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

종려주일설교/예루살렘 입성의 의미(요한복음 1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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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설교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
 
말씀 : 삼하 6:12-19, 요 12:12-16
도 입
  낚시밥 예화: 
<종려주일(Palm Sunday) 핵심체크>
  1. 유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곧 승리의 입성이라고 하는데 그 때 종려나무 잎사귀를 사용한 데서 유래되었습니다.(요 12:13)
  2. 시기: 부활주일 바로 전주일, 고난주간이 시작되기 바로 전날을 종려주일로 지킵니다.
  3. 성격: 고난주간은 그야말로 예수님께서 구세주로서의 고통과 괴로움 결국에는 죽기까지 하시는데 그러한 고난의 주간을 앞두고는 의미있는 행차를 하게 됩니다. 그 때 무리들은 종려가지를 들고 환호하고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입성을 하시는데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행차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무리들이 \'호산나\' 하며 환호하던 소리가 곧 다른 무리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하는 소리로 바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종려나무는 승리와 기쁨의 상징입니다. 또는 정복의 상징입니다. 왕의 행차에 어울리는 나무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사적으로 보면 4세기 이날 경부터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행진하는 특별한 의식을 해왔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영광\'을 되찾게 하실 메시야로서 환영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정치적 메시야를 원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심은 죄인들을 대속하기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이루시기 위한 길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가 되고 인류에게 진정한 평화를 주시기 위한 죽음의 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원하던 다윗의 영광은 칼과 창으로 세우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다윗 왕국의 한 면만 본 것입니다. 물론 다윗은 헤브론에서 왕이 된 후 여부스 족속과 싸워서 시온 산성 곧 예루살렘 성을 빼앗았습니다. 숙적 불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윗 왕국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이스라엘의 신앙을 회복하고 통일 왕국을 이루기 위하여 백성들을 결집시키고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고자 했습니다. 1차 시도에서 법궤를 함부로 다루다가 실패하였고 2차 시도에서는 보다 더 신중하고 정성을 다하여 법궤를 옮기는데 성공을 했습니다.(삼하 5,6장) 
  법궤가 예루살렘의 장막으로 옮겨와 안치되자 다윗은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고 기쁨으로 찬양을 드렸습니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들을 축복하였습니다. 다윗은 백성들에게 떡과 고기를 나눠주며 즐거워하였습니다. 법궤가 무엇이기에 다윗이 이토록 즐거워했습니까?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졌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다른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통일왕국을 의미합니다. 법궤의 속에는 십계명의 두 돌판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시는가의 핵심 내용입니다. 즉 십계명의 두 돌판이 들어있는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둔 것은 이제 영원한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중심의 보좌에 앉아계심을 의미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칼과 창으로 세워진 나라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많은 무리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칼과 창으로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고 이스라엘을 압제했던 로마 제국을 물리치는 것은 예수님의 하실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정치적으로나 또는 군사적으로, 영토에 있어서 통일을 이루려 오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다윗은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많은 활약을 하였으나 예수님은 그것을 목표로 이 땅에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겨우 한 나라의 영토를 회복하고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오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이 세상 모든 나라가 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러기에 창과 칼은 의미가 없습니다. 칼을 사용하여 예수님의 가는 길을 위하고자 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베드로야 너의 칼을 칼집에 넣어라. 내 나라는 칼로서 이루는 나라가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윗 왕국이 법궤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기를 원했던 것처럼 지금도 예루살렘에 말씀을 가지고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갔던 것이 십계명의 두 돌판이 담긴 법궤였다면 예수님은 법궤가 의미하는 모든 것을 가지신 말씀 자체로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은 구약의 법궤의 실체이셨습니다. 법궤는 오히려 예수님의 그림자였습니다. 이제 실체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이루고자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인생의 죄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시기 위한 화목의 제물로 바쳐지는 것이었습니다.
  용서와 화해, 바로 이것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이 하실 일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희생으로 말미암아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하실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모여 들었던 많은 무리들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겉옷과 나뭇가지(요 12:13절에 의하면 종려나무의 가지였음, 이는 번영과 승리를 상징함)를 길에 펴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고 소리를 지르며 맞이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왜 나귀를 타셨을까요? 그것도 나귀의 새끼였습니다. 이는 평화의 상징입니다. 보통 세상 왕은 위용을 떨치는 군마를 타고 개선문을 통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무나도 겸손하여 나귀의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마 21:5, 슥 9:9) 예수님은 스가랴 9:9의 예언을 이루어오셨습니다.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겸손의 왕이요, 평화의 왕으로 오셨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들어가셔서 온 인류를 위하여 섬기실 때에는 칼과 창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온유하고 겸손한 태도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던 메시야는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왕, 이스라엘을 그토록 압제하고 고통스럽게 했던 로마제국을 분쇄하며 박살내고 파괴하는 왕이었습니다. 지금 백성들은 마치 그 날이 오기라도 한 듯 기대감에 젖어서 흥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고 오심으로 평화의 왕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백성들이 그토록 큰 기대감과 터질듯한 분위기의 함성으로 외쳤던 것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였습니다. 다윗의 나라가 곧 임할 것을 그들은 기대하였습니다. 그들의 행렬은 예수님과 동행하며 따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후로 예수님의 행렬을 끝까지 따르는 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이내 예수님이 수난을 당하실 때 열 두 제자부터 배반하고 떠났습니다. 몇 몇 여인만이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지만 부활의 자리까지 믿으며 따르지는 못했습니다. 종려주일에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의 행렬은 주님을 위한 행렬이 아니라 자기들의 꿈을 이루기 위한 행렬이었습니다. 주님은 평화의 행렬을 원했으나 무리들은 전쟁의 행렬을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행렬을 원했으나 무리들은 지배의 행렬을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고난의 행렬을 원했으나 무리들은 영광의 행렬만을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향한 행렬을 원했으나 무리들은 살기 위한 행렬 뿐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믿노라 주님을 따르노라 하면서 정작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닌 자신들이 원하는 길을 걸을 때가 많습니다. 주님의 일을 행한다고 하면서 주님의 뜻은 묻지 않고 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종려주일에 성경대로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성경대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만 살겠다고 다짐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세상적 성공이나 축복 또는 화려한 등극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난과 희생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행렬입니다. 무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가신 길을 제대로 이해한 자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자신의 가는 길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0:18,19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삼 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면서 타신 나귀는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의 새끼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순결한 제물로 희생되실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는 세속적인 의미로는 경제적 이익을 전혀 취해보지 못한 나귀를 의미합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택하신 제물로는 흠 없는 짐승으로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것을 끌어오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민 19:2, 신 21:3, 삼상 6:7)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나귀의 새끼, 아무도 타 보지 못한 나귀의 새끼, 이것은 순결한 예수님에 어울리는 짐승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영향력을 완전히 극복하시고 절대 순결을 유지하신 분이십니다. 세상의 더러운 것과 완전히 구별된 흠 없는 제물로 오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입성하시는 예수님은 사실상 순결한 제물로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로 입성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히 4:15)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하신 의미 있는 말씀이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하셨습니다. 생명의 태동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시작됩니다. 희생을 거부하는 생물 종족은 보전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알의 밀알이 되사 땅에 떨어져 죽으심으로 많은 영혼의 열매를 거두시기 원하셨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독생자가 희생되는 것이기에 수 많은 거룩한 영혼의 열매를 거두시기에 충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목적은 바로 희생을 통한 열매를 바라보는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희생을 통하여 얻는 영혼의 열매를 깊이 적용해야 하겠습니다. 성과나 업적 위주의 현대사회에 경종을 울려주고 있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고 확실한 것에 투자하는 것이 현대 사회의 특징입니다. 멀리 보지 못하고 단기 승부를 보려 합니다. 그래서 100년지대계라는 교육에 대하여는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는 교육가가 적어지고 있습니다. 영원한 것을 위하여 신령하게 심어야 할 터인데 육신의 것을 심어 육신의 것을 거두려고만 합니다. 주가의 변동폭이나 환율의 변화, 주택의 시장 가격에 관심이 커집니다. 시세 차익이나 노리고 땀 흘리지 않고 벼락 부자가 되려 합니다. 돈 많은 자들이 고액과외를 한다고 하면 내 자녀들은 상대적으로 열세가 될 것을 걱정합니다. 당장에 눈 앞에 보이는 것, 눈 앞에서 효과가 들어나는 것 이것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성공하시는 방법은 이 세대의 것과 다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완전히 버리셨습니다. 어떤 이득도 취하시려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썩어져 발효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럴 때에 많은 밀알을 다시 얻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존심도 버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셨습니다.
  적용: 밀을 땅에 깊이 묻듯 우리의 삶을 깊이 묻읍시다. 그리고 완전히 썩어지고 발효가 되기까지 포기합시다. 때가 되면 열매가 맺힐 줄 알고 아무것도 이득을 취하지 않으시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 중심으로 활동하였다면 종려주일에 예루살렘 입성 후에 당장에 무리들을 모아서 선동하는 일부터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리들을 선동하여 무기를 하나씩 들게 하고 빌라도 총독부 건물부터 쳐부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일을 전혀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묵묵히 이루어나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순종의 사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일거수 일투족을 움직일 때마다 자신의 임의대로 행동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을 이루는 것을 중심으로만 행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든지 나귀보다 화려하고 힘센 짐승들을 동원하실 수도 있지만 나귀 중에도 나귀의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구약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대로 하시는 예수님, 예루살렘을 들어가셔서도 성경대로 되어지지 않는 모든 것은 개혁하셨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고 돈 바꾸며 비둘기 파는 자들을 몰아내셨습니다.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 자들에 대하여 성경대로 개혁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