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주님이 하신 첫번째일
부활하신 주님이 하신 첫번째 일
부활하신 주님이 하신 첫번째 일
마태복음 28: 1-10
여러분, 부활절을 저희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활의 계절에 일주일을 어떻게 보내셨습니다. 저는 유진 피터슨의 \"Living the resurrection\"이란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부활을 살지요? 이것이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부활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저희들이 읽은 마태복음 28장의 기사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여인들을 처음 만나서 주님이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무엇이지요? 저희 말로는 \"평안하냐?\"라고 번역된 인사를 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greetings\"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제가 읽었던 \"Living the resurrection\"을 쓰신 유진 피터슨은 이것을 \"Good morning!\"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저는 처음에 그 부분을 읽다가 저으기 당황스러웠습니다. \"Good morning!\'이란 번역은 너무나 평범한 현대의 우리들이 쓰는 말이기에 처음에 막상 막딱 뜨렸을 때는 이상했습니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하고 다시 읽어보니, 이 번역이 종일 제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었습니다. 왜 일상적 언어로 한 인사로 번역한 것이 내 마음을 사로 잡았을까요? 사실 우리는 부활을 어떤 신비한 것으로, 너무나 거룩하고 굉장한 것으로 신비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다 보면, 부활은 나의 일상적인 삶과는 굉장이 멀리 떨어진 어떤 것이 되어버립니다. 즉, 부활은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것(extraordinary)으로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신앙을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이질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병의 시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진 피터슨의 \"Living the resurrection\"은 매우 정확한 지적입니다. “Greetings” (NRSV)는 사실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지만, “Good morning!”은 부활하신 주님의 우리의 삶의 자리로 뚜벅뚜벅 걸어오시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부활의 본질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이 사셨다는 것은 멀리 영적인 세계에 사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자리로 그분이 오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죽어서 천당을 간다거나, 어떤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누가 죽거나, 병에 들렸거나, 사고가 났을 때, 그분께 의지하고 울고불고 하는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신앙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바로 나의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어야 하고, 내 일상사에서 능력으로 자리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은 내 삶의 자리에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첫 부활절 아침에 부활하셔서 나타나신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의 삶의 모든 것을 꿰뚫고 계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에 어떤 이상한 능력을 제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현장에 오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깊은 애정과 사랑으로 그들의 문제를 깊이 터치하시고 계십니다. 여인들에게 주님께서 주신 말씀은 이것을 여실하게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처음 만난 여인들에게 \"평안하냐?\" Good morning! 하신 다음에 뭐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분의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아라.” 입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위축시킵니다. 두려움이 있는 사람들은 무언가를 활기차고 제대로 감당해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마음 속에서부터 위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너무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커도, 내가 무언가를 이루고 싶은 마음이 커도, 사실은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방향으로 나가기 보다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가기가 쉽습니다. 그런 상황에서의 처방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상황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처형을 받으신 것은 그들에게 충격이었고, 세상 무서운줄을 정말로 깨달았습니다. 갈릴리 촌놈들로서 선생님만 계시다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고무시켰습니다. 예루살렘을 선생님을 따라 올라오면서, 그들에게는 봄이 오듯이, 꿈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기대를 걸고 왔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종려주일에 예수님이 예루살렘 사람들에 의해서 환영을 받고 아이들까지 소리치면서 그분의 오심을 떠들썩하게 맞이했을 때 그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우리 선생님을 따라 나서기를 잘했어. 아무렴, 우리 선생님은 정말로 수백년에 한 분 나오실까 말까 한 분이야. 아무렴, 모세보다도 엘리야보다도 더 위대하시지. 내가 그 때 안 태어나서 잘 모르지만, 모세가 아무리 기적을 일으키고 엘리야가 기적을 일으켰지만, 우리 선생님만큼은 못할 것이 틀림이 없어. 이런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 이후로 그들에게 상황은 전혀 반대로 진행되었습니다. 도무지 뭐가 뭔지도 모르게 상황은 몰렸고, 마침내 희망의 걸었던 선생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자들은 두려워하지 않을래야 두려워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습니다.
사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런 제자들의 상황을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느끼고 계셨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제자들이 문을 잠그고 꼭꼭 숨어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들을 골방 속에 숨고 동굴 속에서 나오지 못할 정도로 희망을 잃고 믿음을 잃고 무서워하고 두려워떨고 있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그들로 하여금 위축되고 작아지게만 했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주님의 인사는 \"Good morning!\"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두려워 말아라\"였습니다.
그런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불신으로 떨고 있고 무서워하고 있는 그런 제자들의 마음을 그분은 읽고 계셨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분이셨기에, 세상을 이기신 분이셨기에, 우주적 선포를 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삶의 자리에 그분이 깊이 내려오셔서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대표적으로 드러난 것이, “Good morning!”입니다. “평안하냐?” 주님은 그들이 평안하지 못하고 안녕하지 못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의 삶의 모든 문제를 꿰뚫고 계셨던 것이다.
여인들은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셔서, “Good morning!” 하셨을 때, 그분이 바로 자신들 곁에서 살아계시다는 착각을 했습니다. 아니, 그분이 살아계신 것과 돌아가신 것의 차이를 잠시 잊어버릴 정도로 놀랐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영원한 것을 던져 주시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 날 하루를 멋있게 살 것을 주문하신 것입니다. 이 대목이 한없이 뜨겁게 다가왔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다른 인사를 하신 것이 아니라, “Good morning!”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진 피터슨은 위대한 번역을 한 것입니다. 그는 전문적인 성서신학자가 아니지만, 그의 영적인 깊이는 이런 뛰어난 위대한 번역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고 부탁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나를, 나의 사정을 나의 원통함을 나의 나약함을 나의 비통함을 아신다는 사실이 우리의 신앙에서는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피도 눈물도 없는 분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깊이 아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이 여기에서 뜨겁게 다가 와야 합니다.
대통령은 주치의를 둡니다. 아니, 우리 모두에게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주치의가 필요합니다. 사실은 주치의가 지시하는 것에 따라서 우리는 전문의를 찾아가게 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주치의십니다. 대통령의 주치의는 항상 대통령을 수행하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항상 동반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욱더 잘 아신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의 신앙은 진일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나를 아시기 때문에 그분의 진단과 처방은 나를 정말로 살릴 수 있습니다.
그분의 부탁은 갈릴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부분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갈릴리”의 의미가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왜 구태여 갈릴로로 가라고 하셨을까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마도 제자들에게는 갈릴리로 정말로 가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갈릴리로 가면 주님 생각이 날 것이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주님의 자취가 서려있는 곳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아마 어디보다도 갈릴리만은 가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모리스타운 교회에 있을 때 에스더를 보낸 부모님 이야기를 제가 했습니다만, 그 때 교회의 어른들이 가장 걱정했던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교회에 오면 에스더가 뛰어 놀던 모습이, 그 애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밟힐텐데 어떻게 엄마나 아빠가 우리 교회에 나올 수 있겠느냐고 했던 것이 그분들의 의견이었습니다. 사실 아빠는 한동안 굉장이 힘들어 했습니다. 인터넷에서 죽음의 의미와 그런 것들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밤을 새우면서 위로받을 것이 없을까 헤매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을 정말로 목숨을 바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따르고자 했던 제자들에게 갈릴리야말로 가장 돌아가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사셨을 때의 흔적과 자취가 눈에 밟힐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너희가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면대결을 벌여서 이길 때 위대한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정면으로 부닥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힘겹고 어렵지만, 그렇게 정면으로 부닥쳐서 이기게 되면, 길이 보이고, 새로운 시작이 가능합니다. 회피하게 되면 길이 없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스승의 그렇게 아름답고 거룩하던 모습을 정면으로 볼 때, 그분의 정신과 그분의 영혼과 그분의 뜻과 그분의 비젼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렇기 때문에 갈릴리로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갈릴리 그곳은 역사의 땅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눈물과 피와 열정과 꿈이 영근 의미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가서 주님이 하시던 사역을 제자들이 다시 시작할 때에 주님은 그들과 함께 사셔서 새롭게 역사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을 우리가 깊이 느끼고 경험하고 전진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까요? 저는 오늘의 본문의 말씀에서 한 구절을 발견하고는 바로 이것이라고 소리치게 됩니다. “주님의 발을 꼭 잡는 것입니다.” “Good morning!”이 첫 인사였다면, 주님의 발을 꼭 잡는 것은 여인들의 처음 반응이었습니다.
우리가 부활절을 정말 멋있게 살아가는 방법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발을 꼭 잡아야 합니다. 주님의 발을 잡기 위해선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할까요? 그냥 어정거리면서 서서는 주님의 발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어깨를 내려야 하지요? 가장 낮은 자리까지 우리의 어깨와 손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아니 아주 낮은 자세로 엎드려야 합니다. 엎드리기 전에는 주님의 발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예배자의 자세입니다. 사실 어떤 찬양을 하고 어떤 예배의 포맷을 가지고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시대에 맞는 예배를 위해서 우리가 창조적인 사고를 가지고 노력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를 위해서는 이 마음, 자기 자신을 가장 낮추어서 주님의 발을 꼭 잡으려고 하는 이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갈릴리로 가야 하지요? 네, 갈릴리로 갈 때,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하시던 일을 할 때, 우리는 그분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본질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뵈옵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주님의 영과 주님의 정신과 성령과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 바로 그것이 부활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살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발을 잡을 때 그것이 가능합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오셔서, \"good morning!\"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할께, 함께 같이 가자는 초청입니다. 부활의 계절에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함께 가자고 초청하십니다. 우리 모두 그분과 함께 부활의 길, 생명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나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새 봄이 오고 있습니다. 떨치고 일어나서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증거하는 일에 앞장 섭시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