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케 되는 것
성결케 되는 것
성결케 되는 것이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면 의도적으로 죄를 범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우리는 경험한다(갈 5:16-17). 그러나 한편, 언제라도 그리고 아무리 거룩함의 완전을 이룬 자라 할지라도 경험상 육체의 욕심이 완전히 사라져서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런 단계는 결코 없다.
다만 성령의 능력에 의해 진압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지속적으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대항하며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옛사람을 죽였다\'(롬 6:6; 갈 5:24)는 표현은 성결 능력의 근본적 현주소를 정확히 기술한 것이지만, 경험적으로는 우리의 자유의지가 지속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못할 때가 많으므로, 이럴 때는 \'죄를 죽이신\' 성령의 능력이 우리 영혼 속에서 구현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양면성을 인정해야 한다. 원칙적으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살던 옛사람이 죽었다. 그리고 경험적으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복할 때 우리는 이 성결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 불완전한 성결의 체험은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의지가 지속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는다는 안타까움에서 비롯한다. 만일 우리의 자유의지가 거듭난 이후 지속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만 따른다면, 우리는 결코 죄악을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옛사람의 죽음은 현재완료형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헌신에 대한 약속에 있어서 우리의 불성실이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결의 능력이 완전한 \'죄의 멸절\'을 이루지 못한 것처럼 경험되는 것이다.
육체의 욕망은 우리 안에 여전히 있다. 그것은 언제나 성령의 소욕을 대항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만을 위해서 자신의 의지가 지속성 있게 드려진다면, 죄와 육체의 소욕 그리고 율법의 요구는(갈 5:18) 우리 안에서 죽은 것과 같다.
고린도 전서 12장에 나오는 아홉가지 성령의 나타남은 성령충만한 자에게서 나타나는 외적 열매에 불과하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5장에 나타나는 아홉가지 열매는 성령충만한 자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 내적 열매에 불과하다. 이것들은 다같이 성령충만한 자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열매인 것이요, 성령충만의 실체는 \'그리스도의 왕되심\'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성결된 삶을 직접적으로 가능케 해주는 요인은 바로 주님께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 11:25).
이처럼 성결의 성패는 얼마나 내가 그리스도의 영을 충실히 따라 행하고 있느냐에 있기 때문에, 그 실제적인 성공의 비결은 주님을 끊임없이 바라보는 힘, 즉 사랑인 것이다. 이처럼, 성령에 의해 변화되어 차츰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 되어가는 것이 \'성결케 되는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성화의 영이다.
성결 그룹이나 오순절 그룹이나 이들 성령운동 전통의 깊은 초점은 하나님께 대한 열정이다. 다시 말하자면, 거듭난 신자의 영혼에서 솟아오르는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perfect love for God)을 강조하는 일은 이들 그룹 모두가 지닌 성령론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 사랑의 신학은 인간의 삶속에 형성되는 영적 공허함과 인격적 결함과 체계적 갈등과 같은 문제 속에 \'그리스도 닮기\'(Christlikeness)를 구현시키는 일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 닮기\'의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길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을 행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이러한 신념에 바탕을 둔 성령운동을 지속적으로 실천해 나간다면, 이는 곧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복음적 성령운동의 변함없는 핵심을 지속적으로 활성화시켜 나가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