하고, 100개 정도의 선교 중심적인 교회를 세울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꿈은 거의 대형교회만이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허황된 꿈이라고 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 교회도 인터넷상에서는 영향력이 큰 대형교회입니다. 지금 요삼일육선교회, 미션퍼블릭, 사랑매거진, 분당샛별교회의 4각체제도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꿈을 버리지 않고 더욱 힘쓰면 우리의 꿈은 결코 헛된 꿈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에 미국에서 감독님이 와서 조금씩 열매 맺는 것을 보고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열심히 내일의 보다 많은 선교를 위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요새 많은 기업들이 원가를 절감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세계선교라는 대 계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해외로 눈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영혼 한명 구하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그러나 선교지는 지금도 옥토밭입니다.

어떤 선교사님은 인도네시아 정글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그 원주민들은 얼굴은 무섭게 생겨도 마음은 아주 순수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분이 복음을 증거하는데 한분이 막 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슨 서글픈 일이 있다보다 하고 생각하고 “왜 우세요?” 하고 물었더니 “울며 회개하라!”고 하니까 그 말만 듣고 무조건 울었다고 합니다.

그런 순박한 영혼들이 지금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영혼들을 위해서 더욱 기도하고 더욱 선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3. 인내하는 마음

선교의 꿈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모든 비전은 성취하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비전은 마라톤 경주입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눈앞에 금방 성공이 다가오지 않아도 비전을 버리지 말고 꾸준히 전진해야 합니다.

조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빨리 뛰면 대개 멀리 가지 못합니다. 천천히 가는 자가 멀리 갑니다. 때로 우리가 뿌린 선교의 씨가 후대에 자녀를 통해 열매 맺는 경우도 많습니다. 다윗이 성전 건축 비전을 가졌지만 정작 성전 건축은 그 아들 솔로몬이 했습니다. 선교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기독교 선교 역사는 인내의 역사였습니다. 캐리어 선교사가 인도에서 첫 세례를 주기까지 칠년이 걸렸습니다. 저드슨 선교사가 버마에서 첫 제자를 얻기까지 칠년이 걸렸습니다. 모리슨 선교사가 중국에서 첫 신자를 얻는 데 칠년이 걸렸습니다. 모팻 선교사가 아프리카의 비추아나에서 성령의 역사를 볼 때까지 칠년이 걸렸습니다. 헨리 리차드 선교사가 반자 만데카에서 첫 회심자를 얻기까지도 칠년이 걸렸습니다.

칠년의 기다림은 엄청난 고통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내를 통해 작은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그처럼 우리의 비전에 당장 열매가 없어도 인내해야 합니다. 어떤 것도 인내를 대신하지 못합니다. 재능보다 인내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재능이 있어도 인내가 없으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성공하려면 인내해야 합니다. 신앙의 성공에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한번 교회에 나왔으면 난관과 실망이 있어도 꾸준히 나와야 교회생활에서도 성공합니다. 저의 13년 목회 경험에 의하면 교회생활의 성공은 모든 성공과 축복의 근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어떤 큰 성공보다 교회생활의 작은 성공을 먼저 꿈꿔야 합니다. 우리의 헌신은 눈으로 보기에는 아무 효과가 없는 것 같아도 언젠가는 그 열매가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미국에 한 주일학교 보조교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교회에 오다가 어린이 네 명이 길에서 노는 것을 보고 “얘들아! 교회 가자!”고 해서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도 학생 네 명이 생기니까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들어 교회에 자기 반을 하나 만들어달라고 했습니다. 결국 교회의 허락을 받아 이 교사가 네 명의 아이들을 말씀으로 잘 양육했습니다.

그 후 오십년이 지난 어느 날, 이 주일학교 교사는 50년 전의 골목길 꼬마들로부터 동시에 생일 카드 네 장을 받았습니다. 한 장은 중국의 선교사가 보낸 카드였고, 또 한 장은 당시 연방 은행장이 보낸 카드였고, 또 한 장은 대통령의 비서실장이 보낸 카드였고, 나머지 한 장은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보낸 카드였습니다. 오십년 전의 주일학교 꼬마들에게 심어준 말씀이 놀라운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지 마십시오 >

저도 이런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분당의 다른 대형 교회들보다는 훨씬 작습니다. 우리 교인들도 대단한 인물이 없습니다. 게다가 교단 벽이 높은 한국에서 미국 기독교 선교 연맹(CMA)에 속한 최초의 교회입니다. 개척자의 길은 눈물 없이는 못 가는 길입니다. 교회 개척도 어려운데 CMA를 한국에 착근하는 것은 100배나 어렵습니다.

저희 CMA가 전 세계에서 선교로 가장 유명하고 선교 노하우가 많은 건전한 복음주의 교단이고, 홍콩이나 동남아시아에서는 한국의 장로교처럼 주된 교단인데 한국에서는 유독 그 이름조차 생소합니다. 사람들이 모르니까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 실정을 아는 사람들은 다 장로교로 들어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길이 뻥 뚫린다고 합니다. 그래도 한국이 선교 중심 국가가 되려면 120년의 선교 노하우를 가진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의 역할이 한국 교회에 꼭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저는 아직도 개척자의 길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부족하지만 4명의 꼬마들보다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도 비전을 붙들고 나가면 한국에서 선교사 훈련학교도 세우고, 수많은 선교 중심적인 교회도 개척해서 막강한 후방 선교군단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몽고에서도 재작년에 선교센터와 성경훈련학교를 세웠는데 우리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 가진 비전을 과소평가하지 말고, 우리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현재 아무리 부족해도 자신에 대해 실망하지 마십시오. 저는 우리 교인에 대해 실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왜 우리에게는 비전을 세우면 그 비전을 힘 있게 뒷받침할 수 있는 성도가 왜 없습니까? 하나님! 왜 우리 성도들이 이렇게 신앙과 헌신이 부족합니까?”하고 실망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비전을 기억해주신다고 믿고, 우리 성도들이 멋있게 하나님의 일을 할 비전을 항상 마음속에 품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 실망하지 말고, 열등감도 가지지 마십시오. 현실에 비해 꿈이 너무 크면 열등감이 생긴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물론 이상과 현실 간의 차이는 열등감의 크기와 비례한다는 이론은 맞습니다. 그래도 큰 비전을 품어야 합니다. 다만 큰 비전은 품되 단기 목표는 알맞은 목표를 세우면 됩니다. “알맞다”는 말은 “꼭 맞고 적합하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내게 적합한 나의 일과 사명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그 일에 매진해야 합니다.

남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큰 교회를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비교하려면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면 됩니다. 나보다 앞선 남은 비교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다만 배움의 대상으로 삼으면 됩니다. 그리고 배울 때도 다 배울 필요는 없고 좋은 것만 배우면 됩니다.

누구에게나 열등감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열등감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사실 성공한 사람들은 열등감이 없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열등감을 극복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휠체어를 탔던 루스벨트는 열등감을 극복하고 미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돌대가리란 소리를 들었던 소크라테스는 그 열등감을 극복하고 위대한 철학자가 되었습니다. 열등감보다 더 큰 문제는 열등감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비천하고 비굴하게 사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부족해 보여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언제나 초라한 도구를 가지고 위대한 일을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부족해도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일하고, 사업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자녀를 키우면 됩니다. 그처럼 우리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고, 사명의 불꽃이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불꽃으로 큰 불길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어느 날, 스코틀랜드의 한 작은 교회에서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마지막 날에 헌신자 초청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오직 한 소년만이 일어섰습니다. 인도하던 목사님은 실망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달랐습니다. 그때 이 소년은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에게 아프리카를 주세요.” 이 소년이 나중에 아프리카 선교의 아버지 데이빗 리빙스턴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불꽃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이 불꽃을 기억하시고 큰 불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2006년 선교를 작정하기로 했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 선교연맹에서 파송한 한국인 선교사가 8가정입니다. 그 외에 여러 협력선교사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사역비와 생활비 내년 예산이 40만 불(약 4억)입니다. 아직 우리가 그것을 다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금년에는 여러 교회들이 합쳐서 절반 정도인 20만 불밖에 후원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한국인 선교사는 이제 미국의 도움을 받지 말고 한국인이 책임지자는 목표로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그 목표를 이루려면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기도와 후원이 필요합니다. 오늘 선교후원 작정서를 내지 못한 분들은 다음주에 선교위원회에 내주시고, 이번에 새로 개편된 홈페이지의 선교후원 난을 통해서도 선교후원 작정에 많이 참여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전방 선교사로 나가지 못하면 후방에서 돕는 선교사 역할을 해야 합니다. 주님은 최후의 계명에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선교하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 주님의 마지막 계명을 생각하며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복된 일인 선교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