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적 교만의 죄를 아십니까?(롬2;1-16) 제가 대학원 공부하고 집에 올 때 한 분을 모시고 옵니다. 이 분은 일산에 계신 집사님인데 함께 공부를 하시는 분입니다. 이 분이 고려대학을 나와서 젊어서 기업에 사장으로도 있었던 분인데 지금 연세가 70세가 넘으신 분입니다. 이 분의 고백을 보면 나이가 들고 지금 생각하니 하나님을 알고 사람을 배워가는 것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고 말씀하시면서 10년째 신학공부를 하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물질의 부에 인생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면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부유하고, 영적인 부유함, 말씀에 부유함이 있을 때는 금생과 내세에 유익이 있고, 노년이 되어서도 그 풍유함을 고백하는 축복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의 유명한 법대생의 고백이 어느 대학에 붙어있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제 한 학년만 공부하면 됩니다. 당시에 일류대학의 법대생이라고 한다면 장래가 보장된 사람입니다. 그는 가난하여 등록금을 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에 잘 알려진 부호인 할머니에게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저는 어느 대학의 법대생입니다. 저에게 대학의 등록금을 대 주신다고 한다면 졸업하여 갚겠다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랬더니 그 할머니가 보자고 말씀하시더랍니다. 그래서 갔는데 그 분이 묻기를 ‘그래 자네는 이 돈으로 무엇을 할 작정인가?’했더니 당연히 이 젊은이는 등록금을 내고 법대를 졸업할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할머니가 다시 묻기를 ‘그 후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하고 물었더니 당연히 유명한 판사가 될 것이라고 말하더랍니다. 이 할머니는 또 물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는 하고... 그랬더니 돈도 많이 벌고 결혼도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할머니가 또 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집도 사고 좋은 집도 살거라고 말하더랍니다. 또 이 할머니가 물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는 하고 ..., 그랬더니 “나이가 들어 늙겠지오”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랬더니 또 묻더랍니다. 그 후에는...., 이 젊은이는 그 후를 생각도 하지 않았던터라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후에는... 이 말이 이 젊은이의 뇌리에서 떠나질 않더랍니다. 저는 저와 함께 공부하는 그 어른 집사님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나름대로 기업에 사장으로도 있었고, 나름대로 돈도 벌었는데 지금은 단지 연로하신 할아버지입니다. 그리고 그의 젊어서 배운 학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우는 것에 인생에 풍요함을 고백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부유한 자가 인생의 전반에 걸처 진정한 부유한 자임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돈을 열심히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젊은 날에 말씀으로 영혼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것이 진정한 노후의 재산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분을 만나면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보게 됩니다. 부드럽고, 겸손하신 분, 대학원에 들어오시기 전에 족구연습을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대학원 공부하면서 젊은이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랍니다. 자녀들과 사위들은 한의사, 치과의사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과는 정반대의 한 사람을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였던 것은 그가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궁금해서입니다. 제가 청년 때 포항에 6개월 정도 살 때 교회에서 만난 사람입니다. 그는 매우 부정적이고 비판적이고 지금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 같은 마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자기가 제일이고, 자기만이 선하고, 자기만이 삶의 기준처럼 생각하는 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의 죄를 하나하나 말합니다. 이미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셨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 세계를 보면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드러나고 있는데도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억누루고 있는 이방인들의 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를 하여 하나님께 불경건하고, 이웃에게는 불의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있음을 선포합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 중에 그래 맞아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돼’ 하면서 맞장구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면서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판단한다는 것은 분별한다는 것과 다르다. 잘못을 무조건 덮어두라는 것이 아닙니다. 판단과 분별은 구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별의 영을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여기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잘못을 지적함의 목적이 상대방을 정죄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감정을 감추지를 못하여 노골적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겉으로는 드러나지는 않지만 교묘하게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모양으로 정죄를 목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영적 교만이며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왕 노릇하는 악한 죄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방인들을 향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해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아직 신앙이 어린 초신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중직을 맡아 수고하는 사람들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십자가의 보혈을 경험하지 못한 종교인을 향해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합니다. 먼저도 말씀드렸지만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삼층천의 체험을 한 영적 거장입니다. 그는 가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방 선교사의 리더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고백합니다. 초기의 서신인 고린도 전서 15장에는 자신을 향해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후에 로마의 옥중에서 쓴 서신인 에베소서 3장에서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풀려나서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디모데 전서에서는 ’죄인중에 내가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섬김의 자리에 내려갑니다. 바울은 말씀의 지식이 있어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을 먹는 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은 자유함을 가졌지만 자신의 이런 일로 인해 이제 우상을 섬기다가 주님께로 돌아온 형제들이 아직 우상의 파워를 생각하여 실족하게 된다면 그 형제들을 위해 영원히 우상에게 드려진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고백을 합니다. 로마서 14장 1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15장에 보면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철저하게 약한자, 새신자, 도움이 필요한 자를 향한 낮은 자세를 갖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교만한 자는 다릅니다. 이 모습이 돌아온 탕자의 모습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탕자가 돌아와서 ‘아버지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고백을 합니다. 그때 아버지는 좋은 것으로 잔치를 열어 주십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중요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무시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때 형이 등장합니다. 그 형은 열심히 일한 자입니다. 나름대로 의롭게 산 종교인입니다. 그가 돌아오다 보니까 집에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종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동생을 위해 잔치를 여는 것을 알고는 ‘분노’를 갖습니다.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맏이는 아버지에게 대들면서 말합니다. 아버지 저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한 불효자이고 나는 그래도 의로운 자로서 여러 해 아버지를 섬긴 자인데 어찌 저를 위하여 잔치를 여십니까?하고 따지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보면 그 맏아들은 재산은 탕진하지 않았지만 그의 그 교만이 아버지가 예비하신 잔치를 거부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의 몸속에 흐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요 바리새인들과 같은 영적 교만으로 가득 찬 종교인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이 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지 보십시오. 그들의 생각 속에는 자신들이 남보다 좀 더 선하다고 생각하는 영적 교만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죄인들과 세리들은 주님 앞에 돌아올 수 있는 마음을 갖을 수 있지만 이들의 이 교만은 주님께로 돌아오기 힘든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바리새인과 죄인 취급을 받고 있는 세리의 기도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실 때는 대부분이 영적으로 교만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두고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복음서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불신자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 교만으로 가득찬 종교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모습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갑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새리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바리새인은 자신은 그들보다 선하다고 생각하기에 비교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세리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율법에 철저하다는 사람일수록 이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늘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기도 많이 한다는 것으로 인해 이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많이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많이 읽고 안다는 것으로 인해 이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을 향해 ‘너희도 같은 일을 행하고 있다’고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어떤 목사님이 큰 식당에를 갔는데 촛불을 식탁에 켜서 조금 어둡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이 묻기를 왜 이렇게 어둡게 분위기를 만들어 놓았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웨이터가 하는 말이 ‘어두워도 먹는 것이 코로 안 들어가고 입으로 들어갑니다. 어두우면 모두가 미인처럼 보입니다’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컴컴한데서는 전부가 선한 것처럼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빛 되신 하나님 앞에 나와서 보면 더러운 부분이 다 보입니다. 이 사람이 간음을 행하지 않았으나 마음에는 음욕이 불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살인을 하지는 않았으나 그 속에는 미움이 가득 차 있습니다. 백지 한 장 차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들의 이 판단에서 볼 때 그들의 교만이 더 큰 죄 일런지 모릅니다. 드러나게, 어떤 이는 드러나지 않게 오히려 교묘하게 남을 정죄하고 헐뜯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전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더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죄를 드러내기를 좋아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자기의 눈에 들보가 있는 사람이 남의 누의 티를 놓고 말합니다. 또한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 그 자체가 그 사람 속에 있는 것이 반사되어 보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악을 행합니다. 21절, 22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겠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도다.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업신여기고 자기들의 행위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4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모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요함을 멸시하느뇨. 어떤 면에서는 주님의 보혈의 피가 없는 우리의 선행 이것 역시도 불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선행 배후에는 언제나 나름대로 이기적 욕망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983년 미국에서 올해의 아버지 상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큰 나라에서 한 해에 한 명을 주니 얼마나 큰 상이겠습니까. 그의 이름은 코도조도보수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고아를 18명 입양하여 키웠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이 14, 15세의 사춘기가 갓 넘으면 그들을 성적 회롱물로 삼았습니다. 결국 체포되었습니다. 나름대로 선을 행한다고 하면서 남을 정죄하며 하나님의 심판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을 향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28절을 보면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적으로 교만한 종교인들을 향해서 ‘당신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가 필요하오’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초점은 우리의 의로운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의 몸에 예수의 보혈의 피가 흐르고 있느냐’를 보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흐르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단지 종교인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지 않는 종교인은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영적 교만덩어리로 가득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십자가만이 ‘오늘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덮어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십자가만이 진정 우리를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인도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저와 여러분 속에 흐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고동치는 사랑의 교회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 찬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