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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제 24 강
4) 기근은 언약 자손에게 있어서도 ( 절망 )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애굽에 곡식을 예비하여 놓으신 이유는, 세상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언약 자손인 야곱의 가족을 ( 보호 )하시기 위한, 즉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한 섭리였다.
42:6~17 요셉이 곡식을 사러 온 형들을 시험하려 옥에 가둠
(1절)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관망만 하느냐”
1) 야곱은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는 없었다. 즉 야곱에게서 이런 말이 나올 정도로 심한 ( 기근 )이 들어야 그들은 양식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형들을 만나게 되는 섭리를 하시는 것이다.
2) 이렇게 사건을 일으키시는 이유는 “언약의 성취”라는 과정 가운데서 “언약(= 복 )”의 ( 계승 )자가 누구인가를 밝히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즉 요셉이 애굽의 총리라는 최고 권좌의 복을 누리게 된 것은 ( 야곱 ) 때문이라는 것이다.
(창 27:29 )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3) 그래서 이제 언약의 계승자인 야곱에게 그 복의 위상을(= 가치를 ) 알려준다는(= 전달 ) 것이다. 그러면 이 복을 알려주는 방법은 어떠한 것인가?
(요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 영생 )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 권세 )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1) 예수님의 다스리는 권세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에게만 영생을 주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복을 주시는 ( 권세 )가 요셉을 총리로 등용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은 이제 ( 때 )가 되어 언약의 계승자인 야곱의 몫으로 이 복을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야곱이 받은 복의 ( 가치 )가 어떠한 것이었는지가 요셉을 통해서 밝히 드러나는 것이다.
2) 그런데 이 복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주는 ( 과정 ) 또한 그리 만만치는 않다. 다른 사람들은 돈을 내고 즉시로 양식을 구하면 되었지만, 언약 자손에게 있어서는 양식이나 돈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즉 요셉은 자신이 버림받았던 상황을 형제들이 ( 기억 )하게 하는 것이다. 요셉의 형들은 애굽이 가지고 있는 양식이라는 ( 권세 )의 혜택을 얻고자 온 것 뿐이다. 그러나 요셉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양식을 주는 권세가 아니라 아버지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 복 )의 권세를 알려 주려고 하는 것이다.
3) 이런 복의 전달 과정 가운데서 요셉이 형들을 대하는 모습은 세상을 ( 전체 )적으로 볼 줄 아는 안목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위성지도 ) 반대로 요셉의 형들은 세상을 ( 부분 )적으로 보기 때문에 요셉의 말 한마디에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게 된다. 따라서 형들과 아버지 야곱도 이런 안목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요셉의 목적이다.
4) 하나님께서 ( 죄 )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하시고 그것을 어떻게 ( 복 )으로 전환시키는 섭리를 하시는지를 언약 자손들은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요셉이 형들의 죄를 지적해주는 것으로는 “( 피상 )적인 해결”만 할 수 있을 뿐이다. “( 근원 )적인 해결”이 되려면 형들이 자신의 죄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요셉이 버림받은 상황을 기억하게 하면서, 사람이 하나 빠진 것에 대해서 그들이 어떤 ( 마음 )을 갖고 있는 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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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1) 여호와께서 요셉에게 꿈으로 계시하신 작정 섭리가 성취된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결과가 있기까지 여호와께서는 요셉을 오랜 동안 ( 고난 )을 겪게 하셨다.
(9절)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1) 요셉이 형들을 시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먼저 전제해야 할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 성령 )이 아니고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세례문답서)
33문) 우리가 어떻게 구속에 참여하게 됩니까?
- 성령님의 ( 내적 ) 부르심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34문) 성령님은 먼저 무엇을 깨닫게 합니까?
- 우리의 ( 죄 )와 ( 비참 )함을 깨닫게 합니다.
35문) 누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까?
- ( 성령 )께서 하십니다.
36문) 성령께서 우리를 중생시키는 방편은 무엇입니까?
- 하나님의 ( 말씀 )입니다.
37문) 진정한 회개는 무엇입니까?
- 성령님의 ( 역사 )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2) 신자가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면 먼저 자신의 ( 죄 )와 비참한 상태를 알게 된다. 즉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시험을 통해서 자신들의 ( 죄 )를 알아 가게 되는 것이다.
3) 또한 요셉은 형제들을 알아보고서 자기의 ( 꿈 )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즉 야곱이 받은 예언대로 형제들의 ( 주 )가 되는 것은 자신이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형제들을 살리기 위한 주”가 됨을 알게 된 것이다.
4) 그러므로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형제들을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 계시 )(= 꿈 )에 함께 참여시키기 위하여 형제들이 자신들의 ( 죄 )를 알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죄를 통해서 ( 은혜 )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롬 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 가두어 )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 긍휼 )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9절) “너희는 정탐들이라”
1) 요셉의 첫 번째 문제 해결책이다. 그러자 형들은 당황해서 요셉이 묻지 않았던 과거의 이야기까지(= 기억 ) 자청해서 말하게 된다.
(13절) “말째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2) 그러나 요셉은 이들의 변명을 들어주지 않고 삼일을 옥에 가두게 된다. 즉 지난 날의 죄를 ( 기억 )하게 하는 것이다. 형들은 요셉을 팔았던 죄가 영원히 드러나지 않고 사라질 줄로 착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1절)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로서 독실한 자니 종들은 정탐이 아니니이다”
1) 이러한 말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요셉 앞에 선 형제들의 모습이 ( 죄인 )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즉 이들은 ( 자칭 ) 독실한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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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8~25 요셉이 뉘우치는 형들에게 조건부로 곡식을 허락함
(18절) “삼일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1) 죄를 ( 기억 )하는 기간을 지낸 후 요셉은 형제들이 생육하고 번성해야 할 언약 자손임을 표현하는 말을 하고 있다. 요셉과 그의 형제들은 반드시 생명을 보전해야 하는 언약 자손들이기 때문이다.
2) 언약 때문에 요셉은 ( 고난 ) 속에서도 생명이 보전된 것이고, ( 범죄 ) 한 형들도 생명을 보전하려고 애굽에 곡식을 사러 오게 된 것이다. 이제 요셉은 두 번째 문제 해결책을 내놓는다.
(19절) “너희가 독실한 자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옥에 갇히게 하고”
3) 요셉의 이런 문제 해결 방식으로 인해서 형들 사이에는 큰 ( 괴로움 )이 일어나게 된다. 즉 그 옛날 요셉을 팔아버린 ( 기억 )이 되돌아온 것이다.
(21절) “우리가 아우의 일로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2절) “그러므로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 하니”
1) 범죄 한 형들을 여호와께서 ( 회개 )하게 하신다. 이는 그들이 언약 자손이기 때문에 보호하고 구원하여 주시기 위한 ( 작정 ) 섭리인 것이다. 즉 여호와께서는 요셉을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시고 형제들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시고 구원하여 주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인간 스스로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 하게 ) 하셔야 하는 것이다.
2) 그리고 신자로 하여금 이런 고백들이 ( 십자가 ) 앞에서 터져 나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신자가 자신의 ( 죄 )를 알게 된다면 이제 더 이상 예수님에게서 세상의 것을 얻어낼 것은 없다는 것을 ( 알게 ) 된다. 오직 “( 그의 나라와 그의 의 )”를 구하는 것만 있을 뿐이다.
3) 이렇게 가치관이 변해버린 신자는 세상의 것을 위해서 예수님을(= 교회를 ) 찾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 세속 )적인 존재인가를 지적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게 된다. 오직 관심은 “예수님은 누구신가?”에만 집중되는 것이다.
4)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교회에 나와도 ) 자신의 ( 죄 )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님 앞에서 겸손과 회개의 경건한 모습을 보이고 그 대가로 주어지는 ( 세상 ) 것을 탐낼 뿐이다.(= 거짓 선지자들의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이런 자들에게는 결코 영생의 복은 알려지지 않는다.
(23절) “그들은 요셉이 그 말을 알아 들은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1) 요셉은 형들이 요셉을 버린 죄에 대해서 깊이 ( 인식 )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있다. 즉 요셉이 가진 권세의 혜택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 전달 )되는 것이다.
2)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귀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자꾸만 빼내려고 하신다. 이때 순간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
3) 그러나 신자는 “빼냄(= 자아파쇄 )”의 과정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 십자가 )”를 생각하게 된다. 즉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깨닫게 하시려고 신자에게서 “빼냄의 사건”을 일으키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을 발생시키시는 것이 예수님이 가진 ( 권세 )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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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우리는 예수님과 “( 십자가 )의 아픔”을 사이에 두고 만나게 된다. 다른 길에서는 서로 만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즉 형들의 ( 육체 )는 그대로 있지만 ( 마음 )이 달라지는 것이 ( 복 )인 것이다. 그리고 이 복은 야곱 가족 전부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복이라는 진리는 요셉처럼 높은 곳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는 ( 영적 ) 안목을 갖게 한다.
(42:24)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취하여 그들의 목전에서 결박하고”
1) 요셉은 형들을 철저하게 시험한다. 즉 철저한 ( 회개 )를 이끌어 내려는 것이다. 회개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 방법은 곡식 자루에 돈을 몰래 넣어주는 것이다.
2) 다시 말해서 인간은 범죄를 하고서도 드러나지 않으면 그 범죄에 대해서 ( 회개 )하지 않는다. 이는 범죄에 대한 ( 두려움 )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이 회개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도록, 즉 범죄에 대한 ( 두려움 )을 느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사건과 환경을 일으키시는 것이다.
26~38 야곱이 아들들의 보고를 듣고 나서 심히 괴로워 함
(28절) “그가 그 형제에게 고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 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 하고”
1) 돈이 생겼지만 기쁨보다는 오히려 ( 두려움 )이 생겼다. 과거에는 요셉을 죽이려고 하였다가 애굽에 팔았을 때에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것이 ( 죄 )를 깨닫고 난 이후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 일을 하나님이 행하셨다고 고백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만사를 ( 주관 )하신다는 의미이다.
2) 원치 않는 이상한 일이(= 정탐이라는 오해, 자루 속의 돈 ) 일어남으로 이제 형제들은 ( 범죄 )의 심각함을(= 두려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범죄 한 존재임을 ( 고백 )하는 실제의 적용이 된다.
(요일 1:8-10)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1) 진리의 말씀은 내 속에서 나를 ( 정죄 )하고 나의 ( 불의 )함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그 속에 진리가 있는 신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 죄인 ) 됨에 대한 고백이 있게 되는 것이다. 신자에게 있어서 죄의 문제는 ( 과거 )에 끝나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지금 내가 예수를 믿고 있으니 ( 죄 ) 문제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예수 믿는 지금은 ( 십자가 )가 필요 없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3) 신자는 날마다 여전히 ( 죄인 )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자신을 ( 포기 )(= 부인 )하는 사람이다. “자기 포기”에서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십자가는 날마다 새로운 은혜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 처음 > 볼 때에 ) 신자는 누구든 죄와 ( 상관 )없이 살아가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 할지라도,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할지라도 죄와 ( 상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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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9) “그들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 그 아비 야곱에게 이르러 그 만난 일을 자세히 고하여 가로되”
1) 형들은 과거 요셉의 사건 때와는 달리 야곱에게 거짓이 없는 진실 된 보고를 하고 있다. 예전 같았으면 시므온도 요셉처럼 죽었다고 속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에서 곡식을 사오는 과정에서 범죄가 얼마나 ( 두려운 )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이다.
(32절) “우리는 한 아비의 아들 십이 형제로서 하나는 없어지고 말째는 오늘 우리 아버지와 함께 가나안 땅에 있나이다 하였더니”
1) 형제들의 숨겨진 ( 근본 )적인 죄를(= 요셉의 일 ) 형제들의 입을 통하여 다시 한 번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수와 죄가 드러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체가 ( 근본 )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이다.
2) 즉 드러난 죄가 많고 적음에 따라서 사람들을 의인과 죄인으로 평가하는 세상의 가치는 모두 잘못된 것임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처럼 형제들의 죄의 근본을 추적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언약자손으로 하여금 철저한 고백과 ( 회개 )를 이끌어 내신다.
(36절) “그 아비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로 나의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1) 베냐민까지 보낸다는 것은 야곱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다. 그러나 야곱의 슬픔과 고통은 ( 불신앙 )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다. 즉 야곱은 과거에 마음에 두었던 요셉의 꿈 이야기를 잊고 있는 것이다.(= 창 37:11 ) 자기와 아들들이 ( 요셉 )에게 절하는 꿈을 여호와께서 그대로 이루어 주실 것임을 ( 기억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있는 것이다.
(창 28: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2)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야곱의 모습에서, 오늘날에도 사건과 환경이라는 현실의 위기상황에 몰림으로 언약을 잊어버리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37절) “르우벤이 아비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나의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43:9)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1) 르우벤의 말은 자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형제도 사랑한다는 것을 ( 강조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사리에 맞지 않는 지나치게 ( 과장 )된 말이기도 하다. 과연 야곱이 르우벤의 아들들을 죽이겠는가?
2) 반면에 유다의 말은 자신이 죄인으로서 형벌을 받겠다는 것이다. 즉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이처럼 신앙이란 억지스러운 행위를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 자연 )스런 행위를 유발하는 것이다.
3)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고백은 자신들의 ( 죄 )를 알고 난 이후에 달라진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즉 자기중심적이 아닌 ( 타인 )을 생각하는 삶의 모습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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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15 형들이 약속한 대로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감
(6절) “이스라엘이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오히려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고하여 나를 해롭게 하였느냐”
1) 본문은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있음에도 야곱이 자식에(= 베냐민 ) 대해서 애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야곱에게는 다른 인생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준 ( 언약 )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손 언약 )
2) 그러나 가뭄이란 현실은 애지중지하는 자식을(= 베냐민 ) 양식과 바꾸어야 하는 처지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야곱이 가장 아끼는 베냐민이란 말인가? 이는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야 하는 순간을 생각하게 한다. 다시 말해서 ( 복 )을 받은 신자에게 어려움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3) 그러면 왜 어려움이 주어져야 하는가? 그 이유는 신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복이란 ( 연속 )되는 것이기 때문에 연속되는 ( 다음 )의 복으로 채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장 ( 소중 )한 것의 “빼앗김”이 없이는 하나님의 복에 담겨 있는 진정한 뜻을 모르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사라의 태가 죽어야(= 빼앗겨야 ) “이삭의 탄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복 주신 자들을 언약대로 ( 보호 )하여 구원하시려고 “뺏음”을 섭리하시는 것이다.
4) 결국 여기서 요셉이 베냐민을 데려오기 전에는 양식을 주지 않겠다고 말한 의미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양식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 복 )의 의미를 그들에게 전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양식이란 먹고 또 먹어도 사람을 살려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으로 말미암아 생긴 자손들은 연속되는 ( 복 )에 의해 인도를 받아야 한다.
(마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사건과 환경이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일으키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이란 인간의 손에 의해서 유지된다든지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사람들이 방해한다고 방해받는 것도 아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지닌 복을 방해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의 복 속으로 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 생각의 ( 근원 )을 흔들어서 드러내는 것이다.
(43:6) “이스라엘이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오히려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고하여 나를 해롭게 하였느냐”
1) 야곱은 진실을 말한 아들들을 책망함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 이는 사람들이 자기의 계획과 욕망으로 이하여 주어진 심리적 갈등의 해결책을 진실의 왜곡에서 찾으려고 하는 ( 죄 )성을 보여준다. 즉 이스라엘은 아들들이 애굽의 총리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기를 바란 것이다.
2) 야곱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앙이 있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불신앙의 모습도 갖고 있었다. 야곱의 이런 모습은 아직 ( 육체 )의 소욕에 얽매인 오늘날의 신자가 ( 갈등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숨기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롬 7:23-24)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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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1)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있지만 결국 신자의 문제 해결 방법은 간단한 것이다. 바로 “( 전능 )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능력의 가능성이 있는 듯 싶으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불신앙적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능력이 없다고 판단되면 하나님을 ( 기억 )하고 신앙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2)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도 죽을 것 같고, 곡식을 사오지 못해도 죽을 것 같은 환경에서 야곱은 자신의 철저한 ( 무능 )함을 깨닫게 된다. 결국 이스라엘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결단을 내리는 신앙적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야곱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하신 섭리가 야곱의 행동을 ( 이끌어 ) 내시는 것이다.
3) 이처럼 가장 ( 소중 )한 것을 놓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신자로 하여금 붙들고 있는 것을 ( 놓게 ) 될 때 하나님을 부르게 하는 섭리이다. 이것이 자기 백성들의 신앙을 키워나가시는 하나님의 작정인 것이다. 따라서 야곱은 불신앙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가도 다시 언약을 ( 기억 )하게 되는 것이다.
(에 4:16)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4) 그러므로 신자는 자꾸만 일이 어그러지고 원하지 않았던 상황으로 끌려갈 때에, 드러난 ( 현상 )만을 가지고 원망하거나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다. ( 십자가 )의 예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을 ( 찾 )고 ( 구하 )고 ( 두드려 )야 할 것이다.
(마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11)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는 무엇을 말하는가?
(눅 11:13)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 여기서 성령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성령은 누구의 영인지를 생각하시오 )
16~34 요셉이 잔치를 배설하고 형들에게로부터 절을 받음
(43:18) “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일 우리 자루에 넣여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를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
1) 형들은 베냐민을 요셉에게 데리고 간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형들의 생각은 양식을 구해서 빨리 난처한 상황을 피해보려는 것이었다. 즉 기존의 사고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2) 그러나 요셉은 예기치 않은 호의를 베푼다. 그런데 형들은 자신들의 잘못 때문에 요셉의 대접을 즐거워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처럼 ( 죄 )는 항상 인간을 불안하고 괴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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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0) “가로되 내 주여 우리가 전일에 내려와서 양식을 사가지고”
1) 결국 형들은 죄에 대한 형벌이 두려운 나머지 요셉의 청지기에게 모든 일을 사실대로 고백하게 된다. 그 전의 사실들을 애굽의 총리가 모를 리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였기 때문이다.
2) 이처럼 신자가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다 ( 알고 ) 계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자는 자신의 죄를 숨기려 하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 인정 )하려고 하지 않는다.
(34절)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
1) 형들은 모든 일의 진실을 밝혔으니 애굽의 총리가 그 진심을 이해하고 후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잔치를 즐겼다. 그러나 요셉이 베푸는 호의는 “악으로 선을 갚는” 방식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44:4 )
(4) 형들을 용서하는 요셉 (44:~45:)
1) 요셉은 형들을 ( 시험 )한 후에 용서하고 야곱의 온 가족을 애굽으로 데려오게 한다.
2) 이는 여호와께서 열조에게 세우신 언약을 이루시려고, 언약 자손의 ( 죄 )를 용서하시고 ( 보호 )하여 구원하시려는 섭리이다.
3) 즉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자손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하실 것을 언약하시는 ( 예표 )로서의 모형과 그림자적 계시의 섭리인 것이다.
44:1~13 요셉이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어 형들을 시험함
(4절) “그들이 성에서 나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 미칠 때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악으로 선을 갚느냐”
1) 이제 형들에게서 나올 말은 전혀 없다. 이유를 막론하고 그들은 “은혜를 악으로 갚은 것”이다. 이제 그들을 살리고 죽이는 것은 완전히 요셉의 손으로 넘어와 버렸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언약자손의 ( 근본 )적인 죄를 집요하게 추적하여 ( 시험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2) 그런데 이런 형편에 처해 있을 때에 하나님의 복이 진정으로 ( 은혜 )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즉 진정한 은혜를 아는 자는, 자신이 전적으로 ( 무능력 )한 자이며, 복 주시는 분의 자비가 아니면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자라는 것을 절감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3) 우리가 인생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며 노력하는 모든 공로가 하나님에 의해 강탈당하고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빈털터리가 되게 하실 때, 비로소 이미 하나님이 준비하신 복이 얼마나 ( 소중 )한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이런 “빼앗김”의 ( 복 )을 받은 자만이 언약의 대상자인 것이다. 이 사실을 고백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집요한 추적을 하신다.
(고후 11:23-27)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춥고 헐벗었노라”
참길교회성경연구원 창세기 제 24 강
(5절)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하라”
1) 하나님께서는 언약자손들의 숨겨진 ( 마음 )을 드러내신다. 즉 잘못된 마음을 완전히 예수께로 ( 돌아 )서게 하심으로 용서하시는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의 마음 상태를 정확히 짚어서 ( 드러 )내신다.
(9절) “종들 중 뉘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우리 주의 종이 되리이다”
1) 형제들은 죄가 없으므로 당당하게 결백을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 현상 )적으로 드러난 은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요셉을 팔아넘긴 흉악한 죄라는 ( 근본 )에 있는 것임을 형들은 모르고 있다.
2) 이런 사실을 모르고 또 인정치 않는 형들은 겉으로 드러난 범죄라는 행위에 대해서만 시시비비를 따지게 된다. 그러나 이는 동일한 죄인들의 “오십보 백보”의 모습일 뿐이다. 즉 드러나지 않은 죄인이 드러난 죄인을 ( 정죄 )하는 세상의 모습이다.
3) 결국 이 사건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는 ( 모형 )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을 ( 율법 ) 아래 가두어 정죄를 받아 죄인이 되도록 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 죄인 )임을 깨닫고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이다.
(갈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 죄 )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 약속 )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13절)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오니라”
1) 이제 형들의 생각은 “야! 정말 이렇게 일이 꼬이냐!” 하는 것이다. 이처럼 꼬이기만 하는 것이 ( 죄인 )들의 삶의 모습이다. ( 근본 )적인 죄가 해결되지 않는 한 사람들에게 평안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근본적인 죄를 해결할 ( 능력 )이 없음에도 이를 해결하려고 하다가 더욱 ( 어두운 ) 곳으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 빛 )이 비추어야 할 수밖에 없다.
2) 당당하던 형들의 기세는 봄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즉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인간의 죄가 드러나게 하시는 이유는,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겸비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롬 7: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 죽었 )도다”
14~34 유다가 요셉에게 과거를 뉘우치며 간절히 애원함
(20절) “우리가 내 주께 고하되 우리에게 아비가 있으니 노인이요 또 그 노년에 얻은 아들 소년이 있으니 그의 형은 죽고 그 어미의 끼친 것은 그 뿐이므로 그 아비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하였더니”
1) 결국 유다의 간청에서, 인간이란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 알고 ) 있다”라는 판단이 서지 않으면 절대로 죄를 ( 고백 )(= 인정 )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형이 죽었다”는 말은 “애굽의 총리가 사실을 모른다”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희생의 장본인인 요셉 앞에서 유다가 해야 할 진정한 고백은 “죽었고”가 아니라 “( 우리 )가 죽였고”라는 것이었다.
2) 그러나 죄인은 절대로, 스스로, ( 끝 )까지 죄를 고백하지 못한다. 결국 팔려간 장본인 요셉이 나타나야 죄가 고백되어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언약자손들의 죄가 ( 고백 )되어지게 섭리하시는 것이다.
창세기 제 24 강
3) 요셉이 형들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가장 ( 큰 ) 자이신 예수께서 완전한 용서를 하시는 예표이다. 이처럼 용서란 ( 장자 ) 된 자가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교회에서든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큰 자의 포용력이 문제를 풀게 되는 것이다.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요셉 - 영의 사람 / 형들 - 육의 사람 >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1) 인간에게 있어 제일 큰 문제는 육이 ( 영 )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종교적, 도덕적으로 ( 경건 )의 모양을 가진다고(= 유대인들 ) 해도 육는 ( 육 )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이러하지만 사람이 ( 하늘 )의 복을 받게 된다면 육의 눈으로 바라보던 세상을 영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2) 이런 점에서 요셉의 형들은 ( 육 )의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요셉이 알고 있는 ( 영 )의 세계를(= 꿈, 계시, 언약 ) 모른다. 즉 요셉의 시험 과정은 영적인 세계 안으로 언약자손들을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고 있다.
3) 육의 눈으로 볼 때 총리라는 권세는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총리라는 권세는 계시의 결과물로서 ( 영 )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를 알리시고자 요셉을 통하여 형들의 ( 육 )적 사고방식을 제거하시는 것이다. 그 방법은 은잔 사건을 통하여 형제들 모두를 \"은혜를 악으로 갚는\" 악한 ( 죄인 )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영과 육의 관계는 영생을 얻고자 예수께 찾아 왔던 부자 청년의 사건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마 19: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마 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1) 부자 청년은 인간의 ( 실체 )를 보여준다. 즉 인간은 그 누구도 “자신의 ( 것 )”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계명을 지키는 실천은 자신 있지만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예수님을 좇으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실천할 수 없었던 것이다.
2) 즉 부자 청년은 행위와 믿음의 문제를 보여준다. 믿음의 행위란 믿음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들어 내는 모든 행위는, 비록 그것이 율법의 실천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손해가 없는 행위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행위란 “나의 손해, 나의 희생, 나의 포기(= 부인 )”가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즉 종교를 빙자한 ( 거짓 ) 행위일 뿐이다.
3) 그러나 믿음의 행위에는 자신의 포기(= 부인 )와 버림이 있다. 그런데 이런 행위는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신 이 말씀은, 사람의 육이란 어떤 선한 일을 한다고 해도 ( 죄인 ) 그 자체로서 머물 수밖에 없는 ( 한계 )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이는 요셉이 일부러 \"독실한(= honest )\" 형들을 절도범으로 만드는 사건과 동일한 원리이다.
4) 즉 부자 청년은 이 말씀 한 마디에 그동안 율법을 지킨 공로는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오히려 ( 죄인 )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선과 악이란 ( 육 )의 차원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죄인이라면 더 이상 선과 악의 구분은 ( 무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