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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제 10 강
16장 (2절)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1) 아브람과 사래는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들을 ( 위 )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 빨리 ) 성취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약속에 대해서 ( 끝 )까지 믿는 것보다는 “( 언제 )(= 빨리 ) 이루어지는가?”에만 관심이 있다.
(약 1:4) “( 인내 )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2) 이런 이유로 신자들의 의식의 한쪽에는, 주께서 지금껏 오시지 않았으니 내일도 안 오실 것이라는 생각이 있다. 그래서 “오늘까지는 이렇게 살고 ( 내일 )부터는 바르게 살면 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도 한다. 어쨌든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 전 )에 고치면 된다는 생각에서다.
3) 그러나 약속은 행위가 아닌 ( 믿음 )만을 요구할 뿐이다.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서 인간이 개입할 부분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다만 약속을 ( 믿 )고 ( 기다리 )며 사는 것밖에 다른 할일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믿음을 흔드는 것이 인간의 ( 시간 ) 개념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 속에서 100년도 채 못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게 되면, “( 언제 ) 이루어지는가?”라는 조급함이 아니라 “하나님은 ( 반드시 ) 이루신다”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된다. 신자에게는 “언제?”가 아닌 “( 반드시 )”가 믿음이다.
(히 6:14) “가라사대 내가 ( 반드시 )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창 22:16-17 )
4) 즉 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 정체 )성을 알게 되면, 약속이란 ( 나 )를 위한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 일 )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하신 일을 성취하시기 위해 ( 약속 )하신 것을 알게 된다. 신자는 하나님의 계획에 ( 포함 )되어 있을 뿐이지, 신자가 곧 하나님의 계획의 ( 목표 )는 아닌 것이다. 이것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 이방 )종교처럼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며, 하나님은 내 ( 편 )이라는 이기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16:3~4 하갈이 사래를 멸시함
(4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1) 이것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약속을 얻으려고 한, 즉 자신들을 ( 위 )한 약속으로 오해한 행위의 결과이다.
2) 자식이 없다는 것은 복이 없다는 것이며 힘이 없다는 ( 사회 )적 평가이다. 때문에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을 ( 힘 ) 있는 자로(= 방패, 상급 ) 만드시겠다는 의미로 오해했던 것이다. 결국 아브람은 약속한 복이 오지 않음으로 스스로 복을 얻고 ( 힘 ) 있는 자가 되기 위해 하갈과 동침한 것이다.
3) 마찬가지로 하갈도 잉태한 것을 자신의 ( 힘 )으로 여겼다. 세상은 자신에게 힘이 되는 것을 소유하기 위해 애를 쓰며 살아간다. 이렇게 노력했으니 소유의 주인이 ( 나 )라는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나의 소유가 ( 누구 )로부터 왔으며 ( 무엇 ) 때문에 주어졌는지를 생각하게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너는 누구냐?”라고 묻는 ( 음성 )을 들을 수 없다.
4)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자신의 행위로 자식을 얻은 결과는 자신과 사래를 괴롭히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가정에(= 언약자손에게 )
( 육체 )의 소욕을 처리하시기 위해서 ( 대인 )관계로 작정하신 섭리였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제 10 강
16:5~6 사래가 하갈을 학대함
7~14 하갈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음
(10절)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 하갈의 자손은 약속의 자손이 아닌데 왜 그들을 번성케 하시는가? 바로 이런 것이 성경의 절묘한 구성이다.
2) 하갈의 자손은 누구의 자손인가? -
- 그러면 장차 사래가 낳을 자식은 누구의 자손인가? -
(갈 4: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 약속 )의 자녀라”
3) 그러므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적 ( 방법 )(= 행위 )에 의해 낳은 아들과 하나님의 ( 약속 )(= 은혜 )에 의해 낳은 아들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적 방법에 의해 낳은 아들의 번성을 통해서, 누가 과연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 드러내 )고자 하시는 것이다.(= 에서와 야곱, 사울과 다윗 )
4) 인간적 방법의 삶과 약속을 의지하는 믿음의 삶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따라서 무엇이 믿음이며 무엇이 불신인가를 세상에 나타내시기 위해서 하갈의 자손이 ( 필요 )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약속의 성취를 늦추신 이유는, 약속에 대한 인간의 ( 조급 )함 때문에 인간적 방법이 나타나기를 ( 기다리 )신 것이다.
(창 15:16)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 관영 )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5) 그러므로 신자가 할 일은 분명하다. 믿음 없는 세상에서 믿음이 ( 무엇 )인가를 증거 하는 것이다. 세상 것으로(= < 땅 >의 가치로 ) 사는 세상에서 믿음으로(= < 하늘 >의 가치로 )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6) 오늘날에도 신자가 하나님의 ( 약속 )을 모르면 자꾸만 ( 이스마엘 )을 낳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이스마엘을 양산해도 결국은 내어 쫒기는 신세일 수밖에 없다.
(13절) “내가 어떻게 여기서 ( 감찰 )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엘 로이 = 내가 본 하나님, 나를 살펴보시는 하나님
1) 하갈은 10절의 말씀을, 하나님이 자신을 인정하시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즉 나의 형편과 처지를 외면하지 않고 살피시고 도와주시는 하나님이다.
2)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하나님에 대한 ( 오해 )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감찰하신다는 것은 인간을 인간의 ( 자리 )로 돌려보내기 위한 살피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3) (9절)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는 말씀은, 여종이라고 하는 네 ( 역할 )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증인 역할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주기도 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내 힘으로 삼고 증인의 자리에서 벗어날 때가 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돌아가라”고 말씀하신다.
15~16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음
(15절) “아브람이 하갈의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갈 4:23)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3) 열국 통치 언약 (17:~20:)
(1) 열왕이 날 것을 언약하심 (17:~18:15)
창세기 제 10 강
17:1~5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을 언약하심
(1절) “나는 ( 전능 )한 하나님이라”
1) “전능”의 의미를 설명하시오. / 엘 샤다이
- 세상이 이해하는 전능 =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일을 성취시켜주는 하나님의 힘
- 성경이 말하는 전능 =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한 자기 계시
2)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은 포기되어짐이 없이 ( 반드시 ) 성취된다는 말씀이다. 즉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그들의 죄악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 친 )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 전능의 의미이다.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 친 )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룻 1: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 전능 )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나오미=희락 / 마라=괴로움
1) 나오미가 말하는 전능자는 자신의 일을 도와주는 전능자가 아니라, 믿음에 있지 못한 자신을 괴롭게 해서라도 본래의 자리로 ( 돌아 )오게 하시는 능력자라는 의미이다.
2) 즉 아브람이 죽은 자와 방불하든 사래가 늙어서 폐경이 되었든 간에,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방해할 수 없다. 이것이 “( 전능 )”이다.
(히 11:12) “이러므로 ( 죽은 )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1절)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 완전 )하라”
1) “행하여 완전”한 것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가져야 할 자세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할 수가 없다. 의를 위해서 힘쓴다 할지라도 완전함을 이룰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실상이다. 그러면 여기서 “완전”이란 무엇인가?
2) 완전이란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 믿 )고 ( 기다리 )는 것이다. 조건이야 어떻든 관계없이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믿음만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인간의 문제는 언제나 믿음을 떠나서 ( 행위 )를 할 때 발생한다.
(5절)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1) 이름을 짓는 자와 지음을 받은 자의 관계는 ( 종속 )된 관계이다. 부모가 자식의 이름을 짓는 것 역시 부모의 다스림을 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창 2:19)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2)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주시는 것은 단지 좋은 이름을 주시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아브람이 하나님에 대해 종속 ( 관계 )에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도대로 아브라함을 ( 사용 )하실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새 이름은 무엇인가?
(행 11:26) “안디옥에서 비로소 ( 그리스도 )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3)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신자는 당연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벧전 4:16) “만일 ( 그리스도 )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6~8 열왕이 날 것을 언약하심
창세기 제 10 강
17:9~14 언약의 표징 할례
(10절)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 할례의 의미는 생식기를 잘라버리는 것이다. 즉 ( 혈통 )적 출생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약속대로 후손을 주시기 전에 먼저 할례언약을 세우신 이유이다.
2) 즉 아브라함 언약은(= 열국의 아비 언약 ) 아브라함의 혈통적 가문을 번성케 하시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혈통과 ( 상관 )없는 거룩한 가문을( = 민족을 ) 만드시겠다는 작정인 것이다. 이것이 이스마엘은 할례 ( 전 )에 태어났으며, 이삭은 할례 ( 후 )에 태어난 이유이다.
3) 할례란 위생상의 문제이거나 성인 의식과는 무관한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통하여 약속의 자녀가 ( 어떻 )게 나오는가를 계시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하는 것으로 언약의 백성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14절)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1) 하나님의 백성인가 아닌가는 할례에 달려있다.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중대한 문제였고, 예수를 믿게 된 이방인 신자들에게도 할례를 요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 안 ) 되고 할례를 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할례에(= 율법에 ) 철저한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 마귀 )의 자식이라고 선언하심으로써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임을 보이셨다.
2) 할례란 “나는 육신의 조건과는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다. 즉 신자는 ( 마음 )에 할례를 행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 약속 )에 의해 출생한 하늘의 자녀들이다.(= 이스라엘 )
(신 30: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1) 마음의 할례란 ( 하나님 )이 해 주셔야 하는 것이다. 몸의 할례란 ( 사람 )이 할 수 있다. 그러나 몸의 할례로는 하나님을 ( 바르 )게 섬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신자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심으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게 하시는 것이다.
(롬 4:11)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은 율법(= 행위 )으로가 아니라 믿음(= 은혜 )으로 되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 일 )하심으로 된다는 것이다.
15~18 사라가 열국의 어미가 될 것을 언약하심
(16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1) 악인과 선인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 언약 )의 백성에게만 ( 제한 )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고촌성경연구원 창세기 제 10 강
2) 하갈이 낳은 아들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굳이 사라에게 아들을 낳게 하시겠다는 이유는 인간의 ( 혈통 )과는 관계가 없는 ( 약속 )의 아들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낳은 아들은 복과 ( 상관 )이 없다는 말씀이다. 복과 상관이 없다면 아무리 번성해도 그것은 ( 저주 )일 뿐이다.
3)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이란 언약백성의 어떤 실수나 허물도 약속을 방해할 수 없음을 뜻한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 불신앙 )의 증표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불신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하시고 그 아들에게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17절)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1)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항상 웃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웃음에도 상관없이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을 하신다. 우리가 어떤 실수와 허물에 빠진다 해도 우리에게 다가와 말씀하시며 우리를 건지실 것이다. 이분이 언약을 성취하시는 ( 신실 )하신 하나님 ( 여호와 )이시다.
(18절)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1)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약속의 자녀로 생각하고 있다. 아직 아브라함은 ( 전능 )하신 하나님의 의미를 잘 모르고 있다. 아브람은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지만, 그 약속을 이룸이 ( 자기 )의 행위가 동원되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2) 그러면 여기서 아브라함의 심정이 입혀지는가?
- 아브라함이 무슨 뜻인가?
- 부부 김집사와 이집사가 싸웠다. 그리고 다음날 교회에 갔다. 목사가 설교를 한다. 이 부부에게 무엇이라 부르며 설교를 시작하는가?
17:19~22 여호와께서 이삭과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심
(20절) “그가 열 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1) 물론 이스마엘도 아브람의 자손이기에 번성하게 하시지만, 이 정도로는 ( 언약 )자손의 상대가 안 된다는 말씀이다.
23~27 여호와의 명대로 아브라함과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음
18:1~8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사자를 접대함
(2절)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 편에 섰는지라”
1) 3절에서 “내 주여”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을 하나님인 것을 알았다는 해석도 있지만, (히 13:2)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 한 이들이 있었느니라”는 말씀을 보아 아브라함은 세 사람을 단순히 나그네로만 알고 대접한 것으로 본다.
2) “고운 가루 세 스아, 송아지” - 아브라함이 아주 성대한 대접을 한 것으로 보아 하나님을 알았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주(= 아도나이 )는 종교적인 용어만이 아니라, 남편, 상전, 또는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의미로서도 쓰였다.
3) 그러나 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 찾아 )오신다는 것이다. 즉 손님 접대를 잘 하라는 교훈이 아니라, 손님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 바른 ) 관계에 있는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시는 것이다.
창세기 제 10 강
3)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언약백성의 정신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면, 이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서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마 25:40)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1)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세워서 ( 신자 )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2) 이를 창세기에서는 어떤 관계로 표현했으며 실패한 이는 누구인가?
- 그리고 누가 이 정신으로 살아야 했는가?
- 이 정신이 담겨 있는 절기의 이름은 무엇인가?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경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9~15 여호와께서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을 언약하심
(9절)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1) 세 천사는 접대를 잘 받고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 현장에 없는 사라를 찾는다.(= 눅 14:15-24, 마 22:9-14 )
(눅 14:24)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2)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만 있다고 해서 잔치가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잔치에 같이 기뻐하는 심정으로 참석해야 될 자가 따로 있고 참석해서는 안 될 자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3) 누가복음과 마찬가지로 잔치에 참석하도록 초청되었다고 해서 제대로 된 손님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즉 예수께서는 “청함”과 “택함”의 차이를 분명히 하시는 것이다. 단순히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으로 천국 잔치가 가능하다고 본다면 이 사람은 청함을 받은 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가 가슴에 담긴 자가 참석하는 것이라면, 그 사람은 “택함”을 받은 자이다.
4) 그러므로 세 천사들은 아브라함에게 후한 대접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다. 그 계획이 “사라가 어디 있느냐”의 질문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창 3:9) “네가 어디 있느냐”
-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5) 세 천사의 계획은 아브라함의 접대나 사라의 음식 솜씨에 따라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일방적으로 언약하신 그 내용으로 하나님과 자녀와의 진정한 만남을 성취하신다. 즉 이삭의 잉태는 결코 아브라함 개인의 소원 성취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의 앞선 뜻이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6)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천국은 인간의 숫자가 채워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루시는 뜻(= 잔치 )에 의해서 채워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전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할 마음도 안 되고 도리어 하나님에 대해서 적대적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우리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에 의해서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즉 예복 입지 않은 자를 결박해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던지는 영원한 형벌을 충분히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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