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제9강- 멜기세덱과 십일조 / 창13장

멜기세덱과 십일조 - 창세기 9 강
 

창세기 제 9 강
(2) 약속의 땅 정복 (13:)

13:1~4 아브람이 벧엘에 이름

(4절)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1) 12:7절에서 아브람은 단을 쌓았지만 애굽으로 내려간 것으로 보아서, ( 땅 )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즉 자신에게 ( 복 )을 주시는 하나님을 높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은 ( 내 )편이며 나를 ( 위 )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내가 ( 믿 )는다는 것이다. 12:8절의 단을 쌓음도 역시 동일한 의미로 볼 수 있다.

2) 결국 애굽 사건은 하나님의 ( 약속 )을 신뢰하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살려고 하는 노력은 실패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계시한다. 그러므로 처음 단을 쌓은 곳에서 다시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여호와가 ( 누구 )신가를 새롭게 깨달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 나 )를 위해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 약속 )을 성취하시기 위해 일하시며, “나”라는 존재는 약속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패로 몰고 가는 자에 불과함을 깨닫고 여호와의 ( 이름 )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3) 그러므로 신자에게도 처음에는 아브람처럼 “하나님은 ( 나 )에게 복주시고 도우시는 분”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아브람처럼 ( 실패 ) 속에서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깨닫게 된다. 나의 실패와 허물이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은(= 구원은 ) ( 성취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처음에 예수님을 불렀던 자리에서 새롭게 깨달은 “( 주 ) 예수님”을 부르게 된다.

 

5~9 아브람이 땅이 좁음으로 조카 롯을 떠나라고 권함

(9절)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 좌 )하면 나는 ( 우 )하고 네가 ( 우 )하면 나는 ( 좌 )하리라”

1) 사람들의 생활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사람들이 자기 ( 뜻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즉 사람들에게는 행동의 ( 가치관 )이(= 근본 )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치관이 ( 요구 )하는 대로 살게 되어있다. 자기 마음껏 자유롭게 사는 것 같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 가치관 )이 이끄는 대로 살아갈 뿐이다.

(요 8:34)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 종 )이라”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 마귀 )에게서 났으니”

2) 학자들은 이 가치관을 여러 가지로 보았는데, 특히 마르크스는 경제로(= 재물, 소유의지 ) 보았다. 그러나 이런 세상의(= 마귀의 ) 가치관들이 이끄는 대로 살다보면 “내가 누구인가?”라는 ( 정체 )(= ID )성이 갈수록 희미해지면서 결국에는 내가 누구인가에 관심이 없이 그냥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3) 마찬가지로 애굽에서 삼촌과 조카가 같이 나왔는데 헤어지게 된다. 헤어지는 이유는 바로 재물 즉 ( 소유 )라는 가치관 때문이다. 그러나 아브람에게는 소유 때문에 헤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 가운데서도 ( 신앙 )이라는 가치관이 있었던 것이다. 이 가치관이 있는 사람이 9절과 같은 결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즉 “너희들은 ( 소유 )하기 위해 다투며 살아가라 나는 나대로 갈 길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을 향한 신자의 외침이다.

(출 20:17) “네 이웃의 집을 ( 탐 )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신 27:17) “그 이웃의 ( 지계표 )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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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애굽에 가기 전의 아브람은 (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었음이 사래의 사건을 통해서 밝혀졌다. 그리고 아브람은 애굽에서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선택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즉 애굽을 통해서 자아가 ( 파쇄 )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과정은 오늘날 신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실로암의 소경을 예수께서는 언제 찾아오셨는가? (= 요 9:35 )

5) 결국 아브람의 판단은 하나님의 언약 성취의 역사 가운데서 ( 예정 )대로 이루어진 것이며, 롯의 눈에 보이는 소망을 향한 마음이 강하게 나타난 것도 ( 예정 )대로 이루신 것이다.(= < 종속 >의지 )

 

10~13 롯은 요단 들에,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게 됨

(10-11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 애굽 )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 아브람은 롯에게 우선권을 부여함으로써, 자신의 소망하는 바가 따로 있음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즉 신자의 인생이란 ( 좋 )은 것을 선택하는 세상의 원리와는 다른 것이라는 증거이다.

2) 롯은 이미 인간의 노력으로 살아가는 ( 애굽 )을 경험했기 때문에 소돔을 택했다. 그러나 동일한 애굽의 경험을 했지만, 이제 아브람은 그렇지 않았다.(= 동일한 사건을 놓고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던 사건을 말하시오 - )

3)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땅이 롯에게는 ( 좋 )게 보였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마 6:21)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

즉 무엇에 마음을 두고 있느냐에 따라 ( 보물 )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마음을 하늘에 두고 세상을 본다면 세상은 하나님의 ( 심판 )을 받을 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현재는 하나님이 세상을 멸하시기 전이므로 좋은 것이 가득한 곳으로 보이는 것이다.

 

14~18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땅과 자손을 약속해 주심

(14-17절)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1) 이제 ( 믿음 )이라는 가치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 약속 )을 믿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좋은 소유라는 세상의 가치는 롯에게 넘겼지만, 갈대아 우르를 떠나 올 때와 마찬가지로, 그 ( 빈 )자리를 “하나님의 ( 언약 )”이라는 새로운 가치로 채우게 되었던 것이다.

2) 롯과 다투게 된 원인인 재물(= 소유 )은 ( 애굽 ) 사람들로부터 얻어낸 것이었다. 아내를 내팽개친 대가로 얻은 더러운 재물이었다. 그러므로 재물이라는 가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약속이라는 가치가 아브람에게는 필요했던 것이다.(= 언약하신 하나님의 섭리로 인한 것이다 )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힘이나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 약속 )에만 기대를 걸고 사는 참된 ( 신앙 )인의 모습을 아브람을 통해서 보여주시고자 한 것이다.

3)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으로 사는 신자는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다\"는 ( 실제 )를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 확실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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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나님의 언약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는 무엇에 ( 관심 )을 두어야 하는가이다. 대개는 “아브람은 땅을 ( 많 )이 소유하게 된다”라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된다. 즉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에게 관심을 두기보다는 받는 것들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5)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의미는 그 땅이 어떻게 주어지는가의 ( 과정 )을 통해서 하나님이 ( 누구 )신가를 계시하시겠다는 것이다.

(신 9:5)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 의 )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 악 )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 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 맹세 )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3) 전쟁에서의 승리 (14:)

< 여호와의 전쟁 - 붙이시매 전쟁 >

14:1~12 경쟁과 투쟁의 세상

(12절)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1) 하나님을 믿는 아브람에게 날 벼락 같은 전쟁이 터졌다. 조카가 잡혀 갔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편안하게 놔두지 않으시는가? 내 ( 몸 ) 하나도 유지하기 힘든데, 왜 하나님은 ( 원 )하지도 않는 전쟁에 몰아넣으시는가?

 

(4절) “이들이 십 이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 십삼년에 배반한지라”

1) 롯이 선택한 땅이 하나님의 동산처럼 보일 만큼 좋은 땅이었다면, 다른 사람의 눈에도 좋은 땅으로 보였을 것이다. 결국 그 안에는 서로 좋은 것을 차지하기 위한 ( 경쟁 )이 있을 수밖에 없으며, 다른 사람의 좋은 것도 ( 내 ) 것으로 만들기 위해 피나는 투쟁을 하게 된다. 이러한 경쟁구조 속에서 구분되는 것이 ( 강 )자와 ( 약 )자이다. 그래서 약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이 벌였던 일은 무엇인가? - 바벨탑

2) 결국 롯은 소돔에(= 좋은 땅에 ) 있었다는 이유로 전쟁에 휩쓸려서 포로로 잡히고 재산도 모두 빼앗기는 재난을 당하게 된다. 영적 분별력이 없다면 이런 일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신자를 세상에 남기신 이유는 좋은 땅을 원하는 세상의 가치와 싸움을 하게 하기 위해서다.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 영 )들에게 대함이라”

 

13~16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출함

(14절) “단까지 좇아가서”

1) 아브람이 318명이라는 적은 수를 가지고 승리했다는 것은, ( 하나님 )이 아브람을 도우셨음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 보내 )서 롯을 구출하는 것이 하나님의 ( 뜻 )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따라 간 롯을 구하시는가? 사실 이런 질문은 세상의 사고방식인 인과율의 사상에서 나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조건은 하나님의 ( 선택 )일 뿐이기 때문이다.

2) 물론 롯은 자신의 생존만을 바라보고 잘못된 선택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 육신 )으로 인해 세상 속의 싸움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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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더불어 ( 친 )히 싸우시는 것이다.(= < 여호와 >의 전쟁 ) 그래서 신자는 망하지 않는다. 칼빈주의로 말하시오, - 그리고 이를 ( 경험 )하게 됨으로 신자는 세상에서 많은 소유가 없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는다.

3) 분명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 신자 )의 전쟁에 개입하신다. 물론 사람들이 보기에는 세속의 전쟁과 동일하게 보일 것이지만(= 아브람의 군사들 ), 하나님 입장에서는 ( 영 )적인 전쟁으로 개입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신자는 ( 육 )적인 전쟁에서 못 벗어나는 현실성을 지니고 있지만, 사실은 그 속에서 하나님이 벌이시는 영적 전쟁의 ( 군사 )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20절)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1) 강력한 4개국의 연합군을 아브람은 도저히 이길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 붙여 )주신 전쟁은 반드시 이긴다. 이 승리의 모습을 아브람의 처음 전쟁에서 보여주시는 것이다. 오늘도 신자는 롯처럼 적에게 사로잡혀 갈 수 있지만, 예수님이 용사가 되셔서 전쟁에서 승리하심으로 우리를 구하여 내시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 여호와 )의 전쟁”의 승리로 ( 구원 )을 받고 있는 것이다.

2) 결국 하나님의 ( 언약 )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무조건 아브람의 ( 편 )이기에 승리하게 된 것이다.(= 12:3 )

(빌 2:12)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 멜기세덱의 의미 >

1) 전쟁과 승리의 의미를 알려준 사람이 멜기세덱이다. 십일조는 ( 전부 )를 드린다는 의미이며, 이는 전쟁의 ( 중심 )(= 주도권 )이 멜기세덱에게 있었다는 의미이다. 즉 아브람은 그저 전쟁에 ( 초대 )된 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전쟁의 중심이 과연 멜기세덱인가?

(시 110:1-2)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 우편 )에 앉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시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 멜기세덱 )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히 7: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2) 즉 하나님께서 ( 다윗 )을 데리고 전쟁을 하시는데 정작 승리는 하나님 ( 오른 )편에 계시는 주께 있다는 것이다. 이 주님이 아브라함이 만났던 멜기세덱과 ( 같 )은 일을 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멜기세덱으로 인해 하나님의 전쟁은 승리가 주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8절)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 멜기세덱은 왕인가 제사장인가? - / 외증 - 제정의 분리

1) 멜기세덱은 제사 행위 그 자체로서 자기 백성을 통치한다. 즉 왕들은 전장에 나가서 칼을 들고 행동하면서 통치를 하지만, 제사장으로서의 왕인 멜기세덱은 조용히 ( 제사 )만 지내고 ( 기도 )만 해도 전쟁에서 승리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19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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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즉 ( 제사 ) 자체가 전쟁에서의 무기이며, 승리이며, 백성을 통치하는 방식이다. 참 된 제사에서는 의가 나오고, 그 의가 거룩하지 못한 하나님의 원수를 ( 멸 )하는 것이다. 이것이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라 오시는 주께서 하나님의 원수를 멸하시는 방식이다.

3)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역할은 무엇인가? - 예) 소년 다윗과 성인 골리앗의 경우

(시 8:2) “주의 대적을 인하여 ( 어린 ) 아이와 ( 젖먹이 )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 지금 젖먹이 어린이들을 동원시켜서 휴전선에 초병을 세우면 북한군들이 얼마나 황당하고 가소롭게 여기겠는가? 그래도 하나님의 전쟁은 이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즉 아브람은 이 전쟁에서 ( 젖먹이 )의 역할을 한 것이다. 하나님의 전쟁에서 자기 공로를 개입시키면 그것이 하나님과 ( 대적 ) 관계에 놓인다는 것을 아브람은 깨달았던 것이다.

4) 이제 하나님의 전쟁에 초대받은 아브람에게 멜기세덱은 “( 떡 )과 ( 포도주 )”를 선물로 준다. 이것은 가나안 땅에서 나온 ( 생명 )의 산물이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떡과 포도주”로 자신의 ( 생명 )을 주신다.

 

< 십일조 >

( 아브라함의 십일조 )

17~20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드림

(20절)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1) 아브람은 318명으로 전쟁에서 승리한다. 이런 경우 대개는 자신의 능력을 ( 자랑 )하게 된다. 비록 하나님께서 도우셨다는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내심에는 “너희들은 하나님이 돕지 않지만 ( 나 )는 도우신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와 다른 ( 특별 )한 존재다”라는 의식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남들보다 ( 잘 )되었을 때가 신자에게는 위험한 순간이다.

2) 그러나 이 전쟁은 롯을 구하기 위한 여호와의 전쟁이었다. 그래서 ( 십분 일 )의 의미가 중요한 것이다. 복을 받기 위한 십일조가 아니라 복을 ( 받 )았기에 복의 ( 통로 )가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승리는 ( 자기 )의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내 일을 “( 잘 )되게 하실 것”이라는 조건부로 십분의 일을 강요하면 곤란하다. 아브람의 십일조는 여호와의 붙여주신 전쟁을 시인하는 신앙의 ( 고백 )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는”것이 아니라 “복의 ( 출처 )가 어디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십일조이다.

 

( 히브리서 7장의 십일조 )

(히 7:27)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제물을 싫어하신 이유는 그 제사가 ( 노아 )의 제사에서 보여주는 “다른 사람의 ( 희생 )으로 사는” 의미를 모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 1:13) “( 헛 )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2) 이스라엘의 ( 처음 ) 난 것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다.(= 민 3:12-13 ) 그래서 장자를 ( 대신 )하는 레위 지파의 희생의 모습은 그들에게 ( 땅 )이 없다는 것이다. 즉 다른 지파가 레위 지파의 희생으로 살기에 ( 십일조 )를 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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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럼에도 레위지파의 희생과 제사직무는 ( 완전 )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레위 혈통이 아닌 ( 유다 )지파에서 예수님이 오시는데, 이것이 ( 멜기세덱 )이 나타나 아브람을 축복한 것과 같다는 뜻이다.

3) 결국 십일조의 ( 완성 )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이다. 이제 우리는 십일조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사장의 역할을 하시면서 동시에 자신이 ( 희생 )제물이 되는 것이다.

4) 멜기세덱과 레위지파의 공통점은 ( 제사장 )이라는 것에 있다. 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사하는 ( 중보 )의 역할을 한다. 죄인으로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기에 중보자를 통하여 만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 희생 )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삽니다”라는 고백이 ( 십일조 )를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 율법의 십일조 )

1) 율법 안에서는 ( 레위 )지파가 십일조를 받는다. 아브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 멜기세덱 )에게 십일조를 한 것처럼,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 레위 )지파에게 십일조를 하는 것이다.

2) 레위지파가 십일조로 ( 생활 )하면서 제대로 된 ( 제사 )를 드리게 되면 다른 지파를 ( 축복 )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 화목 )을 이루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 기억 )하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말 2:5) “( 레위 )와 세운 나의 언약은 ( 생명 )과 ( 평강 )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 것은 그로 ( 경외 )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1) 이처럼 생명과 평강이 레위와 세운 언약을 통하여 주어지는데, 이 레위언약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파기함으로, 즉 온전한 ( 십일조 )와 헌물을 드리지 않음으로 인하여 생명과 평강을 누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느 13:29) “내 하나님이여 저희가 제사장의 직분을 ( 더럽 )히고 제사장의 직분과 레위 사람에 대한 언약을 ( 어기 )었사오니 저희를 기억하옵소서”

1) 느헤미야가 바벨론에 다녀오는 사이에 ( 십일조 )가 드려지지 않음으로 레위사람들이 그 직무를 행하지 않고 전리로 도망가 버렸다.(= 느 13:10 ) 그래서 다시 불러와서 정비하고서는(= 11절 ) 레위언약을 새롭게 하였으니 복을 달라고 기도한다.(= 31절 )

2) 그러나 이스라엘은 느헤미야 이후로도 계속 ( 온전 )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았음을 ( 말라기 ) 선지자는 증거하고 있다.(말 3:7-12) 그래서 이스라엘이 ( 복 )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3) 유대인들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도 고생을 많이 하였다.(= 중간시대 ) 그런 고생을 하면서 왜 우리가 복을 받지 ( 못 )할까를 연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을 보니 십일조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복을 받지 ( 못 )한다는 말씀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철저하게 ( 십일조 )를 하자는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십일조만이 아니라 모든 ( 율법 )을 철저하게 지켜서 복을 받자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 바리새 )인들이다.

 

 

창세기 제 9 강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눅 11:42 )

1) 그런데 ( 십일조 )를 철저히 잘해서 오히려 “화 있을진저”의 저주를 받은 것이다. 율법의 더 중한바 율법이 증거하는 예수님을(= 의와 인과 신 ) ( 버리 )게 되는 것이 저주이다. 이스라엘이 무엇을 하다가 저주를 받았는가?

- ( 형식 )의 십일조를 철저히 하다가

2) 그러나 분명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셨으니 십일조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의와 인과 신을 행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3) 이것이 안 되면 저것을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다. 의와 인과 신을 버린 십일조를 지킨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 저주 )를 받는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 온전 )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는 저주를 예수님 자신이 ( 온전 )한 십일조가(= 율법의 완성 ) 되셔서 ( 대신 ) 드려지는 것이다.

4) 그리고 이 말씀은 ( 십자가 ) 이전의 말씀이며, 문맥적으로는 ( 과거 )에도 이렇게 했어야 했고, 예수님 당시의 ( 현재 )에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즉 인간으로서는 ( 온전 )한 십일조를 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모든 ( 율법 )을(= 십일조 포함 )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즉 처음 것의 ( 희생 )의(= 어린양의 대신 희생, 레위지파의 장자를 대신하는 희생 ) 완성으로서(=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심 ) 십일조를 완성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 서신서에서는 ( 십일조 )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이다.

5) 신약시대에는 십일조가 아닌 ( 전부 )(= 이것이 < 아브람 >의 신앙고백이었다 )를 드리는 것이다. 모든 것이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로부터(= < 멜기세덱 >의 제사로부터 ) 왔기 때문이다. 이제 복은 십일조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의 ( 완성 )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에는 십의 일조를 하든지 십의 구조를 하든지 또는 형편이 어려워서 못하든지 거기에 ( 관심 )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분에게만 ( 관심 )이 있는 것이다.

 

21~24 아브람이 소돔왕과 노략물에 대한 처리를 끝냄

(23절)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1) 이처럼 아브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 높이 )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소돔 왕이 많은 돈을 줄 때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승리자로서 당연히 가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자신이 소돔왕의 말 대로 돈을 취하면 소돔 왕이 ( 아브람 )의 승리를 인정해서 돈을 준 것이 되고, 그렇게 되면 ( 하나님 )의 승리가 자신으로 인해 부정된다는 생각을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 이처럼 신자가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산다면 자신의 ( 이름 )과 ( 소유 )를 위해 살아가게 될 것이다. 어떠한 방법이든 상관없이 내 소유가 많아지면 되는 것이고, 심지어는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 복 )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신자는 이름과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 이름 )을 위한 군사로 살아가는 것임을 아브람의 모습이 말해주고 있다.

(시 44:3)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 주 )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 주 )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창세기 제 9 강

 

2) 자손 번창 언약 (15:~16:)

(1) 자손에 대한 언약 (15:)

15:1~3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異常) 중에 아브람에게 임함

(1절) “아브람아 두려워말라”

1) 아브람은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는가?

 

(1절)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절)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1) (13:16)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라는 약속은 있었지만 아무 것도 ( 받 )은 것이 없었으므로, 방패요 상급이라는 말에 아브람은 ( 세속 )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즉 아브람은 이 말씀을 자신에게 ( 힘 )이 되는 것을 주시겠다는 뜻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런 아브람의 잘못된 이해가 오늘날 현대 교인들과도 일치한다.

2)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은 ( 창조 )주와 ( 피조 )물의 관계이다. 이 관계는 ( 도움 )을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라 다스림과 다스림을 ( 받 )는 관계이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타락함으로 인간은 ( 자신 )만을 생각하는 존재 즉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난 존재가 되었다. 즉 하나님의 다스림이 자신에게 ( 이익 )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타락 이후 인간들은 하나님을, 인간을 ( 돕 )는 신으로 인식을 하게 되었다.(= 자기중심 )

3) 이런 맥락에서 성경도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초점이 “나에게 어떤 ( 이익 )이 되는가”에 맞추어져 있음을 아브람을 통해서 증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방패와 상급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우리는 ( 아브람 )과 같은 시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즉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도와주고 보호하는 역할로서의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보호를 받고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열심히 ( 종교 )생활을 하는 것에서 찾게 된다.

 

< 상급 >

1) 이 말씀은 세상에서 힘이 될 만한 것을 주셔서 아브람을 지키고 보호하시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이 방패요 상급이라면 그것으로 ( 족 )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후사를 ( 주시겠다 )고 약속을 하신 것이지, 후사를 얻기 위해 힘쓰면

( 도와주겠다 )고 약속하신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아브람은 후사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할 필요가 ( 없 )다. 다만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실 때를 ( 기다리 )면 되었던 것이다.

2) 그러므로 상급에 대해서도 아브람이 노력한 일에 대한 ( 대가 )로 주는 것이라는 의미는 처음부터 ( 없 )는 것이다. 아브람이 노력해야 할 부분은 없기 때문이다. 아브람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이 약속의 열매를 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의미이다.

3) 그런데 “구원은 하나님의 ( 은혜 )요, 상급은 우리의 ( 행함 )으로”라는 비성경적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누가 누가 잘하나”의 경연대회장이 되어버린 모습이다. 구원은 따 놓은 것이니 이제는 행함으로(= 교회, 목사에게 충성 ) 이 세상에서 복도 받고 천국에서 상도 받아 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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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물론 성공(?)사례들이 있기는 하겠지만 문제는 이를 ( 보편 )화 시킨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에게 “그러면 나도 한 번”이라는 경쟁과 헛된 욕망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아브람의 ( 본 )을 받아 우리도 ( 복 )을 받자”는 식으로 성경을 보게 하는 것이다. 결국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는 모습이다. 그런데도 이것을 마치 복인 양 말하고 있음을 볼 때에 우리가 성경에 얼마나 무식한 것인지가 드러난다.

4) 도덕경(노자)을 불신자들이 해석한 예

- “훌륭하다는 사람 떠받들지 말라. 사람 사이에 다투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

- 해설) 훌륭한 사람을 표창하여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되도록 떠받들면, 모든 사람이 그 사람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힘쓸 것이라고 믿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다. 정부나 기관에서는 이런 통념에 따라 표창장이니 훈장이니 하는 것을 적격자에게 나누어 주고 이를 널리 공표한다. 하지만 노자는 이런 상식적 관례를 깨어 버리라고 한다. 훌륭한 사람들을 떠받들거나 그들에게 상을 주면 그것 때문에 서로 다투고 질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5) 무슨 말인가? - 세상의 성과급이라든가 상이라든가 표창이 사람들을 선한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와 질투를 일으키게 된다고, 예수도 안 믿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였는데, 은혜를 말해야 하고 시기, 질투가 죄라고 말해야 하는 교회에서 어떻게 “상 받기 위한 경쟁을 하게 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6) 말씀 그대로 아브람의 상급은 ( 하나님 )이다. 이 말씀을 하나님을 잘 ( 섬기 )면 무엇을 ( 받는다 )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마치 재벌회장처럼 생각하고 그분에게 잘 보여서 무엇을 받아내려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세상에서는 재벌회장을 사랑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외적으로 잘 보임으로서 무엇을 받아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다.

(고전 16:22)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든 ( 저주 )를 받을 지어다”

 

4~7 여호와께서 아브람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될 것 언약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 믿으 )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 의 )로 여기시고”

1) 세상은 의를 도덕과 윤리적인 규범을 기준으로 하여 규정한다. 의롭다는 말을 들으려면 철로에 뛰어 들어서 남을 살리고 대신 죽는 정도는 되어야 의롭다는 평가를 하게 된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의롭다고 평가 받는 것은 인간의 ( 행위 )이다. 특별한 ( 열심 )에 의한 행위를 두고 의로운 것으로 평하는 것이다.

(신 6:25) “우리가 그 명하신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2) 이 말씀대로라면 ( 의 )롭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켜야 한다. 즉 모든 율법을 빠짐없이 지켜야 한다. 그러나 율법을 모두 지킬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 않 )는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의로울 수 ( 없 )는 것이다. 그런데 의로워질 수 있는 길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당신을 ( 믿으라 )고 하신다. 즉 예수님이 흘린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을 ( 의 )로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 믿음 )에 있는 것이다.

 

< 믿는 것이 왜 의가 되는 것인가? >

1)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전혀 생각해볼 수도 없는 사람을 통해서 ( 의인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즉 믿음이란 아브라함의 의견이나 행위가 개입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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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2) 인간은 분명 죄의 종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인간의 생각, 의견, 힘, 노력 등이 개입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 아들 )이 개입되어야 성사되는 문제이다.

3) 그러면 어떤 식으로 개입하시는가? 하나님은 자기 아들은 ( 죄 ) 있는 육신의 몸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 정 )하셨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육신은 그 자체가 ( 죄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의 ( 영 )이 임해야 죄의 종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4) 아브라함이 제시하는 행위란 기껏 종에 불과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내세우는 의라는 것은 기껏 죄의 종으로서 드러내는 ( 가짜 ) 의일 뿐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떤 다른 인물을 개입시키는 것이다.

 

(5절)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 셀 ) 수 있나 보라”

1) 아브람이 그 수많은 별을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처럼 하나님의 의도는 아브람의 행할 수 있는 행함의 범위를 ( 벗어 )나 있다. 즉 하나님의 ( 은혜 )란 인간의 수준에서 다 헤아릴 수 ( 없 )는 것이다. 그 많은 별을 다 셀 수 없듯이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신 은혜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엄청난 것이다.

2) 그러므로 아브람은 자신의 뜻을 꺾고 하나님이 계시한 계획과 약속하신 그 인물이 개입하는 것에 대해서 ( 동의 )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의는 하나님의 ( 약속 )된 인물과 관련지어서 판정받는 의이다. 오늘날 우리가 의로운 것은 예수님이 의롭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 나의 때 볼 것을 = 창 15:6 / 보고 = 창 21:2, 22:14

(창 21:2)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창 22: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8~11 여호와께서 언약의 증거를 보이려 아브람에게 명하심

(8절)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10절) “그 중간을 쪼개고”

1) 고대의 계약체결의 의식적 모양이 있지만, 이는 사람들처럼 쌍방계약이 아니라, 하나님의 ( 일방 )적 선언이다. 그러므로 계약에 대해서 아브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없다. 하나님이 성취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2) 구약의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의 증거가 곧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자는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라는 믿음으로 ( 말씀 )을 대하게 되는 것이다.

(행 17: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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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 사람 )의 말로 아니하고 ( 하나님 )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 역사 )하느니라”

 

12~21 여호와께서 언약을 이루실 과정과 그 증거를 알려줌

(16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 아직 )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1)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땅에 대한 약속을 하시지만 그 성취는 상당한 기간 동안 지연된다. 그렇다면 자손의 고난이 아모리 족속의 죄악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는 이방의 죄를 ( 드러내 )기 위해서다. ( 나그네 )를 괴롭히는 것 자체가 곧 하나님의 ( 은혜 )를 모르는 죄이며 이것이 심판의 기준이다.(= 창 6:5, 8:21 )

2) 그러면 예수님은 왜 아직 안 오시는가? -

- 그러면 신자는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어떤 상태에 있어야 하는가?

이처럼 때가 찰 때까지 신자는 괴로움을 당하겠지만 결국 이는 세상의 죄를 더욱 분명하게 하는 도구로서의 삶인 것이다.

(계 6:9-11)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 죽임 )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 신원 )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 죽임 )을 받아 그 수가 ( 차기 )까지 하라 하시더라”

(계 14:12) “성도들의 ( 인내 )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18절)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 이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이루어진다. 무엇에 근거한 전능하심인가? -

우리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 언약 )을 이루는 일에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100년도 못 사는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는 1,000년이 더 걸려서도 약속을 이루어 내신다. 이를 인정하는 것이 ( 믿음 )이다.

2) 하나님께서 약속을 성취하심으로 후손과 땅이 주어졌다. 그리고 하나님은 언약을 새롭게 하신다. ( 다윗 )에게 영원한 약속을 주시는 것이다.(= 삼하 7:8-16 ) 그러므로 구약의 커다란 틀이(= 징검다리 )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주신 ( 언약 )이라는 것이다.

(삼하 7: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 영원 )히 보전되고 네 위가 ( 영원 )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마 1:1) “( 아브라함 )과 ( 다윗 )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 그러면 지금은 다윗의 왕위가 없는데, 영원이란 무슨 뜻인가? -

- 결국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주신 언약이란 누구를 지향하는 것인가? -

3)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큰 흐름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것을 위하여 우리가 한 것이 ( 없 )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오직 주님이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 내심으로 인하여 ( 참여 )(= 초대 )된 것이다. 모든 인류가 한 통속이 되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를 때 함께 있던 자들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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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 2:9)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 들어가 )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후 1:4) “신의 성품에 ( 참예 )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2) 이스마엘의 출생 (16:)

16:1~2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듣고 몸종인 하갈을 취하게 됨

1) 하나님께서는 땅에 대한 약속은 기간을 정하여 주셨는데 후손에 대한 약속은 기한이 없다. 그러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 ( 주실 ) 때까지

2) 이런 아브람의 이야기를 가지고 여러 가지 교훈적 모범적 설교를 하게 된다. 물론 듣기도 좋고 적용하기도 좋다. 그러나 행함이 강조되다 보니, 하나님의 자기 언약보다는 “사람이 조금만 잘하였으면 될 텐데....”라는 신인( 협력 )적인 내용이 되어 버린다.

3) 다시 한 번 김용옥의 노자의 도덕경을 인용한다. “무위란 행위가 없음이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무위도식 하거나 빈둥거린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무위란 보통 인간사에 발견되는 인위적인 행위, 과장된 행위, 자기중심적인 행위, 계산된 행위, 쓸데없는 행위, 부산하게 설치는 행위, 남의 일에 간섭하는 행위, 함부로 하는 행위 등 일체의 부자연스러운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너무 자발적이어서 자기가 하는 행동이 구태여 행동으로 느껴지지 않는 행동, 그래서 행동이라 이름 할 수도 없는 행동, 그런 행동이 바로 무위의 위, 함이 없는 함이라는 것이다”

“이런 무위의 위를 실천하는 사람은 자기 행동 때문에 누가 잘되거나 무슨 일이 이루어져도 자기의 공을 주장하거나 과시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기의 의식적, 인위적 행위가 아니라 도에 따라서 저절로 우러나온 자연적 행동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행동인지도 모르고 그것 때문에 생긴 공이 자기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행동방식, 이런 마음가짐, 이런 초월적 자세를 가진 자유인이 하는 일은 참된 일이기 때문에 허사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만큼 자유인인가?”

4) 이 정도의 행위를 도에 따른 자연스런 행동이라고 하는 도덕경의 말과 교회에서 성경을 가지고 말하는 윤리적 교훈적 설교와 차이가 있는가? 거의 없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 워낙 ( 인위 )적인 일들을 많이 하다 보니까, 도덕경의 이런 내용이 훨씬 신선하고 좋아 보인다는 교인들도 생겨나는 것이다. 교회보다 더 ( 욕심 ) 없이 사람답게 잘 살아 가자고 말하는 그에게 교회는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5) 그러면 차이는 무엇인가? 세상은 사람이 이런 일들을 할 수 ( 있 )다는 것이고, 성경은 사람이 할 수 ( 없 )다는 것을 전제하고, 혹 이러한 일들이 나온다 할지라도, 자기 공로를 주장하지 않는 자세가 나오는 것은 오직 성령의 ( 은사 )로만 나오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2절)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1)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어”, (13:16)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15:4)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15:17)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2) 계속 약속이 주어졌지만, 결국 십년이란 ( 시간 )은 아브람 부부에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의심을 하게 했다. 이런 결과는 하나님의 약속을 ( 시간 )적인 개념에서 생각한, 조급함의 결과이며 약속은 반드시 성취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