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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STUDY 창세기 제 6 강
(9:3절)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1) 홍수전에는 채소만으로도 생존이 가능했었는데, 왜 동물을 음식으로 허락하시는가?
2) 심판을 받고 죽었어야 할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 생명 )을 가진 자”가 되었다는 것이 홍수이후의 ( 사람 )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생명”의 의미를 사람들이 ( 기억 )하도록 날마다 섭취하는 음식물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것이다. 즉 인간의 ( 힘 )이 아닌, 외부의 다른 ( 힘 )에 의해서 사람의 생명이 ( 유지 )(= 보존 )되고 있음을 알리시고자 한 것이다.
3) 그러면 채소만으로는 새로운 생명의 의미가 기억되지 않는가?
- 그래서 노아의 번제가 계시되는 것이다. 노아의 번제는 단순한 감사의 의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은 “정결한 제물의 ( 희생 )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홍수 후의 인간의 생명은 오직 제물의 ( 피 )와 관계가 된다는 것을 ( 계시 )하는 제사였다. 그런데 채소에는 ( 피 )가 없음으로 채소만으로는 “새로운 생명에 대한 ( 의미 )”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 피 )가 있는 동물을 음식으로 허락하심으로써 인간의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계시하시는 것이다.
4) 물론 노아가 “나는 정결한 제물의 피의 은혜로 새 생명을 얻었다”는 구체적인 고백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당시는 시내산 ( 율법 )(= 언약 )을 통해서 음식에 대한 규례나 제사 규례가 선포된 후라는 것을 생각하면, 모세는 정결한 제물의 ( 피 )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노아의 제사를 기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5) 또한 창조 기사에서 의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동물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사람의 숭배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기도 하다.
(4절) “그러나 그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 것이니라”
(레 17:10) “무릇 이스라엘 집 사람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 중에 어떤 피든지 먹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 피 먹는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육체의 생명은 ( 피 )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 단 )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1) 피를 금하신 것은 생명이란 인간 스스로 유지(= 보존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즉 고기를 먹기는 하지만 피는 먹을 수 없는 규례를 통해서, 진정한 생명은 고기로(= 음식으로 ) 인한 것이 아니라, ( 피 )를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피는 정결한 제물의 희생으로 인한 은혜의 피를 ( 예표 )하는 것이다.
(6절)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 피를 흘린다 = ( 죽음 )을 말한다(= 상처가 아니다 )
1) 이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 주관 )할 수 없음을 말씀하는 것이다. 인간은 다만 피의 은혜와 그로 인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피의 은혜 아래 자신의 생명이 있음을 아는 자는 타인을 아래에 두고 ( 주관 )하려고 하지 않게 된다.
2) 신약적으로 피는 곧 예수님을 말한다. 예수님의 ( 피 )가 우리의 생명의 근본임이 해석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생명(= 영생 )을 얻었다는 뜻이며, 스스로의 ( 힘 )으로는 생명을 유지(= 보존 )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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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러므로 오늘날에는 피의 규례를 음식물의 규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피가 곧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확실하게 ( 해석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음식물의 규례가 아니라 타인에게 피해를(= < 피 >를 흘리게 하면서 ) 주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 고기 >만 먹어라 ) 의와 인과 신의 정신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고전 8:8)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눅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 새 )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4) 이것이 새 언약의 완성이다. 창세기에서는 피가 예수님의 생명이라는 의미가 희미하게 보이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성취로 언약이 더욱 구체적(= 유기적, 점진적 )으로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새 언약을 받은 자로서, 이제 역으로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 언약 )을 추적하면서 확인하는 놀라운 은혜 가운데 들어와 있는 것이다.
8~17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언약을 세우고 증거를 보이심
< 무지개 >
(13절)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1) 무지개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들 -
2) 노아의 언약은 하나님의 자기희생으로 자기 백성을 구하여 내시는 ( 십자가 )의 희생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새 언약 아래 있는 자들은 자연현상의 무지개를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무지개의 증거로 인해서 물로 ( 심판 )하지 않을 것은 여전히 유효하며 영원한 언약이다. 무지개는 세상이 하나님의 ( 언약 ) 아래 있음을 증거 한다.
3) 홍수 후에 세상은 “사람의 ( 악 )함으로 인해 멸망을 받을” 위기에서는 벗어났다. 그러나 그 대신 다른 질서가 주어졌다. 그것은 ( 피 )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다. 피를 믿는 자는 ( 영생 )을 가진 자로 살아가는 것이고, 피의 은혜를 무시하는 자들은 ( 심판 )을 받는 새로운 질서에 놓이게 된 것이다.
4) 하지만 세상은 무지개를 보면서 ( 언약 )을 생각하지 않는다. 무지개라는 언약의 증표 즉, ( 은혜 ) 아래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자신들의 실체를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 멸망 ) 받을 세상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지금도 말해주며 묵묵히 땅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무지개이다.
(4) 언약의 성취 (9:18~11:)
9:18~19 노아의 후손이 여호와의 언약대로 온 땅에 퍼짐
20~27 은혜를 아는 자들과 모르는 자들
(22절)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1) 손자 가나안이 먼저보고 아버지 함에게 알려준 것으로 추정된다.
2) 가나안이 함의 자손 중 중요한 인물로서 가문을 대표하는 의미로도 추정된다.
3) 모세가 기록 당시 들어가야 할 땅 가나안을 의식한 기록으로도 추정된다.
(23절)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1) 동일한 사건에 대한 “함”과 “셈과 야벳”의 모습을 대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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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절)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이 되기를 원하노라”
1) 노아는 아들 함이(= 손자 가나안 ) 잘못을 했더라도,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자기이기 때문에 덮어 줄 수도 있지 않은가? 또한 자식이 아무리 잘못을 해도 이렇게 저주를 하는 아버지가 어디 있는가? 그래서 이 저주는 참으로 황당하다.
(26절)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1) 더 황당한 것은 셈과 야벳을 불러다 놓고는 축복을 하는 것이다. 자식을 이렇게 차별해도 되는 것인가? 과연 이런 기사는 어떤 계시를 담고 있는 것인가?
(21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1) 노아도 사람이며 ( 죄인 )임을 보여준다. 즉 노아가 구원받게 된 것은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 반복 )해서 강조하는 계시의 사건이다.
2)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8:21)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제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기대를 하지 않으심을 천명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 막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식구들에게 “구원받았으니까 앞으로 잘해라”는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3)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인데, 이렇게 악한 사람들이 왜 저주를 받고 멸망되지 않는가? 그 이유는 노아의 ( 제사 )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노아라고 하는 의인을 (= 하나님이 < 선택 >했기에 의인이다 ) 뽑고, 그 의인의 제사를 통해서, 고쳐지지도 않고 돌아올 가능성도 없는 이 세상의 인간들을 ( 용서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노아 ( 언약 )이다
4) 그러므로 이제 이 땅은 “한 사람의 ( 희생 )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대신 살아나는” 원리가 ( 적용 )되는 땅이 된 것이다. 이것이 성경적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원리이다. 이 원리를 아는 사람은 ( 구원 )을 받고, 모르는 사람은 ( 저주 )를 받게 되는 것이다.
5) 그래서 노아 언약이 담고 있는 복음의 원리를 알게 되면 “비록 나는 망하고 쓰러져도 나 때문에 일어서고 회복되는 사람이 있구나”라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이로 인해서 하나님께 ( 감사 )가 나온다.(= 범사에 감사하라 ) 예수께서 말씀하신 “소금과 빛”, “밀알” 등은 노아 언약의 “대신 ( 희생 )”의 원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6) 그러므로 노아의 술 취함과 벌거벗은 모습에서 실수와 죄를 드러내려는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 은혜 )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려는 것이 성경의 의도이다. 그래서 세 아들을 통해서 이 모습을 대조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의도>
1) 함의 태도 - 저런 행동을 하면서 무슨 ( 구원 )받을 자격이 있어! 당대의 ( 의인 ) 좋아하네! - 함에게서 우리는 인간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려주신(= 방주 )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람들의 ( 무지 )함과 감사하지 않음을 보게 된다. 이런 태도는 결국 저주에 속한 것임을 노아의 ( 저주 )로서 계시하신다.
2) 셈과 야벳의 태도 - “그래, 아버지도 ( 죄인 )이고 우리도 ( 죄인 )이다! 덮어드리자” - 셈과 야벳의 행동에서는 인간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가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 아 )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런 태도가 복에 속한 것임을 노아의 ( 축복 )으로서 계시하신다. - 결국 노아의 예언이 주는 의미는 ( 10 )장 이후에서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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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또한 노아의 축복과 저주는 곧 ( 예수 )님과 연결된다. 노아가 수치와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누워있는 것은, 세상에 오셔서 ( 수치 )를 당하시고 벗겨지신 ( 부끄러움 )을 드러내고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치와 부끄러움은 우리가 받아야 할 몫이었다. 따라서 신자는 예수님 때문에 내가 받아야 할 수치와 부끄러움이 가려졌음을 ( 아 )는 자를 말한다.(= 셈과 야벳의 태도가 이를 말해준다 )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잎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덮으심(= 가리우심) 의 은혜>
1) 노아가 홍수의 심판에서 살아남은 이유는 하나님의 덮으심의 은혜 때문이다. 배를 만들고 준비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120년 동안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 수가 있겠는가? 이는 순전히 ( 믿음 )으로만 가능한데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다.(= 엡 2:8 )
2) 방주의 문을 하나님이 닫으신다(= 7:16 덮으신다, 가리우신다 ). 하나님의 덮으심으로 구원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덮으심이 정결한 짐승의 ( 희생 )에 있음을 홍수 후에 제사로 ( 확정 )(= 계시 )하는 것이다(= 시간적인 순서를 볼 때 하나님의 계시 사건은 시간을 초월하는 < 영원 >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 ). 이 덮으심의 은혜를 “함”이 무시했다. 이렇게 하나님이 덮어주시는 은혜를 기억하지 않고 거절하는 것을 ( 저주 )라고 한다.
3) 가장 먼저 덮으심의 은혜를(= 가리움 ) 받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
또한 덮으심이 공동체적으로 나타나는 때는 언제인가? -
그리고 이 덮으시는 유월절의 정신을 담아내는 그릇이 ( 율법 )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중심은 ( 제사 )에 있고, 제사의 중심은 “대신 ( 희생 )”을 통하여 덮으심(= 가리움 )을 받는데 있는 것이다.
4) 모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출 33장 )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죽을까봐 반석 틈 사이에 두고서 ( 손 )으로 덮으신다(= 33:22-23 ). 즉 하나님이 덮어주셔야만 모세는(= 우리는 ) ( 살 )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두 번째 돌판을 주신다(= 출 34장 ). 처음 돌판은 금송아지 숭배로 깨어졌다. 그런데 처음 돌판이 깨어지지 않았다면 금송아지를 숭배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다 ( 죽 )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두 번째 돌판은 이스라엘의 ( 반역 )과 ( 불순종 )이라는 증거를 담고 있다.
5) 이 반역과 불순종의 증거인 ( 돌판 )을 담아두는 상자가 ( 언약 )궤(= 법궤 )이다. 그리고 상자에 뚜껑을(= 뚜껑의 이름을 말하시오 - < 속죄소 >, < 시은좌 > ) 덮는다.(= 출 25:16-22 ) 이 뚜껑 양 끝에 그룹을 쳐서 만들어 그룹의 날개로 덮는다. 이 위에 대제사장이 피를 들고 가서 뿌린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 가리 )움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대로 하면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지만 언약궤를 덮는 ( 뚜껑 )의 기능이 죄를 ( 속함 )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히 9:4)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왕상 8:9 )
6) 이처럼 반역과 불순종의 증거가 들어있는 언약궤의 뚜껑을 덮어두지 않으시고 열어버리면 우리는 다 죽을 수밖에 없다. 지금도 우리의 허물과 죄가 가리워지고 덮어지고 있기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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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32:1-2)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 가리움 )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 정죄 )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롬 4:6-8)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김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 가리우심 )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 인정 )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고전 6:7)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7) 그러므로 신자는 이 은혜가 나를 덮어서 남의 허물도 ( 용서 )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 금식 )도 해야 하고 ( 철야 )도 해야 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르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이다. 즉 바보가 되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이것 외에 우리가 무엇으로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님을 증명하겠는가?
(막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10:1~32 여호와의 언약대로 번창한 노아 아들들의 계보 내용
(1절)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1) 야벳의 후손은 2-5절, 셈은 21-31절, 함과 가나안은 6-20절이다. 야벳은 유럽 쪽으로 나아가고, 함은 바벨론 지역과 가나안 지역을 차지하고, 셈은 바벨론 지역으로 갔다가 함의 세력에 밀려 산지에서 살게 되었다(= 10:30 ).
2) 노아가 세 아들에게 축복과 저주를 한 것은 하나님의 계시로서 그대로 이루어 져야 하는데 오히려 강대하게 된 것은 저주를 받은 함의 후손으로 보인다.
(8절)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 니므롯(= 반역하다 ) / 영걸(= 기볼 ) - 폭력으로 통치하는 자
(9절)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군이 되었으니”
- 특이한 사냥군 = 사냥하는 용사
1) 속담 = “하나님 보시기에도 대단한 용사”, “하나님이 아니면 어찌 저런 탁월한 능력을 가질 수 있느냐” /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가 안 하시는가”를, 이 땅 위에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남보다 더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로 가름하는 것이다.
2) 저주받은 함의 계열에서 영걸이(= 영웅 ) 나온다. 그러면 오늘날 니므롯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겠는가? - 우리에게서 “니므롯”과 같은 탁월한 영웅이 태어나기를 소원하며 기도하는 것이 “함” 세계의 특징이다. 그리고 이 모습이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메시야이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
(10절)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1) 당시 최고로 좋은 지역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어디가 되겠는가?
2) 그러나 하나님은 생육과 번성이라는 숫자보다는 어떤 ( 상태 )의 인간으로 존재하느냐에 더 큰 관심이 있으신 것이다. 그래서 ( 말씀 )에 순종하지 않은 아담과 하와에게 벌을 내리시고, 악한 세상을 홍수로 심판해 버리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10장의 족보는, 저주받은 가문의 번영하는 모습을 통해서, 세상은 결국 저주와 축복이라는 두 모습으로 구분되어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노아의 예언이 계시하는 것이다 )
3) 세상이 받드는 영웅이란 하나님을 멸시하는(=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군 ) 가증한 존재일 뿐이다. 따라서 니므롯의 존재는, 은혜를 무시하는 인간의 힘과 능력을(= 행함을 ) 보여주며, 그것이 곧 ( 저주 ) 안에 있는 자의 모습인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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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러므로 함 자손의 번영은 ( 저주 )받은 자들이 어떤 세계를 이루고 살아갈 것인가를 계시하는 것이다. 물론 번영과 성공이 저주이고 가난과 실패가 축복이라는 말이 아니다. 소유의 많고 적음의 여부를 떠나서 하나님의 ( 은혜 )로 살아가는 것이라면 그가 곧 노아의 예언대로 ( 복 )에 속한 승리의 존재라는 것이다.
5) 사단은 우리의 형편을 보여주면서 실망하고 낙심하게 만든다. 세상과 나 자신을 비교하게 하면서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었는데 얻은 것이 뭔가?”라는 원망을 하게 한다. 그러나 나의 약한 모습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감을 감사하는 것이 사단을 이긴 이김이 되는 것이며 이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고전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 약한 )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요일 5:4-5)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21절)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1) 에벨 = 건너편, 건너온 자 - 아브라함이 강 건너편에서 왔다는 의미이다. 어떤 강인가? - 그리고 발음이 에벨 → 이브리로 변형되면서 히브리라는 민족의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추정된다.
2) 이렇게 에벨을 언급하면서 셈의 족보를 기록하는 이유는, 모세가 히브리 민족의 계보를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즉 “히브리”라는 민족의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와 구속사를 계시하는 것이다.
(25절)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1) 족보가 진행되는 가운데 노아의 ( 예언 )처럼 세상은 나뉘어지게 된다. 이 구별은 창세기에서는 희미하지만, 점진적으로 유기적으로 ( 이중 )예정을 보여준다.
<10장을 정리하면서>
1) 저주받은 종족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흠모할 만한 영웅이 나왔다. 우리에게 단지 이 땅의 생활이 전부라면 과연 니므롯과 같은 영웅은 필요하다. 용기와 절제와 덕과 지혜를 겸비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나 신자인 우리에게 필요한 영웅은 하나님의 ( 은혜 )를 알고 그것만 의지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 홍수 )이후 세계의 특징이다.
2) 예수님 옆에 있던 강도는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갔다. 거지 나사로도 낙원에 들어갔다. 거지 나사로와 강도가 용기와 덕과 절제와 지혜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다만 예수님의 말씀에 의거해서 이 땅이 없어진다는 사실을 믿게(= < 영 >으로 혹은 하나님의 < 주권 >으로 )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의 크심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3) 우리는 이 땅이 어떤 영웅을 원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자칫하면 그 영웅상과 하나님을 결부시킬 가능성이 있다.(= < 함 >의 후손들이 그랬다 ) 하지만 우리는 전혀 영웅이 아닌 예수님이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부끄럽게 버림받은 그 사건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 죽음 )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진정한 영웅이란 이 세상이 ( 전부 )가 아님을 아는 신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