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행적
(마27:31)
\'희롱을 다한 후…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화가 \"렘브란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그 십자가 주위에 서 있는 군중들 속에 전체 그림과는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을 한 어느 남자를 그려 넣었습니다. 이에 대해 세인들은 그 남자가 화가인 렘브란트 자신일 거라고 추측하였습니다. 왜 렘브란트는 시공을 초월하여 자신이 주님의 십자가 옆에서 있기를 원했을까요? 그것은 고난 당하신 주님을 통하여 자시니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도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렘브란트처럼 주님께서 고난 당하신 그 장소에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고난에 함께 동참함과 동시에 고난의 의의를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I. 최후의 만찬(눅22:7)
주님의 일생은 탄생 때부터 시작하여 십자가를 향한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실 때가 이르자 제자들에게 최후의 만찬을 베푸셨습니다(눅 22:14). 이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베푸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시면서 떡은 자신의 살을, 포도주는 자신의 피가 됨을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죽음은 단순한 형벌의 대가가 아닌 인류를 위한 자발적인 희생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눅 22:19). 이는 주님의 희생을 제자들이 영원토록 기억함과 동시에 제자들 또한 주님의 본을 받아 세상을 위해 자신들을 희생해야 함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만찬을 생각할 때마다 성도는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리라는 각오를 다져야 하겠습니다.
II. 겟세마네의 기도(마 26:36)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주님께서는 드디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처절한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기도로써 십자가를 맞이할 마지막 준비를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우리에게 절대자의 모습을 보여 주시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똑같은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지금부터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한 마리의 어린 양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겟세마네에서 하신 기도는 우리에게 기도의 바른 자세에 대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심으로 겸손을 보이셨고,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기까지 힘쓰고 애쓰며 간절하게 기도하셔서 기도의 자세를 보여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때의 주님을 가리켜 \'심하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히 5:7) 고하여 주님의 기도가 얼마나 뜨거웠던 호소였는지 증거하였습니다. 또한 주님의 기도는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도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를 \"하나님을 움직이는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올바른 기도는 주님께서 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III. 가룟 유다의 배반(요13:12)
어떤 사람들은 유다를 미화시켜 애국자나 인간적인 휴머니스트등으로 곡해를 해 왔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2:6에 보면 그를 도적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파는 일에서만 도적의 본성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물질에 대한 탐욕이나 위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이었습니다(막14:3-11). 그러므로 가룟 유다가 주님을 배반한 것은 그의 선택이었지 하나님의 예정과 계획이었지만 유다는 자신의 욕심을 따라 주님을 배반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자신의 제자에게까지 배신 당하는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가룟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성도라 칭함을 받았지만 자신의 신앙과 삶을 관리하는데 실패하면 유다의 길을 걸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Ⅳ. 재판을 받으심(막14:53)
체포되어 가야바의 재판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본격적인 고난은 시작됩니다. 가야바와 장로들은 주님을 죽이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공회는 낮에만 모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밤중에 공회를 소집하여 거짓 증인을 내세우고, 판결도 받기 전에 이미 주님을 죽이기로 작정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불공정한 재판은 헤롯이나 빌라도의 법정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에게 불공정한 재판까지 받으시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처럼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사 53:7)묵묵히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V. 사형선고를 받으심(눅 23:23)
그리스도께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신고를 받으심은 불의한 인간들의 잘못된 재판과 사악한 군중들의 그릇된 선택을 보여 줍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빌라도에게 넘겨 그에게 사형을 요구하지만 빌라도는 주님의 무죄함을 알고서 명절 때만 단행하는 사면령을 내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바라바라는 살인 범을 대신 놓아주고 예수를 죽일 것을 요구합니다. 그 군중들은 불과 며칠 전만하더라도 주님께 찬양을 올렸던 자들이었습니다(마 21:8). 그러나 닷새 만에 그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선동에 의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러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 인간들에게 철저히 외면 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VI. 십자가를 지심(마 27:38)
드디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모함하여 죽이려는 자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큰 사랑과 희생과 용서는 없을 것이다. 이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죄악에 빠져 있는 인류를 위한 속죄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요 19:30).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도리어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때 승리의 기쁨만을 느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그토록 처절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음도 함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화가 렘브란트가 주님의 십자가 곁에 서 있기를 원했던 것은 자신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과 동시에 구원의 확실을 느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다시 한 번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이를 통해 주님께 큰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연구1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
(눅22:7)
그리스도의 만찬을 흔히 \"최후의 만찬\"이라 칭합니다. 또 교회에서는 성찬이라고도 부릅니다. 우리가 이 그리스도의 만찬을 생각할 때 어떤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연상하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만찬은 그처럼 예술적 상징으로만 그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있어서의 그 만찬자리라는 당신의 거룩하신 고난에 대한 \'영원한 예표\'를 준비하시며 구원의 언약을 제정해 놓으신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그 만찬 석상을 \'성례전\'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놓고 주님 오실 때까지 영원히 기념하며 \'성찬식\'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고난 주간을 맞아서 우리가 주님의 최후의 만찬자리를 살펴봄으로써 \'고난 중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해 다시금 숙고해 보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I. 자신의 고난을 위한 자리를 준비하신 그리스도(눅 22:7)
성경은 먼저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자리를 어떻게 준비해 오셨는지를 우리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유월절 양잡을 무교절에 이른지라\'(7절). 유월절의 핵심은 바로 \"희생의 양\"을 잡는 명절의 첫날 저녁입니다. 그날 유대인들이라면 가족단위로 희생의 양을 잡아 가족끼리 무교떡과 쓴나물을 먹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그 만찬자리를 마련해야 했는데 주님은 이미 그 자리를 준비해 오고 계셨음을 성경은 증거해 줍니다. 일설로는 \"마가의 다락방\"이라고도 전해집니다. 그러나 그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의 최후의 만찬자리를 벌써부터 준비해 오고 계셨다는 점이 중요한 점입니다. 익히 알거니와 유월절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적 \'예표\'입니다(고전 5:7). 이스라엘 민족을 어린 양의 피를 통해 애굽으로부터 구출해 내신 하나님께서 이제 그 어린 양의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실 근거를 마련코자 하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을 바로 앞에 두신 주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을 먹을 자리를 미리부터 준비해 오고 계셨다는 사실을 무엇을 교훈해 줍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의 \'양면적 속성\'을 익히 인식하고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해 줍니다. 만왕의 왕이신 이께서 영광의 권좌보다도 세상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실 자리를 늘 바라보고, 준비해 오신 것처럼 우리도 성도로서의 영광과 축복만을 바라는 삶을 살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고난의 자리\'에 들어갈 것도 늘 예비하고 살아야 하겠음을 늘 염두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는 영광뿐만이 아니라 의와 진리를 위해 고난스러운 삶이 필경 따른다는 사실을 늘 인식하고 그 자리에 들어가서도 당황하거나 절망치 않도록 늘 예비하는 마음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II. 타인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신 그리스도(눅 22:19)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눅 22:15)고 주님은 그 자리를 마련한 심정을 밝히셨습니다. 그 유월절 만찬자리를 오직 당신만을 위하여 준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제자들을 위하여 준비해 오셨음을 고백하신 것입니다. 이 만찬석상은 곧 교회의 \'성찬의식\'으로 성화되어 오늘까지 지켜져 오고 있습니다. 떡과 포도주로 배병, 배잔하사 \'대속의 언약\'과 함께 성찬예식을 제정하신 자리가 바로 유월절 최후의 만찬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제정된 언약과 성찬을 통해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의 근거\"를 선물로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찬의 의미에 대해 증거하기를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고전 10:16)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고난을 기념하는 그 자리를 오직 죄인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언약의 선포\'자리로 예비해 오셨던 것입니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는 자리를 우리에게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 자리로 만들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고난 당하는 일을 거룩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자리가 우리만을 위한 자리가 되어서는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처럼 내몸과 살을 이웃을 위하여 주는 자리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우리가 환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고후 1:6)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III. 희망의 교두보로서의 만찬자리를 마련하신 그리스도(눅 22:18)
\'내가…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18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16절). 주님은 이처럼 최후의 만찬자리에 드시기 전에 하나님 나라에서 온전한 \'유월절 만찬\'을 드실 것을 두 번이나 언급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맹세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유월절 만찬 후에 닥칠 고난과 수모와 죽음만을 생각하고 계셨다면 그와 같은 말씀을 할수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이 만찬 후에 더 온전한 만찬을 바라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히 12:1)라고 증거했습니다. 주님은 그 만찬자리를 고난 당하시기 전의 \"석별의 자리\"나 \"실패자의 자축자리\"로 마련하신 것이 아니라 승리와 부활과 사역 성공을 축하하고 확신하는 자리로 여기셨던 것입니다. 땅에서의 생명 종식을 아쉬워하는 자리가 아니라 당신의 성도들과 영원한 하늘나라의 식탁을 마련하는 자리로 그 만찬을 축복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는 \"최후의 만찬\"이 없습니다. 성경은 부활 후에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다시 음식을 드셨다고 증언해 주기 때문입니다(눅 24:41 행 9:40). 여러분 우리 성도들에게는 \"최후의 만찬\"자리는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고난의 자리에 들지라도 그 자리는 패배와 자멸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승리를 상급으로 받는 \"교두보\"임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만찬은 오래 전부터 예비되어 온 그리스도의 희생적 삶을 예표해 주는 자리입니다. 또 온 인류를 위한 구원 언약을 구체적으로 제정 선포한 자리이며 승리와 부활을 확신했던 희망의 자리임을 재인식하고 이 고난 주간의 의미를 다시금 음미해 봅시다.
연구2 겟세마네의 기도
겟세마네의 기도
(마25:36)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의 장소를 십자가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들이 유의해야 할 점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 당하심 못지 않게 심혈을 다하신 사투를 벌이셨던 장소가 있음을 극복하사 끝내 십자가를 지실 수 있는 힘을 얻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 겟세마네 기도는 필경 고난적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 성도들에게 기도의 가치에 대해 필수적인 교훈을 해 줍니다. 함께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살펴봄으로써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I. 기도는 성도의 삶에 필수적 요소임을 가르쳐 줍니다(36절)
1. 교회의 공통적 사명 때문임(36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주님은 겟세마네 동산까지 몇몇 중요한 제자들과 동행하였습니다. \'겟세마네\'는 \"감라유를 짜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지명입니다. 이제 주님은 자신에게 주신 아버지 사명을 이루시기 위한 \"최후의 결단\"을 하시려고 그 곳에 가신 것입니다. 눅22:44에는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신 곳이라고 증언해 줍니다. 마치 기름틀에서 감람유를 짜듯 주님은 혼신을 다하여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의 의지를 다지시고자 겟세마네로 가신 것입니다. 그 투쟁의 장소에 당신의 제자들을 함께 데리고 가셨다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 누구나 그리스도처럼 \"선교의 사명\"이 주어졌으며 그 사명을 위하여 다 함께 기도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교훈해 주는 것입니다(행 4:29).
2. 성도의 개인적 한계 때문임(37절)
\'베드로와 세배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우리는 이 귀절에서 그리스도의 연약함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고뇌와 슬픔을 표출하신 것을 통해서 우리는 참하나님 이전 참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성을 극복하시기 위해 분연히 겟세마네의 기도의 장소를 찾으신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영위하자면 우리의 인간적 한계로는 불가능 합니다. 오직 주님처럼 한계를 느끼실 때 기도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나의 온갖 애로점을 털어놔야 합니다.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라\'(시 32:6)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II. 주님의 기도에 동참해야 할 의무를 가르쳐 줍니다(38)
1. 주님의 고뇌에 동참해야 함(38절)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주님은 함께 간 제자들에게 함께 기도해 줄 것을 명하신 것이다. 우리는 전지전능하신 주님께서 왜 그토록 고뇌와 슬픔에 잠겨 있어야 했는지 의아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분이셨기에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알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제가 유다의 배신, 정치 지도자들의 사악한 음모, 따르던 백성들의 배신과 그들에게 불원간 닥쳐올 심판과 파멸 등을 아시고 계셨기에 신음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신의 고뇌에 제자들도 함께 동참해 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그와 같은 그리스도의 겟세마네의 고뇌를 교회를 통해 살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뇌는 바로 우리 성도라면 누구나 이 땅에서 본능적으로 해야 할 고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외면하고 자꾸만 죄악의 길로 치달려가는 이웃의 무지와 불의를 보고 한숨과 비탄의 기도를 올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처럼 괴로워하고 이웃을 위하여 기도하는 성돠 바로 겟세마네의 주님의 기도에 동참하는 성도입니다.
2. 사탄과의 싸움에 동참해야 함(41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이 말씀은 졸고 있는 제자들에게 오사 명하신 내용입니다. 여기서 \'시험\'을 들게 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사탄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기도는 대국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시려는 투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선교 초기 때부터 사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심을 훼방해 왔었습니다. ㅅ비자가에 주님께서 달리셨을 때에도 사람들을 통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 올지어다\'(마 27:42)라고 유혹한 사탄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는 그리스도를 더욱 유혹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성업을 훼방한 사탄은 오늘도 성도의 삶과 사명을 어그러뜨리는 길로 유도하려고 시험할 것입니다. 성도들 역시 그리스도와 같은 싸움을 사탄과 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 사탄의 시험과 유혹을 늘 깨어 기도하심으로써 이기셨던 그리스도처럼 성도들도 기도하여 성령님의 권능을 힘입어 싸워야 하겠습니다.
III. 기도의 본질을 가르쳐 줍니다(39절)
겟세마네 기도는 우리에게 기도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사\'(39절). 이 그리스도의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고백이 바로 기도의 원형이요 본질입니다. 기도란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에 상대적인 나의 뜻을 종속시키는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기도를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대화에는 결론이 필요할 것입니다. 결론 없이 자기주장만 피력하는 대화란 무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대화에서는 결국 인간의 순복으로 결론이 나야 마땅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절대 거룩하시며 오류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성자되신 그리스도께는 성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순복시켰다면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늘 겟세마네의 결단을 우리 삶에 적용시켜야 할 것입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46절). 이 말씀이 겟세마네 기도의 결과입니다. 주님은 분연히 당신의 고난과 죽음의 길로 몸을 떨쳐 일어나 가신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에 동참함으로 써 모든 고난을 능히 이기는 힘을 얻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연구3 가룟 유다의 배반
가룟 유다의 배반
(요13:21)
하나님의 원수는 지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을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십자가의 원수\'가 교회내에 있음을 슬퍼한 적이 있습니다(빌 3:18). 이렇듯 하나님나라의 고통은 외적인 박해나 환난보다도 내적인 변절자나 불순자들로 인해 고난당할 때가 많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슬픔과 고통의 \"촉매\"역할을 한 것이 바로 제자인 가룟 유다의 배신 사건입니다. 이 가룟 유다의 배신 사건은 교회의 영원한 \"경계표\"로 삼아야 합니다. 함께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I. 배신의 동기(요 13:2)
1. 탐욕(요 12:6)
어떤 사람들은 유다의 배신의 동기를 매우 고차원적인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추론하기도 합니다. 즉 유다의 민족주의자인 고로 그리스도를 궁지로 몰아 넣어서 그분의 능력을 발휘케 하여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려고 했을지도 모른다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증언을 모두 추론보다 우위에 두어야 합니다. 성경은 그를 \'도적\'(요 12:6)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를 늘 가까이에서 눈여겨 보았던 요한 사도가 그의 행동과 사고의식을 \'헌금궤에서 잔돈을 훔쳐가는 좀 도적\'으로 고발한 것입니다. 이렇듯 유다의 인간성을 세속적 \'탐욕\'으로 얼룩져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가 다른 고상한 동기로 주님을 배신했었다면 좀스럽게 \'은 삼십냥\'의 헌금에 주님의 거처를 종교 지도자들에게 알려 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주려느냐?\'(마 26:15)는 구차스러운 질문 속에서 우리는 유다의 장사꾼 같은 저속성을 엿볼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유다의 배신의 내적 동인은 \'탐욕\'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탐욕이란 주님보다 이 세상을 더 사모하고 사랑하는 원죄의 뿌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탐심을 \'우상 숭배\'차원에서 해석합니다(골 3:5). 야생마 무리를 잡으려면 그무리를 인도하는 리더를 먼저 잡아야 한다고 합니다. 리더 야생마만 잡으면 나머지 말들은 자연히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어떤 죄성보다도 세상을 사랑하는 \'탐심\'부터 주님 아래 부속시켜야 합니다. 탐심은 모든 불신앙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이 탐심을 절제하지 못하고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 또한 가룟 유다의 길로 가기가 십상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세상의 행복, 영광, 부에 대한 욕망을 늘 십자가에 못박는 생활을 해야만 하겠습니다(갈 6:14).
2. 교만(요 12:5)
주님을 사랑치 못하고 세상의 것을 더 가치 있게 여기는 자들은 주님과 그분께 관계된 것들을 경시하거나 경멸하는 자세를 취하기 마련입니다. 이 불신앙적 사고의식은 당연한 것이며(마 6:24) 점차 반그리스도적 \'교만\'한 의식을 지니게 됩니다. 가룟 유다에게서도 역시 그와 같은 반 그리스도적인 교만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것을 보고 대뜸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5)고 힐난했습니다. 그와 같은 언사는 주님께 대한 매우 무례한 도전인 것입니다. 주님께는 직접 아뢰지 않았으나 간접적으로 \"당신은 참 염치도 없는 분이며 무지한 분입니다. 당신이 지금 머리에 바르고 있는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짜리인데 이 명절을 앞둔 때에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고 왜 당신이 쓸데없이 허비하고 있는 거요?\"라는 의미가 담긴 질책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유다의 반그리스도적 사상을 읽을 수 있습니다. 대속적 진리대신 현세적 물질주의를 신봉하며, 주님께 대한 순종심을 지닌 것이 아니라 주님을 오히려 가르치려고 하는 사탄적인 교만심에 사로 잡혀 있음을 볼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그를 은유적으로 \'마귀\'(요 6:70)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가룟 유다는 내적으로는 세속적 탐심과 외적으로는 세속적 반기독적 사조에 붙잡혀 주님을 배신키로 작정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요인을 우리 성도들도 늘 경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II. 배신의 결과(마 27:5)
1. 하나님의 가슴을 아프게 함(마 26:24)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 26:24).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영생 선물을 주시고자 오신 구세주의 입에서 이와 같은 한탄을 자아내게 한 것이 얼마나 서글픈 일입니까? 창조주 하나님께서 옛적에 인간들을 지으신 것을 한때 후회하신 것처럼(창 6:5) 그리스도는 그 제자의 배신을 한탄하시고 슬퍼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배신함은 곧 하나님의 최선의 사랑을 배신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히 10:29). 성도의\"배교\"는 하나님의 나에 대한 창조목적과 구원은혜와 사랑을 배신하는 죄악의 행위임을 명심합니다.
2. 교회를 요동케 함(요 13:22)
유다의 배반은 주님의 마음만을 아프시게 한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요 13:22)고 성경은 증언했습니다. 그때까지의 제자들간의 사랑과 신의로 결속된 분위기가 유다의 배신 사건 소속으로 깨어지게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22:24에는 유다의 배신 예고 이후 자들간에 세력다툼 싸움이 벌어진 일도 성경은 증언해 줍니다. 또한 누가복음 22:45에는 제자들이 주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슬픔을 인하여 잠\'들었다고도 증언해 줍니다. 이렇듯 가룟 유다의 배신은 제자들에게 균열과 다툼과 불안과 슬픔을 안겨 주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도 그러합니다. 한사람의 배교로 인해 여러 형제 자매들이 고통과 혼란을 맛봅니다. 한 사람의 이단자로 인해 교회 전체가 요동을 할 때도 있습니다. 배교자들은 기성교회의 공동체를 요동케 하는 죄를 범할 때가 많습니다. 자신만 파멸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영적 생명을 파괴하려고 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오직 주님 안에 깊은 신앙의 뿌리를 박고(골 2:6) 배교자나 이단자들의 궤술과 유혹에 흔들리지 말고(엡 4:14) 유다의 배신을 알고서도 \'인자는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눅 22:22)라고 하시며 그 사명을 다하신 주님을 본받아 바른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탈무드에는 \"자기가 마신 샘에 돌을 던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배신자의 사악한 심성을 빗댄 말입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은 그야말로 은헤를 악으로 갚는 죄악의 전형입니다. 성도들도 주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주의할 일입니다.
연구4 재판을 받으심
재판을 받으심
(막14:53)
그리스도를 체포하려고 온 무리들은 당시 유대의 산헤드린 공회원들로부터 파송된 \"경찰\"들이었습니다(막 14:43). 제사장, 서기관, 장로 각24인씩 총 72인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는 로마 총독부로부터 허락을 받아 \"예루살렘의 치안\"을 경비하다는 구실로 소수의 경찰을 조직하여 운영했는데 그들은 이 경찰들로 예수를 체포한 후 재판을 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하신 산헤드린의 종교재판은 예수께 \"사형\"을 언도했는데 이 재판은 그 재판 역사상 유례없는 추아갛고 불의한 재판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재판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주님과 우리 교회에 절ㄷ적인 세상 속성과 그 불의한 형태를 교과서적으로 교훈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와 같은 세상 불의에 대한 주님의 의로우신 자세도 교훈받을 수 있습니다.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I. 재판하는 자들(53, 55절)
1. 자신의 이권 때문에 모였음(53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모이더라\'(막 14:53). 주님께서 재판받으려고 끌려가신 곳은 당시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요 18:13)이었습니다. 주님의 체포 소식을 듣자마자 산헤드린 구성원들이 신속히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원래 물과 기름처럼 하나가 될 수 없는 무리들이었습니다. 현실주의자인 \'사두개 파\' 소식인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보수주의자인 \'바리새 파\'소속인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그 신앙 가치관의 차이로 인해 다툼과 반복을 일삼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행 23:6).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월절 명절의 축제도 잊은 채 그리스도의 체포 소식을 듣고 그를 재판키 위해 신속하게 하나가 되어 모인 것입니다. 이들의 공통된 이익은 \"그리스도 예수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인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종교적 인기는 그들의 명예와 부에 큰 타격을 가져다 줄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민중들을 의로운 길로 인도해야 할 것들이 자신들의 이권에 사로잡혀 재판을 연다는 사실이 그 얼마나 안타깝고 불행스러운 일입니까?
2. 악을 행하고자 모인 무리들(55절)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막 14:55). 이 성경의 증언 한 마디에 그 재판자들의 불의와 악이 담겨 있습니다. 모름지기 산헤드린 공회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율법을 기반으로 구성된 곳입니다. 비록 법을 집행하는 권한은 로마 총독부가 지니고 있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뜻과 정신에 따라 심의하고 의결할 권면을 이스라엘 민중들로부터 위임받은 공직자들인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 사회를 바로잡으며, 하나님 나라의 거룩함과 의로움을 수호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그 공회가 이미 그리스도를 \'죽이려고\'작정을 하고 재판을 한다는 사실은 산헤드린 공회는 이미 하나님의 법을 수호 집행하는 \'선한 사자\'(롬 13:1)가 아니라 사탄의 도구로 타락해 버렸음을 반증해 주는 것입니다.
II. 재파의 내용(막 14:6)
1. 거짓(56절)
\'예수를 쳐서 거짓 증거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거가 서로 합하지 못함이라\'(56절). 유대의 재판에는 필히 증인들의 증언이 필요했습니다.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재판이 성립될 수 없었으며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이 일치해야 죄를 확정지을 수 있다고 율법이 정했기 때문입니다(신 19:15). 만일 거짓 증인이 발생하면 그가 무고히 고소한 사람에게 증언한 대로 형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신 19:19). 산헤드린은 그들의 측근을 거짓 증인으로 세워 그리스도의 죄를 정하고자 했으나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이 합쳐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2. 권세악용(60절)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60절). 증인들의 합치된 증언이 도출되지 않으면 원래 재판을 속개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로마법관도 무고한 고소에는 재판조차 하지 않았음을 증언해 줍니다(행 18:15). 산헤드린은 마땅히 예수의 죄목을 찾지 못했으니 재판을 파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한 대제사장은 어찌하든 그리스도에게 사형언도를 내리려고 시도한 그 구체적인 행동이 바로 재판장의 권위를 악용한 것입니다. 즉 산헤드린 법관들은 증인들의 증언을 들은 후에 가장 연소한 공회원부터 고소 당한자를 심문하여 모든 공회원들이 차례로 심문한 후 심의하여 죄를 확정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재판장 가야바가 일어나 예수를 직접 심문함으로써 공정한 재판받을 길을 막아버린 것입니다.
III. 재판받으시는 그리스도의 태도(62절)
1. 잠잠하심(65절)
하인과 비속들은 예수를 구타했다고 성경이 증언합니다. 이 행위또한 피고로 하여금 공포심을 느끼도록 하게 하는 불법 행위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털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처럼 저항치 않으셨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벧전 2:22). 그리고 그 침묵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벧전2:23)하는 의미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불의한 세력으로부터 고난 당할 때 교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그 원칙적 자세를 교훈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침묵과 무저항은 결코 악에 대한 약자의 순복과 체념이 아닌 것처럼 교회는 불의의 횡포를 하나님의 심판의 손에 맡긴다는 자세로 잠잠히 대해야 하겠습니다.
2. 선언하심(62절)
\'내가 그니라\'(62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공식적인 자리에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임을 최초이자 최후로 구체적으로 선언한 말씀입니다. 비록 수인의 처지이긴 하지만 유대나라 최고 의결기구인 산헤드린 공회석상에서 당신이 유대인들이 기다려온 그 메시야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선언으로 그리스도는 산헤드린 재판석상의 자리를 바꾸어 버리신 것입니다. 진리를 진리로 믿지 않고 질식시키려고 한 유대 법정을 오히려 정죄하신 선고를 하신 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재판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자리를 빌어 당신이 메시야임을 공적으로 선포하셨습니다. 교회도 불의의 권세가 난무하는 곳에서 더욱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터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연구5 사형선고를 받으심
사형선고를 받으심
(눅23:23)
그리스도께서 빌라도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날은 우리나라로 치면 정월명절 기간내였습니다. 유대나라는 유월절이 있는 달 즉 양력 3-4월경을 \'니산월\'이라 하여 그 유월절과 출애굽한 달을 기점으로 월력을 제정했기 때문입니다(출 12:1).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유월절 명절이 시작된 후 3일째 사형언도를 받으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이 날이 바로 유대 월력 니산월 13일이요 또 금요일입니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13일의 금요일을 \"악마의 날\"이라 하여 기피하기도 합니다. 바로 이날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몰아 넣은 제일차적인 죄를 로마 총독이며 법관인 빌라도가 범했기에 우리 사도신경에도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고 명시된 것입니다. 함께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I. 유대인들의 고소(눅 23:1)
1. 행악자로 고소(요18:30)
당신 산헤드리 공회는 로마 총독부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에 비공식적으로 그리스도를 사형죄로 확정한 것을 로마 총독에게 인준을 받아야 했습니다. 정식으로 \"사형판결 및 집행권\"은 로마 총독인 빌라도의 손에 달려 있기때문입니다. 그래서 날이 밝자 마자 총독부로 몰려와 고소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 첫번째 그리스도의 죄목이 \'행악자\'(요 18:30)였던 것입니다. 이 행악자라는 뜻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를 가리킬 때 쓰던 말로 (눅 23:32) 그리스도께서 매우 윤리적으로 악한 죄를 범하신 분으로 고소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도 그리스도께로부터 윤리적으로 악을 행하신 것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눅 23:4) 행10:38에서 보며 베드로가 로마장교 고넬료에서 설교할 때 \'저기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라고 한 것처럼 그리스도는 오히려 선하시고 의로우신 분으로 이방 로마군병에게까지 인정받으신 분이었던 것입니다(눅 23:47). 만일 그리스도께서 윤리적으로 조금이라도 흠이 있었다면 우리 기독교는 싹도 나기 전에 당시 종교들의 공격에 도태되고 말았을 것입니다(벧전 2:15)
2. 로마제국의 반역자로 고소(요 19:12)
그리스도로부터 윤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행악한 증거를 빌라도가 찾지 못하고 무죄를 주장하자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로마의 반역자로 고소를 했습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요 19:12)이라고 매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구체적으로 로마 정부가 가장 민감하게 여기고 있는 식민지내의 반역죄들을 그리스도께 뒤집어 씌우기 시작했습니다. 즉 \'백성을 선동\'하여 \'로마에게 세금바치는 것을 금하고\'그리스도께서 \'자칭 왕\'이 되어 반로마운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죄목은 전날 밤 산헤드린에서 신성모독죄로 그리스도께 사형언도를 한 것과는 거리가 먼 죄명들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사형시키려는 목적으로 혈안이 되어 당치도 않게 반로마 혁명가로 고소한 것입니다.
II. 빌라동의 언도(눅 23:23)
1. 황제에 대한 충성과 아부
빌라도가 그리스도께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고 사형을 언도한 사실에 우리는 일견 단순하게 유대인들의 모략에 말린 어리석음으로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매우 교활한 군인이자 정치가임을 우리는 재인식해야 합니다. 빌라도는 그리스도를 자기 출세의 희생 양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로마 정보는 다른 문제들은 식민지내에서 자율적으로 해결하도록 정책을 세웠으나 \'반로마운동\'만큼은 엄중하고 단호하게 대했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식민지의 총독으로 그리스도께서 거짓으로 \'반로마 선동가\'로 고소 당한 것을 알면서도 일단 로마법대로 사형을 시킴으로써 후에 빌라도의 상관들로부터 황제에게 큰 충성심을 가진 총독으로 점수를 따고 했던 것입니다. 마27:24에는 빌라도가 교화하게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하며 사형언도 후 사족을 단 것을 볼 수 있는데 후에 그리스도께서 억울하게 사형 당한 일을 문제가 된다 할지라도 \"아 그 문제는 유대 정치지도자들이 우겨서 된 것\"이라고 발뺌할 구실을 마련고자 한 것입니다. 여하튼 빌라도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고소건은 식민지 총독으로서 로마 황제로부터 점수를 받을 절호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2. 개인적인 안위도모와 감정
\'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눅 23:24). 이 얼마나 통렬한 고발입니까? 재판관이 법대로 시행치 않고 고소자들의 \'구하는 대로\'판결을 했다고 성경은 빌라도를 고발합니다. 당시 유대나라는 로마에게 있어서 상당히 골치 아픈 식민지 중의 하나였습니다. 빈번한 반란이 들끓듯했으며 그 반란 운동은 유대나라 내뿐만 아니라 로마 식민지 전체에서 유대인들에 의해 일어나고는 했습니다(행 18:2). 그러므로 유대나라의 총독들은 \"민란\"에 전전긍긍했는데, 이와 같은 약점을 안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군중들을 선동하여 그리스도대신 \"민란 주도자\"인 \'바라바\'를 안내 주며(마 17:21) 도다시 민란을 일으킬 수 있음을 시사함으로써 (마 27:24) 빌라도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사형언도를 하도록 한 것입니다. 게다가 유대나라의 민란 운동의 중심지가 바로 \'갈릴리 지방\'이었습니다(눅 23:5). 그래서 그리스도도 바로 그 갈릴리 사람이라고 고소를 했으며 빌라도도 갈릴리 사람들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있기에(눅 13:1) 그리스도를 가리켜 \'저가 갈릴리 사람이냐?\'(눅 23:6)고 되물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의로운 재판장으로서가 아니라 한 정치가로서 자신의 현재 입지 안위에 급급하여 거짓된 유대 정치지도부와 \'정치적 타협\'을 하여 그리스도를 사형시키고, 민란 운동가인 바라바를 내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적 감정이 있었던 갈릴리 지방의 종교지도자인 그리스도를 처단함으로써 자신의 감정도 풀고 대외적으로는 민란 운동에 대해 \'경고\'를 하고자 한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종 예수를 거스려\"(행 4:27). 이 고백은 사도들의 고백입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형언도는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정치권에 대한 이 세상의 불의가 하나로 함축되어 표출된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자신들의 현세적 이익을 위해 온갖 불의를 자행하여 진리를 희생 양으로 삼는 세태 속에 교회가 거하고 있음을 명심합시다.
연구6 십자가를 지심
십자가를 지심
(눅23:26)
일반 사회에서 기독교를 연상할 때 대개가 교회종탑의 십자가를 먼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기독교 하면 먼저 십자가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구심점을 십자가 안에서 찾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진리를 \'십자가의 도\'(고전 1:18)라고 했으며 자신의 선교사명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고전 1:17)하려는 사역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은 세상에 대한 기독교의 기호요 또한 성도들의 신앙의 구심점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는 구절은 기독교 신앙고백의 핵이 되어 있습니다. 이제 그와 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의 신앙적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I.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받으심(눅 22:42)
1. 하나님 뜻에 순종하심(빌 2:6)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의미에 대해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진리가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는 무엇보다도 당신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사역 목표는 언제나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었습니다(마 16:21).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인자\'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교육하신 내용 중의 한가지입니다(막 8:31). 즉 그리스도의 눈은 선교초기 때부터 늘 골고다 언덕의 자기 십자가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며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이 우연적인 사건이나 상대적인 의지로 당하신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적인 뜻을 따라 순종하여 지신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인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빌 2:8).
2.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심(고전 15:3)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또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이루려 하신 행위입니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늘 \'성경중심\'의 교육을 시키셨는데 당신의 고난, 죽으심, 부활사역 모두가 \'율법과 선자의 글과 시편에…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눅 24:44)지게 하려는 것이라고 교육하셨습니다(눅 24:46). 사실 그리스도께서 얼마든지 십자가를 회피하실 수도 있으셨고 다른 방법으로 인류의 구속사업을 이루실 수도 있는 전능하신 분이셨으나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 26:54)라고 하시며 십자가를 지시는 길로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사도들도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나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고전 15:3) 하는 내용으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말씀에 대한 복종과 충성의 열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기 삶의 역설적 운명의 길이라도 가야만 한다는 교훈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얻어야 합니다.
II. 죄인을 대신하심(마 20:28)
1. 죄를 대신하심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심의 본질과 동기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대한 \'복종\'이라면 그 목적은 바로 죄인을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시고 그 죄를 대속하시려는 데 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는 그리스도의 사명목적의 궁극적 수단이 바로 십자가의 대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인본주의의 죄와불경건의 죄에 포로가 되어 있던 우리들에 대한 천국의 통로요 구원의 문이며 영생에 이르는 유일무이한 길입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와 같은 길을 하나님과 우리 죄인 사이에 열어 놓고자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2. 고통을 대신하심
\'그리스도의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죽음은 지상 최대의 이변이요 기적\'이라고 \'루터\'는 역설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진정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전능자이시라면 그 십자가의 죽으심은 그분의 삶과 그 얼마나 동떨어진 수치요 고통이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통과 수욕을 받으신 사실은 우리게에 어떤 진리를 가르쳐 줍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히 2:9) 하신 것이며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히 2:10)하시려는 행위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히 4:15)일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우리 인간들의 고통의 본류를 이루고 있는 죽음, 시험, 죄에 동참하시는 적극적 행위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심이라는 의미라는것입니다. 골고다 언덕의 그리스도의 신음소리는 바로 하나님의 인간의 모든 고통과 시험과 문제에 동참하신 \'하나님의 신음소리\'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인 성도들의 \"인간적 에로사항\"을 깊이 동정하실 수 있으며 이해하실 수 있으시며 용납하실 수가 있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뢰하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히 4:16)수 있는 것입니다.
III. 성도의 삶의 모범을 보이심(벧전 2:21)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심은 성도된 우리의 삶의 기반만 마련해 놓으신 것이 아니라 성도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며 또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 모범을 보이신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고난의 길을 그 삶의 목적으로 정하시고, 그 고난 중에도 타인을 위로하시고 용서하시며(눅 23:28) 십자가를 지신 모습에서 우리는 성도들의 거룩한 삶의 표상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으심과 함께 늘 \'부활\'을 염두해 두셨던 사실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는 바울 사도의 선언처럼 우리는 이 세상 중의 어떤 고난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상급과 영광을 소망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의 열매요, 성도의 구원의 통로요 교회의 모범과 희망의 근간을 이루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장신구로서 목에만 걸고 다닐 수 없습니다. 마땅히 그리스도처럼 내게 맡겨진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