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안에서 황제 통치권 인정한 예수/마가복음 12장 13~17절
진실로 사람은 참으로 고래 심줄보다 더 질긴 존재다. 사람처럼 고집 세고 완고한 존재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예루살렘 성전 관리자들도 그랬다. 예수님께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듣고 마음을 돌이키기는커녕 오히려 격분하며 예수를 떠났다. 떠나서도 마음의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저들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의 왕가를 옹호하는 헤롯 당원 가운데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이렇게 말해도 함정에 빠지고, 저렇게 말해도 함정에 빠지는 묘한 질문을 던지게 했다. 그건 로마의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였다.
황제냐 하나님이냐
사실 이 문제는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유대 본토가 기원전 63년에 로마의 속국이 된 후 로마는 줄곧 유대인들에게 많은 조공을 요구했다. 조공 중에는 인두세도 포함되었는데, 인두세는 기원전 6년에 제정된 것으로 남자는 14세, 여자는 12세부터 65세까지 내야 하는 세금이었다. 이 세금 문제는 무거운 짐일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실제로 예수님 사후인 주후 66년에 로마에 대한 체계적인 반란이 일어났을 때에(그 전쟁은 결국 70년에 예루살렘의 패배와 성전의 파괴로 끝남) 반란의 배경을 살펴보면, 로마의 폭정과 젤롯당이라는 열심당의 종교적이고 애국적인 열광주의와 함께 로마에 대한 납세 문제도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이걸 보면 납세 문제가 사회 정치적으로 얼마나 민감한 문제였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저들은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사회 정치적으로 민감한 세금 문제를 가지고 달려들었다. 예수님이 만일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그렇잖아도 착취당하는 세금 때문에 경제적으로 도탄에 빠진 유대인들의 불신을 받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한 사실이었고, 신앙적으로도 군중들의 불신을 받게 되어 있었다. 반대로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로마에 반기를 드는 폭력적인 혁명가로 판명되어 반로마 항쟁을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고발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문제는 단지 세금 문제가 아니었다.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덫에 걸리게 되어 있는 매우 미묘한 정치적인 문제였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런 음험한 계산을 꿰뚫어 보시고서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쏘아 붙였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고 하셨다. 데나리온을 갖다 주자 예수님은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데나리온을 들어 보이며 그들에게 물었다. “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며, 적힌 글자는 누구의 것이냐?” 그들은 자기들 입으로 대답했다. “황제의 것입니다”
이 짤막한 대화는 예수님의 탁월한 지혜가 아니면 연출할 수 없는 기막힌 장면이다. 가히 백미라고 할 만한 기막힌 물음이다. 앞서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은 것이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였듯이 “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며, 적힌 글자는 누구의 것이냐?”는 물음은 상황을 반전시키는 절묘한 물음이다. 저들의 정체성을 폭로하기 위한 수사학적 전략으로서 가히 압권이다.
과연 그럴까?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는 두 가지 유형의 동전이 사용되고 있었다. 하나는 사람이나 어떤 동물상도 새겨지지 않은 동전이었고, 또 하나는 상이 새겨져 있는 동전이었는데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당연히 상이 새겨진 동전을 소지하거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에게 질문을 던진 사람들이 내놓은 동전은 ‘황제는 신이다’는 문구와 함께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것이었다.
아니, 그게 뭐 대수로운 일이냐고? 물론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을 소지하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때로는 작은 사실이 큰 진실을 말해주는 법이다. 저들이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것도 매우 사소한 일 같지만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미심쩍은 진실이 담겨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그게 뭘까? 그것은 그들이 로마에 협력하는 정치체제의 일부라는 것이다. 물론 저들이 로마와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이야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저들의 호주머니에서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을 꺼내 듦으로써 저들의 정체가 로마의 협력자임을, 한 걸음 더 나아가 저들이 세금 문제를 꺼낸 것도 사실은 예수를 반 로마 편에 줄 세우려고 그러는 것임을 군중들에게 폭로한 것이었다. 이건 결코 지나친 해석이 아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이렇게 저들의 정체를 폭로한 예수님께서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 드려라”(막 12:17)고 말씀하셨다. 이건 정말 뜻밖의 말씀이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절묘한 말씀이었다. 우선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라”는 말이 황제에게 세금을 내라는 말은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넘어가자. 만일 예수님이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다고 했다면, 그건 세금으로 걷어가는 로마의 착취를 정당화해 준 셈이 되는데,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겠는가? 가난한 백성의 것을 착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에 어긋나는 일이요, 선지자들이 줄곧 비판해왔던 일이 아닌가? 그러니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분으로서 로마의 착취를 정당한 것이라고 승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그러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라’는 말이 무슨 말일까? 그 동전의 주인은 황제이니 황제에게 동전을 돌려주라는 말이다.
그리고 곧이어 예수님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말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세금 문제에서 주권의 문제, 주인 됨의 문제로 돌려버리는 기지를 발휘하셨다. 그것만이 아니다. 예수님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고 한 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대답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바리새인이나 헤롯당에게 던지는 도전적인 질문이었다. 예수님은 대답을 통해서 오히려 저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황제에게 속한 것은 무엇이며, 하나님에게 속한 것은 무엇이냐고. 황제에게 속한 것이 있기는 하는 거냐고.
황제의 것은 없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을 통해 질문을 던지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청중을 향해 황제에게 속한 것이 있느냐고 질문하는 것으로 말을 맺었다. 이제 대답을 해야 할 사람은 그 당시의 청중이며, 지금 성경을 읽는 우리의 몫이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보자. 황제에게 돌려야 할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나의 대답은 이렇다. 엄밀히 말하면 없고, 그렇다고 꼭 없는 것은 아니라고. 없기도 하지만 있기도 하다고. 나의 이런 대답을 들으면 무슨 대답이 그러냐고, 그게 대답이냐고 말할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다.
나의 대답이 옳은지 한번 따져보자.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해왔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이스라엘 땅도 하나님의 것이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백성이며, 모든 땅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라고.
다윗도 말했다.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이 모두 다 하나님의 것, 온 누리와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것도 주님의 것이다.”(시 24:1) 바울도 아덴에서 전도할 때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며,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 위에 살게 하셨다’(행 17:24~26)고 말했다.
그러니 황제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겠는가? 없다.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저들은 지금 황제의 이름으로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마치 그것이 황제의 것인 것처럼 가난한 백성들의 것을 강탈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저들을 향해 대답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이다. 지금 너희들이 열심히 거두어들여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과 로마에 협력하는 대가로 치부하고 누리는 것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것을 도륙하는 것이라는 진실을 깨우쳐주기 위해. 그렇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헤롯당과 논쟁하는 상황에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주라’고 하신 것은 ‘황제의 것이 없다’는 것을 환기시키기 위한 전략적인 수사법이었다.
황제의 것은 있다
그러나 꼭 없기만 한 것은 아니다. 황제에게 돌려야 할 것이 있다. 바울의 말을 들어보자. “사람은 누구나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이미 있는 권세들도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것입니다.”(롬 13:1) 바울은 심지어 “권세를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요, 그런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될 것”(롬 13:2)이라고 말했다. 바울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황제는 하나님으로부터 통치권을 위임받았다. 누구든지 그 통치권에 복종해야 할 정도로 살아있는 권세요, 또한 합법적인 권세다. 그는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둘 권세도 있고, 백성들의 잘못을 심판하고 벌할 권세도 있다. 충성스러운 자에게 상을 줄 권세도 있다. 그렇다. 황제가 손에 쥔 칼은 결코 종이칼이 아니다. 백성들을 다스리고 통제할 수 있는 힘 있는 칼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황제의 것은 있다.
하지만 바울은 잊지 않고 말한다. 황제의 통치권조차도 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권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아래 있는 것이라고. 하나님의 통치권과 황제의 통치권은 결코 대등한 것일 수 없다고. 그렇다. 하나님은 만유의 하나님이시고 열국의 통치자시기 때문에 그 어떤 권세도 하나님의 통치권 밖에 있는 것은 없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황제의 것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엄밀히 말하면 황제의 통치권조차도 황제의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적으로 보면 황제의 권세가 없다고 할 수도 없다. 황제의 권세가 우리 모두의 삶에 실제적으로 미치고 있는 것이 분명한 만큼 없다고 할 수도 없다는 것이 정직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하여, 나는 황제의 것이 없기도 하지만 있기도 하다고 대답한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시민이요, 국가의 시민
앞에서 말했다시피 황제의 통치권이 하나님의 통치권과 대등한 것은 아니다. 황제의 통치권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질서와 악을 다스리기 위해 사용하는 또 하나의 통치 방식일 뿐이다. 하나님은 두 가지 방식으로 세상을 통치한다. 하나는 말씀과 성령에 의해, 또 하나는 황제와 관료들을 통해 칼과 시민적 법률로 다스린다. 물론 정부의 통치 방식이 하나님의 정의에 어긋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세상의 악과 사회 정치적 무질서를 다스리기 위해서 정부의 공권력을 사용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냐 황제냐 하는 사회 정치적 문제에서 양자택일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황제의 통치권을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지 않았다. 하나님 안에서 황제의 통치권을 인정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뿐 아니라 국가의 시민으로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아직도 하나님나라의 시민인 것만 중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의 법만 따르면 되지 세상 법은 따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 법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법을 어기는 사람들이 있다. 좀 심한 경우에는 세상의 질서와 하나님의 질서를 대립적인 적대 세력으로 보고, 세상을 등지면 등질수록 신앙에 유익하다고까지 생각한다. 그래야만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고, 믿음을 따라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개인적이고 영적인 차원으로 제한한 나머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 세계 전체를 하나님의 통치영역에서 누락시키는 잘못을 범하게 하는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신앙의 좁은 세계로 함몰되어버리게 하는 위험천만한 생각이다.
신앙은 본래 온 세계를 품는 것이다. 하나님의 피조세계 전체를 품고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하늘을 응시하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나라의 시민이면서 동시에 국가의 시민이어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질서를 따라 살면서도 동시에 세상의 법을 준수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물론 살다 보면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책임과 국가의 시민으로서의 책임 간에 충돌이 일어날 때가 많다. 하나님에게 순종하기 위해 국가 정부에 항거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 과연 어느 선까지 세상 정부의 통치에 순복해야 하며, 어느 선부터 하나님의 이름으로 항거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게 간단치 않다. 하나님의 질서와 황제의 질서 사이에는 분명하게 선을 그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건 사실이다.
종교개혁자인 루터는 농민전쟁에 대한 \"평화에의 권고\"(1525년)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배자들이 사악하고 정의롭지 못하다는 사실이 무질서와 폭동을 정당화시켜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악함을 처벌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책임이 아니라, 검을 갖고 있는 세속 지배자들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이 복음을 억누르고, 세속적인 일들에 있어서 당신들을 억압할 때, 그들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억압할 뿐만 아니라 발밑에 짓밟아버릴 때, 당신들은 훨씬 더 큰 잘못을 범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권위와 법을 침해하고, 당신들을 하나님보다 높이 두는 죄악을 범하는 것이다.”
루터는 세속 정부의 잘못을 비난하면서도 군주들에 대하여 반란을 모의하는 것은 반대했다. 그러나 루터의 이런 주장 때문에 1930년대 독일 교회가 히틀러 치하에 있을 때 히틀러의 불의한 폭압에 저항하지 못하고, 히틀러조차도 하나님의 도구로 여길 수 있게 하는 왜곡을 초래하였던 것을 보면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중 국적을 갖고 사는 것인 만큼 선택하기에 모호하고 복잡한 일들이 많다. 국가의 시민으로만 산다면 하지 않아도 될 고민들을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 이게 힘들고 복잡하다고 해서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만 살겠다고 내빼서는 안 된다. 영적인 도피처로 피신하거나, 교회 안으로 도망쳐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따라 살되, 이 땅에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책임을 다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참 사람으로 사는 길이요, 영과 육을 가진 존재답게 사는 길이다.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길이다. 얼핏 보기에 그렇게 사는 것이 어정쩡한 것 같고, 신앙을 강화시키기보다는 풀어헤치는 것 같고, 쓸데없이 복잡하고 힘겨운 것 같아 보일지라도, 양자택일의 선명한 길이 아니라 양자통합의 현묘(玄妙)한 길을 가는 것이 예수를 따라가는 길이라고 믿는다.
정병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