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연속설교 ‘생명의 복음’(116)
“십자가를 등에 지고 세상으로 가다”
(Take up the Cross and Go into the World)
요한복음 John 17: 9, 20
1.
제게는 들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지는 복음 성가가 몇 개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라는 찬송입니다. 앨버트 브럼리(Albert Brumley)라는 분이 쓴 ‘This world is not my home’이라는 찬송을 번역한 것인데, 그 1절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This world is not my home, I\'m just passing through.
My treasures are laid up somewhere beyond the blue.
The angels beckon me from Heaven\'s open door
And I can\'t feel at home in this world anymore.
저도 이 찬양의 가사의 핵심 내용에 대해서는 찬성합니다. 저의 신앙 고백과 일치하는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찬양의 가사를 피상적으로만 받아들일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믿는 사람이 이 가사를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동조하게 되면, 현실도피적인 태도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고, 믿지 않는 사람이 이 가사를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게 되면, 기독교를 ‘사교’(cults)와 별로 다름 없다고 오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이와 비슷한 찬양이 있습니다. 이것도 기독교인들 가운데 널리 불려지고 있습니다. ‘돌아서지 않으리’라는 찬송인데, 이것도 역시 ‘No Turning Back’이라는 미국 찬송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 3절 가사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 등 지고 십자가 보네
세상 등 지고 십자가 보네
세상 등 지고 십자가 보네
뒤 돌아 보지 않겠네
저도 이 찬양을 수 없이 많이 불렀고, 이 찬양의 메시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 찬양도 역시 부르는 사람들이나 듣는 사람들을 오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이 조심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입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하기까지 사랑하셨다는 뜻 아닙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라고 말해도 됩니까?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라고 말해도 됩니까? “세상 등 지고 십자가 보네. 뒤 돌아 보지 않겠네!”라고 노래해도 됩니까? 뭔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2.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부분을 읽었습니다. 이 부분을 잘 살펴 보면, 세상에 대해 우리가 취해야 할 바른 태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9절을 보면 “나는 세상을 위하여 비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위하여 빕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세상을 위하여 비는 것이 아니고”라는 말씀은 “세상을 위하여 기도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셨고, 이 세상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셨으며, 이 세상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다 바치셨습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에는 자신의 기도를 세상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집중하겠다는 뜻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머지 않아 이 세상을 떠나실 것을 내다 보시면서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위해서 헌신할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궁극적인 구원의 목표는 세상이지만, 그 세상은 하나님을 떠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등을 졌습니다. 그 세상을 다시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구원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에게 돌아와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일을 위해 제자들을 부르시고 3년 동안 그들을 애지중지 키워 오셨습니다.
이 기도를 할 당시의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시작하신 구원의 역사가 이 오합지졸의 작은 무리를 통해 이어져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3년 동안 함께 기거하면서 가르치고 훈련시켰지만, 그들은 아직 부족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무엇하러 예루살렘에 오셨는지도 모르고 누가 높은지를 두고 서로 다툴 정도로 형편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가망 없어 보이는 그들에게 이제 당신의 사역을 맡기고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니 그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예수님은 무엇을 구하셨습니까? 그분의 간구는 15절에 가장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에 그대로 남아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주님은 믿는 사람들이 세상 깊은 곳까지 적극적으로 침투해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세상을 등 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으로 들어가서 그곳을 내 집으로 삼아 정 붙여 살라는 것입니다. 다만, 그 세상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 세상 안에서 정 붙여 살아가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과 풍조와 흐름에 그대로 동조하여 살아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떠난 후, 제자들은 그러한 차별성 있는 삶을 계속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계십니다.
3.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다!”(We live in the world but don’t belong to it.)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주님의 바램은 ‘이 세상 안에서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일하려면 이 세상과 똑 같아서는 안 됩니다. 먼저 믿는 사람 하나 하나가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의 공동체가 구원의 공동체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같은 차별성이 있어야만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 각자를 위해 그리고 우리의 교회를 위해 이와 동일한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우리 각자가 그리고 우리 교회가, 성부 하나님께서 끔찍히도 사랑하시는 이 세상 안에 파고 들어가서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일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구원받은 사람답게 세상 사람들과 차별성 있는 삶을 살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 각자의 말과 행동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세상의 가치 기준과는 크게 달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살펴 보십시다. 우리는 이 세상을 등지고 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즉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고 하루 하루 힘겨운 일상을 대면하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세상 안에 머물러 살라”는 주님의 분부를 실행하고 있는 셈입니다. 요즘처럼 어려운 시기에는 매일 매일 고단한 현실을 대면하는 것만도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물론, 할 수 있다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상의 구원을 위해 적극적으로 세상 끝까지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아가기를 꿈꾸어야 할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그 다음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과연 하나님의 사람들답게 차별성을 드러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이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교회에 다니고 있으니 나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께서 물으시는 질문은 “너희가 교회 안에서 얼마나 달리 행동하느냐?”가 아니라, “너희가 세상 안에서 얼마나 달리 행동하느냐?”입니다. “너희의 가정에서, 너희의 직장에서, 식당에서, 마켓에서, 골프장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우리 한 번 냉정하게 우리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져 보십시다. 혹시나 믿는 사람으로서의 차별성이 교회 다닌다는 점, 술 담배를 피한다는 점, 식사하기 전에 기도한다는 점, 그리고 책상 맡에 성경책이 놓여 있다는 점 외에는 달리 없다면, 여러분은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 정도도 못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 현실이기는 하지만, 믿는 사람으로서의 차별성은 그 영역을 뛰어 넘어 더 많은 면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4.
우리 교회에서 처음 믿기 시작한 분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오래 전에 자신이 직장에서 모시던 상사가 있는데, 아주 독실한 교인이었습니다. 그 상사는 자기를 만날 때마다 교회에 다니라고 권했습니다. 아침에 결재를 맡으러 가면 죽 훑어 보고 도장을 찍어 주고는, “그런데 이 과장, 언제 교회 나갈래? 올 해는 넘기지 말아야지? 잘 생각해 봐!”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상사가 퇴근할 때가 되면 가끔 전화를 해 가지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과장, 오늘 회식이 있는데, 어디 물 좋은 데 좀 알아봐!” 그리고 술자리에서 그 상사는 믿음이 없는 사람보다더 더 추하게 행동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신앙 생활을 시작하는 데 있어서 그 상사에 대한 기억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직장에서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기가 매우 꺼려진다고 했습니다.
미국에서 개신교회의 상황을 가장 잘 조사하고 분석하는 연구소 중 하나가 바나 그룹(The Barna Group)입니다. 이 그룹에서는 1995년부터 정기적으로 조사를 하여 미국 기독교인들의 실태를 분석해 왔습니다. 중요한 윤리적 영역에 있어서 소위 ‘거듭난 신자’(born-again Christian)라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추적해 왔습니다. 투기, 노름, 마약, 인터넷 포르노, 탈세, 절도, 혼외정사, 가정 폭력, 인종차별, 물질주의 등에 있어서 믿음 좋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조사한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떤지 아십니까? 이 모든 영역에 있어서 스스로를 ‘거듭난 신자’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오히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상태가 더 나쁜 경우도 있었습니다. 혼외정사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거듭난 신자들 사이에서 약 2-3% 더 높았습니다. 교회에서 사랑을 너무 강조해서 그런 현상이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사랑이 그런 사랑이 아닌데…….
이것이 미국만의 상황입니까? 우리의 경우, 이 현상이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을 것입니다. 남편의 가정 폭력에 극심한 고통을 받고 힘들어 하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은 다니는 교회에서 믿음 좋은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번창하는 사업으로 인해서 교회에 가장 많은 헌금을 하는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집에서는 아내를 질식시킬 정도로 폭행을 가하고, 밤이면 룸살롱에서 돈을 물쓰듯 합니다. 실제로 우리 지역에 사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누군지 알아보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예는 우리 지역에 수도 없이 많습니다. 바로 여러분 옆에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일 수 있습니다. 아니, 바로 여러분이 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5.
이렇게 부정적인 이야기만 말씀 드려서 죄송합니다. 균형을 잡기 위해서 이번에는 이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분들의 이야기를 몇 가지 나누겠습니다.
제가 잘 아는 동생이 몇 년 전에 겪은 이야기입니다. 한 번은 회사 일로 중국에 출장을 갔습니다. 중국 회사는 그 동생의 회사에 물건을 팔아야 하는 입장이므로 이 동생에게 잘 보여야 했습니다. 후진국에서 늘 그렇듯이, 그 중국 회사는 동생과 그 일행에게 융숭한 대접을 했습니다. 온갖 별미 회식이 끝나고, 술자리로 이어졌습니다. 동생은 피하기 어려운 그 자리에 동석하여 어느 정도 조절해 가면서 어울렸습니다. 자리가 파한 후, 술취한 동료들의 뒷처리를 해 주고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호텔에서 막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누가 노크를 합니다. 나가 보니 중국 현지 회사측에서 보내서 왔다면서, 미모의 여성이 서 있습니다. 당황한 동생은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옷을 갈아입고 나와 그 여성을 데리고 다시 로비로 내려옵니다. 그리고는 서툰 영어로 미안하다고 설명한 후, 택시비를 주어 집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교회의 신실한 장로인 실장은 주일이면 어김없이 교회에 나가 봉사하는 분이고 그 사무실에서 제일 상사이니 당직 근무에서 예외입니다. 나머지 직원들이 모여 상의를 합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 황금 연휴에 사무실에 나와 일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 나름대로의 이유와 계획이 있습니다. 누구는 결혼 10주년이고, 누구는 연휴를 잡아서 부모님의 생신 잔치를 한다고 합니다. 날짜는 다가오는데 직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고 어쩔 줄을 몰라합니다.
이 사정을 눈치 챈 실장이 생각합니다. 자신은 아이들도 다 컸고, 그 기간 동안에 특별한 일도 없습니다. 보아 하니, 부하 직원들의 사정이 절박해 보입니다. 만일 자신이 당직을 자원하면 주일 예배를 빠져야 하고 아내가 화를 낼 법하지만, 기도할수록 왠지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당직을 서기를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아내에게는, 저녁 시간에 불러 내어 좋은 곳에서 외식을 하면 충분히 보상될 것 같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사정을 말합니다. 아내는 기쁘게 그 뜻을 받아들입니다. 그 다음 날 그는 부하 직원들에게 말합니다. 자신이 당직을 설테니 마음껏 연휴를 즐기고 오라고 말입니다.
한 가지 이야기만 더 나누겠습니다.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어느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이 교회는 잠실에 있는 본 교회에서 분립되어 새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 교회의 담임목사님은 주일 대예배 출석 교인이 1500명을 넘으면 분립시킨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 교회가 교회를 분립하여 새로운 예배당을 세우려 할 즈음에 있었던 일입니다. 장차 교회를 분립하면 사용하려고 사 놓은 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분립하려는 시점에 오니 그 지역이 교회를 세우기에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땅을 팔고 다른 지역에 땅을 사기로 결정하고 시세를 알아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땅은 처음 살 때보다 4배 정도 시세가 올라 있었고, 그 차액으로 교회는 40억(4 million dollars)의 차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두고 교인들은 대부분 좋아했지만,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세상이 모두 부동산 투기를 하여 돈을 벌고 있는데, 교회까지도 그렇게 하는 셈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설교를 통해서 믿는 사람들이 부동산이나 주식 투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는데, 자신의 설교와 반대로 행동한 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이 문제를 두고 기도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돈으로 예배당을 지어서는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중직들과 상의하고 교인 총회를 거쳐서 40억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했습니다. 예배당 건축은 성도들의 눈물어린 헌금으로 해야 마땅하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6.
어떻습니까? 이 세상 안에 머물러 있되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얼마나 멋진 것인지, 얼마나 속 시원한 것인지, 얼마나 마음 흐뭇하게 하는 것인지, 이 세 가지 이야기를 통해 알 것 같지 않습니까? 기왕에 믿는 바에야, 이렇게 멋지게 믿어 보고 싶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것이 남의 이야기이니 멋지고 시원해 보이지, 나의 경우였다면 어땠을까요? 뭔가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힘이 없이 이렇게 살려고 하면 아주 어려울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처럼 사는 것은 많은 대가를, 아주 비싼 대가를 치루도록 만듭니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했던 ‘제자됨의 대가’(the cost of discipleship)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값 없는 은혜’이지만,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은 비싼 값을 치루는 일입니다.
이 세상 안에 살면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려면, 두 가지 종류의 값을 치룰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스스로 자초하는 손해입니다. “하나님, 잠시만 눈 감아 주세요”라고 기도하고는 믿음과 양심을 제쳐 두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이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종류의 값은 이 세상으로부터 받게 될 미움과 소외와 압박입니다. 이 세상은 자신들과 달리 사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느낍니다. 회유를 하든, 왕따를 시키든, 박해를 하든,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런 사람을 제거하거나 자신들과 같게 만들려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 안에 살면서 이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자됨의 값을 치루기를 주저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기에는 치뤄야 할 값이 너무 커보이기에 지레 겁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비싼 값을 치루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처럼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비싼 값을 치루기에 기뻐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고 그 교회로 하여금 기꺼이 그 값을 치루고 세상과 달리 살도록 만들어 주는 것일까요?.
그 대답은 오늘 읽은 예수님의 기도에 담겨 있습니다. 14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그들을 미워하였습니다. 그것은, 내가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1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19절에서는 또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위하여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들도 진리로 거룩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있으면 그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은 ‘구별하다’, ‘분리하다’, ‘따로 떼어 놓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통해 거룩해진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이 세상과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억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그렇게 변화시켜 차별성 있는 삶을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답은 이를 악물고 더 힘써 노력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욱 더 말씀을 사모하는 데 해결책이 있습니다. 참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사모하고 사귀며, 그분을 통해 계시된 진리의 말씀을 품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있고, 내가 주님 안에 있는 상태에 머물러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말씀이, 그 진리가, 그 진리의 영이 우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7.
우리 세대는 ‘거룩함’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한 삶은 따분하고, 고리타분하고, 지루하고, 재미 없고, 틀에 박혀 있고, 앞뒤가 꽉 막혀 있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거룩함’이 아닙니다. 진정한 거룩함은 매력적입니다. 생명력이 있습니다. 창조적입니다. 신나는 삶입니다. 앞 뒤가 환히 열려 있는 시원한 삶입니다. 이 거룩한 삶은 때로 높은 값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그것처럼 재미있고 신나고 기쁜 삶이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3절에서 “내가 세상에서 이것을 아뢰는 것은, 내 기쁨이 그들 속에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고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기쁨이 우리 안에 있기를 바란다는 말씀입니다.
50년 정도 믿었으니 저도 경험으로 압니다. 이 세상 안에 살면서 말씀의 능력, 진리의 능력이 부족하여 이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말입니다. 그러한 삶은 우리에게 물질적인 이익을 안겨 줄지는 몰라도, 진정한 기쁨은 점점 고갈되어 갑니다. 반대로, 이 세상 안에 살면서 말씀의 능력과 진리의 능력으로써 차별성 있는 거룩한 삶을 살아갈 때, 물질적으로는 손해를 볼지 몰라도, 그 물질적인 손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신령한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때에만, 우리는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에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이같은 거룩한 사람들로 구성된 거룩한 공동체를 보기 원하십니다. 그것이 없이는 세상을 구원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세상 등 지고 십자가를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바라보고 거기서 진리의 능력, 말씀의 능력을 얻습니다.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를 등에 지고 다시 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 안에 머물러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안에는 이 세상에서 달리 얻을 수 없는 기쁨이 충만할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러한 삶을 통해 이 세상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아, 그렇습니다. 이같은 거룩한 삶이 우리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우리가 가는 모든 곳에서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같은 거룩의 능력을 얻기 위해 더욱 말씀을 사모하고 더욱 주님과 사귀기를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말씀의 능력으로 충만하여 거룩함을 이루고, 그로 인해 주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유용하게 쓰여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드린 기도이니, 우리가 같은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고 힘쓴다면, 이루어지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아멘, 주여! 주님의 뜻을 이루시옵소서!
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저희로 하여금 세상을 사랑하되
헤롯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처럼 사랑하게 하소서.
먼저 주님처럼 진리의 말씀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진리의 말씀으로 충만한 교회 되게 하소서.
그 진리의 능력으로
이 세상 안에 머물러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하소서.
그 값을 기꺼이 치룰 믿음을 저희에게 주시어
저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고,
저희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