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제8강- 아브라함의 언약 / 창12장- 20장

아브라함 언약 - 창세기 제 8 강
 

 창세기 제 8 강

 

제2절 선민의 열조와 언약 (창12:~36:)

1. 아브라함과의 언약 (12:~20:)

< 언약 - 하나님의 뜻 >

1)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어떤 식으로 대화가 되는가? (= 고전 2장 )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 영 ),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 능력 )이 인간에게 주어져야만 해석이 가능하다. 이 방법 외의 해석은 문자이며 육이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 성령 )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 성령 )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 미련 )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2) 이처럼 육은 ( 영 )의 말씀을 분별하지 못한다. 즉 하나님과 인간의 ( 대화 )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 ( 언약 )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하나님께서는 “날 보지 말고 내가 준비한 그분만을 바라보아라”고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만이 ( 언약 )이기 때문이다.

3)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니까 내가 문제를 들고 하나님을 찾아가면 하나님은 응답하신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전형적인 ( 이방 )종교적 생각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 언약 )에 담아서 인간의 요구나 뜻과 상관없이 계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란 하나님의 언약이 선명하게 ( 확장 )되어 가는 모습을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노아에게 ( 방주 )를 만들게 하신 사건이나 ( 아브라함 )을 찾아오셔서 네가 “복의 근원”이라고 하신 사건이 유기적, 점진적인 것이다. ( 방주 )에 “들어가면 살고 안 들어가면 죽는다”는 것이나, ( 아브라함 )에게 주신 언약을 “믿으면 살고 안 믿으면 죽는다”는 것의 의미가 같다는 것이다. 방주가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으로 바뀐 것뿐이다. 즉 노아와 아브라함 속에는 장차 오실 ( 예수 )님이 들어 있는 것이다.

 

(벧전 1:10-11) “이 ( 구원 )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 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 고난 )과 후에 얻으실 ( 영광 )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 시 ) 어떠한 ( 때 )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 무엇을 연구했는가? -

2) 연구했더니 어떤 결과가 나왔는가? -

3) 선지자들이 아브라함을 열어보니 ( 이삭 )이 들어있었고, 이삭 속에는 ( 야곱 )이 들어있었고, 야곱 속에는 ( 요셉 )이 들어있었고, 나중에는 ( 예수 그리스도 )가 그 안에 들어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즉 열조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오늘 ( 우리 )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라는 것이다. 열조들의 실수와 범죄가 오늘 예수 잘 믿고 있는 ( 우리 )의 실수와 범죄라는 것이다.

4) 하나님이 아브라함(= 노아 )을 택했다고 해서 아브라함(= 노아 )이 완전자가 아니다. 오히려 실수투성이, 죄 투성이다. 하지만 그런 자도 하나님이 관여하시니까 용서가 되고 구원이 되고 의인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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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삭의 취향은 ( 야곱 )이 아니라 (에서 )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 축복 )의 자리에서 사람을 바꿔치기 하심으로 이삭의 의도를 꺾어버리셨다. 이는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의 뜻을 내세우고 하나님의 사랑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자기 ( 욕심 )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한 모습임을 이삭을 통해서 ( 계시 )하시는 것이다.

6) 무슨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 언약 )을 주셨는데, 이 언약을 생각하지 않고, 신앙이란 것을 자기의 소망만을 갈구하는 ( 이방 )종교적 수단으로 써먹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기독교의 새로운(?) 사상이 “하나님은 내 편이다”, “하나님은 내편이 되어야 한다”라는 것들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런 생각의 곡해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언약은 ( 수난 )을 받는 것이다.

 

1) 가나안 땅 언약 (12:~14:)

(1) 땅 언약과 보호 (12:)

1)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버린 ( 빈 )자리를 하늘의 ( 약속 )으로 채워야 했다. 마리아가 남자 없이 ( 성령 )에 의해 예수님을 잉태했던 것처럼, 아브라함은 부부의 불임상태와 관계없이 이삭을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 “너는 누구이며 어떻게 태어난 자인가?”

2) 일반적으로 말하는 믿음이란, 인간이 자기의 비전을 세워놓고,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해서 하나님으로부터 ( 능력 )을(= 응답을 ) 받아 뜻을 달성하는 ( 힘 )으로 사용하자는 기대일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이 증거하는 믿음이란 나의 ( 모든 ) 것으로부터의 떠남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 약속 )만이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창 15:1-2)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 방패 )요 너의 지극히 큰 ( 상급 )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 방패 = 유월절 사건, 상급 = 구원

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엘리에셀도 이스마엘도 거부하신다. ( 약속 )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는 ( 행위 )를 지켜보시면서 결국은 모두가 하나님의 ( 약속 )이 아니라고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의 방법이다.

2) 그러면 왜 그렇게 복잡하게 하시는가? 이는 구원이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 약속 )에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 깨닫 )게 하시려는 목적에서이다. 이 하나님의 약속이 택자 안에 들어올 때, 이때 비로소 택자는 ( 신 )자가 되는 것이다.

3) 그러나 자기 스스로 믿고자 하는 자들은 결국에는 지쳐 버린다. 그래서 “그동안 믿은 세월을 하나님이 참작해 주시겠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처음부터 자신이 약속을 붙든 사람이기 때문에 ( 약속 )의 자녀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친히 약속 된 분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예상치도 못한 ( 이삭 )을 주신 것과 같은 원리이다.

4) 득남의 예언을 들은 사라가 장막 뒤에서 홀로 웃었다. 그래서 이삭을 볼 때마다 자신의 능력이 아닌 ( 약속 )의 자녀인 것을 두고두고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삭이라는 라벨이 그들의 인생 내내 항상 따라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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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러면 다음 중 하나님의 부르심의 방향성을 고르시오

(1) 바벨론에서 가나안으로,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영적 애굽에서 영적 가나안으로

(2) 가난함에서 부유함으로, 병에서 치유로, 실패에서 성공으로

6) 아브람과 함께 떠난 자들은 무엇을 계시하는가?

(1) 아브람은 하나님의 직접 부르심을 받는다. 그러나 그를 따라 나선 자들은 직접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니다. 또한 아브람에게 ( 붙 )어 있는 것이 복이지만 현실은 고생길이다. 풍요한 바벨론을 두고서 알지도 못하는 낯선 곳으로의 떠남이란 쉬운 결정이 아니다.

(2) 데라는 도중에 하란에서 머무르게 된다. 갈 길은 험해 보이고 현재의 삶은 좋아 보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딤후 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3) 롯은 비록 아버지를 일찍 여의는 불행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복의 통로로 세우신 아브람에게 ( 붙 )어 있었던 것이 복이 되는 것이다.

(4) 사래는 아내이기에 따라가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고대사회에서는 아이를 못 낳은 것이 수치였다. 그러므로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한 사래가 아브람에게 ( 붙 )어 있었기에 나중에는 열국의 어미가 된다.

(5) “얻은 사람들” - 종들을 말한다. 이들은 주인의 소유이기에 주인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 가야한다. 그런데 이들이 아브람에게 붙어 있었기에 즉 종들이 된 것이 ( 복 )이다.(창 17:12-14) -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의 ( 표시 )로서, 구원이 사람의 ( 능력 )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보여준다. 즉 별 볼일 없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백성에 편입되는 것이 아브람의 종들이다.

(고전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6) 아브람도, 사래도, 롯도, 종들도 결국은 예수님께 붙어 있게 ( 하 )심으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작정과 은혜를 나타내는 ( 예표 )적 인물들이다.

 

12:1~3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불러내심

(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1) 그냥 살고 있는(= 기반이 있는 ) 곳에서 복을 주시면 안되는가?

- 땅에 거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 복 )은 땅의 것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 복 )은 땅을 떠나는 것이다. 이것은 언약에 의해서 아브람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 민족 )이 형성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때문에 아브람이 살던 땅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감으로써 세상의 땅은 ( 둘 )로 나뉘게 된다.

2) 인간이 중심이 되어서 인간의 노력으로 살아가는 땅과 하나님을 중심으로 언약을 믿으며 은혜로 살아가는 새로운 땅으로 ( 구분 )되는 것이다.

 

(2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1) 그러면 인간이 이름을 내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신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청대케 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인가? 이로 볼 때 아브람의 이름은 한 ( 개인 )의 이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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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2) 12장이 말하는 복이란 사람이 달라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 일방 )적으로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벨탑 사건으로 흩어져서 살게 된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의 이름이 아닌

( 하나님 )의 이름을 온 지면에 내시기 위한 것이다.

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언약을 하시지만,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

( 하나님 )이 일하실 것이다. 인간은 언약이 성취되는 쪽으로 나아가지 ( 않 )기 때문이다. 아브람이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다. 결국 아브람의 이름을 창대케 하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 이름 )(= 혹은 일, 사역 )을 창대케 하시겠다는 것이며, 복의 근원이 되는 것도 아브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 아 )는 것이 곧 복이라는 뜻이다.

4) 이처럼 하나님은 한 인간을 세워서 ( 언약 )을 하시고 하나님을 증거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분이시며 곧 복의 ( 근원 )이 되시는 것이다.

 

(3절)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1) 아브람을 축복한다는 것은 아브람을 칭찬하거나 높여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 언약 ) 안에 있는 아브람을 보면서, ( 복 )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주어져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언약은 복의 < 형식 >이고, 복은 언약의 < 내용 >이다 ) 그런데 이것은 인간의 행위와 의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4~6 아브람이 소명을 받고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에 이름

7~9 아브람이 여호와 하나님께 땅을 약속 받고 단을 쌓음

(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1) 아직 자손이 없는 아브람에게 약속을 주심으로, 눈에 ( 보이 )는 약속은 약속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신다. 그러면 왜 눈에 보이는 약속을 주시지 않는가? 이로 말미암아 아브람은 기근을 피하여 ( 애굽 )으로 내려가게 되지 않았는가?

(롬 8:24-2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 성경은 단순히 윤리 도덕적인 교훈으로, 아브람이 가나안 땅을 떠나니 ( 벌 )을 받았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건에 담겨진 ( 언약 )의 계시를 모르게 되면, “우리는 아무리 힘들어도 섬기는 교회를 떠나지 말고 잘 섬기자 그러면 복을 받는다” 혹은 “아브람이 부름을 받자마자 다 버리고 떠났다, 아들 바치라니까 단번에 아내와 의논도 하지 않고 바쳤다, 그런데 우리는 예배당 건축을 위해 집하나 못 팔아 바치느냐”는 식으로 해석하고 설교할 수밖에 없다.

3)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다. 기근이 오면 아브람처럼 살 길을 찾아 나서는 것이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믿음은 불가능이 없다, 지금 눈에 보이지 않아도 큰 꿈을 가지고 믿음으로 이루어 내자”라고 해석한다. 사람들의 “불굴의 의지”를 북돋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을 성경은 ( 바벨 )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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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경이 말하는 믿음을 바르게 알려면, 아브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의 ( 언약 )하신대로 만들어 가시고 당신의 ( 언약 )을 이루어 내시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자신을 고백하고 ( 부정 )하게 하시는 것이다.

 

10~13 아브람이 애굽에서의 생존을 위해 자기를 위장함

(13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1) 아브람은 그 땅에 기근이 들자, 하나님의 ( 언약 )을 잊어버리고 눈에 보이는 현실을 따라 계산하며 행동했다. 그리고 현실의 논리에 의해서 아내를 이복동생으로 부르게 된다. 이처럼 ( 언약 )을 잊어버리게 되면 우리는 아브람과 같이 정당치 못하며 거짓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 모든 ) 일의 결과는 하나님의 뜻에 달렸다. 이것을 아는 것이 ( 믿음 )이다.

2) 그런데 사래는 아브람의 그 정당치 못한 말에 ( 순종 )을 한다. 말하자면 자기 몸을 바쳐서 남편을 살려내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사건은 “누가 더 낫다”는 윤리 도덕적인 기준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아브람의 ( 부정 )적인 모습을 통하여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가시는 과정을 계시하는 것이다.

 

(벧전 3: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1) 즉 아내가 남편에게 ( 순종 )함으로 하나님의 딸이 된다는 것이다. 남편이 믿음이 없어 보여도 그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남편을 ( 주 )님처럼 대하라는 것이다.

2) 이것이 아브람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아브람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실제이다. ( 아브람 )만이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 예수님 )만이 복의 통로이므로, 그분을 알면 복을 받고 모르면 저주를 받는 것이다. 이것이 ( 홍수 ) 이후의 시대의 원리이다.

3) 사람들은 예수의 죽음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맞는 말을 하면서 ( 지옥 )에 가는 것이다. 성경이 이러므로 사람들에게 닫혀 있는 책이다. 오직 주의 은혜를 입은 자만 성경이 보이고 자신의 ( 죄 )가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에 아멘 하는 것이 세상의 학문을 잘 배우고 익힌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믿는 것이 ( 기적 )이다.

4) 다른 해석 = 사래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인 이유는 자신은 복의 근원이므로 반드시 살아남아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해석이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의 뜻을 ( 오해 )한 것이라는 2차적 해석으로 이어지면 복의 근원에 대한 설명으로서 아주 좋은 해석이다.

5) 즉 이런 아브람의 모습은 오늘날 하나님의 ( 영광 )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모습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 믿는 사람이 잘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 믿는 나를 잘 되게 해주셔서 형제들과 친척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 달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잘못을 그대로 아브람이 저지르고 있다. 아내는 단지 자신을 통한 하나님의 일의 보조물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아내의 장래나 운명은 뒷전이고 오직 자신의 안녕을 챙기는 것이다. 그것도 ( 하나님 )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식으로 정당화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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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것이 복의 ( 근원 )이지, 무조건 살아남고 잘산다고 해서 복의 근원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기근을 일으키시고 어리석은 행동을 ( 통 )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 깨닫 )게 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 약속 )대로 복의 근원이 될 것이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는 것임을, 아브라함은 자신의 ( 잘못 )(= 죄 )된 행동을 통해서 체험해야만 했던 것이다.

 

14~17 바로가 사래를 자기의 궁으로 들였다가 재앙을 당함

(1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1) 이런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욕하는 것은, 이 세상은 이미 하나님의 ( 심판 )아래 있기 때문이다. 기생 라합은 이 세상의 입장에서 보면 매국노이고 더러운 여인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 올랐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질서와 가치를 보시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 언약 )만을 보신다.

2) 하나님께서는 거짓말한 아브람을 벌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려서 사래를 구해내신다. 무슨 의미인가? 즉 아브람 때문이 아니라 본문 그대로 사래를 보호하기 위해서 바로의 집에 재앙을 내리신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아브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래가 중요했던 것이다. 왜 사래가 중요한가?

3) 바로가 사래를 아내로 취한다면 하나님의 ( 약속 )이 무너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래를 구하심으로써 ( 약속 )을 보호하시는 한편, 아브람에게는 모든 일은 인간의 방법이 아니라 ( 하나님 )의 방법으로 성취되는 것임을 가르치고자 하셨던 것이다.

4) 그렇다면 바로는 억울한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억울하다고 할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절대자 )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재앙을 내리신 것은 약속을 ( 보호 )하시고, 아브람을 ( 가르치 )기 위함인 것이다. 그래서 바로가 사래를 취하기 직전까지 가만히 계신 것이다.

(15:16)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 관영 )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5) 이처럼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는 ( 행위 )를 지켜보시면서 결국은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고 하신다. 이유는 무엇인가?

 

18~20 바로가 아브람을 책망하고 사래를 다시 돌려보냄

(20절)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1) ( 세상 )의 왕이 명하니 아브람이 원위치가 되었다. 이처럼 ( 절대 )자이신 하나님이 명하시면(= 언약하시면 ) 그대로 이루어진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세상 왕의 명령보다도 못하게 생각한다.

(시편 105:12-15) “때에 저희 인수가 적어 매우 영성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 하였도다 사람이 그들을 해하기를 용납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연고로 열왕을 꾸짖어 이르시기를 나의 ( 기름 )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 선지자 )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2) 아브람을 말하고, 다윗을 말하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 약속 )하여 세우신 사람이기에 어떤 누구도 해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지키시는 것이다. 아브람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