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입장
은사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입장
이러한 성령의 능력에 대한 교회사적으로 다양한 입장들이 있어왔다. 따라서 여기서는 각각의 입장과 견해들을 살펴봄으로써 성령의 능력에 대한 보다 타당한 이해를 추구할 것이다.
성령의 능력에 대해 나름대로의 견해를 갖고 있는 입장은 크게 세대주의자들(cessationist), 오순절주의자들(Pentecostal), 은사주의자들(Charismatic), 제3물결주의자들(The Third Wave), 개방적이나 조심하는 자(Open but Cautious)들의 다섯가지 입장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세대주의자들은 1830년경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시작된 전천년주의자들의 운동으로 플리머드 형제단에서 유래되었으며 다비(J.N.Darby)를 중심으로 성경의 문자주의적이고 축자적인 영감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출생과 신성, 대속적인 속죄,
은혜에 의해 믿음으로 말미암는 영원한 구원, 경건한 삶의 중요성과 성령의 사역,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소망 등의 보수주의적 교리를 소유하고 있는 자들로서, 오늘날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들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예언, 방언, 치유 같은 은사들은 오로지 1세기에만 국한된 것으로, 사도들이 교회를 세우고 신약성서가 완성되지 않았을 때에만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1901년 미국의 오순절 부흥으로 시작된 오순절주의는 신약에 언급된 성령의 모든 은사들이 오늘날도 유효하며, 성령세례는 중생 이후에 두 번째 은총으로서 나타나며 외적인 증거로서 방언을 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은사주의는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은사갱신운동에 역사적 기원을 두고 있으며 신약에 언급된 모든 영적 은사들을 추구한다.
1980년대 새로운 갱신운동으로 오순절주의나 은사주의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고 자신들의 현재 교단에 만족해하는 소위 제3물결주의자들은 오늘날도 신약의 은사들을 사용할 수 있으며 복음 선포시 신약성서에서처럼 표적과 기사, 기적들이 동반되어야함을 주장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소개한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않길 원하는 부류가 있다. 그들은 오늘날에도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들이 나타날 가능성은 있다고 여기지만 지나치게 이 문제에 집중하는 것을 꺼려한다.
이들은 교회에서 전도와 성경공부, 개인과 교회의 성숙을 위해서 기적적인 은사보다는 신실한 순종을 강조하지만, 오순절이나 은사주의, 혹은 제3물결이 복음주의에 신앙과 예배 또는 기도에 있어서 영적 갱신을 가져다주었다고 평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 입장의 공통점은 오류가 없는 성서에 절대적 권위를 두고 삶의 모든 영역에 성서의 가르침을 적용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한 형제자매로서 기도나 예배 혹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써 매일매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갖는 체험을 중요시 여긴다.
모든 기적들 중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남의 체험이며 성령의 역사의 증거로써 거룩함과 신앙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 간과되지 말아야 함을 강조한다. 또한 치유와 기적은 오늘날에도 일어나며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신자들에게 능력을 입히어 다양한 사역과 봉사를 할 수 있게 한다.
성령의 능력을 입히는(empowering) 역사는 이전부터 \'기름바름\'(unction) 혹은 기름부음(anointing)이란 말로 사용되어져 왔으며, 성화와 하나님께로의 순종으로 신자들을 성숙케하는 성령의 내적 변혁의 힘에서 연유한 활동으로 인식한다.
성령은 하나님나라의 진전을 위해 이러한 능력들을 신자들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또한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이 순간마다 필요에 맞춰 성서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적용케 하시며, 신자들의 감정과 느낌에 영향을 주어 특정 상황에 성서말씀을 적용할 수 있는 통찰력을 주실 뿐 아니라 실제적인 삶에 구체적인 삶에 정보를 제공해주신다고 믿는다.
차이점은
첫째, 제3물결과 오순절주의, 은사주의는 예언을 은사라 부르지만, 세대주의는 성서에만 국한되는 은사로서 신약이 완성되는 순간 종료되었다고 한다. 개방적이나 조심스러워 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떠오르게는 하지만 이것은 개인적인 인도일 뿐 예언은 아니라는 입장을 취한다.
둘째, 기적에 대해서도 제3물결과 오순절주의, 은사주의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나타난다고 보는 한편, 세대주의자들은 사도시대에만 국한된 것으로 보며, 조심스러워하는 자들은 역사적으로 특별히 사도시대에 두드러진 것이지만 오늘날도 나타나기는 하되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셋째, 방언에 대해서 제3물결과 오순절 혹은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라기 보다는 인간의 기도와 찬양의 형식으로서 기도하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통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며 오늘날도 계속된다고 보았다.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을 교회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보기도 하였다.
한편, 조심스러운 자들은 오늘날에도 배제하지는 않지만 성서시대의 패턴과 목적과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세대주의자들은 신약이 완성되지 않았을 때에만 적용되며 만일 오늘날 그러한 현상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의미 없는 음절의 나열일 뿐이지만 어떤 이의 기도생활에는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입히는 역사를 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는 성령세례라 칭하였고 다른 입장들은 성령의 기름부음, 성령의 채우심, 성령의 권능 등으로 표현한다.
넷째, 기적의 목적에 대해서 세대주의자들과 조심스러워하는 자들은 1세기에 일어난 기적의 목적처럼 복음의 최초의 입증이라고 보았고, 제3물결과 오순절, 은사주의는 모든 세대에 복음을 증인이 되며 하나님의 백성이 필요를 채워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다섯째, 오순절주의와 은사주의는 성령의 능력을 입히는 역사는 신자들이 거듭날 때 한번이며 그 증거가 방언이라고 보는 한편, 다른 입장들은 때때로 그러한 체험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여섯째, 제3물결과 오순절, 은사주의는 신약시대의 교회의 생활 즉 윤리, 교리, 전도, 교회 행정 등 삶의 모든 영역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나타날 수 있으며, 오히려 왜 그러한 것들이 신약시대에만 국한되어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반면, 세대주의자들과 조심스러워 하는 자들은 사도들에겐 독특성이 있고 오늘날은 그러한 사도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신약시대와 오늘날은 다를 수밖에 없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위에서 나열한 차이점들 때문에 제3물결과 오순절주의, 은사주의는 교회에서 기적적인 영적 은사들에 대해 가르치고 격려하며 훈련시키는 것을 강조하지만, 세대주의자들은 교회안에 그만큼 장려하지 않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렇게 성령의 능력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견해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이견이 있다고 해서 어떤 입장의 견해가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모두 옳은 것이면서도 하나님의 진리의 어느 한 면을 서로 강조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리적인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능력의 참된 목적을 이해할 때 공통점을 찾아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c. 은사적 능력에 대한 문제점과 대책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 나타나는 위험성은
첫째, 성령의 능력 자체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여길 수 있다는 점이다. 성령의 능력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그리고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능력을 행사하는 사람 역시 오로지 하나님의 도구일 뿐이다.
자칫 잘못하면 능력 행사가 우선시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게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구원이 악의 세력을 제어하는 하나님의 능력 행사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능력에 뒤따라오는 휘황찬란한 영광에 현혹되기 시작하면 그 결과 성령의 능력 자체를 목적시 하여 자기의 영광으로 취해버리기 쉽다.
예수님이 능력을 사용하신 것은 항상 하나의 수단이었지 결코 목적이 아니었다.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낼 목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셨다. 따라서 능력 사용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능력 자체는 스스로 자신의 진리성을 드러내주기 않기 때문에 어떤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악으로부터 온 것이지 혼동이 있을 수 있다. 성서에서 보면, 바로의 마술사들도 표적들을 행하였고(출 7:10-22), 사단도 표적을 행하였기 때문에(살후2:9) 하나님과 관련되어서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표적과 기사 자체가 어디서 온 것인지 시험해 보아야한다.
셋째, 영적 능력의 절실한 필요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그리스도의 주되심보다는 감정에 이끌리기 쉬워진다. 체험과 감정은 기독교에서 중요한 부분이나 지나친 강조는 주관주의나 신비주의에 이끌리고 때로는 일종의 광신적인 집단이 형성되기도 한다.
따라서 성령의 능력은 언제나 고난과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능력의 근원은 고난에서 연유하였다.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깨어지기 쉬운 연약함과 하나님께 대한 의존성을 깨닫게 되고 같은 고난을 겪는 인간의 심정을 내 것인냥 헤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배울 수 있게 된다.
하비 콕스도 성령운동 신학자인 스티브 랜드(Steve Land)의 말을 빌어 성령과의 만남은 언제나 고통과 갈망을 수반한다고 하였다. 또한 고통은 세계를 재구성하도록 만들며 기존의 사고 행태를 벗어나 새로운 관점으로 삶을 바라볼 수 있도록 변화시킨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체험하기를 원하지만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능력을 행하는 사역자들의 겉모습을 보고 부러워한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보면 반드시 치러야 할 고난의 대가가 있었다. 고난과 함께 성령의 능력을 이해하는 것, 이것이 스스로의 영광에 도취되는 위험에 빠지지 않는 비결이다.
또한 하나님나라의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성령의 능력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를 동반해야 한다. 성령의 능력 체험을 신체적 기관인 동시에 인격의 중심과 초점을 가리키는 상징인 마음을 기관으로 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령을 통한 임재와 내주를 전인적으로 체험하는 변형적 신체험으로 이해함으로써 감각적이고 열광적이며 주관적인 신비주의에서 탈피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이성을 사용하여 하나님께로 온 것인지 악한 것에서 온 것인지를 분별해 내야 한다. 또한 성령의 능력의 성격이 공동체적이어야 한다. 초대교회의 사람들은 성령을 받자마자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유무상통까지 하였고 그리고 자기보다도 이웃이나 공동체에 봉사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내었다.
테오도르 런연(Theodore Runyon)은 성령의 바른 체험의 여섯 가지 표식을 제공하였다.
그것은 첫째, 주관주의를 초월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에 그 근원을 두어야 한다.
둘째, 마틴 부버의 나-너의 관계처럼 성령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변화되는 변형시키는 체험이어야 한다. 셋째, 기독교란 사회적인 종교이기 때문에, 받은 것은 서로 나누는 바른 실천이 있어야 한다. 넷째, 영적 실체를 매개할 수 있는 물질적 수단으로써 성례전적이어야 한다. 다섯째, 영들을 분별할 수 있도록 이성적이어야 한다. 여섯째, 미래를 지향하는 목적론적 체험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