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은 용서하決윱歐? (마18:21-35) 베드로는 용서에 대해서 일곱 번 이면 되겠느냐고 주님께 물었다. 유대인들은 신앙적 책무를 수치화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랍비들은 3회까지만 용서하라고 가르친다. 일곱은 완전숫자이기 때문에 일곱 번이라는 수치는 인간의 한계를 나타내는 숫자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일곱 번 이라는 용서의 제의는 예수님의 무한수치에 거부되어지고 만다. 예수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했다. 이것은 초월적이고 무제한적 용서와 완전히 용서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본을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셨다. 성경에서 가장 극적인 용서를 보여주는 사건이 돌아온 탕자이다. 실패하고 돌아온 아들을 비웃지도 않고 야단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품안에 안았다.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끌어안고 입을 뭊추었다. 아버지는 과거의 잘못을 문제 삼거나 역정내지 않았고, 대신 죽은 아들이 살아왔다고 기뻐하며 아들의 권위를 회복시키고 잔치를 열었다. 이전보다 아버지와 더 가까운 자리에 설 수 있도록 회복시켜 주었다. 그러나 아들 압살롬이 누이를 겁탈한 이유로 다윗이 반쯤 용서했을 때에, 압살롬은 절규하며 복수의 칼을 갈게 만들었다. 왜 주님은 형제를 용서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는가? (마18:23∼27) 이것은 일만달란트를 탕감받은 자가 백데나리온 빚진자를 탕감해 주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엄청난 죄의 빚을 조건 없이 탕감 받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형제의 허물을 사랑으로 용서하라고 명하는 것은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말로는 ‘용서 한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용서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원수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가?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내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내 영혼이 피폐해지기 때문이다. 시편 32:3-4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이것이 바로 용서받지 못한 영혼의 상태다. 그리고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겪게 될 영적인 아픔이다. 둘째, 용서하지 못한 마음은 몸을 해치는 결과를 낳는다. 잠언 27:3절에서“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 분노를 품고 사는 것은 무거운 돌이나 모래를 가득히 안고 사는 것보다 더 무거운 삶을 산다는 것이다. 우리의 몸이 돌보다 더 무거운 분노의 무게에 눌려 살아가는 데 어찌 건강할 수 있는가? 마음이 무겁고 답답함을 느낄 때에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나 생각해보라. 셋째, 용서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용서는 권면이 아니며 준엄한 하나님의 명령이다. 성경은 내 감정과 기분과 의지를 따라 용서하라고 하지 않는다. 용서에는 조검이 없다. 용서의 가장 큰 장애물이 있다면, 그건 용서 할 수 없다는 우리의 마음이다. 비록 모습이 위선적인 것처럼 생각되어도 이를 악물고 용서를 말하고 용서하도록 노력해야한다. 마음이 없어도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용서하기 시작하면 감정의 변화도 일어나고, 이런 용서의 횟수가 늘어나면 용서가 습관이 되어진다.(딤전4:7-8) 이것이 성화이다. 넷째, 원수를 용서해 주면 비로소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이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그 비밀을 용서할 때에 알게 되는 것이다. <맺는 말>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마치시며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형제를 원수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장차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께서 너를 용서해 주지 않겠다”(마18:35절)며 용서의 결론을 내린다. 무서운 말씀이다. 주기도문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게 했다. 갈라디아서 5:15은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한다. 원수를 용서하기를 결단하자. 이를 악물고 눈물 흘리며 용서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