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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STUDY 창세기 제 4 강
(2) 하나님의 심판 (8~19)
3:8~10 죄를 범하고 숨은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께서 부르심
(8절)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1) 아담과 하와가 숨은 이유는, 선악의 ( 지식 )을 가지게 됨으로, 자신들이 벗고 있는 것을 ( 악 )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들의 ( 악 )을 용납하지 않는 분으로 판단하게 됨으로 두려워하여 숨은 것이다.
2) 오늘날에도 세상은 하나님을 “인간이 알고 있는 ( 선악 )의 기준”으로 대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종교 ( 행위 ), 세상이 선한 것으로 인정하는 ( 행위 )가 있을 때는 당당하게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다. 반면에 이런 행위가 없거나 부족할 때에는 하나님 앞에 나서기보다는 차라리 ( 숨는 ) 것을 마음 편하게 여기게 된다. 이 모두가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이 만들어낸 ( 결과 )이다.
(9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 60억 인구 중에 예수님 재림 시까지 단 한명만 예수 믿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예수께서 “구원받은 자가 너무 적다, 전도 열심히 해라, 재림 연기한다” 그러시겠는가? - 이런 문제들을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 역사 )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2) 노아 홍수 때 단 한 가정 외에는 몽땅 수장되어 버렸다. 하나님의 ( 언약 ) 안에 들어 있지 않으면 숫자에 치지도 않으심을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그대로 두셨다면 나뭇잎 치마를 갈아입느라고 세월 다 보내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선택을 들고 하나님이 ( 찾아 )오시는 예정과 작정의 은혜가 너무나 필요한 것이다.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13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에게 책망을 하심
(11절)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1) 하나님의 질문은 인간들의 고통을 해결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은 ( 원인 )을 규명하시는데 있다. 즉 원인 제공자의 정체를 밝히는데 선악과가 ( 이용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렇게 됨으로 인간과 마귀는 영원히 화해될 수 없는 ( 원수 )라는 관계가 되어 버린다.
2) 하나님께서 뱀에게는 \"왜 유혹했느냐?\"라고 묻지 않으셨다. 뱀에게는 그 어떤 배려도 허용치 않기 위해서다. 뱀은 악의 최종자로서 영원한 저주의 대상이지 ( 구원 )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단도 구원된다고 말한 고대의 교부는? )
(12절)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그 여자가”
1) 아담의 대답은 하나님에게 ( 책임 )전가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자를 만들어 주지 않았으면 애초에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2) “~만 아니었다면”이란 생각은 결국 “하나님이 이것을 주지 않았더라면”이란 말이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죄를 자기 ( 책임 )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자기 합리화”란 타락한 습성 때문이다.(= 죄 지은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라 )
(롬 1:32)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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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9 하나님께서 범죄 한 아담과 하와에게 복과 저주를 명하심
(15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1)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앞으로 진행될 세상의 현실을 예고해주는 것이다. 사단은 세상을 소유하기 위해 ( 신자 )를 공격한다. 하늘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세상만 보고 사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 날마다 시험하고 유혹한다. 그러므로 신자가 날마다 하늘을 소망하는 ( 믿음 )으로 살고자 하는 것이 곧 사단과 ( 투쟁 )하는 것이다.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 악 )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2) 뱀의 후손의 삶은 뱀의 유혹의 ( 내용 )으로 나타난다. 즉 스스로 ( 신 )이 되는 것이다.(= 3:5 “< 하나님 >과 같이 되어” )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과 악의 ( 지식 )을 가지고 자신의 ( 이름 )을 내며 자신의 힘으로 자기를 지키는 자들이다. 도시를 건설하고 문명을 세우는 자들이다.(= 4:17 “가인이 < 성 >을 쌓고 )
(창 11: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3) 여자의 후손은 ( 약속 )을 중심으로 살아간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고 생명나무의 길도 차단되었지만, ( 약속 )대로 생명을 주시는 분이 그들에게 올 것이기 때문이다.
(마 1:23) “보라 ( 처녀 )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사 7:14 )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 여자 )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골 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 승리 )하셨느니라”
(히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 마귀 )를 없이 하시며”
(요일 3:8)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난 것은 ( 마귀 )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16절)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1) 왜 여성에게 해산하는 고통이라는 징벌을 주시는가?
(호 13:13-14)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저에게 임하리라 저는 ( 어리석은 ) 자식이로다 때가 임하였나니 산문에서 지체할 것이 아니니라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 하며 사망에서 ( 구속 )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1) 여자가 해산을 하는데 고생을 한다. 왜냐하면 자식이 저주와 죄를 머금고 태어나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이가 태어나는 ( 문 )(= 산문 )에서 아예 속죄를 해버리고 죄를 사하신다. 더 이상 아이에게는 음부의 권세가 작용하지 못한다.
2) 여자가 아기를 낳으면서 고통 한다는 것은 여자 위에 ( 악 )의 권세가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다. 즉 이미 악한 ( 죄 )가 인간 세계를 장악하고 있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임신한 여자에게 고통이 찾아오는 것을 여자 본인이 어찌 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 스스로 악에게 ( 대항 ) 할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벌이다
3)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인간은 ( 마귀 )(= 죄의 본성 )가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평안하게만 살았다. 그러면 마귀의 실체가(= 죄의 본성이 ) 드러난 이 세상에서 과연 인간은 어떤 소망을 가져야 하는가?
BIBLE STUDY 창세기 제 4 강
(시 68:21) “그 원수의 머리 곧 그 죄과에 항상 행하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치시리로다”(= 창 3:15 )
4) 남자는 비록 인간을 대표하지만 ( 무능 )하다. 그런데 이 약속이 있고 난 뒤, 여자의 이름이 생명이라고 불려진다. 즉 여자라는 육체가 현실의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 이름 )이 현실의 전부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제 죽음의 세력에서 벗어나서 영생에 이르는 것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분을 ( 아 )는 것뿐이다.
(17절)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 아담과 하와가 받은 징벌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현재의 모습이다. 즉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 저주 )(= 수고, 해산 ) 안에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저주 안에서 아담은 아내를 ( 하와 )(= 모든 산자의 어미 )로 부르게 된다.
2)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신 말씀을(= 은혜를 ) 통해서 아담은, 모든 소망이 ( 여자 )에게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가 예수님을 “나의 ( 생명 ) 되신 주”라고 부른다는 것은 죄악 가운데 있는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될 때이다.
(3) 하나님의 보호 (20~24)
3:20~21 가죽 옷을 입혀 주심
1) “좋으신 하나님”에 대해서
- 사람들은 나쁜 짓을 해도 눈감아주고 넘어가는 그런 아버지를 ( 좋은 ) 아버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 사랑 )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태도는 너무나 어리석은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좋으신 하나님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 정의를 1)번처럼 내릴 수는 없는 것이다. 나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게 해 주시는 것이 좋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3) 에덴동산에서의 추방과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망선고, 이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받은 형벌이었다. 하지만 우리 생각에는 비록 이 죄가 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한번쯤은 ( 용서 )해 주시고, 다음에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타일러 주시면 얼마나 좋겠냐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창세기의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하나님이다.
(20절)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1) 아담이 자기 아내의 이름을 전에는 그냥 여자로 불렀는데, 타락 후에는 이름을 “하와”(= 생명 )라고 바꾸어서 부른다. 흙으로 돌아가야 되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아담은 왜 아내의 이름을 생명이라고 부르는가?
2) 그 이유는 3:15의 “여자의 후손”이라는 언약에서 비롯된다. 남자(= 아담 )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이다. 즉 하나님의 형벌은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그 속에는 생명이 되는 복이 있다는 것을 ( 언약 )을 통해서 아담이 알게 된 것이다.(= 때리시고 싸매심 ) 아담에게 주신 복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진다.(= 창 1:28 )
(21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계 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 세마포 )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BIBLE STUDY 창세기 제 4 강
1) 세마포를 입고 있는 그 자체가 옳은 ( 행실 )이다. 가죽옷은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입을 세마포 옷을 예표한다. 이는 우리의 모든 실수와 허물을 다 덮어 버릴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러므로 아담은 죄악 가운데서도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은혜를 깨닫게 된다. 이 은혜를 깨달음의 결과가 “( 하와 )”라는 이름이다.
(고후5: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 덧 )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2)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는 모습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를 볼 수 있는가?
22~24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심
(22절)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1) “우리”란 하나님의 ( 신 )격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는 인간으로서 신처럼 되려고 하다가 결국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비참한 입장에 처하게 된 인간에 대한 반어적인 표현이다.
(22절)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2) 그러므로 ( 신 )이 아닌 인간이 죄악 속에서 영생한다는 것은 더욱 끔찍한 일이다. 이 추방이야말로 하나님의 배려이며 하나님의 놀라운 ( 사랑 )의 표현이다.
3) 그래서 이제부터 인간은 어쩔 수 없는 ( 금식 )에 들어가야 한다. 이 금식은 먹어야 할 ( 생명나무 )의 열매를 못 먹게 되는 고통을(= 금식은 고통의 상징이다 )말하는 것으로서 나중에 율법으로 표현된 말이다. 그러면 이 금식은 언제까지인가?
4)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을 굶주리고 목마르게 했다가, 하늘로부터 오신 생명의 양식 그 자체가 되시는, ( 생명나무 )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풍성한 은혜를 주신다.
(23절)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1) 내어 보내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왜 그런가?
- ( 돌아 )오게 하실 것이니까
(24절)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1) 하나님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심으로써 더욱 분명해 진 것은 모든 인간은 이제 ( 사망 )에 처해졌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예표하는 것은, 이제 인간은 하나님과 직접 ( 대면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유일한 희망은 ( 그리스도 )밖에 없는 것이다. 세상 그 무엇도 우리를 화염검이 가로 막고 있는 ( 생명나무 )로 인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가인 심판과 보호 (4:~5:)
하나님께서는 아벨을 죽인 가인을 저주하며 심판하시지만 죽임을 면하는 표를 주신다. 죽은 아벨에 대해서는 아담언약을 인하여 셋을 주시기로 긍휼을 베푸신다.
(1) 가인의 범죄 (4:1~8)
4:1~2 가인과 아벨
(1절)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동침 = 야다 = 알다 )
1) 아담은(= 신자는 ) 형벌 안에 회복하심이 있음을 하나님의 은혜로 깨닫게 되고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짓게 된다. 그래서 비록 저주받은 땅에서 땀을 흘리지만 아내와 함께 ( 언약 )성취(= 창 1:28 )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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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 아담과 하와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보여진다. 하나님께서 주셨고 그로 말미암아 참 기쁘다는 감정이 나타나있다. 그러나 인간의 믿음의 상태나 감정의 표현과는 ( 관계 )없이 그 후손은 죄의 실체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3~5 가인과 아벨이 각각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
(4-5절)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 예물 )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1) 아벨과 가인의 제사의 차이는 ( 믿음 )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믿음은 제물을 통해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아벨은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 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의 표현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가인의 제물에는 이런 표현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단순히 자신에게 있는 것 중의 일부를 드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해석은 하나님께서 제사를 ( 계시 )하기 이전의 사건이기에, 제물의 내용과 방법 때문에 받고 안 받으신다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아벨은 믿음으로 더 나은 제물을 드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서 “우리도 믿음으로 드리면 된다”라고 쉽게 말할 수도 없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 선물 )이기 때문이다.
3) 그러므로 아벨이 믿음으로 드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제물을 은혜로 열납하여 주셨다는 의미이다. 즉 인간의 선과 악의 지식에 의한 ( 행위 )라는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 주권 )으로 받으셨다는 뜻이다.
4) 그러면 아벨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제사(= 예배 )란 무엇인가?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1) “산 제사”란 내 ( 몸 )이 제물 되어 드려지는 것인데, 이것이 영적 예배이다. 즉 내 몸이 주님을 위해 사용되어짐으로 이제는 ( 내 )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2) 신자가 주님의 용서를 받은 자로서, 남을 용서하는 자로 살기를 ( 힘 )쓴다면 그것이 곧 몸을 주님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고, 믿음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예배를 기뻐하신다.
< 아벨이 예표하는 예수 그리스도 >
(4절)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마 23: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히 12:24)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1) 이는 ( 아벨 )의 계통만이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러면 가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당연히 자기 자신을 버리고 ( 아벨 ) 편으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가인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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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러면 우리는 어느 편인가? 유감스럽게도 가인 편이다. 이 세상에 아벨 편은 아무도 없다. 오직 한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은 이 땅에서 오셔서 아벨처럼 죽임을 당한 분이 시다. 그러므로 아벨의 죽음은 인간의 죄 때문에 죽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3) 그러므로 가인의 후손인 우리가 구원받는 길은 ( 아벨 ) 편에 서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속에 들어가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물론 족보에서는 가인 계열과 셋의 계열로 나누이지만, 혈육을 입고 있는 이상은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 가인 )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4) 그래서 참 아벨의 후손으로서, 인간의 죄 된 본성을 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것이다. 즉 예수님은 아담의 가문에서 태어나셨지만, 참 아벨로서 이 모든 혈통을 다 끊으시고 동정녀의 몸에서 ( 성령 )으로 태어나신 것이다.
5) 그리고 이제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그분을 믿는 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 제사 )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5절)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1) 제사를 받으시고 받지 않으시고는 하나님의 ( 주권 )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내 ( 기도 )는 꼭 들어주셔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결국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에 가인이 분노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다.
2) 이런 가인의 분노는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선과 악의 지식에 붙들려 있는 죄인 된 상태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며,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이 어떻게 대립되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뱀의 후손의 특징은 자기 ( 공로 )를 주장하는 것이다. “나의 제물이 무엇이 부족하여 안 받아 주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물을 받으시고 안 받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 주권 )에 달려 있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다.
3) 하나님은 사람의 ( 행위 )에 매이지 않는 분이시다. 사람의 행위에 매이는 신들은 우상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 뜻 )(= 주권 )대로 받으시는 분이시다. 이것을 하나님의 ( 선택 )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하나님의 선택을 말하면 세상은 싫어한다. 가인처럼 안색이 변하게 된다. 이것이 뱀의 후손의 특징이다.
4) “내가 어떤 면으로 보아도 너보다 나은데, 왜 너만 하나님이 ( 선택 )하고 나는 버리느냐, 나는 그런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공평하신 하나님”을 자신들의 ( 행 )함에 응답하는 기준에서 공평하다고 말하고 있다.
5) 그런데 자신들의 정성에(= 행함에 )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에 의해서라고 하니까, “그러면 나는 뭐냐?”라는 것이다.
“( 지성 )이면 ( 감천 )”이 안 통하는 신은 싫다는 것이다. 이것이 안색이 변하는 이유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 주인 )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라는 것이다.
6~8 가인이 아벨을 죽임
(7절)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1) 이는 가인의 마음이 ( 죄 )를 향해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죄를 향한 마음을 가진 가인이 죄를 다스릴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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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는 죄가 다스려지는 경우가 있다는 말씀이다. 어떤 경우인가? 주님의 은혜가 나를 ( 다스릴 )(= 통치 ) 때 그렇게 된다. 마음이 죄를 향하고 있다가도 주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세상보다도 나보다도 주님이 더욱 크신 분으로 자리하게 된다. 그럴 때 죄가 다스려지는 것이다. 결국 죄를 다스리라는 것은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죄를 이기라는 뜻이 아니라, 죄를 알되 죄를 다스리지 못하는 인간의 ( 연약 )함을 알고 죄를 이기신 분을 의지하고 그분의 은혜로 살아가라는 뜻이다.
3) 그러므로 죄를 다스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스스로 죄를 다스릴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며, 인간은 자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성령의 ) 도우심으로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8절)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1) 죄를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나 가인은 아벨을 죽이게 된다. 이것은 가인이 아벨을 죽일 것을 하나님이 이미 ( 알 )고 계셨음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벨을 죽게 놓아두신다. 왜 그런가? 이는 아벨의 죽음을 통해서 하늘의 생명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 악 )함을 증거하시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 생각나는가? )
2)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사건을 통해서 인간은 말씀이 아닌 ( 죄 )의 종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가인은 죄를 다스리라는 말씀에 복종한 것이 아니라 아벨에 대한 ( 분노 )(= 죄 )에 복종했다. 이것이 곧 죄에 복종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이미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 참 ) 사람의 모습을(= 하나님의 형상을 ) 잃어버렸기 때문에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그 누구도 말씀에 복종하는 자로 살아갈 수 없게 되었음을 ( 가인 )이 보여준 것이다.
3) 그래서 인간은 말씀에 복종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 율법 )을 주심으로써 증명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역사 속에서 율법에 대해 실패한 것은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말씀에 ( 복종 )하시는 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아들을 ( 보시 )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가려주시는 것이다.
4) 이제 성령께서는 말씀에 복종하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날마다 ( 고백 )하게 하시면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에 주님의 은혜가 크게 자리 잡게 하심으로, 주님의 말씀에 복종( 하는 ) 자로 살아가도록 일하신다.
(2) 하나님의 심판 (4:9~12)
4:9~12 가인을 책망하심
(9절)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 자기 자신은 자기가 알아서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인간들의 생각을 대변한다.
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네가 장자로서 네 동생을 지켜 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께서 ( 원 )하시는(= 마음 )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다. 이것이 ( 죄 )의 모습이다.
3)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유월절 어린양의 ( 피 )(= 희생 )의 정신으로 가나안에서 장자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그들의 본분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마음을 ) 알지 못했으며, 그래서 자기 ( 마음 )대로 살아가게 되었다.
4)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떤 정신으로 살아야 하는가?(= 롬 8:29 )그리고 내 마음대로 착한 일을 한다면 그것이 무엇이 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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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절)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죽고 난 뒤에 가인을 찾아오신다. 그러면 가인의 살인을 막으시거나 아니면 아벨을 보호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2) 아벨은 비명횡사를 당하고 가인은 성을 쌓고 잘 살게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누구나 착한 사람은 복 받고 잘살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교회에서도 하나님은 잘 믿는 자를 복주고 재난과 고난으로부터 지키신다고 주장한다. 과연 이것이 지키심인가?
3)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사실중의 하나가, 하나님은 신앙이 좋은 자 혹은 선한 자를 지키신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자녀들을 지키신다. 그러나 지키심의 ( 의미 )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합 1:4)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1) “왜 의인이 ( 고난 )을 받는가?”라는 하박국의 질문이다.
(합 2:4) “보라 그의 마음은 ( 교만 )하며 그의 속에서 ( 정직 )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2)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한(= 악한 ) 세상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 살아 )야 하기 때문에 ( 고난 )을 받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3)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키시고자 하는 것은 아벨의 목숨이 아니었다. 아벨도 아담의 후손으로서 ( 죽어 )야 할 인생이다. 죽어야 할 자가 죽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할 말이 없다. 의인은 세상에서 복을 받아야 하고 불의한 자는 벌 받고 살아야 한다면 의인이라 칭함 받던 ( 욥 )은 왜 고난을 받는 것인가?
4) 이처럼 하나님이 지키고자 하시는 것은 인간의 목숨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죽음을 통해서 세상의 악한 속성과 정체를 드러내심으로, 이 속에서 신자가 ( 믿음 )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도록 ( 지키고 )자 하셨던 것이다.
5)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신자로 하여금 세상의 ( 악 )함을 겪게 하심으로써 세상에 대한 소망을 ( 버리 )게 하시고, 대신 죄가 없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도록 일하신다. 이것이 자기 백성을 ( 지키시 )는 하나님의 원리이다.
6) 그러므로 신자는 땅에서부터 호소되는 아벨의 “핏소리”에 동참하게 된다. 이 세상이 얼마나 ( 악 )한 것인가를, 그래서 하나님의 ( 진노 )가 있을 것임을, 신자는 ( 삶 )을 통해서 분명히 소리쳐야만 한다.
(3) 하나님의 보호 (4:13~5:32)
① 가인에게 베푸신 긍휼 (4:13~24)
4:13~15 가인에게 표를 주어 죽음을 면하게 하심
(15절)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1) 아벨은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죽게 하셨다고 해도 불의한 가인은 세상으로부터 심판을 받도록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이 가인을 지키시겠다니 왜 그런 것인가? - 이는 세상 자체가 ( 악 )하므로 아무도 가인을 ( 심판 )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2) 심판권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아무리 의롭고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심판할 권세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이라는 개인을 보호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 ( 심판 )주이신 하나님의 ( 이름 )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위함인 것이다.
BIBLE STUDY 창세기 제 4 강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1) 하나님이 징벌을 받는 가인을 지키시는 것이나 해나 비를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내리시는 것이나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2) 하나님이 지키시지 않으면 가인은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가인이 살아있는 것은 ( 죽어 )야 할 자가 하나님의 지키심 덕분에 (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어야 할 자가 하나님의 지키심으로 살아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불만과 불평을 한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3) 결국 가인의 징벌은 가인을 통해서 세상이 하나님께 어떤 ( 은혜 )를 입고 있는가를 보이시기 위함인 것이다. 그것은 ( 죽어 )야 할 자가 (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악한 행동을 해서 악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악인에게도 내려주시는 해와 비를 보면서도 하나님께 ( 감사 )하지 않는 것을 악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는 악인도 ( 지키시 )는 하나님을 보면서 ( 감사 )함을 배워간다.
16-24 가인의 후손들
(17절) “가인이 성을 쌓고”
1) 이제 유리하는 자가 된 가인은 자신의 안전을 ( 스스로 ) 지켜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이 인간의 ( 문명 )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문명이란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가인의 후손들도 화려한 문명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 문명의 결과는 어떠한가?
(19절)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24절)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1) 단지 상처를 입었을 뿐인데 라멕은 그것을 살인으로 갚는다는 것이다. 받은 것 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복수하는 것이 가인의 속성이다. 가인은 아벨에게 복수를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살인으로 갚아야 할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가인의 속성이 라멕에게서 드러나는 것이다. 가인의 속성은 라멕에게 계승되고 지금까지 계승되는 것이다.
2) 그래서 인간들은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더욱 무겁게 돌려주기를 원한다. 그래서 ( 동해보복 )의 율례는 인간의 복수심을 다스리시기 위한 하나님의 법인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원리가 가인의 후손들이 사는 방법과 꼭 같은 것이다. 자기의 안전을 자기가 지켜야 하며, 이 안전을 위해서 상대방에게 지나친 복수를 해야만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비극이다.
(출 21:24-25)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린 것으로 갚을지니라”
3)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복수가 없었다. 자신을 죽이는 자에 대해서도 ( 용서 )를 보이셨을 뿐이다. 인간은 모두가 다 용서를 받아야 할 입장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 용서 )함을 받았다. 용서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에 살아있다면 그 은혜는 우리를 용서하는 자로 살아가게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용서를 잊어버릴 때 우리는 복수하는 가인의 속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마 1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BIBLE STUDY 창세기 제 4 강
② 아벨에게 베푸신 긍휼 (4:25~5:32)
4:25~5:5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죽은 아벨 대신으로 셋을 주심
(25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1) 아벨을 가인의 손에 죽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 일 )이고,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신 것도 하나님의 ( 일 )이라면, 이러한 하나님의 일에서 우리가 무엇을 볼 수 있는가?
2)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렇게 일하신다면 결국 일의 성사는 ( 사람 )에게(= 순종과 불순종 ) 달렸다는 결론이 나온다.
3) 하나님은 아벨을 택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벨을 통해서 일을 하시고자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아벨이 죽임을 당했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려면 아벨이 죽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을 그냥 죽도록 내버려두신 후에, 다른 ( 씨 )를 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계속 진행하셨다.
5) 결국 하나님의 일은 ( 하나님 )이 하신다. 하나님의 일은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성취된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 가지 )고(= 도구로 ) 일하신다. 이처럼 사는 것도 하나님의 ( 일 )이고 죽는 것도 하나님의 ( 일 )이라는 사실이 이 세상에서 신자를 강하고 담대하게 한다.
(시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5:6~32 에녹과 노아
(24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1) “낳았으며”, “죽었더라” - 태어나서 죽는 것이 인간의 전부이다. 이러한 죽음의 족보에 죽음을 보지 않은 에녹이 등장한다. 이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유 1:14-15) “아담의 칠 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 심판 )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 정죄 )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2) 에녹은 날마다 하나님이 세상에 행하실 ( 심판 )을 바라보며 살았다.(= 65세에 낳은 아들의 이름이 “그가 죽을 때 그것이 오리라”였다 ) 이것을 창세기에서는 에녹이 하나님과 ( 동행 )했다고 말한다.
(29절)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 노아 = 안위자(= 안식 )
1) 저주 받은 땅에 하나님은 노아를 안위자로 세우셨다. 그러나 노아도 저주의 땅에 있기 때문에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원망과 낙심이 나오고 어떤 사람은 ( 안식 )을 누린다는 것을 노아를 통해서 보이시는 것이다.
2) 노아 또한 에녹처럼 세상에 행하실 하나님의 ( 심판 )을 바라보며 살았다. 세상의 모든 것을 언젠가는 끝이 날 것으로 보았다. 심판을 바라보기에 세상에서 무엇을 누리고 사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이 ( 안식 )의 모습이다.
3) 신자 또한 에녹과 노아처럼 동행과 안식이 무엇인가를 ( 세상 )에 보여줄 자로 세움 받았다. 저주받은 세상에서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세상에 행하실 하나님의 일을 기대하며, 이 삶의 모습을 보여주며 사는 것이 ( 안위 )자로 살아가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