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라웨어 창립기념주일 설교

창립기념 주일 설교 28주년 창립기념주일 델라웨어한인감리교회를 위한 창립기념주일예배 설교 임 목사님, 감사합니다. 창립 28주년 이 특별한 날에 여러분의 초대를 받고, 특별히 이 뜻 깊은 자리에서 설교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기쁘고 저에게는 큰 영광입니다. 드루신학교 졸업생이었던 아펜젤러 선교사님이 한국에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로 가셨습니다. 드루와 한국을 특별한 관계를 그 이후로 맺게 되었습니다. 40년동안 드루의 교수를 지낸 저는 이 드루와 한국의 관계를 수없이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몇몇의 예들을 말하려고 합니다. 제가 교수가 된 초기에 Edward Poitras 교수의 논문을 심사하는 커머티에 있었습니다. 그는 서울에서 존경받는 선교사 교수였습니다. 제 강의에 많은 한국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담임목사인 임 목사님을 포함해서. 한국 학생들은 진지하고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그들을 가르치는 것은 보람있었습니다. 제가 도서관에 갈 때면, 대부분의 캐럴 룸을 한국 남학생, 여학생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교실 밖에서도 한국 학생들은 많은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남성중창단은 아주 훌륭한데, 드루의 중요 행사들에 꼭 나타납니다. 월요일 아침에 축구를 하는 것도 오랜 관행이 되었고, 제가 한국 학생들과 테니스를 친 것이 제 일생에서 가장 좋은 시합들 중의 몇입니다. 아마, 한국에서 탑스핀이 개발되지만 않았다면, 제가 완벽하게 제압했을텐데 말입니다. 제 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은 한국기독교인들 때문에 만들어졌습니다. 신학교합창단이 1987년 봄에 한국을 순회공연하게 되었고, 저는 임시학장을 맡고 있었는데, 드루 총장이었던 폴 하딘이 합창단을 이끌고 갈 수 없어서, 제가 가게 되었습니다. 이 여행을 계획했던 두분의 유명한 목사님들이 그 당시의 긴급했던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쟁취, 6월 항쟁, 6.29선언) 합창단의 한국학생들 덕택에 우리는 진보적인 한국교회협의회(KNCC)에서 기독교 신앙과 사회정의와 민주화를 위해서 일하는 분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정해진 스케줄을 따랐는데, 호텔에서 아침 식사 후에 긴급하게 조찬 세미나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호스트하던 분들이 그 당시 독재자였던 전두환 대통령과 만날 것을 제안했습니다. 저는 학생들의 입장을 존중하고 서포트하기 위해서, 그런 미팅에 참여할 수 없다고 결정했고, 그래서 그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학장으로서, 인천에 있는 큰 교회에서 주일날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보통 분량의 설교를 준비했고, 우수한 통역자에 의해서 한 단락 단락씩 한국어로 통역되었습니다. 교인들이 잘 알아듣도록 천천히 말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이 실수였습니다. 그 결과 설교가 너무 길어져서 합창단은 준비했던 노래들 중에서 몇 곡 밖에 부를 수 없었습니다. 예배 후에, 학생들은 화가 났는데, 이 투어는 합창을 위한 것이고 그들이 주인공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서울에서 저녁 예배에 저는 설교를 줄여서 4분만에 마쳤습니다. 합창단은 좋아했지만, 한국 교인들은 아마도 드루신학교는 경솔하고 천박한 학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미국으로 돌아와서 미래의 새로운 10년을 위해서, 드루는 첫 한국인 교수를 모시는 행운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최고 수준의 창조적인 신학자였고, 학생들을 위해서 너무나 훌륭한 선생님이었던 이정용 박사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7년 후에 96년 학기 중간에 갑자기 돌아가셔서, 수업을 듣던 학생들이 망연자실하게 되었고, 제가 그분의 세미나 나머지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은 대담하고 창조적으로 이 박사의 학문적 유산을 이어가기를 원했고, 동풍(East Wind)라는 논문집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저에게 그 책을 편집하고 서문을 써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기간에 몇몇 학생들은 이박사의 영향을 받아서 학위논문들을 썼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치고, 책을 쓰고, 교회에서 설교를 통해서, 그들은 지금 진정한 동양의 기독교 신학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들 중에서 가장 우수한 분의 하나가 여러분의 담임목사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공동성서일과(Common Lectionary)를 따라서 선택했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오늘 이 동일한 성서본문들을 함께 듣고 묵상하게 됩니다. 2007년 미국 땅에서 한국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이 말씀을 실천하고 적용할 수 있을까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시편 82편은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께 속했다고 선포합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땅을 심판하시는 분, 약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는 자들을 엄격하게 다루시는 분으로 그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평안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은 거의 지구의 반을 건너와서 미국이란 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여전히 동일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한국의 하나님이고 또한 미국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여러분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여러분과 함께 계셨던 그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여러분과 함께 계시는 동일한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가족과 친지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하나님은 또한 여러분의 가족과 친지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의 집과 일과 언어가 얼마나 변했는지와 관계없이 여러분은 여전히 그 똑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새로운 땅에 있습니다. 여러가지 변화들은 대단하게 큽니다. 여러분과 하나님은 여전히 똑같이 맺어져 있으나,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새로운 것을 보여주시고 계시며 여러분은 여러분에 관해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상황을 돌아보실 수 있도록, 제가 은퇴하기 전 마지막 몇년동안 제 사무실의 문에 붙여 놓았던 금언을 소개하겠습니다. 그것은 1901년부터 8년동안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테오돌 루즈벨트가 말한 것입니다. 루즈벨트는 다음과 같이 충고합니다. “당신은 어디에 있든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실천하십시오.” 자,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이 미국 땅으로 처음 온 분들은 대부분 많은 것을 가지고 올 수 없었습니다. 특별히 이 땅에서 여러 세대를 오랫동안 산 분들과 비교할 때, 여러분은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여러분은 부요하게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의 희망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Hope는 소원이나 욕망이 아닙니다. 저는 hope가 한국어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할 때, 희망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일 태양이 다시 떠오를 거야.” 혹은 “우리 팀이 내일 축구시합에서 이겨야지.” 이런 소망들은 우리가 지금 가지지 못한 것에 근거해서 갖기를 바라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희망은 이런 것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갖는 희망은 흔들릴 수 없는 기초가 있습니다. 예수님, 우리의 선생님이요, 구원자요, 친구이신 그분이 우리에게 풍성한 삶에 이르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뒤에, 옆에, 앞에 서서, 전진하라고 우리를 부릅니다. 여러분은 또 다른 선물을 받으셨는데, 100년이상된 한국교회의 전통입니다. 복음은 한국에 뿌리를 내렸고, 성경적인 믿음과 동양과 서양의 신앙적인 열심을 합해서 독특한 신앙을 이루어냈습니다. 하나님은 한국에서 아주 새로운 일을 해오셨고 지금 하고 계시며, 이것을 지켜본다는 것은 너무나 아름답고 귀중한 것입니다. 한인교회는 미국에서 지금도 자라고 있습니다. 교단적으로 뿐만아니라, 보다 넓은 사회 속에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 아주 새로운 일을 하고 계십니다. 기독교가 한국에 심어졌을 때, 한국 기독교와 서구 기독교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듯이, 미국 속에 있는 한인교회공동체는 또 다른 모습으로 발전되어야 합니다. 진실로, 그것이 살아있는 것이라면, 반드시 새롭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제는, 한국기독교인들이 미국에서 교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자리에 서 있는 것을 압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밝은 미래를 바라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또 루즈벨트는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그 곳에서” 그것을 하라고 또한 말합니다. 루즈벨트의 이 충고는 여러분이 어떤 다른 곳에 있기를 바란다거나, 혹은 여러분이 지금 있는 곳을 후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여러분은 다른 곳으로 이사할 수도 있고, 여러분들 중에 많은 분들은 이미 이사를 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반드시 지금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지금 어디에 있는 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명기의 말씀은 우리가 이 점을 분명히 하도록 돕습니다.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이 명령은, 당신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당신들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명령은 하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당신들은 ‘누가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받아가가, 우리가 그것을 듣고 지키도록 말하여 주랴?’ 할 것도 아닙니다. 또한 이 명령은 바다 건너에 있는 것도 아니니 ‘누가 바다를 건너가서 명령을 받아다가, 우리가 그것을 듣고 지키도록 말하여 주랴?’ 할 것도 아닙니다. 그 명령은 당신들에게 아주 가까운 곳에서 있습니다. 당신들의 입에 있고, 당신들의 마음에 있으니, 당신들이 그것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성서는 우리들에게 우리가 하늘 끝까지 혹은 한국 멀리의 고향에까지 다시 돌아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 우리가 있는 지금 이곳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면, 우리가 마음과 영혼을 다해서 그분이 주시는 말씀을 듣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할 수 있고, 하나님의 우리를 위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말씀은 우리에게 가까이 있고, 즉 우리의 입 속에, 우리의 영혼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금 있는 이곳에서,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 가에 대해서 좀더 생각해 볼까요? 신명기의 다음 구절은 이렇게 분명히 말합니다. “보십시오. 내가 오늘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을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여러분이 살고, 번영하고, 그것도 풍성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선택받은 이들의 삶의 질은 무엇입니까? 오늘 저희들이 읽지는 않았지만, 공동성서일과에서 골로새서 1장이 있는데, 이렇게 우리에게 말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의 새로운 교회에 편지를 썼는데, 그 교회는 바울의 본거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과 같은 한국 사람들이 별로 많이 살고 있지 않은 곳에서 비교적 새로운 교회를 이루어가야 하는 여러분의 정황과 비슷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인들에 관해서 무엇을 들었습니까?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고, 그들이 지혜와 지식에 있어서 자라간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마음에 두고 있는 영적인 지혜는 신학이나 철학 책을 쓰는 지혜가 아닙니다. 비록 그것들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사랑의 행위인 선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자라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1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권능에서 오는 모든 능력으로 (여러분이) 강하게 되어서,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보통 함께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함께 놓입니다. 골로새 교인들, 그리고 우리들은 고난 속에서의 인내, 어려운 시기에 오래 참음, 이런 것들을 기쁨으로 행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우리와 가까이 계시겠다고, 우리가 있는 곳 바로 거기에 계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신명기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만납니다. 이것은 바로 테디 루즈벨트의 충고의 마지막 부분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을 실천하십시오”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한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과 모든 것을 행하는 것 사이 어디메 쯤에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상황을 주의 깊게 분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우리는 “무엇을 가졌는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가능한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 가능성을 면밀하게 평가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각을 너무 높은데 고정하면, 그래서, 우리가 모든 것을 하려고 시도하고, 세계에 있는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 보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집중시키지 못하고 에너지만 낭비해 버리게 됩니다. 게다가, 우리는 좌절과 죄책과 절망만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마침내 포기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함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완전함은 감리교 전통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감리교인들은 “형제여, 그대는 완전합니까?”가 아니라, “자매여, 그대는 완전함을 향해 가고 있습니까?” 하고 물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는 도상의 존재 (on the Way)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제자입니다. 한국기독교인들의 새벽기도와 속회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을 증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성찰하고, 매일매일, 매주마다 열심히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주님께서 정말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의를 행하라, 인자함을 사랑하라, 주님과 함께 겸손히 걸어라” 입니다. 루즈벨트의 충고는 제가 지난 봄에 벨지움에서 기차표에 인쇄된 말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한국어로 정확하게 표현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각자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결단해야 합니다. 다른 분들은 그분들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결정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놔두어야 합니다. 이렇게 날마다 새롭게 변해가는 세계 속에서, 다음 세대는 분명히 정의와 인자와 사랑을 위해서 스스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것입니다. 이미 늙은 세대인 우리들은 다음 세대들이 자발적으로 스스로 결정하도록 지켜봄으로써 우리의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실지 모릅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 기독교인으로 기독교적인 삶을 발전시키고 신앙 안에서 자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민자로서 사회 속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미국 사회는 우리를 이해해 주지도 않고 우리들을 공정하게 대해주지도 않으며 때로는 잔인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을 하십시오”가 어떤 도움이 됩니까?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여러분을 사랑해달라고 강요하거나 명령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먼저 사랑할 수 있고, 재능과 관용을 베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여러분의 사랑이 받아들여지거나 상호간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법의 나라인 이 나라에서, 여러분이 요구할 것은 정의와 존중입니다. 미국에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과 구조가 있습니다. 그러나 편견을 갖고 미워하는 개인들은 항상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원리들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오래 산 사람이나 새로온 사람이나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1950년대와 60년대의 사회인권운동도 우리 헌법을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인권운동은 단지 이 나라를 향해서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이상을 실천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 이것을 주장할 권리가 있고 저는 여러분에게 이것을 주장하라고 격려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흑인들, 히스패닉, 게이 운동가들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저는 동양인들, 특히 미국의 한국인들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날을 기다립니다. 여러분은 미국인들에게 줄 문화적으로 풍요한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 미국인들에게 여러분이 받은 이런 재능들을 나누어 주십시오. 제 설교가 거의 끝나갑니다. 왜 누가복음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가 의아해 하실 겁니다. 물론 제 설교의 전체가 이 이야기에 기초해 있습니다. 저는 “누가 우리의 이웃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분명하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이웃은 국적이나, 부, 사회적 지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웃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궁핍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선한 사마리인처럼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도록,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비록 사회적으로는 이방인이요, 열등한 사람처럼 무시를 당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끝으로, 정말로 가슴 속 깊이에서부터 여러분의 28주년 창립을 축하드립니다. 여러분은 성장하고 있고, 그래서 여러분은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 여러분이 가진 것을 가지고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을 해왔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테디 루즈벨트나 저의 충고가 없어도 이미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제가 신앙의 형제로서 그것을 하라고 격려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위험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찬양했던 법이 지켜지고 존중되는 사회가 위태롭게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 더 넓은 세계에서 함께 평화와 건강을 이루자면, 우리 모두가 오래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께 축하드리고 여러분과 함께 이 보람찬 투쟁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