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제16강 -서원 이란 무었인가? / 창29장- 35장

서원이란 무엇인가 - 창세기 16 강
 

 창세기 제 16 강

 

< 복의 원천 >

1) 야곱은 아브라함과 리브가가 떠나온 복의 장소를 찾아서 떠난다. 우리도 환경이 신앙적이라면 그 자체가 ( 복 )을 줄 것 같은, 혹은 복이 추가적으로 주어질 것 같은 생각을 한다. 그래서 보다 신앙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보고자 노력을 한다. 그러나 야곱이 복의 장소라고 생각하며 행하는 행위는 이 땅에서의 ( 수평 )적인 이동에 불과하다.

2) 그런데 꿈에 하늘에서 사다리가 내려왔다. 즉 축복의 장소란 이 땅에서 정해진 장소가 아닌 것임을 보여준다. 하늘과 땅은 사다리가 아니면 도저히 연결될 수 없는 구별된 영역이다. 즉 복의 원천은 위로부터의 ( 수직 )적인 이동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사다리를 통해서 주어진 복의 영역 이외의 모든 곳은 ( 저주 )의 영역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바벨탑도 영역의 구별성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하늘로 올라가려는 모든 ( 행위 )는 일체 인정하지 않으신다. 그런데 땅에 그대로 있으면 ( 저주 )를 받으니, 이 저주를 피하기 위해서 하늘로 올라가려는 것인데 ( 거부 )를 당한다.(= 이방종교의 행위 ) 이런 진퇴양란 속에 무력하게 빠져 있는 것이 인간 세상의 실정이다.

4) 그런데 하늘에서 사다리가 내려온다. 이때 택자는 이 사다리가 복의 ( 원천 )임을 알게 되고, 자신이 저주가 아닌 ( 복 ) 안에 놓여 있는 사람인 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계시하시는 ( 참 ) 하나님은 나를 위하고 인류를 위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당신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기계시인 성경을 볼 수 있을 때,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하나님의 상(= 신관 )이 부수어 지는 것이다.

5)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받은 사람들을 도구로 사용하시면서 언약을 이루어 가신다. 즉 ( 아브라함 )과 ( 이삭 )과 ( 야곱 )의 하나님이시다. 이들의 후손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되는데 그 성취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이다.

(요 1: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 인자 )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16~22 야곱이 벧엘에서 돌로 단을 쌓고 여호와께 서원 드림

(16절)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절)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1)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 찾아 )오신 사실에 대해 무지하다. 자신이 하나님을 찾아 나아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죄인 된 인간을 ( 찾아 )오시는 것이다.

2) 야곱은 길을 가다가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기도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계신 장소는 따로 ( 정 )해져 있지 않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실만한 곳을 정해 놓으면 사람들은 그곳에 가는 것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만나주시는 은혜와 사랑은 무시될 수밖에 없다.

3) 이런 의미에서 야곱은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시는 분임을 ( 몰랐다 )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 무소부재 )

 

< 체험에 대한 야곱의 반응 >

(18절)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창세기 제 16 강

 

1) 구약의 인물들에게 특별히 ( 신비 )한 체험이 주어지는 것은, 그 체험을 통해서 인간의 ( 본성 )을 드러내시려는 하나님의 일(= 사역 )이다. 율법은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별히 구약의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졌다. 이는 유대인들만 하나님의 사역에

( 선택 )되어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이 역할을 야곱도 동일하게 감당하는 것이다.

2) 그런데 신비 체험을 통해서 야곱은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영구히 하려고 한다. 따라서 나름대로 하나님께 지성을 드리며 ( 서원 )을 한다. 이런 야곱의 반응이 곧 모든 인간성의 근본을 드러내는 것이다.

3) 야곱은 자신이 받은 체험을 ( 객관 )화 시키려고 그 지역을 ( 신성 )시한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어떤 효험을 본 특정장소를 ( 신성 )시 하는 행위와 특정한 경험에 매여서 ( 행동 )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다. 그리고 타인의 체험을 인위적으로 자신의 체험으로 만들기에 열중한다.

4) 그러나 이런 행위들이 잘못되었음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특정 인물들에게 여러 가지 ( 신비 ) 체험을 하게 하신 것이며, 나아가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 율법 )을 주셨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야곱이 신비 체험에 대해서 ( 잘못 )된 반응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5) 하나님의 뜻은 야곱이라는 인물에 있다. 그를 도구로 사용해서 일하실 것이 있으며 그 일을 끝내실 때까지는 야곱을 ( 포기 )하지 않겠다는 표시로서 신비한 체험을 하게 하신다. 그러나 야곱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는 ( 관심 )이 없으며 신비 자체, 즉 체험을 한 그 ( 장소 )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20절)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1) 야곱은 인간 중심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다. 내게 있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안다면 반드시 드리겠다는 서원이 ( 필요 )하지 않다. 반드시 드리겠다는 것 자체가 모든 것을 ( 자신 )의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2) 그리고 현상적으로는 보답을 하겠다는 모습이지만 이 보답 또한 물질의 획득이라는 ( 조건 )적인 발상에서 나오는 것일 뿐이다.

 

(21절)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1) 야곱은 ( 조건 )을 전제로 서원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렇게 하시겠다는 ( 약속 )을 하셨다.(= 15절 ) 야곱은 이 약속을 받고 돌 위에 기름을 부어 하나님의 집을 확인하는(= 18-19절 ) 성별의식까지 행했지만, 언약을 조건화하여 서원을 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약속에 자기의 ( 행위 )를 더함으로 ( 확실 )한 응답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 신 )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2) 이러한 서원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정당한 반응이라고 해석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야곱이 이 서원을 지켜내지 못하는데서 이는 틀린 해석임을 알 수 있다.

(1) 나의 하나님 = 이미 하나님께서 너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2) 성전 = 이는 솔로몬 시대에 이루어졌다.

(3) 십일조 = 에서에게는 엄청난 선물을 보냈지만 하나님께 드렸다는 기록은 없다.

3) 즉 서원은 서원일 뿐이고 자기 편리한대로 사는 것이다. 그러다가 야곱은 벧엘로 올라오게 된다. 형이 강력한 힘을 형성하고 있는데도 올라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창세기 제 16 강

 

(창 31:3)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1) 하나님께서는 라반이 야곱을 열 번이나 속이는 상황을 연출하신다. 이런 환경을 하나님이 조성하시면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야곱이 환경과 사건에 매여서 벧엘로 가는 것은 하나님의 ( 작정 )된 일임을 알 수 있다.

(창 31:13)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2) 그러나 야곱은 중간에서 세겜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디나 사건을 만나고 다시 벧엘로 올라가게 된다.(= 35:1 )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어떤 ( 장소 )가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현상적으로는 중요하게 보이지만,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 언약 ) 때문인 것이다. 즉 벧엘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언약으로 ( 돌아 )가는 의미에서 중요한 것이다. 신성한 장소로 여겼던 벧엘은 여로보암 왕 때에 우상을 섬기는 장소가 되어 버린다.

(왕상 12:29-30)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호 12:1)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날마다 거짓과 포학을 더하며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

(호 12:4)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 벧엘 )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호 12:6)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 돌아 )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지니라”

1)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며 앗수르와 애굽을 의지한다. 그러므로 언약의 장소인 ( 벧엘 )을 거명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이다.

2) 야곱은 도망가다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벧엘은 어디인가?

(히 12:2)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 예수 )를 바라보자”

 

(22절)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 전 )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1) 하나님께 지성을 드리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야곱에게 주어진 사다리 꿈은 야곱 쪽에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사다리는 순전히 ( 천사 )들만 왕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야곱이 복의 사람이 되고 안 되고는 천사들을 부리시는 하나님의 약속에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2) 이미 20절에 드러나 있지만, 야곱의 서원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즉 형태는 ( 서원 )이지만 본질은 하나님의 일을 해드리겠으니 기본적인 조건을 갖추어 달라는 ( 요구 )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일을 시키려면 일을 할 만한 최소한의 ( 환경 )을 조성해달라는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하나님을 위하여 마음껏 헌신하고 실력을 발휘 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3) 그러나 야곱의 이러한 인간성은 나중에 천사들이 하나님의 명대로 야곱을 다루면서 육체가 망가지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자아파쇄 ) 하나님은 야곱과 조건을 걸고 동업하는 분이 아니다. 야곱의 바뀐 이름,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의 ( 일방 )적인 뜻이 담긴 이름이다. 즉 하나님께서 야곱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사용하시겠다는 의미이다.(= 아브라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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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야곱은 조건적인 성전을 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성전을 만드신다. 이것이 진정한 성전이다. 즉 하나님의 성전이란 어떤 공간이나 특정 지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담긴 그 ( 인물 )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5) 그러므로 야곱이 내세우는 “서원을 가장한 육신적 요구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 전에 뿌리 채 뽑혀야 될 사고방식들이다.(= 옛 자아 )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성령께서 독차지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6) 그런데 성전이 된 사람에게는 매일매일 그 마음의 주인 자리를(= < 내 >가 다스린다, < 성령 >께서 다스리신다 ) 놓고 다툼이(= 갈등 ) 일어난다. 이 다툼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이런 갈등이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사람 속에 성령님이 계시다는 증거이다.

7) 그런데 왜 갈등이 일어나는가? 이는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착한 마음(= 착각이지만 )이라는 영역을 다스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마음

( 전부 )를 성령님이 친히 다스리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신자는 날마다 자신을 ( 부인 )하면서, 즉 착함이라는 ( 악 )을 내려놓으면서 마음이 ( 성령 )의 주관 하에 놓여서 인도받기를 고대하게 된다.

 

< 서원이란 무엇인가? >

1) 우리는 간절함과 긴박함 즉 절실한 필요에 의해서 서원을 한다. 즉 그냥 비는 것 보다는 서원을 하면 더 잘 들어줄 것이라는 생각에서 하는 것이다. 이것은 꼭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니 “들어만 주신다면 제가 이것을 하겠습니다”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맨 입으로는 안 된다는 인과율적 표현이 서원이다.

2) 야곱의 서원도 이런 생각과 별 차이가 없다. 형을 피해서 도망을 치는 절박하고 불안한 상황에서 야곱은 자신의 신변을 ( 보호 )하기 위한 확증으로서 서원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당신의 언약을 다 이루시기까지 떠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는데도 조건을 내세운다는 것은 자신의 신변보호가 ( 우선 )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언약에 관심이 없는 야곱은 하나님을 ( 수호 )신 정도로 알고 있는 것이다.

3)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언약중심이 아닌 자기보호와 이익 중심의 수호신으로 알고 서원을 하고 있다. 그래서 야곱이 서원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라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야곱의 귀향은 하나님의 ( 언약 ) 때문에 된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은 ( 비 )성경적인 서원을 하지 않는다.

4) 서원은 구약적인 용어로서 신약에서는 사도행전에 두 번만 나온다. 이 서원은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서는 어떤 특정한 소원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 ( 구별 )하여 드리는 자세와 기간을 지칭한다.

 

(민 6: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 몸 )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

1) 나실인으로 서원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한다는 의미이다.

(민 30:2)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 제어 )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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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는 일반적인 서원에 관한 규례인데 서원을 하는 동기가 마음을 제어(= 절제 )하는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는 마음을 ( 괴롭 )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서원은 남편이나 아비에게 그 결정권이 있다.(=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서로 분방하는 것 )

(레 27:8) “그러나 서원자가 가난하여 너의 정가를 감당치 못하겠으면 그를 제사장의 앞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값을 정하되 그 서원자의 형세대로 값을 정할지니라”

3) 이는 ( 헌신 )의 서원인데, 너무 무리한 서원을 했을 경우에 대한 규례이다. 즉 여호와께 자기를 드리기로 하였는데 너무 가난하여 그 대속의 돈을 드리지 못할 때는 제사장이 보고서 그 형편대로 깎아 주라는 것이다. 이처럼 서원이란 하나님께 ( 헌신 )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조건부 서원도 있다.

 

(삿 11: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1) 입다에게 하나님의 ( 신 )이 임한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였다는 것은 이미 적을 물리칠 수 있는 ( 능력 )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도 입다는 승리하게 되면 가장 먼저 자신을 영접하는 자를 번제로 드리겠다는 서원을 한다.

(삿 11:36)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2) 딸은 하나님께 한 서원이기에 자신이 ( 희생 )이 되겠다고 한다. 이 본문은 서원대로 하나님께 딸이 번제로 드려졌는가, 아니면 처녀로 하나님의 성막에서 평생을 봉사했는가의 논쟁을 제공한다. 논쟁의 결과야 어쨌든 서원을 통하여 ( 희생 )자가 나온다는 것은 동일하다. 즉 모든 서원에는 서원의 대가가 있고 서원에 따른 ( 희생 )이 있게 된다.

 

(전 5:5-6)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시 15:4)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1) 그런데 이러한 서원이 신약에서는 거의 없다. 단지 두 곳에서 나오는데 바울이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깍은 것과(= 행 18:18 ), 이방인 네 사람이 복음을 듣고 율법주의자들에게 힐난을 받지 않도록 결례와 머리를 깎는 일을 한 것이다.(= 행 21:23-26 )

 

(마 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1) 예수께서는 서원과 비슷한 맹세를 말씀하셨다. 머리카락 하나 희고 검게도 못하면서 무슨 맹세를 하는가 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맹세를 한다거나 서원을 한다는 것은 자기의 행할 ( 능력 )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 할 것은 예,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는 것일 뿐이다. 이를 넘는 것은 ( 악 )이다.(= 5:37 )

2) 그러므로 서원을 하고서 이 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그런 일이 우리에게는 없어졌다. 단지 있다면 주의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위하여 기도할 뿐이다.(= 마 6:9-13 ) 그럼에도 서원이나 맹세의 구약적 유혹이 있을 때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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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 안개 )니라”

1) 결론적으로 서원이란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 각오 )이며 급한 사정을 해결하기 위하여 내거는 ( 조건 )이다. 그리고 이러한 서원에 대해서는 본인이든 타인이든 ( 희생 )이 뒤따르게 된다. 즉 이 희생이 무엇인가를 ( 예표 )하는 것이 곧 구약적인 서원인 것이다.

2) 그런데 우리는 구약적으로 말하면 날마다 ( 서원 )하고 날마다 서원을 ( 파기 )한다. 즉 예배, 성경공부, 찬송, 기도할 때의 마음과 돌아설 때의 마음이 ( 다른 )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서원 파기자를(= 불이행자를 ) ( 대속 )하신 분이 계시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불완전한 서원을 십자가에서 ( 완전 )한 서원으로 이루어 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쓸데없는 미신적이며 불완전한 서원의 유혹을 버리고 예수님의 완전한 ( 서원 )을 믿고 사는 것이다.

 

2) 야곱의 복과 언약 성취 (29:~35:)

(1) 야곱의 자손 번창 (29:~30:)

1)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언약하신 목적은 당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야곱을 훈련시키시고 연단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언약의 사람이 되도록 하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야곱과 같은 우리를 하나님이 꺾으시고 하나님의 나라만이 최고의 ( 가치 )인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시련과 어려움을 주시는 것이다.

2) 그런데 야곱 자신이 훈련을 받는 부분도 있지만 야곱에게 붙여져서 함께 언약의 자녀로 ( 편입 )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이 언약을 받은 자들의 특징이다. 야곱은 야곱 나름대로 자기의 살길을 찾아 나서는데 그 육신의 ( 일 )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성경은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 우물가의 기적 >

29:1~15 야곱이 우물 곁에서 라헬을 만남

(6절) “그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1) 야곱은 ( 정보 )(= 소식 )를 알기 위해서 우물로 간 것이고, 라헬은 양들에게 ( 물 )을 먹이기 위해서 우물로 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신다.

2) 그러나 이러한 만남이 하나님의 ( 예정 )된 인도와 보호라는 사실은 ( 믿음 )의 눈으로만 보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연한 사건일 뿐이다. 라헬은 자기 직무상 우물로 간 것이지만, 그 곳에서 하나님의 언약 ( 안 )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창 24:15) “말을 마치지 못하여서 리브가가 물 항아리를 어깨에 메고 나오니”

1) 우물가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가 먼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리브가는 평상시 물 긷는 ( 일 )을 하는 중에 하나님의 언약을 수행하는 자를 만남으로 언약 ( 안 )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출 2:15-16)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는지라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 아비의 양무리에게 먹이려 하는데”

2) 언약을 받은 자의 모습은 야곱이나 모세나 그저 지나가는 ( 나그네 )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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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런데 이들에게 주도권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야곱과 모세의 모습이 윤리 도덕적인 것도 아니다. 다만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 언약 )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리브가와 라헬은 자기들의 ( 육신 )적인 필요에 의하여 우물로 온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4) 우리도 동일하게 생존을 위해서만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상치 못한 때와 장소에서 주님이 나타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언약 안에 ( 편입 )시키신 것이다. 즉 우물이 아닌 생명수를 말씀하시고, 생존이 아닌 생명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 12:3)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 구원 )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사 49:10)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들을 이끌되 ( 샘물 )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니라”

1) 포로로 잡혀간 유다백성을 샘물 근원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 구원 )을 샘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구원의 샘물을 어떻게 마시는가?

(사 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계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 4: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1) 구약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야곱처럼 모세처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그리고 죄 많은 한 여인이 ( 육체 )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나온다.

2) 그런데 사람들은 구원의 우물에서 얻은 영생수를 기뻐하지 않고 다른 물을 좋아하여 좇아가고 있다. 물론 ( 불 )택자들이다.

(렘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렘 17: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 근원 )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16~20 야곱이 라반에게 라헬을 위해 칠년을 봉사하겠다 함

(17절) “레아는 안력이 부족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1) 총기가 없이 보이는 여인보다 곱고 아리따운 여인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본성이다. 그러나 이는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 나타난 인간의 ( 악 )한 본성일 뿐이다.

2) 선악과를 먹기 전의 아담은 하와를 향해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을 했다. 즉 선악과를 먹기 전 인간에게는 “좋다 나쁘다”라거나 “예쁘다 밉다”라는 판단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사실 인간의 외형은 그냥 생김새일 뿐이다. 그런데 이 차이를 “잘생겼다 못생겼다”라는 ( 선악 )의 개념으로 판단하게 된 것이다.

(창 8:21)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3) 인간의 감정이 보기 좋은 여자와 남자를 향해 움직이는 것을 자연스럽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는 인간의 감정 자체가 ( 악 )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창세기 제 16 강

 

4) 그리고 이 악은 사회구조 속에서 자신의 ( 가치 )를 향상시키기 위한 욕망으로 변형된다. 예쁜 여자와 혹은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 가치 )가 향상되기 때문이다. 사랑을 아름다운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세상의 일반적인 생각이기는 하지만 사실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 이기 )주의의 한 모습일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한다고도 하지만 결국은 내 ( 마음 )에 드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자기( 만족 )을 삼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5) 이러한 인간의 사랑과 비교하면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은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 택 )하신 ( 모든 ) 자에 대한 사랑이었음을 알게 된다. 즉 성경의 사랑과 세상의 사랑은 그 개념부터가 다른 것이다.

 

(20절)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

1) 야곱이 시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은 자기( 만족 )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선택한 라헬에 대한 ( 만족 )이 시간조차 의식하지 않게 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것을 ( 사랑 )하고 그것으로 ( 만족 )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2) 그런데 신앙이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에는 ( 나 )의 선택, ( 나 )의 만족이라는 것은 없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 신앙 )이고,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사는 것이 곧 ( 신앙 )이기 때문이다.

3) 하지만 나의 선택과 만족, 즉 자기만족이 억지로 버려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언약에 의해 당연하게 버려지는 과정이 야곱의 훈련이며 연단의 과정이다.

 

(25절)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찜이니이까”

1) 집을 떠난 야곱이 라반을 만나고 라헬을 만나는 일까지는 순탄한(= 형통한 ) 길을 걸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야곱이 선택한 라헬을 얻는 일에 라반이 걸림돌로 등장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 하시겠다고 한 말씀은 무엇인가?

 

(창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사랑하는 것, 야곱이 하고 싶은 것은 다 허락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 일 )을 하신다. 즉 참으로 우리가 사랑해야 될 대상이 ( 누구 )인가를 일깨워주시는 것이다. 야곱이 선택한 라헬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선택에 ( 만족 )한다는 것이며, 곧 자기가 자기를 너무나도 ( 자랑 )스럽게 여긴다는 말이다.

2) 이런 자기만족에 7년이라는 세월도 불평이 안 된다. 그러나 결국 훗날 야곱의 인간적 사랑은 비극으로 끝난다. 이것이 야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 방법 )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 원하는 것 모두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시지만 결국에는 온갖 사건과 환경을 등장시켜서,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 상관 )없는 일에 하나님의 ( 이름 )을 사용했는가를 깨닫게 하신다.

3) 이처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자신의 일이 ( 형통 )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편적인 사고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우리의 일이 잘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 일 )을 위해서라는 것을 ( 레아 )의 사건으로 강조하시는 것이다. 동일하게 우리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삶에서 하나님을 ( 배우 )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