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2강-아비멜렉과 아브라함 / 창21장

아비멜렉과 아브라함 - 창세기 12강
 

 창세기 제 12 강

 

(7절)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 기도 )하리니”

1) 아비멜렉이 사라를 돌려보낸다고 해도 그가 ( 죄 )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의 관계를 통해서 인간의 ( 죄 )는 반드시 누군가의 역할을 통해서 ( 해결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2) 선지자는 ( 하나님 ) 편에서 계시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이런 면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도구로서 계시를 드러내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 선지자 )라고 불리는 것이다. 즉 아비멜렉의 죄는 선지자의 기도를 통해서만 용서되는 것이다.

3) 사라에 대한 행위만을 본다면 아비멜렉에게는 굳이 아브라함의 ( 기도 )가 필요 없다. 사라를 돌려보내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잘못된 행위를 내가 반성하면 죄가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 죄 )를 해결하기 위해 누군가가 ( 존재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부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 5: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1) 유대인들은 행위에서 자신의 의로움만을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들을 위해 ( 기도 )해 줄 존재가 필요치 않았다. 기도가 필요하면 자신들이 ( 직접 ) 하나님께 기도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2) 그러나 그 누구도 하나님께 기도하여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의로운 존재는 인류의 역사 이래로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죄 가운데 있는 우리는 예수님의 ( 기도 )로 살아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의 ( 기도 )가 필요한 이유이다.

(히 7:25) “그러므로 자기를 ( 힘 )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 온전 )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 간구 )하심이니라”

3) 구원이란 홍해를 건넌 것만이 아니라 ( 애굽 )에서부터 ( 가나안 )까지 가는 전 과정을 말한다. 그러므로 신자는 십자가 이후에도 “예수님의 기도”와 “성령의 지도와 인도”를 받으며 구원을 ( 이루 )어 가는 것이다.

 

(11절)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1) 아브라함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 통치 ) 아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다. 오늘날 우리의 생각은 어떠한가?

2)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아비멜렉을 붙이신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아브라함처럼 “저들은 하나님을 모르니까 복음은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 다른 ) 방법을 찾아보자”라는 생각을 한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 통치 )를 잊고 있는 결과이다.

 

(14절)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노비를 취하여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 아내 사라도 돌려보내고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너 보기에 좋은대로 거하라 하고”

1)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재물을 얻는다. 인과응보, 권선징악 등의 사상에 의해서 세상은 재물이 주어진 것을 ( 복 )(= 상급 )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재물이 많은 모든 사람들은 착하고 양심적인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현실은 ) 그렇지 못하다. 따라서 “재물 = 복”이라는 공식은 결코 성립할 수 없다.

2) 그러므로 본문은 “죄를 지었는데 왜 ( 복 )을 받는가?”라는 인과율적 공식으로 아브라함을 보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벌을 내리셨다면 “내가 거짓말을 해서 벌을 받았다”라는 단편적인 깨달음은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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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러나 두려워했던 아비멜렉이 오히려 하나님으로 인해서 아브라함을 존중하고 재물까지 준 일에서 아브라함은 이방인을 ( 통치 )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바른 지식을 위해서 아브라함에게 많은 ( 재물 )을 맡게 하시는 것이다.

4)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재물은 상이나 복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 ( 없 )음을 책망하는 ( 도구 )가 된다. 재물이 곧 하나님의 책망의 도구였다는 이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성경의 비밀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을 ( 바르 )게 아는 지식이다.

(롬 10: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17절)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1)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기도의 ( 능력 )을 말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처럼 태가 열리는 기도를 하라고 한다. 정말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기도해서 사라의 태도 열리게 해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기도란 기도하는 사람의 특별한 능력이나 열심과는 전혀 관계가 ( 없 )다. 기도란 오직 ( 언약 )과만 관계가 있는 것이다.

(마 6:10)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2) 아브라함은 자신이 기도함으로써 아비멜렉의 집의 태가 열리는 것을 경험했다. 그러나 여전히 사라의 태는 닫힌 상태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브라함은 자기의 뜻이나 노력과는 무관한, 오직 하나님의 ( 언약 )에 의해 태어난 이삭을 ( 알 )게 되었고, 이 믿음으로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에도 순종하게 된 것이다. 이삭이 ( 약속 )의 자녀라는, 즉 하나님을 아는 ( 바른 ) 지식이 있었기에 독자 이삭을 하나님이 요구하실 때 바칠 수 있게 된 것이다.

 

<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을 통해서 본 윤리와 도덕 >

(시 135:3)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을 찬양하라”

1) 그런데 이런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은 일을 하신다.

(시 135:7) “저가 애굽의 처음 난 자를 사람부터 짐승까지 치셨도다”

(시 136:10)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신 그 ( 약속 ) 하나 때문에 행하시는 것이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사 40:17)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

3)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계시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 선택 )하시고 그에게 ( 언약 )을 주시고 그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을 세우심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잘 되라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계시하는 ( 도구 )로서 세우신 것이다.

 

(수 5:14)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1)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는 하나님편”이라고 말하자 여호수아가 엎드린다. 그리고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라고 묻는다. 그 대답은 무엇인가?

(수 5:15)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창창세기 제12강

 

2) 즉 여호수아의 계획과 작전을 백지화 시키고 너는 종이니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다. 이는 모든 인간들의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환상을 산산조각 내는 말씀이다. 즉 이스라엘을 이기게 하는 것도 지게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 자신 )을 위하여 이루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3) 이 사실을 알게 하심으로 신자가 살아도 죽어도 주의 ( 영광 )(= 이름 )을 위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시는 것이다. 이처럼 구원의 궁극적 목표는 주님의 자기 ( 영광 )(= 이름 )을 위하심이다. 이것이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거슬리는 말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데 어찌 다른 존재에게 영광을 돌리겠는가? 그러나 이미 믿음의 선진들은 이를 영적으로 깨닫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했다.

(시 115: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낮아지심과 성실하심에 돌리소서”

4) 그러나 세상의 평가는 아브라함은 잘못하였고 아비멜렉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부터 하나님께서는 ( 영적 )전쟁을 시작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 전쟁의 의미는 “누가 ( 정당 )한가”의 싸움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의 ( 약속 ) 안에 있는가”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안에 있지 않은 모든 것을 빈 것같이 여기시기 때문이다.(= 사 40:17)

5) 그러므로 언약 앞에서는 윤리와 도덕의 기준으로 “나는 착하니 너보다는 낫다”라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너는 예수 믿고도 그 정도냐 나는 예수 믿지 않아도 너보다 열배 백배 낫다”는 사람들이 ( 지옥 )으로 간다. 과연 세상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보다 훨씬 세상에서 존경받고 윤리 도덕적으로 사는 사람이 많다.

3) 그런데 이들에게 “당신들은 ( 지옥 )가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 천국 )갑니다” 라고 말하면, 이 사람들이 대부분 하는 말은 “나는 그런 예수 안 믿겠다”라는 것이다. 이 생각이 ( 은혜 )를 모르고 ( 행위 )에만 집착하는 세상의 한계이다.

 

2. 이삭의 언약 계승 (21:~26:)

1) 언약 계승의 준비 (21:~23:)

(1) 이삭의 출생과 보호 (21:)

21:1~7 이삭의 출생

1) 성경에 기록된(= < 계시 >된 ) 사건들 인간 사회에서 늘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 계획 )(= 프로그램 )에 따라서 발생되는 일들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이런 일들을 모방하거나 흉내 낸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다.

2) 우리가 말씀을 읽는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들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꼭 일으키셔야만 되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이다.

3)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출생 ( 과정 )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인가를 세상에 계시하신다. 즉 모든 것은 하나님이 ( 계획 )하시고 하나님의 ( 전능 )하심으로 하나님의

( 뜻 )대로 이루시는 것임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4) 이삭이 비록 아브라함과 사라의 정상적인 생식 능력을 ( 초월 )하여 태어나기는 했지만 그도 역시 인간의 생식 기능을 따라 태어났다. 결국 이삭은 장차 하나님께서 사단의 머리를 부수고 자기 백성을 구원할 여자의 후손과 연관된 언약의 ( 예표 )로 태어난 것이다. 즉 여자의 후손이 어떠한 계보를 통해서 어떤 분으로 세상에 오실 것인가를 유기적이고 점진적인 방법으로 보여주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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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여호와께서 그 ( 말씀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1) ( 말씀 )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가장 최선의 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 자기 ) 생각을 버리고 ( 하나님 )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 믿음 )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인간은 절대로 개입할 수도 없고, 계획(= 언약 )된 것 이외에 다른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깊이 알게 된다.

 

(4절)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일만에 그가 하나님의 명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1) 이삭의 출생은 하나님의 ( 언약 )의 산물로서 인간의 생식기능과 상관없이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 그러나 세상은 출생을 인간에 의해서 인간이 태어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인간이 세상의 ( 중심 )(= 인본주의 )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말 자체가 허무맹랑하게만 들려진다. 이들에게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 약속 )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8~9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이 사라가 낳은 이삭을 희롱함

(9절)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1) 이스마엘과 이삭은 서로 화합할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이스마엘은

( 인간 )의 능력이며 이삭은 ( 하나님 )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2) 즉 약속은 인간의 능력과 의지를 배제하는데, 인간은 인간의 능력과 의지로 하나님께 나가려고 하니 충돌만 일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 갈 4:21~29 )

 

10~16 아브라함이 하갈과 그의 소생 이스마엘을 추방함

(11절)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위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

(12절)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1) 근심은 되지만 ( 약속 )의 자녀가 출생한 이상 이제 비 언약자는 같은 길에 서 있어야 할 이유가 더 이상은 없게 된다. 인간적인 혈연의 감정은 있지만, 하나님의 대답 역시 추방될 자는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 10:37-38)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2) 이스마엘과 하갈의 추방은 아브라함에게서 끊어져 나가야 할 것이 끊어져 나가는 결과를 보여준다. 신자에게도 구원의 기쁨 앞에서 추방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 또한 당연히 추방되어야 할 것이다. 즉 이것이 마음의 ( 할례 )이다.

3) 마음에 근심이 될 정도로 갈등이 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으시면 끊는 것이 곧 ( 신앙 )이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내어 쫓는 일은 바로 이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신자가 하나님을 ( 믿 )을 때, ( 약속 )으로 살아가고자 할 때 분명 아프지만 끊어버려야 할 것이 있다는 말씀이다. 그것은 ( 육체 )의 소욕이다.

 

(13절)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1) 하갈에게 주시는 언약의 의미는 아브라함과의 관계에서 보아야 한다. 즉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즉 아브라함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하갈과 이스마엘의 운명은 이미 하나님의 ( 간섭 ) 하에 놓여 있다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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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0:16)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2)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언약의 의미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항상 아브라함의 ( 육체 )적 생각의 산물이자 인간 ( 지혜 )의 산물인 비 약속의 결과를 늘 배경으로 계획하시는 것이다.

3) 즉 약속을 약속답게 드러내시기 위해서 비 약속이 어떤 속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대조하여 부각시키시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육적이고 세상적인 관점의 ( 열매 )인 하갈과 이스마엘이 추방은 되었지만 계속 유지될 ( 필요 )가 있었던 것이다.

4) 즉 22장에서 언약자손인 아브라함은 인간의 ( 육 )적인 한계를 벗어나고 있는 반면에 비 언약자손인 하갈은 모성애라는 ( 육 )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7~21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약속을 주시고 위로해 주심

(18절)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1) 이스마엘은 약속과 상관없는 ( 육신 )의 자녀이다. 이런 이스마엘을 살리시고 번성케 하시는 것은 이스마엘에게 복을 주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마엘을 통해서 무엇이 하나님의 ( 약속 )이며 ( 복 )인가를 확실하게 드러내시기 위한 것이다.

2) 이스마엘을 세워서 이삭으로 계승되는 하나님의 약속의 ( 본질 )을 드러내시겠다는 것이다. 즉 ( 육신 )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존재함으로써 ( 믿음 )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나타내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 ( 악 )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창 16: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3) 그러므로 신자는 악이 번창하는 모습을 보더라도 실망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악의 번창 속에서도 ( 믿음 )으로 흔들림 없이 사는 모습을 통해서 ( 약속 )의 자녀가 무엇으로 사는가를 증거하게 된다.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 정죄 )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22~34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맹세

1)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과는 전혀 다른 생소한 일들이 벌어진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보통 사람하고 다르기 때문이다.

(창 12:3) “너를 ( 축복 )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 저주 )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2) 아브라함의 이러한 위치는 이미 ( 확정 )된 것이다. 그래서 수정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 예상 )하지도 못한 일을 당할 준비를 해야 하는 모양이 되는 것으로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이런 신분 때문에 세상은 이제부터 새로운 ( 전쟁 )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3) 그리고 성경은 이 전쟁의 모습을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게 되는 모습으로 시작하면서, 전쟁의 성격이 어떠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이 전쟁은 어떤 전쟁을 말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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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절)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 함께 ) 계시도다”

1) 아비멜렉이 이렇게 맹세를 해야 하는 이유는 자신들과 후손들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눈치챘다. 아브라함을 간섭하며 움직이시는 그 여호와라는 신이 계속해서 자기 땅에 있게 된다면 후손들에게 큰 피해가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래서 먼저 화친을 제의하는 것이다.

2) 이 사건에서 보듯이 신자는 결코 ( 자신 )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없다. 하나님에게는 신자를 향한 ( 뜻 )이 있기 때문이다. 그 뜻은 신자뿐만 아니라 ( 불 )신자도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위에 있는 불신자들이 먼저 알아서 신자를 신자처럼 대우하는 경우가 일어나게 되기도 한다.

 

(욘 1:8)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게 속하였느냐”

1) 요나 선지자의 경우처럼 난데없이 불신자 쪽에서 먼저 그 사람이 신자임을 알아보고 자신의 신앙에 ( 충실 )할 것을 당부하는 경우가 생겨날 수도 있다.

(수 9:3) “기브온 거민들이 여호수아의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

2) 마찬가지로 기브온 거민들도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맹세함으로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신앙에 ( 충실 )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25절)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1) 그런데 아브라함은 맹세하기 이전에 약탈(= < 범죄 > )사건을 언급한다. 이는 아비멜렉이 제시한 맹세의 취지를 거부하고 아브라함 자신이 원하는 맹세로 진행시키기 위함이다. 즉 단순히 신자와 불신자 간의 협력이나 동등함 혹은 바른 선택 등을 인정하기 위함이 아니다. (= 오늘날 신자와 불신자들 간의 협력과 화친을 생각해보라 )

2) 현상적으로는 비 언약인들이 언약의 자손과 화친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전적으로 ( 은혜 ) 받을만한 인물들이 되지 못함을 계시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이방 민족에게는 ( 은혜 )를 입지 못하게 해놓으셨다. 따라서 그들은 여호와께 대들다가 다 망하게 되는 운명으로 나아가야 한다.

 

(30절) “아브라함이 가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1) 결국 아브라함은 은혜를 주는 입장이요 아비멜렉은 은혜를 받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맹세의 우물은 이 지역에서의 아브라함의 우월성 즉 은혜의 주도권자임을 분명히 증거하는 우물이 된다. 즉 하나님의 은혜(= 구원 )란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예표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 브엘세바의 우물은 나중에 이삭의 우물이 되고 야곱의 우물이 된다.

2) 처음에는 사마리아 여인이(= 아비멜렉이 ) 예수께 물(= < 맹세 > )을 주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아브라함은 ) 도리어 구원의 생수를(= < 암양 새끼 일곱 > ) 여인에게 주신다. 이처럼 구원의 맹세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지는 맹세가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 간에 체결된 맹세이다. 우리는 그 혜택을 입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맹세 속에는 인간이 하나님께 대들고 범죄 한 요소가(= 우물을 < 늑탈 >한 일 ) 담겨 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자기가 잘나서(= 아비멜렉 )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