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표적은사 - 방언 예언 신유를 말한다.
성령의 표적은사 - 방언ㆍ예언ㆍ신유를 말한다
성령의 표적은사 - 방언ㆍ예언ㆍ신유를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혜 외에 그 어떤 다른 특별한 것을 구할 필요도 없고 구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는 전적으로 완전하며 만족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2의 복’이라든가, ‘제2의 체험’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성령의 은사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원의 은혜에 추가되는 제2의 은혜가 아니라 그 구원에 포함되는 선물로 이해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바울은 은사들에 관해 이야기 할 때 우리가 흔히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으로 구분하듯 그렇게 방언과 관리(집사직), 축사와 가르침(교사직), 병을 고치는 것이나 예언, 그리고 구제나 결혼을 구분하지 않고 말하고 있다.
모든 은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개개 인간에게 심어주신 소양이며 자질로서 ‘자연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성령에 의해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일깨워져 활용될 때에 비로소 ‘성령의 은사’가 된다.
성령은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보다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이미 부여하신 기존의 자연적 본능(natura)을 포용하고 쇄신하신다. 중생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된 우리 그리스도인의 어떠한 행위도 성령으로부터 독립적일 수가 없다.
사도·선지자·교사·서로 돕는 것·다스리는 것 등의 은사들과 마찬가지로 방언과 치유와 예언도 하나님 스스로 교회에 부여하시는 은사들이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무가치한 것, 해 되는 것, 중요하지 않은 것을 부여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이 분명할진데, 우리는 방언·질병 치유·예언 등 성령의 은사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로 그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고 교회와 나의 덕을 위하여 이를 올바르게 활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들은 그것을 멸시하는 곳에서 뿐 아니라 그것들이 열심히 추구되고 활용되는 곳에서도 오해되고 오용되고 있다. 방언과 예언과 신유의 은사들 역시 마찬가지다.
방언, 하나님 향한 기도, 찬양, 감사... 개인에 유익
성령의 은사 가운데 대표적인 은사로 방언을 꼽을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적으로서 방언만큼 확실히 눈에 띄는 은사도 없다. 교회사를 통해서도 방언은 다른 어떠한 은사보다도 특별히 논란을 일으켜온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방언의 반대자들 뿐 아니라 그 옹호자들에게 있어서도 많은 몰이해와 혼란이 실재한다. 일방의 과장은 다른 편의 과장된 반격을 유발한다. 우선 방언은 ‘비신화화’(Entmythologisierung)될 필요가 있다.
오순절(행 2)에 나타난 방언과 고린도 교회의 방언(고전 12장 14장) 사이에는 몇 가지 상이한 요소들이 있다. 우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사건에서는 1백20명의 제자들 전체가 한꺼번에 ‘통성’으로 방언했을 것이 거의 분명하다.
그리고 그 제자들의 통성 방언이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되었으므로 방언을 통역하는 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즉 성령께서 방언하는 제자들에게 뿐 아니라 듣는 자들에게도 동시에 작용하여 각자 자기들이 태어난 고장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셨다.
일부 주석가들은 오순절에 약 1백20명의 제자들이 제각기 여러 지방으로부터 모여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자기들이 전혀 배우지 않은 타 지방의 실제 언어를 순간적으로 구사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설득력이 없으려니와 잘못된 것이다. 성경에는 방언으로 사람에게 설교하거나 가르치고 예언하였다는 구절이 전혀 없다. 방언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찬양·감사이며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이다(고전 14:2, 행 2:11).
오순절 당시 예루살렘에는 언어의 장벽이 없었다. 사도행전 2장 9절~11절에서 말하고 있는 지중해 연안의 각 지방에서 태어난 ‘경건한 유대인들’(행 2:5)은 당시 대부분 예루살렘에 정착해 살고 있던 자들로서 유대인의 공용어인 ‘아람어’를 사용했으며 ‘코이네’라는 그리스어를 이해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공용어를 놔두고 저들이 태어난 여러 지방의 실재 언어들을 말해야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통성으로 하는 방언을 들은 일부 사람들이 대낮에 새 술에 취했다며 제자들을 조롱하자 베드로가 일어나서 비로소 방언이 아닌 공용어(아람어)로 설교하기 시작했다. 오순절의 방언은 복음 선포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과 함께하심을 증거 해주는 하나의 표적이었을 뿐이다.
오순절 예루살렘의 방언과 고린도 교회의 방언,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발생하고 있는 방언은 그 방식과 내용에 있어 동일한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 전혀 배운 적이 없는 그 어떤 외국의 실제 언어를 순간적으로 구사하도록 하실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기적’을 방언이라고 볼 수는 없다
방언의 상대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다. 방언의 내용은 계시나 지식, 또는 예언이나 교리가 아니다(고전 14:6). 방언은 간구기도라기 보다는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자유로운 감사, 찬양, 경배의 표현이다.
방언은 일차적으로 성도의 개인적인 경건생활에 덕을 세워주는 유용성을 지닌다(고전 14:4). 방언하는 자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자신을 연결시킴으로써 자기의 덕을 세우며 마음의 깊은 곳으로부터 끊임없는 영적 쇄신을 이루어 간다.
자신 앞에 다가오는 세계를 향해 자신을 열고,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의탁하며, 하나님의 자녀 된 기쁨과 축복 속에 잠기게 된다. 모든 방언은 아람어 ‘Abba’(아바)라는 기도 외침으로 압축될 수 있다.
방언은 언어의 표현 가능성을 초월하여 우주적 음성 영역 속에 잠입하여 언어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사슬이며 감옥이다. ‘언어의 장벽’은 사람과 사람 사이뿐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 사이,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도 놓여 있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단어 실력을 초월하여 생각을 할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다. 인간의 언어는 넘쳐흐르는 우리의 기쁨이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어서 너무나 불완전하고도 거친 도구다.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 다 가지고 내 구주 주신 은총을 늘 찬송 하겠네…’
그런데 우리는 단 하나의 입밖에 없다. 방언은 만 개 이상의 입을 사용하는 것이다. 방언에는 한계가 없고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다. 무중력 상태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린다.
방언은 언어의 안식이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을 개념들(단어들)에 담아 문법이라고 하는 틀에 정돈하는 아주 힘든 노동이다. 방언은 이 언어적 노동에서 해방되어 안식을 누리며 펼치는 축제이다.
방언은 풍요로운 은혜의 축제이며, 그 안에서는 행위를 통해 의로워진다는 율법성이 전혀 없다. 방언은 내일이 오늘 되게 하며 이미 내일 속에서 이야기한다.
방언의 환호성은 우주를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실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참여하는 것이다. 방언은 하나님께서 온 마음과 영혼과 몸을 다해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심을 표현한다.
그러나 방언이 언어 적대적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7일 중 하루의 안식을 가질 뿐이다. 방언의 안식 역시 엿새 동안 정상적인 언어로 기도하고 찬양한 후에 누리는 축제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서 이르게 될 때 비로소 무한한 안식 속에 지속적인 축제를 누리게 될 것이다. 방언은 영원한 천국에서 누리게 될 그 안식의 복락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방언은 ‘마란 아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하는 종말적인 환호이기도 하다.
예언, 하나님 자녀는 누구나 예언자... 교회에 유익
사도시대 이후, 보다 정확히 말해 정경이 우리에게 주어진 이후의 모든 예언은 성경과 동일한 계시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장소와 시간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씀인 반면, 예언은 ‘지금, 여기, 이 사람’을 위해 주어지는 일회적 의미와 권위를 지닐 뿐이다
. 예언은 결코 이미 완성된 성경의 계시에다 그 어떤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다. 예언은 실제로 누구나 성경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것들만을 말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말씀을 중언부언 하는 것이 예언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성경적 예언은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다(고전 14:3, 31).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선지자? 왕으로 기름부음 받으셨듯이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세상 속에서 제사장이고 왕이며 또한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예언자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언자로서 예언을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나는 너희가 다 방언을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고전 14:5)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고전 14:29)
다른 은사와 마찬가지로 예언은 ‘사랑을 따라 구하라’는 대전제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 사랑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예언은 비록 그 내용이 올바른 것이라 할지라도 무용하며 때로 해롭다. 자신을 비울 줄 모르는 자, 겸손하지 못한 자, 교만한 자는 결코 예언할 수 없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는 말씀은 특별히 예언의 은사에 해당된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통찰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들은 바를 말할 뿐이다. 예언은 깊은 묵상 기도와 성경 말씀의 상고 속으로부터 발생한다.
예언하는 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자신의 경험과 견해와 선입관에서 벗어나 항상 새롭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울 줄 알아야 한다. 항상 회개하고 새롭게 헌신하여 하나님에 의해 정화된 자만이 올바로 예언한다.
내가 하는 말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사람들이 내 말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체험하며,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데 도움을 주며, 나의 말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 화해와 일치가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회개하고, 위로를 받으며 용기를 얻게 된다면, 나의 이 모든 말들은 예언이다.
신유, 믿는 자에게 따르는 권능의 표적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악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 10:1)고 하신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말씀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새 방언뿐 아니라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라는 약속이 주어졌다(막 16:17-18).
모든 은사들은 특별한 사람들만이 지속적으로 소유하고 활용할 수 있는 ‘자격증’ 같은 것이 아니다. 치유의 은사 역시 헌신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언제라도 주어질 수 있는 선물이다. 그리고 언제라도 중단되거나 거두어질 수도 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치유를 위해 기도할 뿐이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부모들은 자녀들이 병들었을 때 안수하고 기도함으로써 치유하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 성도 중에 병든 자가 있으면 교회가 합심하여 기도함으로써 치유하도록 해야 한다(약 5:14~15).
그리스도인인 한 의사의 모든 의료행위 역시 은사적인 행위이다. 약품의 처방이나 주사, 그리고 수술도 다를 형태의 안수이며, 그를 통한 치유 역시 하나의 은사이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의료행위가 기도 중에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사는 치유자가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다. 자신은 단지 하나님 앞에 책임을 맡은 자로서 자신의 의사 직을 은사로 여기며 행할 뿐이다. 그러나 질병의 치유를 의사나 약품에게만 의지하는 것은 좋은 신앙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를 고쳐주셨다. 이 네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 대부분이 하나님을 그의 창조세계, 즉 인간의 육체로부터 분리시키고 그의 치유하시는 능력을 믿지 않을 때에는 병자 자신이나 개인의 믿음과 기도에 큰 어려움이 닥치고 약화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믿음을 통한 병 치유가 드물어진 이유는 기독교의 공동적인 불신앙에 있다. 전반적으로 만연된 불신앙으로 인하여 개인의 믿음 또한 너무나 미약해져 버렸다. 대다수의 불신앙이 소수의 믿음마저 삼켜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한 개교회의 목회자를 비롯하여 대다수 교인들이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는 치유의 은사는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기독교가 전반적으로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오늘도 우리의 육체에 대해 권세를 가지시고 병을 고치실 능력이 있음을 믿게 될 때 다시금 사도시대 처럼 치유의 은사가 활발해질 것이다.
예수께서는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는 묘한 질문을 하셨다(요 5:6). 병자가 당연히 낫기를 원할 텐데도 그렇게 물으신 것이다. 사실 병자가 낫기를 원하는 것은 그렇게 자명한 것만은 아니다.
병자가 자신의 질병과 비밀스럽게 결탁하여 자신의 병을 사랑하며 애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는 자기의 정체성을 자신의 질병에서 찾기도 한다. ‘나는 병자다. 고로 나는 존재할 가치가 있다’, ‘나는 고통을 당한다.
고로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다’ 라고 하는 무의식적 기치를 내걸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공동체 내에게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하나의 사회, 일개의 국가 체계가 질병과의 동맹을 맺고 고통과 동거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 개인적인, 또는 공동체적인 사디즘과 마조히즘적인 도착, 악의 역학이 작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건강을 원하시며 모든 병을 치유하기 원하신다. 단지 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겨 버리고 간구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돕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병든 세상 속에서 생명을 향한 회심을 촉구하고 나서야 한다. 병자가 진정 낫기를 원하고 건강한 자들이 병의 치유를 위해 믿고 기도할 때 치유의 은사는 자연스럽게 주어질 것이다.
맺는말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성령께서 그 안에 내주하는 모든 성도는 근본적으로 다소간에 모든 은사들을 지녔고 활용할 수 있다. 단지 교회 안에서의 은사 활용은 질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영분별의 은사에 의해 정돈되어야 하며, 때로는 권유되어야 할 것이다. ‘
은사는 언제나 회심과 회개, 즉 전적인 헌신을 전제한다. 자신의 언어능력까지 하나님께 바칠 때 비로소 방언의 은사를 받게 되고, 자신의 지식과 지혜를 바칠 때 예언을 할 수 있으며, 자신의 힘과 재능을 바칠 때 비로소 치유의 은사가 주어진다. 언제나 새롭게 회개하고 다시금 헌신하여 완전히 자신을 비우지 않으면 은사는 거두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