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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서신들은 사도행전 12장까지의 유대 그리스도 세계에 밀접하게 연결된 사도행전 후반부와 연대적으로 볼 때 차이가 있다면 예루살렘 교회의 입장에서가 아닌 바울의 입장에서 본다는 것 뿐이다.
누가는 의식적으로 예루살렘 전승의 관점을 채택한 듯 한데 바울서신에는 호의적이면서도 날카로운 신학자에 의한 제현상의 분석이 있다. 고전 12:4-11절과 같은 성령 은사의 목록은 실로 실제적인 분류요 평가인데 이것은 단지 계시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심사숙고한 열매인 것이다.
바울은 서두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있어서 성령 은사의 본질적 통일성을 강조했는데 여기에는 근거와 기원, 또 목적의 통일성도 있다. 즉 은사는 개별적인데 그 목적은 집단적이다.
바울은 나아가서 보다 차원 높은 통일성의 유대를 덧붙이는데 이는 모든 은사는 사랑안에서 사용되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증언과 목표의 근본적 통일성이라는 원칙을 수립해 놓고서 바울은 성령 은사의 다양성을 강조했다.
그가 처음에 둔 『말씀』의 은사는 이것이 만일 유익을 주기 위한 것이라면 교회안에서의 설교나 교훈 같은 것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이 다음의 은사는 『믿음』으로 기도의 응답이나 혹은 말의 능력으로 인한 기사와 표적에서 입증된 믿음을 말하는 것 같다. 그 다음에는 『신유』와 『능력 행함』의 은사들인데 이 능력이 고린도 교회에 일어나지 않았으면 바울이 소신을 가지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언』의 은사는 바울에게 있어서 두 가지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이는데 첫째는 초대 교회에 명백히 있었던 글자 그대로 예언적 요소이며 현존하는 바울서신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둘째로 바울은 예언을 일정한 상황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능력으로 본 것 같다. 이것은 성령 충만한 능력이 있는 설교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고 방언의 은사와는 달리 모든 사람, 심지어 불신자들도 즉시 알아 들을 수 있는 것이었고 이런 이유에서 바울이 예언의 은사를 다른 것보다 우위에 두는 이유인 것으로 보인다.
『영 분별』의 은사는 그 당시 모든 예배와 목회 양식이 유동적이었고 정통 교리나 조례가 초기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의심할 것 없이 한층 더 필요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받았다고 말하는 ‘영’(inspiration)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아니면 사단에 속한 것인지 말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진리의 영과 거짓 영을 구별하는데 있어서 단순한 척도를 예수를 주님이라 고백하느냐 않하느냐에 두었다.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진심으로 받아 들였고, 통역의 은사를 보다 귀하게 보았으나 자신이 직접 방언을 하였다. 그는 이 은사들을 고의적으로 마지막 목록에 두었다. 사랑이 없다면 방언은 쓸데 없는 것이고 이 은사는 하나님에게 하는 것이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방언은 교회 전체의 덕이 아닌 자신의 덕을 세우는 것으로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이 보면 미쳤다고 오해하기 쉬운 것이다. 만일 방언을 사랑과 겸손에서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 두 세 사람이 질서를 따라서 행하고, 거기서 합당한 통역을 덧붙인다면 아마 아무런 반대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바울은 이 은사를 가진 자는 교회 안에서 잠잠하라고 권고했다. 방언하는 자는 원한다면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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