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만 니의 <영적 전쟁>
죽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 씻음의 중요성을 모른다면 이것은 크나큰 위험이다.
씻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과 관련된다.
죄는 범죄의 근원일 뿐 아니라 더러움이기도 하다.
우리는 먼저 주님의 죽음과 연합하는 기초를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씻음을 구한다 하더라도 악한 본성은 여전히 우리를 더럽힐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오직 씻음이 가져다주는 축복만을 알 뿐 그 씻음을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신성한 기초를 의지하기보다는 그들의 체험을 더욱 의지하기 때문이다.
오직 주님의 죽음만이 악한 본성의 활동을 저지시킬 수 있다.
믿는 이가 믿음을 통해 주님 안에 거할 때만이 주님의 죽음은 죄의 종노릇에서 그를 자유롭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발생되는 한 가지 문제는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죄에 대하여 자신을 죽은 자로 여겼는데 또 무슨 씻음이 필요하냐?”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믿음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당신이 이러한 태도를 취하지 않거나 깨어 있지 못함으로써 당신의 악한 본성에 순종하여 더럽혀졌다면 당신에게는 씻음이 필요하다.
어떤 종류의 더러움이든 그것은 당신을 주님의 임재에서 떠나게 한다.
단지 마음속으로
“나는 주님의 죽음 안에 거하기 때문에 자유자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죄를 범했다면 반드시 주님께 그 죄를 자백하고 주님의 보혈의 씻음을 구해야 한다.
주님의 죽음은 단번에 이루어졌지만 이 보혈의 효능은 영원하다.
이것은 구약에서 붉은 암송아지로 예표되었다(민 19:2-22).
붉은 암송아지를 죽여 더러움이 있을 때 사용하도록 그 재만 남겨 두었다.
세상 죄인은 속죄를 위한 희생이 필요할 뿐 아니라 또한 여전히 이 희생의 ‘재’를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주님의 희생도 이와 같다.
죄를 자백할 필요도 없고,
보혈의 씻음을 구할 필요도 없는 정도에까지 이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러움은 안에서 올 수 있는가 하면 밖에서도 올 수 있다.
우리는 세상과의 접촉으로 더럽혀질 수 있다.
우리가 들이마신 도덕적인 공기로도 우리는 오염될 수 있다.
생명 안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 왕래하고 교통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항목이다.
우리는 시편 24편 3절과 4절에서 이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혼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원문 참조).
‘손이 깨끗하며’는 우리가 사물을 만지는 것을 언급한다.
민수기 19장은 의도적으로든 부주의하게든 무의식적으로든 사람의 시체를 만진 사람은 외면상 부정하게 되므로 구속받고 경배하는 무리와 끊어짐을 보여 준다.
이것은 물질적인 것보다 더 깊은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의 생명을 위해 열심을 내신다는 것과 사람이 죄를 만지면(사상이든 사물이든) 하나님과의 교통을 상실한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가운데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우리를 더럽히는 사물을 만진 적이 없다고 담대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그러므로 피 뿌림을 끊임없이 적용할 필요가 있다.
\'청결한 마음’은 생명의 근원을 가리킨다(잠 4:23, 마 15:18-19).
우리에게 있는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은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본성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벧후 1:4, 원문 참조) 하심이다.
오직 신성한 본성 안에서만 우리는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다.
믿는 이가 믿음을 사용하여 옛 본성을 십자가에 넘길 때만 이 신성한 본성이 우리를 다스릴 수 있다.
우리의 악한 본성은 보혈로써 씻는 것과 상관없고 오직 못 박혀야만 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롬 6:6),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 … 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악한 본성의 활동으로 생긴 더러움은 사람을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서 있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과의 교통을 끊어 놓는다. 씻음은 이러한 더러움을 제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혼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혼은 자애의 중추―교만, 곧 사람에게 드러나고 알려지며 높임 받기를 좋아하는 ‘나’―이다.
이것은
바로 흔히 “나는 그들과 같지 않아서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라고 말하는 영성의 교만이다.
영성의 교만은 가장 영적인 믿는 이의 마음속에 몰래 들어와서 그들을 더럽힌다.
이 영성의 교만을 가진 자는 다른 사람과의 교통을 차단하고,
남의 일을 교정해 주기를 좋아하며,
남의 흠을 잡기를 좋아하는 영으로 성도를 판단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그들도 빛 가운데 거한다면 그들은 서로 교통을 하게 된다.
즉 그들이 성도들과 교통을 나눌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들의 죄를 깨끗하게 한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요일 1:8)는 것이다.
스스로 의롭다 하는 것은 우리를 정죄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요일 1:9).
이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짓는 본성이 있음을 시인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씻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나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없다.
구원받은 죄인이 주님 앞에서 취할 자세는 바로 “내 죄를 시인합니다.”이다.
보혈을 믿는 믿음이 그를 위해 변호한 결과 그는 성도들과의 교통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