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나의뇨? / 롬3:9-31

우리는 나으뇨(롬 3: 9-31)


유명한 종교개혁자 칼빈은 “사람은 자존심이 골수에까지 박혀 있어서 자존심을 만족시키는 매혹적인 언사를 제일 좋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정치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여론을 의식하면서 인기성 발언, 인기성 공약을 많이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맞는 말 같습니다. 저 자신을 들여다 보면 저 역시도 그렇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지도자 모세는 당시에 인기투표를 하면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모두 돌을 들어 치려 하였으니 얼마나 인기가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사람을 의식하는 목회를 할 때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구역예배를 드리고 성경체크할 때 저는 인기관리를 잘 합니다. 어느 정도 신앙생활 한 사람이 성경을 조금 읽은 것을 말하면 저는 이게 뭡니까 성경좀 많이 읽으세요 하고 자존심을 긁는 것이 아니라 ‘잘 하셨습니다’라고 칭찬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목회가 세상적으로 볼때 가장 인기 없는 일이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조금 남은 자존심까지 다 긁어 놓는 일을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조금 남은 자존심까지 긁어 내는 것이 무엇일까요? ‘당신은 죄인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목사는 자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어떤 목회자는 교회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죄’의  단어를 쓰지 말아야 목회가 성공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적극적인 사고방식의 설교만을 합니다. 그리고 죄 라는 것을 유식한 심리학적인 용어로 미화시키고 합리화 시켜 버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수술만 하면 낳을 수 있는 병을 잠시의 고통을 줄여주는 달콤한 마약으로 오히려 죽게 만든다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3장 1절 “이제는”이라는 일대 놀라운 전환의 상태를 말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모두 죄인이라”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을 제거해 버리는 우상숭배와 성적 타락, 도덕적 부패를 놓고 비종교인들을 향해 당신들은 죄인이라고 선언합니다. 또한 2장에서는 남보다 조금 선하다고 느끼며 하나님의 자리에서 앉아서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는 자들을 향해 여러 가지 증거를 들어서 ‘당신들도 죄인이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 오늘 본문에서는 그 동안 제 삼자를 향해 말하다가 갑자기 바울 목사님은 “우리는 어떠하뇨”하면서 자신과 독자들을 향해, 오늘 저와 여러분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하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 하였느니라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이렇게 보면 이 세상에는 한 종류의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죄인과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죄인만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파스칼이라는 기독교 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의인이나, 위인이나, 성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 땅에는 오직 한 가지 종류의 사람만이 존재한다. 그들은 죄인이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으십니까?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10절에서 12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관점에서 볼 때 의인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구도자도 없고, 선인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13절부터 15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혀와 행동을 보십시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라 입만 열면 열린 무덤같이 더러운 냄새가 나고,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아니 바울을 교황의 근거로 삼는 이 세상의 많은 교황들은 무오하다고 하는데 바울은 무오하지 않나요? 아니 이 세상에는 거룩하게 산 사람들이 있어 그들의 이름 앞에 ‘거룩할 성’자를 붙여 그들의 이름으로 기도도 하는데 바울도 죄인인가요? 다윗은 어떻고요? 미국에 영적 대각성 운동을 일으켰던 에드워드 조나단 목사님은 어떻고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대적인 비교에서는 의인 같고, 구도자 같지만 하나님 관점에서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은 속에 있는 죄가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고, 감옥 밖에 있는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더러운 죄가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뵙는 순간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라’고 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미국 초대 역사의 유명한 인물 ‘조나단 에드워드’라고 하는 목사님은 프린스턴 대학 초대 학장 가운데 한분이셨는데 그는 설교가운데 자신을 “흉악한 벌레 같은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다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식인의 두 얼굴이란 책에서 위대한 명성 뒤에 가려진 지식인의 이중성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계몽주의 철학자 루소는 자기 아이들을 고아원에 내다버렸고, 노동자 해방을 부르짖었던 마르크스는 가정부를 45년간이나 착취했고, 톨스토이는 사창가를 드나들면서도 여성과의 교제가 사회악이라고 여겼고, 논쟁을 즐긴 철학자 러셀은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저주를 퍼붓던 망상증 환자였고, 노인과 바다의 헤밍웨이는 병적일 정도로 거짓말을 일삼았고,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전형적인 남성 우월주의자였고다 폭로하고 있습니다. 저 자신도 주님의 일이라는 이름 속에 교묘하게 숨어있는 저 자신의 욕망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위인으로 여기는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에 대해서 보면 그 역시 ‘원주민과 끊임없이 불화와 갈등을 겪었으며, 자기가 치료하는 환자들에게 매우 냉정하며 그들을 무시했던 사람이었다’라는 내용이 담긴 또 다른 면모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귀한 목사님들의 고백을 보십시오. 2005년 5월 13일 교계에 목사님들이 모였습니다. 거기서 기성총회 증경총회장인 홍순우 목사님은 ‘처음 교회를 개척하면서 1년 만에 성도가 100명 늘어나자 자만에 빠졌다’며 ‘’그러나 결국 다른 교회 성도를 빼앗아온 양 도둑에 부과했다‘고 자백했습니다. 장로교 교계의 원로인 이종성 목사님은 먼저 ’크고 작은 죄를 수없이 범했다‘고 운을 뗀 뒤 ’서류를 위조해 일본에 가서 공부하고 다른 학생의 대리시험을 치른 것 등은 평생 씻을 수 없는 짐‘이라고 털어 놨다고 합니다. 장신대 주선애 교수는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기쁘고 행복했던 기억을 잊고 어느새 스승의 자리를 지키기에 급급하고 사례비? 월급봉투 두께에 희비하는 세상 속물로 변해 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곽선희 목사님인지 함경직 목사님인지 잘 모르겠는데 그 분들에게도 성도들이 열 댓 가지 목사님의 연약한 부분을 적어서 왔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고는 그 목사님이 ‘이것뿐이 안되냐’고 하면서 나는 이보다 더 많은 죄와 연약함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목사님을 쫓아내려고 하던 그 무리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나는 의롭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나의 의로운 선한 행동으로 당당하게 하나님께 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요한 일서 1장 8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죄의 문제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무엇입니까? 죄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시편 기자는 복있는 사람을 말할 때 (시 32:1) ‘[다윗의 마스길]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16절을 보면 죄는 우리를 파멸과 고생의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죄의 결과에 대해서 창세기 3장 16절의 말씀을 놓고 먼저 나눈적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6절에 보면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라는 단어와 창세기 4장 7절의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할 때의 소원은 같은 단어입니다. 다른 번역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표준 새번역이나 공동번역에는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공동번역에는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죄는 지배하려는 욕구가 가득찹니다. 그러므로 가정에 부부간에 주도권을 놓고 매일 치열한 전쟁을 합니다. 뱀과 사람과 갈등을 합니다. 땅과 사람과 갈등을 합니다. 

사무엘 하를 보십시오. 다윗의 인생에 대해서 나와있습니다. 사무엘 하는 24장까지 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인생을 보면 10장까지는 승리의 인생을 삽니다.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예루살렘 성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기고,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8절 말씀에 보면 ‘이후에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왕국이 확장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11장에 중요한 사건이 나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불륜적인 관계를 갖게 됩니다. ‘죄’라는 것이 등장하면서 24장까지 계속해서 불행한 길을 걷게 됩니다. 자식들 사이에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심지어는 압살롬이란 아들의 반역으로 예루살렘 성에서 쫓겨납니다. 

지금 이 사회를 보십시오. 파멸의 길을 걷고 있는데 치안을 잘하면, 형벌을 높이면, 다 될 것 같지만 일시적으로는 해결될런지 모르지만 그러치가 않습니다. 점점더 많은 폭력과 잔인함을 드러낼뿐입니다. 이유는 9절에 ‘다 죄 아래 있기 때문이다’이라는 것입니다. ‘죄’는 파워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 아래 있다는 것은 “죄의 사슬에 매여 끌려 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성경에서 1장부터 3장까지 ‘죄’의 문제를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죄를 말하면서 모두가 죄인이라는 선언은 사람을 부끄럽게, 죄책으로 몰아가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자기를 포기하고 주님께 나오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올바른 행위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다고 발버둥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의로운 행위로 발버둥치면 칠 수록 더욱 깊은 수렁에 빠져들어간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 21절에 자신이 깨달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리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문제의 해답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8장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잇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할렐루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율법의 행위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으로 우리가 왜 죄인인지를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 우리의 모든 입을 막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필요함을 고백하게 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21절에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구약에서부터 이미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 구속은 모두 당시에 법정에서 쓰던 용어들을 빌려온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하나님의 법정에서 이 용어들을 해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미국 그 지역의 판사의 아들의 심판
교통위반으로 즉심에 넘겨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이루어짐
더 이상 아들을 죄로 정할 근거가 없어짐 / 구속은 사면이 아니라 죄의 근거가 해결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하신 것은 처벌을 면제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의 값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치르심으로 더 이상 처벌을 부가할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