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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제 7 강
< 신앙생활이란? >
1) 종교생활의 모델은 절(= 수도원 )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다. 새벽4시에 일어나서 새벽예불, 아침에는 아침예불, 저녁에는 저녁예불, 시간이 날 때마다 기도하고 불경보고 수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 수행 )(= 훈련 ) 과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자기가 알아서 스스로 해야만 한다.
2) 목사도 5시에 새벽기도, 말씀보고, 아침 먹고, 또 말씀보고 심방하고, 저녁 예배하고, 자기 전에 기도한다. 그러면 앞의 스님(= 수도사 )의 경우와 목사의 경우에서 무엇이 다른가? 여기서 기도와 말씀, 예배는 스님들이 목사보다 훨씬 잘한다. 다만 심방 부분에서 스님들은 목사보다 한참 처진다.(= 불교의 구조상 그럴 수밖에 없다 ) 그러나 곧 스님들도 목사 못지않게 심방을 잘하게 될 것이다.
3) 이는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가 문제가 아니고, “내가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강한 ( 힘 )이, ( 외 )부에서 그렇게 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왜 말씀을 보고 기도해야만 하는가? 이것은 내가 스스로 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 은혜 )로만 되는 것이다.
4) 그러나 종교생활은 이런 은혜로 하는 것이 아니다. 스님(= 수도사 )들이 그렇게 열심히 수행을(= 행위를, 훈련을 ) 하는 것은 스스로 부처가 되기 위한 자기 ( 사랑 )의 모습이다. 이것은 ( 하나님 )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따먹는 인간의 죄악 된 모습일 뿐이다.
11:1~9 단합하여 성과 대를 쌓는 사람들
< 바벨탑 >
1) 바벨탑은 하나님의 ( 은혜 )를 잊어버리고 자신들의 ( 힘 )으로 더욱 안정되고 평안한 삶을 살아 보려는 것이다. 홍수 후의 땅은 물로 씻어진 정결한 땅이요,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자가 살 수 있는 긍휼의 공간이었지만, 결국 인간들은 죄성을 드러내고 만다.
2) 그러나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케 하시므로 그들의 일을 중지시키고 흩어지게 하셨다. 그리고는 셈의 후손 아브람을 통해서 “인간들의 ( 이름 )을 내”는 것(4절)이 아니라, 하나님이 ( 택 )하신 자의 “이름이 창대”케(12:2)될 것과 그 자손을 통해서 흩어진 백성을 다시 부르시는(= < 교회 > ) 사역을 계획하고 계신 것이다.
< 유기적 점진적 계시로서의 바벨탑 사건 >
1) 하나님의 선악과 금령은, 사람이 “선악”과는 전혀 ( 상관 )없이 창세전 작정의 은혜로 창조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시고자 했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곧 ( 은혜 )의 시작인 것을 하나님은 ( 사람 )을 통해서 알리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는 선악을 몰라도 사람이 사람 되는데 있어 전혀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선악을 알게 됨으로 그것이 인간됨을 와해시켜 ( 흙 )이 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2) 그러므로 “선악”과는 무관하게 신자는 “우리는 하나님의 ( 은혜 )로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 은혜 ) 덩어리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것은 내가 잘났기 때문이다” “혹은 우리가 서로 협력하기 때문에 교회가 잘 되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비 은혜적인 것이다. 이런 태도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매를 안맞기 위해 자기변명과 자기 의로움을 내세우는데만 신경 쓰는 철부지 자식과 같은 태도이다.
3) 그러므로 바벨탑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탑 쌓는데 동조 안했어요”라고 발뺌부터 하려고 하지 말고, 선악과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동안 하나님에 대해서 몰랐고 오해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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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것을 발견하고 수정하게 하자는 의도로서 바벨탑 사건을 일으키신 것을신자는 알아야 하는 것이다. 즉 ( 선악 )과 사건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을, ( 바벨 )탑 사건을 통해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시는 것이다.(= 유기적, 점진적 계시 )
(1절)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4절)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1) 사람들이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탑을 쌓게 되었는데 이것이 왜 나쁜 일인가? 사람들이 이름을 내고 모여 사는 것이 왜 나쁜 일인가? 오늘날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름을 내기 위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죄악이라고 말씀하시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2) 이런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 언약 )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홍수 심판 이후의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를 모른다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성경은 홍수 심판 이후의 땅이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그 위에서 인간의 참 모습을 ( 발견 )하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땅을 말하고 있다. 땅이라고 하는 것은, 노아 언약에 의해서, 다른 사람의 ( 희생 )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원리를 보여주는, 즉 땅이란 인간이 산다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 은혜 )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소이다.
4) 그런데 이러한 땅위에 인간들이 짓는 그 건물이, 하나님의 희생하신 사랑을(= 영광을 )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 아 >는 것이 아니라 ), 자기들의 이름을 내기 위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 모르 >는 것이므로 ) ( 죄 )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 희생 )을 몰랐기 때문에, 방주에 타고서도, 홍수의 심판을 거치고서도 저주를 받은 사람이 바로 ( 함 )과 그 가족이었던 것이다.
5) 하나님의 이 은혜를 모른다면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을 살아 있다고 보는가? 그냥 흙덩이가 움직이는 것으로 보면 된다. 이미 ( 사형 ) 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창 3:14) “종신토록 ( 흙 )을 먹을지니라”
(마 15:13-14) “심은 것마다 내 ( 천부 )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 뽑 )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4절)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1) 왜 흩어짐을 면하려고 했는가? 이는 ( 외 )부에서 인간들을 흩으려는 ( 힘 )이 작용했음을 의미한다.
2)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 술 ) 취한 모습을 통해서, 자식들의 상반된 태도를 일으키게 하셨고, 저주받을 자는 저주를 받고, 복을 받을 자는 복을 받게 ( 예정 )하신 것이다. 즉 사람들을 ( 분리 )(= 이중예정 )시키신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흩어지지(= 분리되지 ) 않겠다는 것이다.
3) 땅에서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은 인간 ( 존재 )성 강화(强化)에 대한 욕구라고 말할 수 있다. 즉 흩어짐을 인간의 소멸과 ( 힘 )의 약화로 보고 있기 때문에 단합하여 스스로를 지키고자하는 욕구가 바벨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고촌성경연구원 창세기 제 7 강
4) 바벨탑은 인간의 마음이 서로 ( 연합 )하였을 때, 무엇을 만들어 내는가를 보여준다. 인간의 모임이나 집단은 “( 단합 )대회”라는 것을 만들어낸다. 그 의도는 ( 바벨 )탑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와중에서 힘이 없는 집단은 결국 흩어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마음과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애를 쓰게 되는 것이다.
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 언어 )를 혼잡케 하심으로 완전히 흩어 버리신다. 한 번 계획한 것은 그대로 이루시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는 ( 언어 )의 혼란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한다. 흩어져 있다는 것은 다시 모으시겠다는 것을 전제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6) 이 하나 됨을 보여주는 것이 ( 교회 )이다. 그래서 교회란 과거처럼 인간의 이름을 내기 위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나로 모으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 된 주님의 ( 몸 )으로, 그 ( 지체 )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3절) “벽돌로 돌을 대신하여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1) “대신”
- 사람들은 돌을 대신하여 벽돌(= 행위 )을 사용함으로써, 거대한 탑이 자신들을 대신할(= < 존재 >감을 더욱 부각시킨다 )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2) 그런데 이것이 왜 하나님에게 문제가 되는가? 그냥 내버려 두시면 안되는가? 왜 인간끼리 뭉치는 것을 왜 못보시는가?
- 그 이유는 바벨탑(= 인간의 나라가 )이 하나님 나라를 ( 대신 )하려는 속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바벨탑은 단순히 벽돌로 지은 탑이 아니라 인간의 나라를 굳게 하려는 것이요, 단순히 역청으로 벽돌을 연결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언어(= 생각 )로 그 사이를 연결한(= 연합 ) 것이다.(= 이는 성령의 지도와 인도에 반하는 것이다 )
3) 그런데 오늘날 교회도 많은 부분에서 바벨탑을 보여준다. ( 단합 )하여 교회를 위해 애를 쓰고 교회의 이름을 온 ( 지면 )에 내자는 말을 한다. “우리 교회를 ( 세계 )에서 제일가는 교회가 되게 하시고 ( 이름 )을 세계에 떨치게 하소서”라는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기도를 서슴지 않고 하기도 한다. 이것이 자신의 ( 이름 )을 내기 위해 힘을 모으는 인간 집단의 모습이다.
(요 5:41-42) “나는 ( 사람 )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 없음 )을 알았노라”
(요 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 믿 )을 수 있느냐”
7) 교회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 이름 )(= 십자가 )만을 증거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 내 ) 교회, ( 우리 ) 교회”라는 것은 없다.
(7절) “언어를 혼잡케 하여”
1)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의 ( 힘 )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연합을 좋지 않게 보신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 힘 )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흩으심은 “( 힘 )이라는 가치관”을 흩으시는 것이다.
(단 2:35)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 세계 )에 가득하였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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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이 만든 문명은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만이 인간의 나라를 대신한다는 것이다.
(시 28:5)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 파괴 )하고 건설치 아니 하시리로다”
(시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2) 사람은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고 굳건히 하기 위해 연합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을 세우시고자 한다.
(마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 4:17)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4) 그래서 ( 언어 )를 혼잡케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지구상에 언어가 다른 민족들이 수없이 흩어져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 도전하고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책임지며 자기 이름을 위해 힘을 모으고 연합한 인간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 징계 )의 흔적이다.
(행 2:3-4)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1) 성령이 임했을 때 나타난 현상은 ( 방언 )이다. 이 방언으로 베드로가 설교할 때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모든 사람들이 베드로의 말을 알아들었다. 즉 언어의 흩어짐을 극복하고 다시 ( 하나 )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보여주는 것이다.
2) 신자에게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 택 )한 백성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방언이란, ( 창세 )전에 택한 자들을 부르셔서 ( 하나 ) 되게 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엡 4:4-6)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 통일 )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1) 이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기 백성을 성령으로 새롭게 하셔서 ( 하나 )로 만들어 내심을 말해주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뜻을 주장하며 살았지만, 언어의 혼잡으로 뜻이 통하지 않자 자연히 흩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성령 안에서는 ( 인간 )의 뜻은 없다. 다만 ( 하나님 )의 뜻만이 있을 뿐이다.
2)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모일 때 ( 하나 ) 됨이 가능하며, 그것을 두고 ( 통일 )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신자의 하나 됨은 인간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 위 )해 살아갈 때 가능하다. 이것을 위해 성령이 오신 것이다.
(막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9절)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1) 사람들은 바벨탑 쌓으면서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았고, 하나님 또한 탑을 쌓지 말라고도 안하셨다. 그러므로 바벨탑 사건은 인간들이 몰랐던 하나님의 마음을 그들의
( 행동 )을 통해서 밝혀진(= < 계시 > ) 것에 의미를 두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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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즉 신자들은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 실패 )의 영역을 넓혀 나가야 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의 오류는 “전에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사업에 실패했다. 그런데 이제는 순종했더니 사업이 성공했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을 해도 항상 그것이 자신에게 ( 바벨 )탑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무엇을 해도 자기 이름을 드러내려고 한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실패하게 하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의 실패를(= < 행동 >을 ) 통해서 확인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지식을 알게 하시기에 ( 감사 )가 되는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라 )
3)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 실패 )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미 이루어 놓으신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가 알고 믿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민족들을 흩으셨지만 그 흩어진 곳곳마다에서 ( 은혜 )를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우신 것만이 ( 영원 )한 것임을 ( 바벨 )탑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다.
4) 그러므로 성경의 계시를 통해서 나의 것이 원래부터 ( 부숴 )져야 될 것임을 알게 된다면 실패에 절망하지 않게 되고, 불안에 떨며 살지 않게 된다. 바벨탑 사건을 통해서 확고한 하나님의 ( 뜻 )을 알게 된 자들은 십자가 앞에서 ( 회개 )의 무릎을 꿇는다.
< 셈의 족보 > 10:21-31의 족보와 11장의 족보
1) 10장에서는 셈이 낳은 아들들이 모두 기록되었고, 11장의 족보에서는 “아르박삿”의 아들의 혈통만이 기록되다가 데라에 이르러서 다시 아들들을 모두 언급한다.
2) 즉 10장의 족보는, 축복을 받았지만 초라하게 된 셈의 모습과 저주를 받았지만 부요하게 된 함의 모습을 대비하면서, ( 복 )과 ( 저주 )의 진정한 개념을 예고하시는 것이며, 11장의 족보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짐으로써, 결국 참된 복은 ( 세상 )에서의 번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 약속 )을 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임을 가르치시고자 하는 것임을 볼 수 있다.
(28절)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
1) 11장의 족보에서는 “죽었다”는 표현은 없다. 그런데 28절에서는 하란이 아비 데라보다 먼저 죽었다는 말을 한다. 즉 28절의 “죽었다”는 단순히 한 인간의 죽음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2) 죽음은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며, 세상에 온 순서대로 죽는 것이 아니라 하란처럼 아버지보다 먼저 죽기도 한다. 결국 하란의 죽음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준다. 낳는 순간 ( 죽음 )도 함께 가지고 오는 것이다.
3)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 죽음 )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는 죽음의 상황에 비춰지고 있는 ( 빛 )(= 언약 )에 대해 마음을 두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갈대아 우르는 ( 죽음 )의 땅이다.
(31절)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1) 떠난다는 것은 곧 ( 죽음 )의 땅을 떠나는 것과 같다. 갈대아 우르를 죽음의 땅이라고 하는 것은, 사는 환경이 좋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 인간 )의 힘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땅에서의 마지막은 죽음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대아 우르에서는 모두 죽는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사는 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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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갈대아 우르를 벗어난다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오던 삶의 방식을 모두 ( 버려 )야 함을 뜻한다. 그리고 ( 새로 )운 땅에서 ( 새로 )운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아브람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30절)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1) 그런데 떠났기 때문에 자식이 생겼다. 물론 이는 예정된 사건이다. 이 사건의 의도는 이삭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자녀가 아니라는 것이다. ( 하늘 )의 자녀는 떠나야 생기는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닌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자녀를 창조하시기 위하여 “( 불임 )”이라는 장치를 마련하시고 그 가정을 고향으로부터 떠나도록 조치하신 것이다. 즉 이사를 하는 과정에서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 새로 )운 자녀를 잉태케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은 물으신다. “그러면 너는 누구냐?”
3) 우리의 몸이 비록 세상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 생각 )은 이 세상을 떠나 있어야 한다. 세상은 인간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루며 살아가는 땅이다. 이러한 땅에서의 결과는 낳았다가 ( 죽 )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신자는 ( 새로 )운 땅을 살아간다. 성령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새로운 나라를 살아가는 것이다. 신자는 ( 갈대아 우르 )를 떠나 ( 가나안 )에 거하며 살아가는 백성이다.
(갈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1) 우리의 어머니가 ( 하늘 )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 가는 자의 지상에 있는 어머니는 누구인가? 그것은 하늘에 참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 알려 )주는 폼(= form )의 어머니인 것이다. 즉 \"내가 너를 천국의 사람이 되게 잉태한 어머니가 아니란다\"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폼이다. 이를 위해서 사래가 잉태치 못한 것이다.
3) 그런데 꼭 떠나야만 천국의 자식을 잉태하게 되는가? 그렇다. 떠난다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지역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간적이고 육적인 환경으로부터 철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름이란 ( 부모 )가 자식에게 지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름을 바꾸겠다는 말은 부모와 혈육의 ( 관계 )를 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사래가 사라로 이름이 바뀌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여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즉 ( 다른 ) 인생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4) 이제 새로 지어진 이름 자체가 담고 있는 그 내용이 그 사람의 남은 여생이 된다. 부모와의 모든 관계는 ( 단절 )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적인 요소가 없는데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새로운 존재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제 “내 것, 내 가정, 내 나라”라는 것은 없어졌다. 다만 하나님과 함께 하심, 그 뿐이다.
5) 그러나 아브라함의 인생을 도와주기 위하여 하나님이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이 계획하고 성취해 나가시는 일에 아브라함이 ( 부름 )을 받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함께 하심”(= 동행 )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인하여 자기 것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이 점점 닳아지고 없어져 가는 것이다. 남은 것은 하나님의 ( 약속 )뿐이다. 그래서 위에 어머니를 갖고 있는 사람을 “( 약속 )의 자녀”라고 부르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