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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제 19 강
32:1~12 야곱이 형 에서의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간구함
(2절)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 하나님의 군대 )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1) 에서를 만나야 하는 두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야곱은, 이들을 자신을 지켜주기 위한 하나님의 군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을 (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데서 나오는 오해이며 오늘날에도 교인들에게서 동일하게 반복되는 현상이다.
2)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자기백성을 ( 새롭 )게 하신다. 이것이 야곱에게 ( 하나님의 군대 )를 보내신 이유이며, 오늘 우리에게 ( 예수 그리스도 )를 보내신 이유인 것이다.
3)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을 지키기 위한 하나님의 군대가 아니라 오히려 야곱을 치기 위한 군대였다. (= 31절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
(6절) “그가 사백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1) 장인에게서 죽음의 위기를 넘자마자 또 하나의 문제가 나타난다. ( 믿음 )의 사람들은 인생 곳곳에서 이렇게 자기를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욥 7:17-19)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 권징 )하시며 분초마다 ( 시험 )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 침 )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 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7절)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
1) 사람들은 ( 이론 )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문제가 드러나면, ( 실제 )적으로는 부지런히 자신의 방법을 생각하고 사용한다.
2)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자신을 돕기 위한 하나님의 군대라고 말은 했지만(= 물론 오해였지만 ), 그것은 ( 이론 )이었기에 하나님의 군대를 의지하고 담대히 에서를 만나는 ( 실제 )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 사건들은 후에 유기적 점진적으로 그 의미가 밝혀진다.
예) (수 5:13-15) 여호와의 군대장관 (왕하 6:14-17) 도단 성에서의 불 말과 불 병거
(12절) “주께서 ( 말씀 )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1) 9절부터 시작되는 야곱의 기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 약속 )을 받은 몸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 말씀 )을 붙잡고 하는 기도”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자신에게 하신 말씀대로 성공이라는 은혜를 베푸셔야 하기 때문에, 자신이 죽으면(= 실패하면 )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신에게 기도하는 이유이다.
< 이스라엘 >
13~32 야곱이 브니엘에서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받음
(24절)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1) 결국 하나님께서는 ( 복 )을 향한 야곱의 강하지만 잘못된 욕망을(= 탐심 ) 드러내시고 고치시기 위해 “어떤 사람”과 씨름을 하게 하시는 것이다.
2) 야곱은 형이 자기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야곱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약속을 (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여 오해한 것이다.
창세기 제 19 강
3) 그런데 야곱은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된다. 아마도 야곱은 이 사람이 ( 에서 )가 보낸 자객쯤 되는 줄 알고 죽을 힘을 다해서 싸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사람을 이기면, 형을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이 모습을 ( 기도 )라고 말한다.
4) 그러나 본문은 흔히 말하는 “열심 있는 기도”가 아니다. 오히려 ( 자기 ) 힘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보려는 강력한 ( 욕망 )의 발산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를 보고서도 자신이 스스로 살길을 마련하고 있기 때문이다.
5) 지금까지 야곱은 하나님의 ( 언약 )을 말하면서도 항상 ( 자기 )의 방법과 계획을 의지했다. 다만 상황이 급하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것이다. 결국 야곱은 자신의 방법으로 형의 분노를 풀기 위하여 예물을 보내고, 자신의 소유를 각각 떼로 나누게 된다.
(호 12:3-4)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 울며 )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1) 하나님께서 얍복으로 야곱을 찾아오신 이유는, 야곱의 ( 자기 )중심적인 방식으로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다.
2) 그래서 벧엘의 하나님은, 야곱의 씨름상대로서, 낮아지신 주님을 예표로 보여주시는 것이다. 즉 주님의 겸손하심이(= 희생이 ) 언약을 이루어내시는 것이다.
3) 그러므로 야곱이라는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것을 통하여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하나님의 의도와는 ( 상관 )이 없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야곱의 이김이란, 인간의 탐욕이 하나님을 죽이는 일까지 나가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예수님의 ( 십자가 )란 인간의 탐욕이 어디까지 가는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낮아지심과 죽으심이 우리에게는 ( 구원 )이 된 것이다.
4)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것이 울음이 된 것은, 이제야 하나님이 ( 어떤 ) 분이신지를(= 예수님은 누구신가? )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25절)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1) 이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복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야곱의 강한 욕망을 반어적으로 ( 강조 )하는 표현이다.
(25절)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1) “이제는 내가 이겼다”라는 생각이 들 때에, 갑자기 그 사람에게서 엄청난 힘이 나와서 야곱을 쳤다. 즉 야곱의 욕망이라는 힘의 ( 중심 )이 환도뼈가 꺾이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조차도 이기고자 하는 강한 욕구, 기어코 하나님이 내게 ( 복 )을 주도록 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욕구가, 오늘 우리에게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자기 백성들의 환도뼈를 치신다. 자신의 힘을 ( 의지 )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힘을 ( 잃은 ) 자로서 엎드려 간구하는 자로 만드시는 것이다. 이것이 ( 기도 )의 진정한 의미이며, 장차 신자가 하나님의 군대로서 ( 영적 ) 전쟁을 벌이게 되는 예표적 의미이다.(= 마하나임 )
(26절)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1) 야곱은 이 힘이 ( 하나님 )의 힘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따라서 그 사람을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어떤 ( 목적 )을 가지고 보낸 하늘의 사람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 19 강
2) 즉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겠다는 교만함을 버리고, 이제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된 것이다. 다만 불쌍히 여겨서 살려달라는 것이다.
(27절)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1) 이름을 묻자 야곱(= 약탈자, 발목을 잡는 자, 사기꾼 )이라고 대답한다. 즉 질문의 목적은, 야곱의 정체성은 ( 죄인 )이라는 것이다.
(28절)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1) 그런데 이제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야곱이 이긴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말씀이다.
(롬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 구속 )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 의롭다 )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하나님의 군대로 불렀다. 즉 야곱은 이들을 ( 자신 )을 위해 싸우는 군대로 오해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군대는 야곱의 ( 욕망 )과 싸우는 존재였던 것이고, 하나님께 굴복되어진 야곱은 이제부터는 ( 세상 )과 싸우는 자로 존재하게 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3) 이스라엘은 “그가 엘과 싸우다”란 뜻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엘”은 여호와가 아닌, 이방인들이 섬기는 ( 우상 ), 즉 일반적인 신을 지칭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즉 이스라엘에는 ( 이중 )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4) 이스라엘의 가나안 전쟁은 하나님의 군대로서의 싸움이다.(= < 여호와 >의 전쟁 ) 오직 자신의 성공을 복으로 여기고 그 복을 쟁취하기 위해 경쟁하는 민족들과의 싸움이다.(= 이스라엘 이전의 야곱처럼 ) 그리고 이스라엘은 바로 그들을 이겨야 할(= 이스라엘 ) 민족인 것이다.
5) 따라서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야곱을(= < 신자 >를 )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이제부터 야곱은, 자신의 복을 위해 싸우는 존재에서, 하나님의 복을 세상에 선포하는 자로 싸우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신의 ( 힘 )(= 행위 )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 은혜 )로 사는 자임을 증거하는 자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 복 )이기 때문이다.
(롬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 행위 )에 있지 않고
( 믿음 )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6) 그럼에도 오늘날 하나님의 복을 야곱처럼(= 성공 )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과 ( 원수 ) 된 사고방식일 뿐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유대주의, 세속주의, 적그리스도 )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이들과 싸워 이기는 자가 참된 이스라엘인 것이다.
(30절)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 보전 )되었다”
1) 결국 복이란 하나님을 보고도 ( 죽지 ) 않는 것이다. 심판의 날 주의 얼굴을 보고도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 ( 복 )이다.
2) 야곱은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오해했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그렇지 않게 되었다. “진정한 장자는 ( 섬기는 ) 자”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은 섬기는 자가 예표하는 장자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다. 이것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 구원 )의 서정”이다.
창세기 제 19 강
(31절)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1) 이 모습이 성도의 ( 정체 )성이다. 자기 다리로 걷고 달릴 수 있을 줄 알았던 모습을 ( 야곱 )이 보여주었다면, ( 이스라엘 )은 지팡이를 의지하여야만 걸어갈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 마찬가지로 신자 또한 지팡이를 의지하는, 저는 자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독립자요 개별자가 아닌 철저하게 ( 의존 )된 자로 나아가는 것이다.
(고후 1: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 자기 )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 하나님 )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3) 숙곳과 세겜 성 정복 (33:~34:)
33:1~17 야곱이 형 에서를 상봉하고 숙곳에서 거주하게 됨
(3절)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1) 세상의 질서는 어린 자가 큰 자를 섬기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하신다.(= 25:23 ) 이렇게 세상과는 전혀 ( 다른 ) 질서를 세우실 것임을 야곱과 에서를 통해서 보이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2) 야곱은 장자라는 의미를 ( 복 )의 개념에서 생각했다. 하지만 장자는 오직 섬기는 자이다. 즉 야곱은 브니엘의 사건을 통해서(= 씨름을 통해서 ) 자신이 복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이 ( 허상 )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에서에게 절을 할 수 있었다.
(마 20:26)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잠 16:7)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1)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깨어지자 원수였던 형과 화목하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의 싸움은 나를 쳐서 ( 복종 )시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결정하기 전에 먼저 주님 앞에 나의 ( 죄인 ) 됨을 고해야 하는 것이다.
(15절) “에서가 가로되 내가 내 종자 수인을 네게 머물리라 야곱이 가로되 어찌하여 그리 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1) 지금까지 형님의 은혜를 입은 것도 과분하오니 저희들끼리만 가겠습니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벧엘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야곱은 형님에게로 가겠다고 말하고 있다.(= 14절 )
(17절)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18~20 야곱이 세겜 성에 이르러 밭을 사서 단을 쌓음
(18절)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장막을 치고”
1) 그런데 숙곳으로 가서 집을 짓는다. 이것은 세일로 가는 것도 아니고 벧엘로 가는 것도 아니다. 이제 한 고비가 지나자 자리를 펴고서 앉으려고 하는 것이다. 벧엘은 멀리 있으니 여기서 내 살길을 준비하자는 것이다.
2) 뿐만 아니라 세겜에서는 땅을 산다. 그리고 하나님께 단을 쌓고서 그 단의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라고 이름을 짓는다. 그러면 야곱이 단을 쌓은 것은 신앙의 표시인가?(= 가는 곳마다 단을 쌓는다는 의미인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