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제15강- 축복과 저주 / 창27장- 28장

축복과 저주 - 창세기 15 강
 

 창세기 제 15 강

 

3) 예수께서는 새 언약 시대의 복이란 무엇인가를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셨다. 즉 구약의 선진들이 복을 받았다는(= < 거부 >가 되었다 ) 표현은,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를 ( 예표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 약속 ) 안에(= 예수 그리스도 < 안 >에 ) 있는 자가 복 있는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4) 신약에서 언약 안에 있는 자의(= < 복 >을 받은 자 ) 결론적인 모습은 의를 위해서 ( 핍박 )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물질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복을, 오늘날에도 예수를 믿어서 세상의 것들을 복으로 받는다고 해석한다면 이는 커다란 오해이다.

(마 5:10-12)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 하나님은 신자를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

(창 6:3)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1) 육체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 신 )이 함께 하지 않은 인간에 대한 평가이다. 육체가 된 인간들은 자기들의 ( 좋아 )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 창 6:2 ) 좋아함의 기준이 아름다움이었고 그것이 선택의 조건이었다. 이것이 육체가 삶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2) 이처럼 육체가 중심이 된 인간은 육체가 사는 길, 즉 육체의 편안함을 추구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본능에서는 하나님을 나의 환경을 ( 좋 )게 만들어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게 되고, ( 좋 )은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이다.

3) 그런데 하나님은 이삭이 거하는 땅에 흉년이 들게 하심으로써 육신에 ( 고난 )을 안겨주신다. 그리고 애굽이 아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신다. 그런데 그 땅에도 흉년이 있다. 결국 이 사건은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전혀 ( 다르다 )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4) 사람들은 하나님은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이고 불신앙이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그가 곧 ( 성령 )이 임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하나님, 곧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를 모른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5) 그런데 세상은 ( 근본 )적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 계시 )하시기 전에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상은 하나님을 잘 아는 척 한다. 왜냐하면 신에 대한 상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 그린 신에 대한 그림은 어떤 종교이든 ( 동일 )한 모습이다. 즉 인간의 삶을 도와주고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신이다.

6) 하나님은 인간의 육신의 삶을 돕기 위해 일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 언약 )을 성취하시기 위해 일하신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은 나를 돕는 분이다. 그것이 좋으신 하나님이며 참된 하나님이다”라는 착각 속에서 끝없이 자신이 살길을 찾아 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 포기 )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신다. 그래서 이삭에게 아브라함의 과거사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창세기 제 15 강

 

(5절)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1)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것을 이루신다.(= 3절 ) 아브라함은 흉년으로 인해 살기 위한 최선의 길을 찾아 나섰고 그 길에서 사래를 누이라고 속이는 일까지 있었지만 결국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에 거하게 된다.

2)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명령을 지켰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이것은 아브라함 스스로 지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 일 )하신 결과였다. 즉 말씀이 ( 지켜 )지는 길로 아브라함을 밀어 넣으신 것이었다.

3)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이삭의 삶의 풍요로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 맹세 )하신 바를 이루시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일을 위해 결국 이삭 역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명령과 법도와 계명을 지키는 길로 하나님이 ( 밀어 ) 넣으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4) 우리는 끊임없이 내가 살 수 있는 최선의 길과 방법을 찾고자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막으시면서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 순종 )할 수밖에 없는 길로 밀어 넣으신다. 이것이 신자가 하나님을 ( 찬양 )해야 할 이유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사역에 의해서 신자는 결국 ( 구원 )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6~11 이삭과 리브가가 아비멜렉에게 보호를 받음

(7절) “그는 나의 누이라”

1)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이삭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택했다. 이삭은 아버지에게 과거의 일에 대한 교훈을 받지 못했던 것일까? 그러면 이삭이 아버지에게 과거의 교훈을 받았다면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까?

2) 살기 위한 최선의 길과 방법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공통된 본성이기 때문에 그 본성 안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행위는 ( 반복 )되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행위는 우리에게서도 계속 ( 반복 )되고 있다.

3) “죄”란 교육과 교훈으로 다스리고 방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죄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있는 순간에는 “그런 죄를 범하지 말아야지”라는 ( 각오 )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각오와 결심을 지키기 위해서, 살 수 있는 최선의 길을 ( 포기 )하고 죽는 길로 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4) 결국 죄라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그 ( 본성 )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기에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인간의 본성 자체가 바뀌어야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본성이 바뀐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인간은 죄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 무능 )하고 연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5) 이런 자신의 본성을 알게 되었을 때, 죄인을 위해 오신 그리스도가 가장 ( 가치 )있고 귀한 존재로 여겨지게 되고 그분만을 의지하는 것이 자신이 ( 사 )는 길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 앞에서 무능한 자신을 ( 발견 )하는 것이다.

6) 물론 신자는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 ( 힘 )을 쓴다. 그러나 결국 여전히 죄 앞에서 무너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신자는 낙심하기보다는 그리스도가 죄인을 위해 오셨다는 말씀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된다. 이런 이유로 신자는 타인의 죄에 대해 비판할 수 없다. 타인의 죄가 나에게서도 반복되고 경험되기 때문이다.

창세기 제 15 강

 

7) 죄는 ( 욕망 )의 산물이다. “나는 살아야 한다. 나는 잘돼야 한다. 나는 남보다 뛰어나야 한다”라는 자신을 향한 욕망이 분수처럼 끊임없이 분출되면서 죄는 쉴 새 없이 계속 흘러나오게 되어 있다. 이런 내가 누구를 비판하고 판단할 수 있는가? 타인의 죄가 곧 ( 나 )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1절)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나 그 아내에게 범하는 자는 죽이라 하였더라”

1)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의 명령을 철저히 지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방법대로 한다. 이것을 볼 때, 결코 타인의 경험이 ( 나 )에게 그대로 적용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증과 계시 ) 이삭은 하나님께 ( 순종 )하여 지시하는 땅으로 가서 살지만 그 땅에서 사는 태도는 자신의 ( 생각 )대로 사는 것이다.

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맹세를 이루시려고 도덕과 정의를 부르짖는 ( 아비멜렉 )이라는 인물을 만나게 하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일을 벌이시는가? 이는 “하나님의 맹세와 인간의 도덕 윤리”를 직접 마주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비멜렉은 이삭의 잘못을 지적한다. 이 상황을 볼 때에 하나님의 정의가 이삭 쪽에서가 아니라 아비멜렉 쪽에서 성취되는 것 같다.(= 은혜와 행위 )

3) 그러나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 맹세의 본질은 인간들의 도덕 윤리와 정의감이 아니라 ( 사랑 )이기 때문이다. 이삭이 지금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 이삭 )을 통해서 구현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4) 즉 아비멜렉은 이삭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보호받고 있는가를 주목해야만 하는 것임을 본문은 보여주고 있다. 이삭의 행동이 아비멜렉의 입장에서 볼 때 옳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삭을 향한 하나님의 보호가 ( 수정 )되거나 ( 취소 )되지 않는다는 진정한

( 사랑 )의 본질을 알아야만 했던 것이다.

5) 인간의 정의감에서는 ( 사랑 )이 나오지 않는다. 물론 이삭의 처세술에서도 사랑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이삭에게 맹세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만 ( 사랑 )이 나오는 것이다. 즉 실수하고 범죄하는 어리석은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 사랑 )의 실체를 드러내시는 것이다.

6) 그런데 이러한 사랑을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정의감과 마주치게 하신다. 그러면 인간들은 자신의 ( 행위 )에 따라 신의 복과 저주가 결정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생각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살아남고자 하는 근원적 본성을 통해서 ( 고침 )을 받아야 하는 것임을 창세기는 증거하고 있다.(= 음주운전과 성도 )

 

12~22 르호봇

(12절)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4절)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17절) “이삭이 그곳을 떠나”

1) 이삭은 자신의 부로 말미암아 오히려 쫓겨나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삭에게 복을 주심으로 무엇을 계시하시는가?

2) 하나님께서 이삭의 소유를 백배나 더하게 하심으로써 나타난 것은 세상의 본질이다.이삭이 거부가 되기 전에는 ( 시기 )의 대상이 아니었다. 즉 세상은 ( 소유 )의 많고 적음을 비교하며 시기하고 경쟁하는 곳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창세기 제 15 강

 

3) 그러므로 세상은 그 본질상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을 원하지 않게 되어 있다. 세상이 원하는 하나님은 자신의 소유를 많아지게 함으로 경쟁에서 승리하게 해주는 신이다.

 

(22절)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1) 이삭은 다툼으로 인해서 여기 저기 옮겨 우물을 파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물로 인해서 자신이 거하는 곳이 참으로 ( 넓다 )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우물을 르호봇이라고 이름 한 것이다.

2) 이삭이 우물을 판 곳마다 물이 나왔다는 것은 ( 하나님 )이 함께 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삭은 이것을 깨닫고 ( 르호봇 )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이다. 즉 진정한 ( 복 )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3) 결국 하나님은 이삭으로 하여금 참된 복이 ( 무엇 )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소득을 백배나 얻게 하시고, 그로 인해 시기를 받고 쫓겨나게 하시고, 우물을 빼앗기게 하시면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이삭과 함께 하셨음을 우물을 파는 곳마다 ( 물 )이 나오게 하심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4) 신자에게 있어서 진정한 복은 신자가 어딜 가든 하나님이 ( 함께 ) 하신다는 것이다. 어딜 가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은총의 세계 ( 안 )에 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는 참으로 넒은 ( 르호봇 )의 세계를 살아가게 된다.

 

23~25 브엘세바에서 이삭이 여호와께 언약을 받고 단을 쌓음

(23절)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1) 이삭은 흉년이 들어서 애굽으로 내려가다가 하나님이 막으시자 그랄 땅에 거함으로 거부가 되었다. 그러나 이삭에게는 하나님께 단을 쌓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기록이 없다. 오히려 그랄 사람과 계속된 다툼 속에서 브엘세바로 밀려난 것이다.

 

(24절)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복을 주어 네 ( 자손 )으로 번성케 하리라”

1) 하나님이 다시 이삭에게 언약을 ( 반복 )하여 주신다. 그러자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25절 )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가?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2) 그러므로 이삭의 복이란 양떼와 소떼가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하여 주시는 것이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사 7:14 )

 

< 복을 알아보는 원수들 >

26~33 이삭이 그랄 왕 아비멜렉과 평화를 위한 조약을 맺음

1) 신자는 이삭에게 내려진 복을 하나님의 뜻과 본질을 보여주는 ( 통로 )라고 보게 된다. 즉 하나님은 이삭에게 복을 주심으로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던 ( 불신 )의 세계를 들추어내는 계기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창세기 제 15 강

 

2)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형편에 맞도록 ( 복 )을 주시는데, 그 내려주신 복으로 인하여 그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하나님의 ( 대적 )(= 원수 )이 나타나게 된다.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인해 이삭은 이제 그 동네 사람들부터 기피 인물이 되어 버렸다. 왜 사람들은 이삭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가? 이는 신약에 와서야 밝혀지게 된다.

 

(마 8: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1) 본문에는 예수님과 관계하는 두 종류의 사람이 등장한다. 귀신들린 사람과 마을 사람들이다. 마귀와 예수님과의 사이에서는 이 세상의 ( 본질 )을 보여주는 관계이지만, 마을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는, 모든 것을 ( 양 )적으로 따지는 이 세상의 ( 겉 )모습을 보여주는 관계가 된다.

2)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귀신이 나갔는가에는 ( 관심 )이 없고, “내 소유를 저 사람 때문에 다 잃어버렸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삭에게도 동일한 요구가 주어진다.

(16절)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

3) 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이삭이 소유한 것의 가치를 모른다. 그래서 이삭이 받은 복으로 인하여 다툼이 유발되고, 그래서 원수가 자기 ( 정체 )를 드러내고 결국에는 그것으로 인해 이삭의 정착지가 크게 ( 넓혀 )짐을 신자는 알 수 있다.

4) 즉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복이 지니고 있는 ( 본질 )적인 요소를 드러내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소유에만 집착하는 사람은 이삭이 깨달았던 ( 르호봇 )의 의미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창 39:23)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1)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복을 주시는데, 옥에 갇히게 하시고(= < 희생 > ) 그 안에서 요셉의 활동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편하도록 조치하시면서 그것을 “( 만사 )형통”이라고 하신다. 그러면 과연 희생이 복인가?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의 본질은 복이 가지고 있는 그 내용의 자리를 ( 확장 )시켜 나가시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요 12:24)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2) 복이 가는 곳마다 ( 다툼 )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원수가 자기 ( 정체 )를 드러내는 과정을 거쳐서 성도는 \"우리가 거할 자리가 참으로 ( 넓다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깨달음이야말로 우리 생각의 폭이 ( 넓어 )지는 것이다.

(28절)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3) 아비멜렉은 자신들에게 없는 것이 이삭에게 있음을 알았다. 그것은 단순히 늘어난 재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 그 자체였다. 복의 이런 ( 질 )(= 내용 )적 요인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 원수 )가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된다.

 

창세기 제 15 강

 

(마 10:34-36)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 집안 식구 )리라”

4) 즉 하나님과 함께 있는 복을 받은 사람은 불신자라는 새로운 원수들을 ( 불러 )내는 계기가 된다. 심지어 자기 식구라도 예외는 없다. 원수는 복을 ( 알아 )보고 그 복을 괴롭힌다. 이것이 기독교인이 이 세상에서 ( 핍박 )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34~35 에서의 아내 헷 족속의 딸들이 부모의 근심이 됨

 

3. 야곱의 언약 계승 (27:~36:)

1) 야곱이 받은 복과 언약 (27:~28:)

(1)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 (27:1~45)

27:1~4 이삭이 나이 많아 죽기 전에 에서에게 축복하려 함

1) 다음 중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은 어떤 것인가 고르시오.

(1) 하나님을 향하여 정성을 다하며 마음을 깨끗이 하고 겸손한 태도로서 열심히 충성하며 복을 달라고 기도한다.

(2) 인간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복을 주고자 하는 자에게만 복을 주신다.

 

(1절)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1) 영적인 눈이란 하나님의 ( 언약 )을 볼 수 있는 눈을 말한다. 이삭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으나 그 언약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 나가려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욕심을 따라 하나님의 언약을 ( 해석 )하고 적용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것이다.

 

(4절)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1) 굳이 별미를 먹어야만 축복을 할 수 있는가?

2) 이삭에게는 ( 축복 )권이 있다. 그러나 축복권이란 하나님을 배제한 채 행사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복은 오직 ( 하나님 )만이 주시기 때문이다. 즉 축복권이란 하나님의 복을 ( 전달 )하는 권한이다. 따라서 이삭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 아 )는 것이다. 하나님이 복 주시고자 한 자가 ( 누구 )인가를 바르게 알 때 복이 제대로 전달되어지는 것이다. 이삭은 이 부분에서 실패했다.

2) 그런데 에서가 복을 받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에서를 불러서 그 자리에서 축복을 하는 것이 옳다. 그렇게 했다면 야곱에게 속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삭은 왜 에서에게 별미를 요구했는가? 그것은 복 받을 자에 대한 인간의 ( 차별 )(= 조건 ) 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삭은 하나님의 복에 대해서 자신의 ( 뜻 )(= 생각 )을 더한다. 그것은 복 받는 자를 ( 외형 )적인 조건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그 조건은 에서가 맏아들인 것이며, 별미를 만들어서 복을 전달할 권한이 있는 자를 ( 기쁘 )게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오늘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3) 그러나 이삭은 에서와 야곱이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구분되어졌음을 알지 못했다. 이것을 알았다면 외형적인 조건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물었을 것이다. 결국 외형적인 모습으로 복 받을 자격을 구분하는 것이 복에 대한 이삭의 ( 오해 )였다.

 창세기 제 15 강

 

4) 그러나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권한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삭과 같이 우리의 뜻을 개입시켜서 복을 이해하려고 한다. 결국 이삭처럼 ( 외형 )적인 조건으로 복 받을 사람과 받지 못할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에서가 별미를 만들어서 이삭을 기쁘게 하는 것이 복 받을 사람의 모습으로 여기는 것처럼 오늘날도 “( 별미 )”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하나님이 기뻐하실 별미를 바치라고 말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복을 받을만한 조건으로 말하는 것이다.

5) 복이란 인간에 의해서 결정되지도 변경되지도 않는다. 오직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자 택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어떤 인간도 택함 받고 복 받을 만한 자격은 없다. 하나님의 ( 무 )조건적인 사랑일 뿐이다. 복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내리는 ( 일방 )적인 것이지 사람이 하나님께 복을 요구하여 받는 것이 아니다.

(민 22:12)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 복 )을 받은 자니라”

 

5~17 리브가가 이삭을 속여 야곱으로 복을 받게 함

(5절) “이삭이 그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1) 리브가는 에서에게 가는 복을 가로챌 수 있는 계략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야곱은 복은커녕 저주를 받을까 두렵다고 말했다.(= 12절 ) 이에 대해서 리브가는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라고 말한다.(= 13절 )

2) 이들 역시 복에 대한 ( 무지 )함을 드러내고 있다. 일단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가는 복을 가로챌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민 22:6)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3) 야곱은 이삭이 복이 아니라 저주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들은 복과 저주에서 ( 하나님 )을 생각하지 않고 ( 이삭 )만을 바라보고 있다. 이삭에게 ( 잘 )하는 것을 복 받을 자격이 있는 것으로 보는 이삭과 에서나, 이삭을 속여서라도 축복을 받으면 복이 자신에게로 올 것임을 믿는 리브라가와 야곱이나 복에 대한 무지함은 동일하다.

4) 이것을 보면 인간은 복에 대해 참으로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외형적인 조건으로 복 받을 사람을 구분하고, 복을 마치 ( 물질 )처럼 취급하여 남의 것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복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 중에 ( 꿈 )에 대한 것이 있다. 흔히 꿈을 사고 파는 것이 그것이다.

4) 그런데 문제는 신자가 은연중에 이러한 세상의 이방종교적인 상식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세상의 사고방식처럼 좋은 꿈을 기대하고, 꿈으로 하나님의 복을 계시 받고 전달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18~29 눈이 어두운 이삭이 속아 작은 아들 야곱에게 축복함

(28절)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1)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는 내용이 물질적인 풍성함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라는 표현은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의 ( 근원 )이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물질을 풍성하게 주시는 것이 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 함께 ) 하시는 것 자체가 풍성함이며 복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창세기 제 15 강

 

(29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1) 야곱의 형제는 에서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다. 결국 형제들의 주가 된다는 것도 가장 높은 자가 된다는 의미이기 보다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 주 )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예고해주는 것이다.

 

30~40 야곱에게 복을 빼앗긴 에서에게 이삭이 축복해줌

(33절)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1) 복에 대한 에서의 무지를 보여준다. 즉 하나님이 ( 택 )한 자에게만 복을 주심을 모르는 모습이다. 에서도 야곱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 이삭 )만 보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목사를 이삭의 위치에 두고 있다. 즉 목사에게 축복권과 저주권이 있다는 극히 비성경적인 무식함에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복과 저주에 있어서 목사는 전혀 개입할 수 없다. 목사에게 잘하는 것이 복을 받는 길이라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 복이 주어진다는 것을 정면으로 ( 반대 )하는 것이다.

 

(37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1)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오자 이삭은 야곱에게 속은 것을 알게 되지만, 야곱에 대한 축복을 취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2) 이삭은 자신이 축복하고자 한 에서를 축복하지 못하고 엉뚱한 야곱을 축복하게 된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축복하고자 한 사람은 ( 에서 )가 아니라 ( 야곱 )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삭은 야곱이 자신을 속인 일에 대해서도 분노하지 않는다. 이것은 야곱의 속임수를 하나님께서도 ( 허용 )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야곱의 속임수를 허용하지 않으셨다면 속임수로 복을 가로채는 행위에 대해 이삭은 ( 용서 )하지 않아야 마땅하다.

3) 그러나 야곱의 속임수를 허용하셨다고 해서 속임수를 ( 정당 )한 것으로 여기거나, 택한 자는 속임수를 쓴다 해도 허용된다는 식으로 ( 오해 )하면 안 된다. 야곱의 행위를 허용하신 것은 야곱의 속임수를 ( 이용 )하여 복에 대한 이삭의 무지함을 깨우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속임수로 이삭의 축복을 가로 챈 야곱은 그로 인해서 집에서 도망을 쳐야 하는 신세가 된다. 이것으로 야곱의 속임수가 정당해서 허용하신 것이 아님이 드러나는 것이다.

 

(40절)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1) 이는 저주에 가까운 말이다. 결국 이삭은 축복하고자 했던 자에게는 저주의 말을 하고, 축복을 할 마음이 없었던 사람에게는 축복을 하게 된다. 즉 축복과 저주가 이삭의 의도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이다.

2) 에서와 야곱 중 ( 한 ) 사람만이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다. ( 복 )은 그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야곱에게 복이 돌아간 이상 에서에게 남은 것은 ( 저주 ) 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삭의 가정사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혈육의 관계로 이해하면 안 된다. 이삭이 사랑했던 에서를 저주하는 행위에 대해 답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즉 이제 이삭은 혈육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 약속 )의 관계에서 에서와 야곱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롬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창세기 제 15 강

 

41~45 리브가가 야곱에게 형 에서의 복수를 피하라고 함

(41절)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1) 형제가 복을 두고 다투게 된 것은 복을 ( 물질 )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이 그토록 복을 원하는 것은 서로 자신이 더 ( 힘 ) 있는 자로 군림하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을 물질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면 결국 탐욕과 경쟁만을 유발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2) 하나님이 야곱에게 언약 (27:46~28:)

27:46~28:5 어머니 리브가가 꾀를 내어 야곱을 외가로 보냄

(28:1절)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1) 많은 교인들이 ( 불 )신자와 결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말씀에도 위배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불신자와 다를 바 없는 교인이 교회 안에 허다한 것을 볼 때에 교인끼리 결혼하는 것을 하나님의 ( 뜻 )과 연계하여 생각할 수는 없다.

2) 현대 교인들은 복에 대해 많은 ( 오해 )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십일조를 안 하는 사람보다는 충실히 한 사람이 더 ( 복 )을 받을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십일조는커녕 교회에 헌금 한 푼 하지 않는 불신자들도 잘 살고 있다. 그러므로 교인과 결혼했다고 해서 특별히 ( 복 )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불신자와 결혼했다고 해서 특별히 ( 저주 )를 받는 것도 없다. 다만 교인과 결혼하지 않음으로서 교회 출석이 자유롭지 못할 경우는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결혼을 했다 해도 복음을 알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그리스도의 ( 증인 )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9절)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1) 이삭이 야곱을 밧단아람으로 보내자 이방인을 아내로 맞이한 에서는 자신의 행위가 ( 복 )에 있어서 걸림돌이 된 것으로 생각했을 수 있다. 결국 이에 대한 해결은 아브라함의 집안에서 아내를 맞이하는 것이다. 즉 ( 신자 )의 집안과 맺어짐으로써 하나님의 복을 얻고자 하는 기대와 동일한 것이다. 복을 얻을 수 있는 ( 행위 )가 되는 것을 찾아서 그 행위를 ( 모방 )함으로 복이 자신을 향하게 하는 것이다.

2) 하지만 에서는 하나님의 ( 약속 )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에게서 쫓겨난 자이다. 하지만 에서에게는 아브라함의 ( 아들 )이라는 것만 보일 뿐이다. 하나님의 약속과는 상관없이 아브라함의 가문 ( 안 )에만 거하면 ( 복 )이 주어질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 행위 )만 좋으면 복을 받는다는 생각과 다를 바가 없다.

 

(12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1) 사람들은 하늘의 복을 말하되 그것은 그저 막연한 기대로 그칠 뿐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하늘의 복이란, 미지의 것, 불확실한 것, 육신에 도움이 안 되는 것 등으로 생각됨으로 교회에서도 사실 ( 인기 )가 없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2) 또한 어떤 사람들은 복에는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이 있기 때문에 하늘의 복만 말해서는 안 되고 땅의 복도 함께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 영육 )간에 잘되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어떤 복을 들고 이 땅에 오셨는가?

 

 창세기 제 15 강

 

3) 야곱은 장자의 복을 ( 땅 )에서 높아지고 성공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야곱은 복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복을 받기 위해 헌금하고 기도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이러한 야곱에게 하나님은 ( 하늘 )과 연결되어 있는 사닥다리를 보여주신다.

4) 생명은 하늘에만 있으므로 땅과 하늘은 ( 단절 )되어 있는 것이다. 하늘과 단절되어 있는 땅이라면 땅 자체가 ( 저주 )의 세계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생명나무를 감추시고 화염검으로 감추신 이유도, 이 땅에는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 방법 )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땅 자체가 저주의 세계라면 땅에서 어떤 ( 일 )(= 행위 )을 한다고 해도 그 일을 통해서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5) 야곱은 이것을 깨닫지 못했다. 다만 땅의 것을 소유하면 그것이 ( 복 )인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야곱에게 사닥다리를 보여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사닥다리가 아니면 야곱의 세계는 ( 저주 )일 뿐임을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즉 야곱은 자신의 노력과 애씀으로 복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주신 사닥다리로 인해서 복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사닥다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6) 신자는 ( 그리스도 )로 인해서 복의 사람이 된다. 이것을 알지 못한 자는 하나님이 내려주신 사닥다리, 즉 ( 그리스도 )를 바라보고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 행위 )를 통로로 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런 행위야말로 저주의 행위이다. 인간은 그 어떤 수단과 방법과 행위를 동원해도 하늘의 복으로 나아갈 수 없다. 복의 사닥다리는 오직 ( 그리스도 )일 뿐이다.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누가 뭐래도 그 사람은 복에 거하는 복된 자이다.

 

(15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이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 이 말씀을 인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어떤 하나님이 그려지겠는가?

2) 하나님 중심에서 생각한다면 이 말씀은 야곱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 일 )의 성취를 위한 하나님의 열심과 인내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3) 야곱은 하나님이 택한 사람으로서, 한 개인의 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 일 )의 성취를 위해 택하신 것이다. 다만 야곱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욕심을 따라 ( 행동 )하고 있을 뿐이다. 즉 하나님은 야곱의 인생을 ( 간섭 )하신다. 인생이 야곱의 욕망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의 성취를 향해 나아가도록 끊임없이 간섭하시면서 야곱을 고쳐 가시고 야곱을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는 인간으로 ( 만들어 ) 가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이며 인내이다.

4) 결국 하나님이 야곱을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떠나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야곱이 자신의 ( 욕망 )을 따라 살아가지 않도록 지키시고 함께 하시고 도우신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일의 성취를 위함이다. 이처럼 하나님 ( 중심 )의 해석은 성경 전체를 이끌어간다.

5)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의 ( 말씀 ) 앞에 섰을 때, 자기 자신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일만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날 위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일을 위한 ( 도구 )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믿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