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제14강- 언약 계승의 실현 /

언약계승의 실현 - 창세기 14 강
 

창세기 제 14 강

 

< 막벨라 굴 >

1) 아브라함의 ( 소유 )가 됨으로 막벨라 굴은 약속의 ( 터 )가 되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땅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다. 그 약속을 막벨라 굴로 말미암아 후손들이 계속하여 ( 기억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언약의 땅을 은 400세겔이라는 ( 이익 )의 도구로 생각한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 막벨라 굴 )”보다는 “( 은 400세겔 )”을 취하려고 예수를 믿고 있다.

(엡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 터 )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 모퉁이 ) 돌이 되셨느니라”

2) 막벨라 굴은 언약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즉 언약 안에 들어오는 세상의 것은 반드시 ( 값 )을(= 희생 )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육체로 보여주는 언약 백성의 증거는 ( 할례 )인데, 이 할례는 세상과의 ( 단절 )을 의미하는 것이다.

3) 사라가 장사된 막벨라 굴은 400년 후에 돌아올 거점이 된다. 그러므로 죽음도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는 하나의 ( 과정 )일 뿐이다. 사라의 죽음을 아브라함이 슬퍼하고 애통하였지만 언약 안에서 ( 극복 )이 된다. 즉 무덤을 준비하여 자기도 그곳에 ( 묻 )히고 후손도 그곳에 ( 묻 )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창 49:29-33, 50:25 )

(창 49:29)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 굴 )에 우리 부여조와 함께 장사하라”(= 50:13 )

(창 50: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출 13:19 )

(수 24:32)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백개를 주고 산 땅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 야곱은 막벨라 굴에, 요셉은 자신의 기업 세겜 땅에 묻혔다 )

4)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은 언약을 받은 당사자들이 ( 죽어 )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후손들이 해골을 메고 와서 그 약속의 땅에 ( 묻 )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야곱이 그 땅의 일부를 사는 것은 앞으로 하나님이 이 땅을 약속하신 대로 주실 것을 ( 믿 )고서 준비한 것이다. 이곳에 제일 처음으로 묻힌 사람이 ( 사라 )로서, 이름대로 복을 받은 언약자손의 ( 어미 )가 된 것이다.

(시 116:15) “성도의 ( 죽 )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계 14:13)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 죽 )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아픈 아버지와 어린 아들의 실화 )

 

2) 언약 계승의 실현 (24:~26:)

(1)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 (24:)

24:1~9 아브라함이 종에게 이삭의 아내를 구하라고 당부함

(1절)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고”

1) 여기서 늙었다는 말은 신앙이 ( 진전 )되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신앙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드린 사건으로 ( 확정 )적으로 드러났다. 즉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의 사건을 경험함으로 예수님을 ( 보 )게 된 것이다. ( 믿음 )이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 8:56) “아브라함은 나의 때 ( 볼 ) 것을 즐거워하다가 ( 보 )고 기뻐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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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브라함은 언약의 핵심인 ( 대속 )(= 희생 )의 사건이 여호와 이레로 ( 준비 )된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세계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내리신 언약을

( 중심 )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고 믿게 된 것이다.

(창 12:3) “너를 ( 축복 )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 저주 )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7절)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 씨 )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1)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이삭의 배필을 구하는 생활의 편리함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원칙이 “하나님의 ( 맹세 )”이다. 이 하나님의 맹세를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 신앙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맹세”가 아브라함의 모든 것을 ( 지도 )하고 ( 인도 )한다는 뜻이다.

2) 사람은 죽어도 하나님의 언약은 계속된다. 그 계속되는 방법을 아브라함이 ( 구체 )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믿음의 조상이란 하나님이 ( 택 )하시고 ( 부르 )시고 ( 훈련 )(= 시험 )을 통하여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신 결과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 언약 안에 들어오는 자들도 아브라함과 같은 ( 과정 )(= 경험, 체험 )을 통과하게 하는 것이다.

3)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내를 가나안 사람으로 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고향에서 데리고 오게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 불러 )내신 것처럼, 이제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 자격 )으로 그들을 불러내어 하나님의 언약에 ( 참여 )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같은 과정을 통과하게 하여 믿음이 ( 무엇 )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히 6:13-16)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 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1) 하나님의 약속을 지킬 사람이 ( 없 )기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맹세하시고 ( 일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맹세를 이루시는 모습이 본문에서는 아브라함이 ( 리브가 )를 구하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2) 즉 아브라함은 자신의 ( 일생 )을 여호와 하나님이 당신의 맹세의 ( 능력 )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맹세의 능력대로 자신의 ( 씨 )로 인해 후손에게 ( 복 )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아무나 며느리를 삼을 수 없었던 것이다.

3) 그러면 며느리의 자격은 무엇인가? 여기서 아브라함은 약속의 씨의 출발을 자기 자신이 아닌 “( 사라 )에게서부터”라고 보는 것이다. 사라의 ( 죽 )은 태에서 약속된 ( 산 ) 씨인 이삭이 탄생했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맹세의 씨가 되는 후손도 ( 사라 )와 같은 여자를 통해서 주어진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 맹세 )로 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아브라함이 자기 마음대로 생각해낸 것이 아님을 다음 구절이 보여주고 있다.

 

(7절) “그가 그 사자를 네 ( 앞 )서 보내실지라”

1)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일이니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임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며느리를 아브라함의 고향에서 택할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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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평생을 통하여 만들어 내신 믿음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에서 하나님을 ( 배우 )고 만났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 체험 )이다.

3) 그래도 씨란 이삭의 씨를 의미하는 것이니 이삭이 중요하지 여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는 ( 사라 )의 경우에서 이미 계시하셨다. 사라와 하갈의 사건을 통해서, 약속의 씨란 ( 사라 )와 같은 여자를 통하여 태어난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절실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8절) “만일 여자가 너를 좇아오고자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

1)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 떠난 ) 경험에서 혈연과 지연과 육정의 땅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땅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여자가 종을 좇아 혈연과 지연과 육정의 그 땅에서 ( 나오는 )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2) 며느리 될 여자가 종을 좇아 그 땅에서 나온다는 것은 다른 ( 신 )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자는 이와 같은 존재이다. 다른 신을 섬기는 땅에서 ( 벗어 )나서 하나님만 섬기는 새로운 땅에 ( 들어 )와 사는 것이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 수 24:2-3 )

 

(수 24:2-3)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 다른 )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 이끌어 )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 두루 ) 행하게 하고 그 ( 씨 )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

1) 여기서 “다른 신들”이란 표현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 새롭 )게 등장한 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하나님이 등장해서 ( 일 )을 시작했고 그래서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약속된 땅에 들어왔다. 이를 생생하게 알게 된 여호수아는 다음과 같이 외치게 되는 것이다.

(수 24: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 강 ) 저편과 ( 애굽 )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2) 이 세상을 신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칠 수 있는 집단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 새롭 )게 만들어진 집단이며, 세상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 낯 )선 집단일 뿐이다. 즉 석가모니나 공자나 마호메트 등이 ( 아무 ) 것도 아닌 존재요 사단의 ( 하수 )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이 지구상에 ( 예수 )라는 분이 새롭게 등장될 때만 가능한 일이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3) 아브라함은 전에 자신이 살았던 그 땅과 지금 “하나님의 맹세”에 의해 들어와 살게 된 이 약속의 땅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여호와의 맹세에 의해서 ( 인도 )받는 여자만이 약속의 씨를 잉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맹세”의 능력이 작용함으로 사라가 ( 죽 )은 태에서 ( 산 ) 생명을 잉태했고, 나중에 그 아이가 ( 죽 )을 자리에서 다시 ( 살아 )났음을 아브라함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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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우리가 사건과 환경 속에서 걱정하고 의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 일 )(= 사역 )을 어떻게 하시는지를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맹세한대로만(= < 언약 > 안에서만 ) 일하신다. 아브라함은 이 점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던 것이다.

5) 그러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확실하게 알았는가? 그 씨는 ( 예수 )라는 것을 확실하게 안 것이다. 그래서 신자는 모든 복이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짐이 ( 확정 )되었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 복음 >의 확정 )

 

< 며느리를 구하는 과정에서 보는 아브라함의 삶의 원칙 >

1)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 부르심 )이 있음으로 가능한 것이다. 즉 아브라함처럼 바울처럼 ( 약속 )에 의해서 하늘에서 ( 음성 )이 들려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다.

2) 아브라함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의해 ( 다스림 )을 받고 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무엇이고, 맹세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 기준 )으로 하여 오직 거기에 맞춰 움직이게 된 것이다. 생각과 판단까지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3) 이러한 삶에서는 ( 내 )가 원하고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불안해하는 것이 없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약속하셨으니 하나님의 뜻대로 ( 일 )하실 것임을 믿기에 불안과 낙심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4) 그래서 아브라함은 종을 보내면서 “하나님 좋은 여자를 만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지라”는 말을 하게 된다. 즉 종은 ( 가기 )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일은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이루실 것이니 너는 가서 하나님이 ( 주신 ) 여인을 ( 데려 )오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다.

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 약속 )하셨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신다. 지금은 내가 넘어지고 엎어지고 코가 깨지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하나님 나라에 있게 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 흔적 )일 뿐이다.

 

10~49 아브라함의 종

< 종의 자세 >

(12절) “그가 가로되 우리 ( 주인 )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사 나의 ( 주인 )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1) 아브라함의 종은 그 ( 이름 )조차 등장하지 않지만 오직 아브라함을 위해 일하고 있다. 즉 종은 ( 자신 )의 이름이 아니라 ( 주인 )의 이름을 위해서 일하는 존재이다. 마찬가지로 신자 또한 그리스도의 ( 종 )이다. 그래서 본문의 종처럼 신자는 주인을 위한 기도를 하게 된다.

(마 6: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이름 )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27절)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인자와 성실을 끊이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니라”

1) 종이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리브가를 만난 일은 하나님이 자신을 ( 돕기 ) 위해 하신 것이다. 예수를 믿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이렇다.

2) 그러나 종은 주인인 아브라함을 향한 여호와의 인자와 성실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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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절)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시되 우양과 은금과 노비와 약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

1) 본문 이하는 아브라함의 부요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삭의 결혼이란 주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여호와의 ( 전쟁 )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삭의 결혼이 왜 전쟁이 되는가? (=창 3:15)

2) 여인의 후손이란 범죄 한 ( 아담 )의 혈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뜻이 아브라함의 ( 할례 )에 담겨 있다. 대적의 문을 얻을 자는 언약의 자손이다. 이 언약의 통로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보여 주시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란, 우리도 이렇게 하면 부자가 되게 해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3) 이 언약을 위해서 여호와께서 ( 앞 )서 일하신다. 이것이 창세기 24장의 핵심이며 성경 전체의 흐름이다. 24:1-27절까지만 말하고 그 다음은 그래서 리브가가 따라 왔다고 하면 되는데, 그 내용을 다시 리브가의 가족에게도 자세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 앞 )서 일하심이 어떤 것인가를 계시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앞서 일하시는 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 여호와의 ( 전쟁 )

 

(출 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 가운데 )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출 23:23) 나의 사자가 네 ( 앞 )서 가서 너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에게로 인도하고 나는 그들을 끊으리니“

1) 이러한 하나님을 40년 동안 믿지 못한 자들이 광야에서 죽는다.

(신 1:30) “너희 ( 앞 )서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2) 하나님이 아들같이 안고서 여기까지 왔는데 너희가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렘 31:32)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 이스라엘은 이렇게 앞서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광야에서 망한 이유이고 또 이스라엘 국가가 망한 이유이다. 그러므로 이제 새 언약은 ( 마음 )에 기록하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렘 31:33)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4)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 앞 )서 일하실 것을 믿었다. 이것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리스도와 연결해야 한다.

 

50~60 아브라함의 종이 라반과 리브가에게 허락을 받음

(50절) “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리브가가 그대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대로 그로 그대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

1)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자를 종보다 ( 앞 )서 보내신 이유이며 결과이다.

 

(60절)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1) 마치 전쟁터에 보내는 것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이 축복은 이삭이 모리아산에서 받은 ( 언약 )과 같은 내용이다. 대적의 성문을 얻는 것이, 아브라함의 씨, 즉 이삭의 씨가 할 내용인데, 이것이 구약에서는 ( 여호와 )의 전쟁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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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호와의 전쟁이 역사 속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전쟁을 수행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전쟁이란 이스라엘 자체의 힘이나 능력과는 ( 무관 )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의 ( 언약 )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 여리고 )성과 ( 아이 )성의 전쟁이다.

 

61~67 리브가가 아브라함의 종을 따라가 이삭의 아내가 됨

(67절)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모친 사라의 장막에 들이고”

1) 사라의 죽은 자리에 리브가를 ( 대신 ) 채워 넣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이 죽어도 그 언약은 영원한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2) 아브라함의 죽음과 후손들 (25:)

25:1~6 아브라함이 죽기 전에 후손에게 유산을 분배하여 줌

(1절) “아브라함이 후처를 취하였으니 그 이름은 그두라라”

1) 언약의 씨가 아닌 자손(= 서자들 )의 기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이스마엘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혈통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에 ( 참여 )되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2)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 집안 )(= 가문 )에 약속을 주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개인에게 약속을 하셨고, 그 약속은 ( 이삭 )에게로 이어졌다. 이처럼 구원은 선택과 약속에 의해서 성취되어진다는 것이 성경의 원리이다.

3) 즉 아브라함의 서자들의 번성을 통해서 언약 자손들과의 ( 구별 )을 반복적으로 하며 ( 강조 )하고 있는 것이다. 육신의 혈통은 아무리 번성한다 할지라도 결국 언약 ( 밖 )에서 머물다가 멸망당할 존재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성경은 ( 반복 )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도 역시 언약 ( 밖 )에 있는 사람일 것이다.

(마 25:32-33)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 분별 )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5절)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 모든 소유를 주었고”

(6절)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물을 주어”

1) 이삭에게는 많은 양을 주고 서자들에게는 조금 주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 상속 )의 개념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 즉 이삭만이 아브라함의 ( 유일 )한 상속자라는 것이다.

2) 택함을 받지 않은 세상 사람들도 ( 하나님 )이 주신 재물을 가지고 살아간다. 물론 그들은 재물이 누구로부터 온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자신의 힘으로 재물을 모은 것이다. 즉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 영화 )롭게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이 언약 ( 밖 )에 있는 멸망의 자식임을 스스로 드러내며 살아가는 것이다.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 영화 )롭게도 아니하며 ( 감사 )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3) 그런데 사람들은 그들의 많은 재물을 보고 ( 부러워 )한다. 왜 저들에게 더 많은 재물을 주시는가 하면서 하나님께 ( 불평 )을 하는 것이다. 이는 신자의 존재를 ( 상속 )의 개념에서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신자에게는 ( 땅 )의 모든 것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 하늘 )의 모든 것이 주어진다. 세상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 서자 )들처럼 다만 재물을 나누어 가지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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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그들로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국으로 가게 하였더라”

1) 서자들은 언약 ( 밖 )에 있기 때문에 약속의 자손인 이삭과 함께 ( 동거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자는 구원의 서정에서 인간적 ( 조건 )은 모두 배제한다. 하나님의 구별은 인간의 조건을 보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 무조건 )적인 선택”에 따른 것이다.

2) 그러므로 택함을 받은 자와 받지 않은 자의 ( 구별 )은, 인간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 행함을 자랑하지 않으며, 다만 예수님의 의를 의지하는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7~26 이스마엘과 이삭의 후예들

(11절)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1) 이삭이 받은 복은 이스마엘이나 서자들이 받은 복이 아니라, 언약을 ( 계승 )하는 복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12절)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이스마엘의 후예는 이러하고”

(19절)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1) 번창하는 이스마엘 자손에 대해서 먼저 말하고,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라는 말로 이삭의 번성하지 못함을 기록하고 있다.

2) 세상의 관점에서 누가 더 복을 받은 것인가? - 그러나 하늘의 복은 절대로 세상의 것을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 약속 )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복의 충만함에 거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의 복이 부럽다면 신자는 “( 종말 )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 눈 )”이 열리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3) 그러면 약속을 성취하는 하나님의 계획에 부름 받은 여자들이(= 사라와 리브가 ) 아이를 낳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은 “언약과 성취”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창 24:60)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1)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리브가를 아이를 못 낳는 상태로 만들어 놓으셨다. 이처럼 불임 여성들을 하나님의 약속에 동원시키는 이유는, 약속을 성취하는 일에 있어서 인간의 ( 힘 )(= 도움 )은 전혀 개입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즉 하나님의 일을 ( 인간 )이 도울 수 없다는 것이다.

2)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 세상 )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 아들 )을 통하여서만 영광을 받으신다. 그 분만이 약속의 씨로 오신 ( 여자 )의 후손이시다.

 

(21절)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1) 본문은 (남편이)기도하면 들어주신다는(= 잉태한다는 ) 가르침과는 전혀 ( 상관 )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이삭으로 하여금 기도( 하게 )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란 내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 언약 )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나는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음을 ( 고백 )하는 것이다.

2) 그런데 하나님이 언약을 하셨다면, 기도를 하지 않아도 자녀를 주시면 될텐데 왜 기도를 하게 하시고 자녀를 주시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는 사람의 ( 힘 )으로 낳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삭으로 하여금 기도( 하게 ) 만드심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은 ( 하나님 )이 성취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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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3:12)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23절)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1)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사라에게 자식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마엘이 약속과 상관이 없는 자식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런데 이삭의 경우에는 혼란스러운 일이 발생한다.

2) 야곱이 약속의 자손이었다면 야곱만 태어나게 하면 간단할텐데 왜 둘을 태어나게 하시는가? 그것은 둘을 통해서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 새롭 )게 가르치고자 하심이다. 장차 이삭과 리브가는 누가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갈 자식인가에 대해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 기준 )을 가지고 판단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의 기준을 깨뜨리고 ( 새롭 )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갈 ( 장자 )는 먼저 태어났든 나중에 태어났든 그것이 ( 조건 )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장자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두 아이를 통하여 보이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하여 세상의 기준과 ( 가치 )관을 허물어 버리신다. 현재 합동과 통합이 서로 “장자 교단”, 또는 교파 중에서도 서로 “장자 교파” 혹은 “장자 교회”라는 비성경적인 주장들을 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장자란, 역사와 전통과 교세가 ( 기준 )이다. 이러한 세상의 기준이 ( 잘못 )된 것임을 하나님께서는 두 아이를 통해서 보이시는 것이다.

 

(23절)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1)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언약 )에는 ( 관심 )이 없다. 그저 자기들의 취향(= 유익 )대로 사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가를 ( 야곱 )의 생애를 통해서 더 철저하게 보여주시려는 것이다.

2)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생애는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보여주는

( 도구 )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27절)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 좋아 )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 사랑 )하였더라”

1)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 놓고서도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에서는 모두 자기 ( 유익 )을 따라서 행동하고 있다. 이삭은 하나님의 언약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더 좋아하는 에서를 축복을 하겠다는 것이다. 리브가 역시 언약을 확신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취향대로 야곱을 더 좋아하는 것이다.

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큰 자가 어린 자를 ( 섬긴다 )는 비밀을 가르쳐 주셨다. 즉 섬기는 자가 ( 장자 )가 된다는 것이다. 이 정신이 바로 하나님의 모습이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최종적 약속의 자녀인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4)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고 사람들은 자기 방법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미련하고 탐욕적인 모습이 27장부터 32장까지 길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33장에 가서야 비로소 야곱은 에서를 “( 주 )”(= 33:5 ) 라고 부르게 된다. 비로소 야곱이 진정한 ( 장자 )권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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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4 장자의 명분

(28절)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1) 이삭과 리브가 부부는 두 아들을 키운다. 물론 둘 중의 하나는 가짜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가짜를 함께 키우게 하시는가? 그것은 이삭 부부가 이제부터 또다시 ( 새롭 )게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알게 하기 위해서다.

2) 하나님께서는 신자에게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사건과 환경을 유발시키신다. 신자가 바르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지만 사건과 환경에서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면 좌절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 복음 )을 아는 자는 좌절할 어떤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복음 자체는 이미 ( 완료 )(= 확정 )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 복음의 완료, 확정 )

3) 신자에게 리브가가 쌍둥이를 임신한 것처럼 예상 밖의 사태가 일어나면 그동안 알았던 복음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고, 탐욕적인 본심으로만 움직이는 ( 자아 )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두 아이가 치열한 싸움을 하는데 그 싸움이 복음을 빙자한 ( 탐욕 )의 싸움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을 흔히 환란이요 고난이라고 말한다.

4) 그러나 사실 환란이란,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하는데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가지면 가진대로, 건강하면 건강한대로 염려가 있고 환란이 따라 오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는 하나님에 의해서 ( 환란 ) 속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5)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평소 우리의 선입견이나 생각들이 순수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축복이든 항상 (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버릇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6) 따라서 예수님과 ( 동행 )하고 있는 신자를 예수께서는 그냥 놓아두지를 않으신다. 신자의 예상을(= 기대를 ) 빗나가게 하는 일들을 일으켜서 신자로 하여금 예수님의 가치와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신다. 이쯤 되면 예수님에 대해서 알만큼 안다고 자부하다가, 새로운 사태를 만나게 됨으로, 자신이 마음속으로부터 예수님을 얼마나 미워하고 원망해 왔는가가 드러나게 된다.

7) 그리고 이런 더러운 나를 ( 대신 )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그 희생을 생각하게 하시고, 예수님의 고귀함과 가치를 더 깊게 깨닫게 하신다. 이렇게 되면 무엇이 복이고 무엇이 가치인지를 알게 된다. 교회 부흥을 외치고, 건강을 부르짖고, 행복한 가정 꾸미기에 예수님을 거론하는 일들이 ( 복음 )을 모르는데서 비롯된 ( 무지 )의 열매임을 절감하게 된다.

 

(32절)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4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1) 만일 이삭이 재산을 장자에게 물려주려는 실제적 상황이었다면 에서가 이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또한 에서는 장자의 명분이 판다고 해서 팔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그냥 장난치듯 했을 수도 있다.

2) 그러나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팔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갈 장자가 에서에서 야곱으로 뒤바뀐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 처음 )부터 에서는 약속과는 상관이 없는 자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장자의 명분을 판 것이 장자가 되지 못한 것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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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야곱 또한 장자권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기에 장자가 된 것이 아니다. 야곱의 장자권에 대한 집착은 ( 탐욕 )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장자권을 팔라고 한 것이나 배고프다고 장자 명분을 팔아버린 행동은 인간의 ( 탐욕 )과 잘못된 관심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히 12: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4) 이제 야곱은 스스로 장자의 복을 이루기 위하여 잠도 안자고 수고하고 애쓴다. 그리고 말년에 가서야 장자란 이 땅의 서열이나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장자를 만들어 내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증거가 요셉의 두 아들 중에서 장자권을 에브라임에게 위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5) 이것이 하나님의 “( 장자 ) 만들기”이다. 이 섭리는 야곱 자신보다는 요셉을 통하여 더 분명히 계시된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예언의 구체적인 실현이 요셉에게서 이루어지게 된다.

6) 요셉은 어느 날 하나님의 ( 계시 )를(= 꿈 ) 받는다. 그런데 요셉의 꿈을 가지고 사람들은 ( 비전 )을 가지라고 설교한다. 그러나 요셉의 꿈은 인생의 포부나 야망과는 전혀 ( 상관 )이 없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야무진 꿈을 가지고 있다. 모두가 주인이 되고 싶고 왕이 되고 싶고 신이 되고 싶은데 단지 현실이 그렇지 못하니 눌려 살 뿐이다. 이 세상이 그런대로 질서 있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람들이 마지못해서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낮은 자리를 좋아해서 그곳에 있겠는가? 이렇게 상식적임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기사를 꿈을 크게 가지라는 ( 세속 )적인 욕망으로 설교하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평가할 수도 없다.

7) 그러면 요셉을 통하여 성경은 무엇을 계시하고 있는가? 요셉도 그런 꿈을 꾸고 나니 ( 자랑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자랑은 결국 자신을 종이 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팔려간 요셉이 “( 주 )”가 되어야 하는 것이 언약의 목적이다. 즉 누구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는가를 ( 주 )의 역할을 맡은 자가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8)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주의 역할을 할 자가 세상에서 ( 버림 )을 받고 ( 배척 )을 받는 것이다. 세상의 주란 버림받는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주는 버림을 받는다. 즉 세상에서 버림받는 것을 통하여 세상의 주의 개념이 얼마나

( 잘못 )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버려짐 속에서도, 인간의 배척과 방해 속에서도, 주님께서 한 사람을 주로 지목하여 세우셨다면 그가 주로 서게 되는 것이다.

9) 그러므로 요셉이 처음 팔려간 집에서 요셉이 ( 주 )가 되는 것이다. 유혹과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지만 감옥에서도 역시 ( 주 )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총리가 되어서도

( 주 )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10) 그러므로 요셉은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예언의 그 주가 됨을 보이기 위하여 먼저 애굽으로 파송된 것이다. 야곱의 잃어버린 아들, ( 버림 ) 받았던 자가 버린 자를 구하는 ( 주 )가 되는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이다.

 

< 장자권 >

(출 13: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1) 너희에게는 어린 양의 희생의 원칙이 묻어있는 하나님의 장자가 있는가를 물으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장자란 곧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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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9:10-13)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 야곱의 장자됨은 이미 그들 형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되어 버린 사항이다. 하늘의 장자라는 것은 지상에서의 착함과 선행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취소될 문제도 아니다.

2) 그런데 이런 예정된 일에 대해서 반기를 드는 세력들이 등장한다. 즉 하나님의 예정된 뜻을 거부하고 싶은 자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 자가 바로 에서다. 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장자권 자체에 부족한 이해를 갖고 있었다. 즉 “팥죽 한 그릇에 바뀌는 그런 장자권은 아닐 것이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축복이 저주와 병행한다는 것을 무시한 것이다.

 

(창 27:38)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1) 에서는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얻어내기 위해 최후의 항변을 한다. 그러나 축복 곁에는 저주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에게는 저주만 임할 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물론 예정되지 않는 자는 이런 하늘의 규칙을 비난하고 경멸할 뿐이다. 이것이 곧 에서의 본색이다.

 

(대상 5:1-2)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1) 그런데 요셉에게서 왕이 나오면 문제가 없겠는데 왕은 유다지파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요셉의 장자의 명분은 ( 영원 )한 것이 아니라 다른 ( 주권 )자가(= 주가 ) 오면 자리를 비켜주어야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출 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장자를 죽이리라”

2) 이런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는 야곱을 장자로 만드시고 그것을 요셉을 통하여 보이시고 이제는 한 ( 국가 )를 장자로 만들어 내신다. 물론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루어 내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장자를 만들어 내는 일을 위하여 10가지 재앙이 주어지는데 그 마지막은 ( 장자 )의 죽음이다.

3) 장자의 죽음을 면하려면 어린양의 ( 피 )를 발라야만 한다. ( 히브리 )인이라도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으면 장자는 죽는 것이고 ( 애굽 )인이라도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장자가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10재앙을 통과하는 마지막은 민족적인 혈통이 아니라 어린양의 ( 피 )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 정체 )성이란 어린양의 ( 피 )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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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러므로 ( 유월 )절을 해의 첫 달이 되게 하시고 매년 유월절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을 더욱 구체화하기 위하여 모든 ( 초 )태생의 수컷과 사람의 장자를 하나님께 바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지파가 장자를 ( 대신 )하여 희생의 역할을 하게 된다.

(민 3:12)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5) 이렇게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를 통해서, 아들의 ( 피 )로 이루어진 우리가 주의 백성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 아들 )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희생의 ( 흔적 )을 지닌 ( 장자 )의 모습으로 부름을 받고 있는 것이다.

6) 결국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란 ( 희생 )하는 자를 통하여 장자를 삼으시고 그 장자로 인하여 다른 아들을 불러내시는 것이다. 즉 예수님으로 맏아들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롬 8:29 )

7) 그런데 이스라엘이 제대로 ( 장자 )의 역할을 못했으므로, 완전한 제사를 드릴 완전한 ( 장자 )를 가다리게 하시는 것이 구약이다. 신약시대에는 제사도 아니요, 율법도 아니요, 레위 지파도 아니요, 성전도 아니요 “별다른 한 제사장”이 나오는 것이다.(= 히 7:11-17 )

 

(3) 언약을 계승한 이삭 (26:)

26:1~5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아비의 언약을 계승하게 하심

(전 1:9-10)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1절)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1) 그러나 이삭은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아브라함과 함께 75년을 살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며 살았다. 분명히 아브라함이 애굽과 그랄에서 당한 일을 들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제물이 될 뻔하다가 대신 양을 바친 사건도 잊을 수가 없는 일들이다. 그런데도 이삭은 흉년이 들자 하나님께 ( 기도 )한다거나 ( 묻 )지 않고 살 길을 찾아 애굽으로 내려간다.

 

(2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1)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 갈 때 하나님이 막지 않으셨다. 그런데 이삭은 막으신다.야곱은 오히려 내려가라고 하신다. 아브라함의 내려감은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 더욱 알게 되는 것이고, 야곱은 내려감은 그곳에서 후손들이 400년간 있다가 나오는 언약을 이루기 위함이다.

2) 즉 동일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만, 그 구체적인 ( 적용 )은 다 다른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마다 ( 다르 )게 인도하시는 것이다. 이삭은 하나님이 막으시니 내려갈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거부가 된다. 흉년이 들어서 다른 곳에 살려고 내려가다가 하나님이 막으심으로 흉년든 땅에 살았는데도 오히려 큰 부자가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 구약 )적인 방법이다. 물론 이러한 내용을 오늘날에도 문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