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내가 실상을 안다-(15)

내가 실상을 안다. 15

계시록 2:8-11

 

중국은 인구가 11억이나 됩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아시다 싶이 공산국가입니다. 죽의 장막이라고 불릴 정도로 폐쇄적인 나라가 이제 문을 열고 개방을 시작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 전도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중국에는 여건상 두 종류의 교회가 존재합니다. 공인 교회가 있고 지하 교회가 있습니다. 공인 교회는 정부가 인정하는 교회로 건물도, 목사도 있으면 정부에서 자금의 지원도 받습니다. 반면 지하 교회는 어느 성도의 가정의 골방이나 산 속이나 바위틈이나 숲 속에 비밀이 모이는 교회입니다. 물른 건물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지하 교회에는 많은 성도들이 모이는데 어떤 경우에 300명씩 모이는 교회도 있습니다. 중국의 교회는 대부분이 이런 지하 교회입니다.

공인 교회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공인 교회에는 불문율의 명령이 내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①.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을 하지 말 것. ②.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 하지 말 것. 그리스도를 만 왕의 왕이라고 하지 말라. 교회의 머리는 공산당이라고 가르치라고 합니다. 3.요한 계시록을 본문으로 한 설교를 하지 말 것. 다시 말하면 종말론적인 주제의 설교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인 교회가 이런 제재를 받았음으로 지하 교회는 자연이 이 세 가지 주제를 주로 해서 설교를 합니다. 지하 교인들은 주님이 다시 재림하신다는 메시지를 열심히 사모하고 경청합니다. 그래서 한국 방송을 듣고 보낸 편지에는 대부분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워 온 이 때에---\'라는 서두가 있습니다. 지하 교회는 종말론적인 메시지를 복음의 중심으로 하여 교회가 확장이 되고 철저한 그리스도적 신앙으로 무장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종말적인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종말적인 메시지란 믿는 우리들에게 구원이 완성되는 메시지이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어지는 메시지입니다.

 

여기 기록된 일곱 교회는 시대를 초월한 모든 교회의 대표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교회를 특징적으로 분류하면 이 일곱 교회 중에 하나가 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일곱 교회들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기도 하고 책망을 받기도 합니다. 즉 교회의 잘한 일과 잘못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내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독 서머나 교회만은 책망을 받은 일이 없이 칭찬을 받고 있어서 모든 교회 중에 가장 아름다운 교회, 모범 된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 서머나는 에베소 다음 가는 큰 도시였습니다. 오늘도 소아시아와 에게 해 주변 지역에서는 가장 큰 상업 도시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현재는 이즈미르(Izmir)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인구는 20만이 넘습니다. 그 중에 1/3 이상이 기독교인들입니다. 이처럼 서머나는 역사적인 도시입니다.

서머나라는 이름은 그 어원에 \'몰약\'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 말은 고난이라는 뜻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지금 큰 환난을 겪고 있습니다.

첫째, 이 환난은 전쟁이나 가난이 아니라 교회가 당하는 고난 즉 핍박과 고문과 처형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끌려가서 온갖 고문을 당하고 처형을 당하는 것입니다.

둘째, 재산의 몰수와 추방, 소금에 저린 가죽옷을 사막으로 추방되어 유리 방황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셋째, 모든 사회적 지위를 박탈당하고 일가 친척까지 고난을 당하는 연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서머나 교회가 격은 환난입니다.

저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하고, 추방을 당하고, 사형을 당하여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가난하게 되고 그 사회에서 소외되고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잠시 받는 고난이 아니라 100년도 200년도 더 오래 계속이 되는 고난이었습니다.

 

서머나 성도들은 이런 환난 가운데 에수님을 믿고 교회를 지켰습니다. 간혹 절망하고 낙심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견디기 어려운 시험이었습니다. 믿다가 낙심이 되어 교회를 떠난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성도들은 굳게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고난이 그들을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재산도 명예도 평화도 건강도 없습니다.

흔히 말하듯이 에수님을 믿고 복을 받는다. 평안을 얻는다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에수님에게 얻는 것이라고는 고난받게 없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서머나 교회의 실상이었습니다.

 

여기에 또 다른 고난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고난을 당할 때 누가 옆에서 위로를 해 주면 훨씬 견디기 쉬울 것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이 의로운 행위에 대해서 누군가 알아주는 사람이 있겠거니 하고 실제로 그런 식의 위로를 받으면 고난의 보람이라도 있을 것입니다.

 

에이즈에 걸린 사람의 가장 큰 고통은 병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를 이상하게 죄인 취급하는데 있다고 합니다. 꼭 부정한 짓을 해야 그 병이 걸리는 것이 아닌데도----

 

서머나 교회 성도들의 고난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할 때 견딜 수 없어 한 것은 그의 친구들이 그를 정죄하는 것이었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도 그런 고난이 겹쳐 있었습니다. 고난 속에 비난과 조롱, 몰이해와 오해가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습니다. 외롭고 때로는 부끄럽기 까지한 고통, 이것이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그런 시련을 당하고 이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2차 대전 말기의 이야기입니다. 온 세계를 손에 넣겠다고 광분하고 있는 히틀러를 보고 본 헤퍼 목사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히틀러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그는 히틀러에게 체포되고 캄캄한 감옥에서 처형 날짜를 기다립니다. 그는 감옥에서 편지를 썼는데 그것을 사람들은 본 헤퍼의 \'옥중 서신\'이라고 부릅니다. 그의 글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내가 고통을 당하는 것, 내가 매 맞는 것, 내가 죽은 것-- 이것이 그리 심한 고통은 아니다. 나를 참으로 괴롭게 하는 것은, 내가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는 동안 밖이 너무 조용하다는 사실이다.\" 그가 교회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바깥 사람들은 침묵을 하고 있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밖에 있는 사람들이 데모라도 해야 힘이 날텐데--- 정의를 위한 탄원서라도 내야 힘이 날텐데, 어쩌면 이렇게 철저히 조용한가라는 것입니다. 이 외롭고 정당한 투쟁에 왜 힘을 합하는 사람이 없는 가라는 것입니다. 왜 뜻을 같이하여 불의와 싸우는 사람이 없는 가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본 헤퍼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초대 교회도 같은 고통이 있었습니다. 더욱이 오늘 본문에서 본바 와 같이 거짓된 자들의 비방과 조롱이 있었습니다. 거짓 유대인들이 득세를 하여 의인 인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잘 섬기는 것 같으나 사실 사단의 하수인들이 세상을 지배한 듯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종들은 너무 약해서 힘이 없어 보입니다. 이런 것들이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킵니다. 충성심을 약화시킵니다.

 

요새는 큰 소리 내는 사람이 힘이 있는 사람 같습니다. 없어져 주었으면 딱 좋을 사람들이 세상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다고 큰 소리를 치고 다니는 것을 보면 사람 바뀌는 개혁을 느끼게 됩니다.

 

서머나 교회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악한 자들은 잘되고 진실한 성도들은 핍박이나 받고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사실을 미리 아시고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의인의 고난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지 말라. 우리 힘으로 우리 믿음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모순 투성이고, 무질서하고, 죄악으로만 가득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아무 것도 하시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실상을 안다. 너의 환난을 알고, 궁핍을 알고, 고난을 알고, 가난을 알고, 원수가 누구며, 그들이 너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안다. 그 잔인한 수법도 알고, 그들의 배후 세력도 알고, 모든 것을 안다. 그런데 너에게 또 한가지 아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사실 네가 가난한 것 같지만 부요한 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 보다 주님이 우리들을 더 잘 아시고 정확한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에 대하여 부요하다고 하시는 것은 그들의 믿음이 남다르기 때문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부요함을 의미합니다. 믿음에 약속이 있고, 믿음에 기업이 있고, 믿음에 모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어도 믿음이 없으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강하고, 믿음이 있으면 모든 것을 가진 자며, 믿음이 있으면 행복한 사람이고, 믿음이 있으면 완전한 사람이다 라고 하십니다.

 

기독교 역사에는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순교史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순교사의 금자탑이라고 하면 서머나 교회 감독 폴리갑의 순교입니다. 그는 2세기 초 중엽부터 서머나에서 복음을 전하던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86세까지 하나님의 교회를 섬겼습니다. 고결한 인격의 소유자인 그를 선도들은 물른이고 불신자들도 존경하고 흠모를 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를 핍박하는 사람들도 그를 존경할 정도였습니다. 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폴리갑을 죽일 수밖에 없게 된 사형 집행관은 말했습니다. \"감독님, 나는 이렇게 나이 많은 노인의 몸으로 비참하게 죽어 가는 것을 원하지 않오. 그러나 거짓으로라도 제발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말해 주시오. 그러면 당신을 놓아줄 구실이 생기지 않겠오. 자유를 얻은 다음에 어느 시골에 가서 당신이 좋아하는 예수를 전하든 말던 상관하지 않겠오.\' 그 때 그는 말하기를 \'86년 동안 나는 그 분을 섬겨 왔습니다. 그 분은 내게 아무런 잘못도 없고 거짓 말을 하신 일도 없으십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 분, 아니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한마디로 거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세계와 교회를 위해 두시간 동안 큰 소리로 기도한 후에 화형을 당했습니다. 얼마나 위대하고 당당한 죽음입니까? 당시 온 교회가 그의 순교를 애도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유럽에서는 해마다 폴리갑의 순교 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거행되고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결코 가난한 것도, 약한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위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약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그 교회는 부자 교회입니다. 믿음의 부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부자다.” 조금도 불행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자들 ‘스스로 잘 난 척하고 부자인 척하는 자들은 사단의 회’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잘난 것들을 유황불 못에 던지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역사, 인물, 자연, 영적인 것, 자연적인 것, 지나 간 일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 장차 일어날 일들을 모두 잘 아시고 계십니다. ‘주님이 아신다’는 말에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나타냅니다. 감사와 찬송을 나타내는 사람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두려움과 염려를 가지는 사람들은 죄인들입니다. ‘주님이 아신다’는 말에 무관심한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유일한 위로와 감사는 우리들의 모든 것을 ‘주님이 아신다’는 말씀에 다 들어 있습니다.

 

페루의 어느 지방에 성당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대단히 큰 교회여서 신부가 여러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유난히 한 신부에게만 열심히 고해 성사를 하고 다른 신부에게는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신부들은 이 일을 심히 불쾌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신부는 귀머거리였습니다. 신자들은 귀먹은 신부에게 죄 고백하기를 좋아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신부라 할지라도 알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말씀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속 깊은 진실을 누가 압니까? 하나님이 아시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아는 것 같지만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설혹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해도 문제를 해결하고 진실을 보존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의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 우리들의 진실을 보존하시고 은혜와 축복과 구원을 주십니다.

 

주님의 위로의 말씀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하십니다. 주님이 아시기에 어떤 환난, 어떤 오해, 어떤 핍박이 와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매우 귀한 말씀입니다. ‘충성’의 헬라어는 ‘피스티스’입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설명하면

첫째, 진리에서 출발하는 순수한 동기.

둘째, 매사에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독일에 한 경건한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가족도 없이 혼자 사는 이 노인은 외롭고 고독한 중에도 언제나 경건한 생활을 했습니다. 이를테면 길을 갈 때도 좋은 길은 놔두고 나쁜 쪽으로만 걷습니다. 주님에게 좋은 길을 내 드리고 자기는 나쁜 쪽을 걷는 것입니다. 식사를 하면서도 자기 자리보다 더 좋은 의자를 앞에 놔두고 음식도 좋은 음식을 앞에 두었습니다. 그것도 주님을 대접하는 마음이 그렇게 하게 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는 날 그 노인은 가장 좋은 의자를 자기 머리맡에 두게 했습니다. 그 분은 그 의자에 주님이 앉아 계시면서 자기의 임종을 보고 계시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노인의 장례식 때에는 하늘에서 이상하고 밝은 빛이 비추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충성입니다. 한 순간도 주님을 떠나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 늘 가장 좋은 것을 드릴 줄 아는 사람, 주님이 보시고, 주님이 아시고, 주님이 들으시고, 주님이 처리해 주신다고 믿는 사람, 그리고 그렇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아신다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아신다는 말씀 가운데는 우리들의 문제 해결,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모두 포함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아신다는 믿음, 그것은 우리들에게 최고의 행복이 되고, 지혜가 되고, 능력이 되고, 충성이 됩니다.

 

충성의

세 번째 특징은 진실한 중심을 가지고 성실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으로 진실한 것만이 아니라 그 진실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충성의

네 번째 요건은 인내입니다. 하다가 말면 아니한 것만 못하다는 우리 속담도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 부딪치던 주님이 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인내하여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두 가지고 해석을 합니다.

(1). 죽음에도 충성하라는 말씀입니다.

경제적인 손실, 체면, 명예 훼손, 죽음의 고통이 있어도 주님에게 충성하라는 말씀입니다. 죽은 한이 있어도 진실을 버리지 말고, 믿음을 버리지 말고, 사랑을 버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2). 숨을 거두는 그 시간까지 진실을 잃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대하는 바는 죽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도록 까지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이렇게 다시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네 실상을 다 안다. 그대로 죽어라. 죽도록 충성하다 똑바로 죽어라. 그러면 천국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주어 행복하게 영생을 얻도록 해 주마” 이것을 종말적 메시지라고 합니다.

 

누명을 벗겨 주겠다. 원수를 갚아 주마. 기어코 사람들 앞에서 너를 높이겠다. 물른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아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우리가 천국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쓰는 것과 비교하면 별로 가치 있는 일들이 아닙니다.

 

영생의 생명의 면류관, 그것이 충성하는 사람에게 약속하신 최고의 영광입니다. 주님은 구 최고의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여 최고의 영광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샘솟는 기름병 .16

왕하 4:1-7

 

우리는 열왕기 하에서 참으로 놀랍고도 이상한 일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를 이어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된 엘리사는 그의 스승의 뒤를 이어 여러 곳에 신학교를 세우고 선지 생도들을 지도하여 타락한 종교를 바로 잡고 하나님의 진리를 온 나라에 선포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나 지금이나 선지 생도들은 언제나 가난한 신세를 면치 못한지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선지 생도의 아내도 가난한 중에 남편을 잃고 먹을 것이 없어 죽게 되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빗을 지고 죽었는지라 체주가 와서 아이들을 데려다 종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 젊은 여인은 아무리 해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 선지자를 찾아가 이 사실을 말하고 도움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1. 하나님은 곤고한 날에 우리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남편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선지 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다가 그만 죽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온 나라에는 가뭄이 들어 흉년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두 아이들을 데리고 살길도 막막한 판에 남편이 빗까지 지고 죽었으니 빗 갚으라는 체주의 독촉에 견딜 제간이 없습니다. 더욱이 이제 와서는 그 체주는 아이들을 종으로 삼겠으니 빗대신 아이들을 내 놓으라고 성화입니다. 이런 고난을 四面 超過라고 할 것입니다. 進退兩難이라고도 할 것입니다. 이런 곤고한 형편에서 이 여인은 신비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이 은혜로 인해 죽음의 공포와 시련과 외로움을 이기고 힘겨운 인생살이에 큰 용기를 가져 승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샘솟은 기름병의 은총은 곤고하고 괴로운 자에게 임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22:24)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시34:6)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라고 하셨으며 “(전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난 한 해를 보내면서 곤고한 날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슬프고 좌절되고 낙심되는 날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럴 때마다 우리들에게 샘솟은 기름병과 같은 은혜를 주셔서 그런 일들이 더욱 은혜가 되도록 해 주셨습니다.

 

2. 그 여자는 곤고한 날에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전12:1)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라고 솔로몬은 말씀했습니다.

“(왕하4:1)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 중에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체주가 이르러 나의 두 아이를 취하여 그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그렇게 그 여자는 엘리사를 찾아가서 그 사정을 말했습니다. 엘리사는 쓸어져 가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엘리사를 찾았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찾은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따뜻하신 말씀을 들으십시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는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모든 것을 말씀드리고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주님을 찾아 도움을 구해도 하나님의 응답이 시원치 않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표준이 되어 내 욕심으로 저울을 삼아 하나님의 도우심을 저울질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일어 나는 모든 일들이 합심하여 선이 되도록 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을 찾았을 때 찬송가의 말처럼 손들고 주님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들이 만든 해답을 제시하면서 이 해답대로 점수를 먹여 주시라고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자기를 찾아 온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마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보건대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결정하고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한 해를 마지막 보내시면서 한 해를 잘 살았느냐 못 살았느냐를 평가할 때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얻었느냐 그렇지 못했느냐로 따지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살았느냐 못 살았느냐로 결산을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높은 영광을 얻었다고 해도 그리스도의 형제가 되지 못하였다면 잘 사는 것이 아니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고 해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당신의 형제와 자매로 생각해 주셨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3. 이 여인은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선지자에게 말했습니다.

남편이 없다는 것, 자식들이 종으로 팔려 가게 되었다는 것, 집에는 기름 한 병밖에 없다는 것, 그런 자기는 어떻게 이 일을 수습할 수 없는 무능한 인간이라는 것, 이런 일들이 결코 자랑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살다가 식구들을 빗 더미 위에 앉혀 놓고 죽어 버린 남편, 사정이야 어떻든 참으로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아이들을 빼앗기도록 그냥 세월을 보낸 그 여자도 딱한 사람입니다. 물른 여러 가지 노력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결과는 노력을 해 보나 마나 가 되었습니다. 자식을 둘이나 낳게까지 이 부부는 어떻게 살았기에 다른 사람 같지 않게 기름 한 병밖에 남아 있지 않아 죽게 된 사람들이 되었는지 한심합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면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도와야지 삶의 의욕이 없고 노력하지 않는 개으름뱅이는 도울 가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사야가 주님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마12: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마12:18)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마12:19)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마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마12:21)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와 같은 사람들, 꺼져 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무능한 사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호기심으로, 동정심으로, 걱정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사랑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고 주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금년에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어떻게 얼마나 받고 살아 왔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4. 이 여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순종했습니다.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여 많이 빌려 온 그릇의 수와 양만큼 기름으로 채움 받은 여인 (왕하 4:5-6).” 순종이라는 것은 믿음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기적과 이적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축복입니다.

 

원래 성경의 순종이라는 말은 듣다, 청종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말씀을 단순히 수동적으로 듣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청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흔히 순종이라고 하면 죄들을 범치 않으려고 기를 쓰고 애를 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의미의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와를 배반하는 것은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참된 순종은 말씀이 부족한 채 무작정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골수까지 쪼개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 우리로 죄를 미워하고 죄를 짓지 않는 생애를 살도록 할 것입니다. 이것이 구속의 과학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는 하나님의 구속의 과학의 진수입니다. 자, 이제 우리 속에 말씀이 충만하게 하여 말씀의 능력이 우리 안에 역사 하는 체험을 하도록 합시다.

 

한 늙은 스코틀랜드 사람이 작은 배의 노를 저으며 승객을 실어 나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손님이 그 노인의 한쪽 노에는 \'신앙\', 그리고 다른 노에는 \'옳은 행위\'라고 새겨져 있는 걸 보았습니다. 이상히 여긴 그는 이 의미를 물었는데 그 노인은 \"자 보시오\"하며 \'옳은 행위\'라고 써 있는 노만 저어 보였다. 그러자 배는 원을 그리고 뱅글뱅글 돌기만 했다. 바꿔서 \'신앙\'이라고 쓰인 노만 저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나서 노를 둘 다 함께 젓자, 배는 물살을 가르며 재빠르게 나아갔다. \"보십시오, 이것이 기독교인의 생활 방식입니다. \'믿음 없는 메마른 행위\'는 소용없으며 \'행동 없는 믿음\'또한 죽은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옳은 행위\'의 두 개의 노를 함께 젓는다면 안전과 발전과 은총을 모두 얻을 수 있습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어머니 생일날을 맞아서 많은 축하객들이 참석했습니다.. 그 중 어느 분이 대통령 어머니에게 묻기를 \"어머님은 어떻게 아드님을 위대하게 만드셨습니까?\" 이 물음에 \"예, 나는 아들에게 하나님께 대하여 절대 복종할 것을 가르쳐 주었을 따름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조지 워싱턴이 위대한 사람이 된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복종하는 사람이었기에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한 표준은 순종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순종이라는 것을 물른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말씀합니다.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5. 그리고 그 기름병에서는 그 여인이 빗을 갚고 두 아이와 함께 살만큼 기름이 나왔습니다.

한없이 쏟아져 그 기름을 팔아 거부가 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잠30:8) 곧 허탈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 시옵소서 (잠30: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이외의 것을 욕심 내는 것을 성경은 탐욕이라고 하고 탐욕을 사술을 베푸는 죄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받은 기름병의 은혜는 바로 이런 것이 였습니다. 부자는 아니지만 쓸 수 있을 만큼 주신 하나님! 쌓아 놓고 교만할까 하여 쓰는 것만큼 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6.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들에게 있는 기름병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지난 한 해 동안 기록한 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세상에는 10대 뉴스가 있고, 우리 나라에는 20대 뉴스가 있습니다. 이 뉴스들은 모두 우리들을 슬프게 하고 좌절하게 하고 불행하게 한 일들이 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10대 뉴스를 주시지 않았고 5대 뉴스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있도록 인도하시고, 일상 생활 속에 감사가 넘치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 나라 옛 속담에 무소식이 좋은 소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난 한 해에 이렇게 엄청나고 놀라운 소식이 없었음이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엄청나게 부자 되게 하고, 우리들을 천사 되게 하는 것은 아니 였지만 우리 교회가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는 물질을 주시고, 어려운 문제를 쉽게 해결해 주셨으며, 우리들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고, 우리 모두에게 신령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교회뿐 아니라 여러 성도 님들의 가정에도 이런 적절하고 필요한 은혜가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세상을 떠난 일이 있었지만, 그것도 위로가 되는 일들 이였고, 어려운 일이 있었다고 해도 삼풍 백화점 무너지는 것 같지는 않았으며 대통령이 잡혀가는 일들은 아니 였을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이 안 되였다고 해도 계속 기도를 하면 결국 그 기도를 하나님이 다 들어주실 줄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샘솟는 기름병의 은혜입니다. 즉 때를 따라 주시는 은혜입니다. 슬플 때는 위로를 주시고, 굶주릴 때는 먹을 것을 주시며, 외로울 때는 친구가 되어 주시고 고통 당할 때는 힘이 되어 주시는 은혜가 기름병의 은혜입니다.

죄를 지였을 때는 사죄의 용서를 주시고, 우리가 우리들을 스스로 높여 교만할 때는 타일러 낯아 지게 하시며, 풍성하고 풍요할 때는 감사하게 하시고, 인색할 때는 넉넉함을 알게 하시는 은혜가 기름병의 은혜입니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지난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보다 우리들에게 더욱 유익한 것을 공급해 주시고 나누어주시며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들의 일에 바빠서, 죄를 지어, 불신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불만이 있어 하나님을 멀리하고 잃었을 때도 주님은 기름병의 은혜를 주셔서 항상 우리들의 영적 곤고함과 육신의 피곤함을 견디게 해 주시고 새로운 새 해를 맞을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시였습니다.

 

그 여인의 기름병은 자기 집에 있는 모든 기름병도 모자라 이웃에 있는 기름병을 빌려 기름을 다 채워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름을 팔아 빗을 갚고 아이들과 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우리들의 심령에 성령의 기름병을 주신 하나님! 채우시고 채우시는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기름병이 비워졌다는 것, 한 병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지금 가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이 주신 기름병을 쏟아 붓기만 하면 얼마든지 다시 채워지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기름병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던 사람들, 특히 제자들은 남은 물고기와 떡을 바라보면서 순간적인 걱정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걱정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엄청난 감격과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5,000명이 다 먹고도 12바구니가 남도록 계속 솟아나는 물고기가 든 바구니와 떡이 든 바구니의 체험이 우리들에게 있었음을 이 시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옥토를 가진 사람의 마음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까닭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3:23) 좋은 땅에 뿌리었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되느니라 하시더라”

 

오늘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주신 신령한 기름병이 있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기름병을 성경에서는 성령님의 도움이라고도 하고 기도의 응답이라고도 하며 말씀의 축복이라고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 시간 여기까지 우리들을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새해를 맞이하도록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