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계산법

시간계산법
본문/시 90:1-12


우리 중에는 특별히 붙임성이 좋은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처음 만나면 나이부터 따집니다. 그래서 상대방보다 두어 살 많으면 <이제부터 내가 형님이야! 앞으로 잘 지내보자구>라고 하거나, <이제부터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얼마 전 시내 모 교회에 설교하러 갔을 때, 그 교회에 부임하신 목사님께서 저를 갑자기 <형님!>이라고 부르는 데 좀 당황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형님 소리 듣는 게 좋습니까? 아니면 동생 소리 듣는 게 좋습니까? 어쨌든 이것은 <누가 더 오래 살았나, 적게 살았나?>를 기준으로 하는 계산법입니다. 한 마디로 밥그릇 숫자를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되는 계산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난 세월의 길이를 재는 게 아니라, 남은 시간을 따져보는 것입니다. 이런 계산의 모범을 보여주신 분은 <다석 류영모(柳永模)> 선생님입니다. 이 분은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 근대 사상계를 대표할만한 분입니다. 함석헌 선생과 김교신 선생이 그 분의 제자입니다.
류영모 선생님은 1890년에 태어났고, 15살 때 연동교회에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20세 때는 남강 이승훈 선생님이 세운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2년 간 봉직했는데, 이때 이승훈 선생님을 전도하여 기독교인이 되게 했고, 이로 인해 오산학교는 기독교학교가 되었습니다. 잠시 학교를 떠나 일본에서 공부하고, 31세에는 조만식 장로님의 후임으로 오산학교의 교장직을 맡게 됩니다. 그 후 류영모 선생님은 모든 것을 뒤로 한 채로 농부가 되었습니다. 평생을 하루에 한 끼만 먹고살았습니다. <다석(多夕)>이란 호는 저녁에만 식사를 한다 하여 붙여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65세 되던 해에 특별한 일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이 죽을 날을 정해 놓은 것입니다. 그는 인생은 66세쯤 살면 족하다고 생각하고 1956년 4월 26일을 자신의 죽음의 날로 정해 놓았습니다. 그는 그 날을 자신의 최후의 날로 생각하고, 하루씩 날을 줄여가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곤 그 때부터 깊이 있는 일기를 썼습니다. 그 후 하루도 소홀히 함이 없이 최선을 다해 살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 분은 1981년에 90세를 일기로 별세하였습니다.
그 분은 자신의 별세일로 정해놓은 1956년 4월 26일 일기에 요한복음 12장 27절을 적어 놓았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왔나이다>

어떻습니까? 살아온 과거의 시간을 계산하는 게 아니라, 남은 시간을 계산하면서 살아가는 방식이 어떻습니까? 어떤 분은 <우리가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는가?>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탄생을 생각하면서 그 의미를 되새기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성탄절을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미 2천여 년 전에 오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맞이한 첫 번 성탄절과 오늘 우리의 성탄절은 차이가 많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가 오시길 기다리다가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오래 전에 이미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과 오늘 우리의 입장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단지 오래 전에 있었던 과거의 사건을 축하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일까요? 이미 지나간 사건을 한번쯤 머리에 떠올리는 게 전부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대림절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언을 따라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에게도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어떤 형식으로 만나게 됩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신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는 날 그 분을 뵙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는 날>이란 다른 말로 바꾸면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날>입니다. 그 날이 오면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우리가 기다려야 할 날이란 바로 그 날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영광스러운 주님을 만날 바로 그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대림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날은 얼마나 더 기다려야 오는 것일까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은 언제일까요? 바로 여기서 <시간을 거꾸로 계산하는 방식>이 필요하게 됩니다. <내 인생은 이제 몇 일 남았다. 예수님을 만날 날이 몇 일 남았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서 이런 계산에 열중한 분을 만나게 됩니다. 그 분은 이스라엘 백성의 위대한 지도자인 모세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90편은 <모세의 기도>입니다.
본문 앞부분에서는 인생의 덧없음을 말씀합니다.먼저 모세는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언급합니다. 2절을 보세요.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에 반해서 우리 인생들은 어떻습니까? 3절 이하를 보십시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이게 바로 너무도 짧은 세월을 사는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이런 짧은 인생을 사는 것을 생각하면서 모세는 자신의 날이 얼마나 남았는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여기 <우리 날을 계수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모세는 모두 120년을 살았습니다. 40년은 애굽의 궁궐에서 왕자의 신분으로 성장했습니다. 그 후 40년은 미디안 광야에서 보냈습니다. 마지막 40년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어떻게 남은 시간을 따지면서 살게 되었을까요? 여러분, <므리바 물가>의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므리바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로 반석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반복되는 백성들의 불순종과 원망의 태도에 화가 난 나머지 반석을 두 번이나 두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분노를 표출한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물을 솟게 하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20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란 말씀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나안 땅 입구까지만 가고, 거기서 죽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실제로 모세는 가나안 땅이 바라보이는 곳까지 가서, 비스가 산꼭대기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본 후에 죽었습니다.
므리바 물가의 사건 이후 모세의 시간 계산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가나안 땅 입구에 도착할 때가 자신이 떠날 때임을 알았습니다. 남들이 가나안 땅에서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무렵에 그는 인생을 끝내야 했습니다. 그 때부터 모세는 하루씩 줄어가는 자신의 시간을 생각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모세의 하루가 줄어들었습니다. 가나안 땅이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모세의 날은 그만큼 줄어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줄어드는 날들을 생각하는 그에게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새로웠을 것입니다. 그게 바로 모세의 <날 계수함>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세만 가나안을 향해 가는 게 아닙니다. 우리도 가나안 땅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나안 땅은 천국입니다. 모세의 날들만 줄어들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갈 날들도 하루하루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루씩 줄어드는 계산은 기쁜 것일까요? 괴로운 것일까요? 제대 날짜를 기다리는 병사들은 남은 시간 줄어드는 것이 기쁠 것입니다. 시간이 정말 안 간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랑하는 남편이 해외 근무를 발령 받은 경우, 가족들은 이별의 날이 너무 빨리 다가온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시간 계산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날 수가 줄어드는 것을 슬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맨 마지막 날은 우리에게 기쁨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날 천국에서 우리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 순간은 우리에게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그 날을 믿음으로 기다리면서 살아갑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주님을 만나는 그 날을 그리워했습니다. 어서 빨리 주님께서 오셔서 만나게 되길 고대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2장 20절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마무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종말의 날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그리워하고 기다리면서 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 시간을 역으로 계산하면서 살아보십시오. 살아온 지난날들을 생각하지 마시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계산하면서 사십시오. 얼마나 남았습니까? 2007년도만 생각하면 오늘이 12월 2일이니까 29일 남았습니다. 우리 인생은 얼마나 남았을까요?
이렇게 묻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 그 날이 언제인지 어떻게 알고 계산한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날과 그 시간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류영모 선생님께서 하신 것처럼 어떤 날을 가정해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은퇴하는 나이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법은 만 70세가 되면 은퇴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70세가 되면 더 이상 교회 직분을 감당하지 않습니다. 70세 되는 해 12월 31일을 기준으로 계산해 보십시오. 얼마나 남으셨습니까? 얼마 전 집회인도 하러 가서 뵌 어떤 목사님은 당신께서 은퇴할 때까지 5년하고 사십 여 일이 남았다고 헤아리고 계셨습니다. 직장에 근무하는 분들은 직장 정년을 기준으로 계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남은 날들을 하루씩 지워가면서 남은 인생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지난 세월을 계산하는 게 아니라, 남은 날들을 계산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대단히 큰 유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난 세월이 아니라, 남아있는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세월 동안에 아무리 잘 했다고 해도 남은 세월에 잘 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서 18장 24절은 말씀합니다.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으리라> 또 반대로 지난날에 잘못 살았다고 하더라도 남은 세월 동안 잘 하면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서 18장 21절을 보면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행한 공의로 살리라>고 했습니다. 남은 세월이 중요합니다. 지난 세월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미래는 과거를 지우는 지우개>입니다. 미래는 아름다운 과거도 지웁니다. 그런가 하면 미래는 부끄러운 과거도 지웁니다. 남은 세월을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 전 인생을 결정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루씩 지워가면서 살아가는 동안, 아직 날들이 남아 있는 동안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우선 우리는 과거에 대한 회개부터 해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3장 2절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했습니다. 지난날의 죄악을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죄악 가운데 산다면 앞으로 수백 년을 더 살아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고 새로운 날들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또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로마서 13장 11절은 말씀합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깨어야 합니다. 이 내용을 마태복음 24장 4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임하시든, 우리가 주님께 가든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만날 날이 언제인지 알 수 없으므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인이 돌아올 날을 알 수 없으므로 맡은 종들에게 양식을 잘 나눠주면서 집안일을 잘해야 합니다. 그런 종들은 주인이 언제 오더라도 걱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깨어있지 않은 종들은 주인이 갑자기 오면 당황할 것입니다.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말씀생활과 기도생활과 사명 감당에 깨어있는 성도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또한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히브리서 10장 25절은 말씀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열심히 모이십시오. 예배에 빠지지 마십시오.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에 힘쓰시길 기원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포용하십시오. 빌립보서 4장 5절을 보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인데, 원한을 품고 원수를 맺지 마십시오. 다 풀고 화해하고 사랑하십시오.

힘들고 어려워도 끝까지 참고 견디십시오. 야고보서 5장 8절을 보면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고 했습니다. 주님 만날 날이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참고 견디면 됩니다. 힘들다고 믿음을 저버리면 안 됩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이 힘들어도, 주변 사람들의 비난이 거세도, 끝까지 인내하면서 믿음의 승리를 거두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십시오. 요한계시록 22장 10절은 말씀하기를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봉해 두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활짝 열어 모든 사람에게 보게 해야 합니다. 즉 천국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전해 주어야합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도하심으로 주님 앞에 이를 때에 내 보일 것이 많은 인생을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

그러면서 <오늘 하루>을 우리 생애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욕심도 버리고, 깨끗한 영으로 주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여기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오늘을 위한 기도>

잃어버린 것들에 애달파 하지 아니하고
살아있는 것들에 연연해하지 아니하며
살아가는 일에 탐욕하지 아니하며
나의 나됨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 내 안에 살아있는
오늘이 되게 하소서

가난해도 비굴하지 아니하며
부유해도 오만하지 아니하며
모두가 나를 떠나도 외로워하지 아니하며
억울한 일을 당해도 원통해 하지 아니하며
소중한 것들 상실해도 절망하지 아니하며
오늘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오늘이 되게 하소서

누더기를 걸쳐도 디오니게네스처럼 당당하게
가진 것 다 잃고도 욥처럼 하나님을 찬양하며
천하를 다 잃고도 다윗처럼 엎드려 회개하는
넓고 큰 폭의 인간으로
넉넉히 사랑 나누는
오늘이 되게 하소서

이렇게 살면서 주님 만날 날을 기다리는 평생의 대림절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