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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나는 믿음
에베소서4:11-16
결혼 후 60년을 같이 산 노부부가 85세에 교통사고로 죽게 되었습니다.
이분들은 죽기 전에 10년 동안 할머니의 권유로 건강식을 하며 살았습니다.
맛은 없지만 건강에 좋다니까 열심히 먹었습니다.
그들이 천국에 이르자 베드로가 맞이하며 커다란 저택으로 안내했습니다.
베드로가 이곳이 당신들이 살 곳이라고 하자, 노인은
“꽤 비쌀 것 같은데 가격이 얼마요?”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미소를 지으며 “무료입니다. 여기는 천국입니다”
다음날 베드로는 산해진미들이 가득한 뷔페 식당으로 안내했습니다
노인은 다시 값을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여기는 천국이요, 다 무료란 말이요”
약간 움찔해진 노인은 ‘그럼 저지방 저 칼로리 음식이 있는 곳은 어디죠?’
베드로가 한심하다는 듯이 “먹고 싶은 다 먹어도 아프거나 살찌지 않아요”
그러자 노인은 모자를 집어던지고 발을 구르며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습니다.
진정을 시키고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노인이 말했습니다.
“이 할망구야! 이게 다 당신 탓이란 말이야!
당신이 그 깔깔한 현미밥, 그 날내 나는 가루음식 먹일 생각 안 했더라면,
난 벌써 10년 전에 여기 왔을 거란 말이야!”
우리가 착각하며 살고 있는 게 많습니다.
이 세상에 오래 살면 축복인 줄로 압니다.
그러나 천국은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곳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부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원하시는 소원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자꾸 세상에서의 성공과 부자, 높은 자리, 평안한 것 구해요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엄마의 젖과 사랑을 먹으면서 자라납니다.
그런데 만일 자라지 않는 아이가 있다면 얼마나 걱정이 되겠습니까?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적으로 갓 태어난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이 아이는 말씀과 기도, 훈련과 사역을 통해 자라게 됩니다.
장성한 사람이 되기까지 계속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자라지 않는다면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나의 믿음은 자라고 있는가?, 멈추어 있는가? 아니면 퇴보하고 있는가?
자기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보기 바랍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라는 것은 아직 미숙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영적인 어린 아이와 장성한 사람에 대해서 나옵니다.
우선 어린 아이에 대해서는 14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어린 아이는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지는 사람입니다.
또 세상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사람입니다.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알면서도 후회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직 미숙하기 때문입니다.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립니다.
이런 말 하면 그 말에 흔들리고, 저런 말 하면 또 그 말에 흔들립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흔들리지 않게 되고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됩니다.
어른은 어떤 사람입니까?
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님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믿는 예수와 내가 아는 예수가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온전한 사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이 중요한 말입니다. 희랍어 원어로는 teleios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telos의 형용사인데 telos는 끝 , 목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 말을 좀 풀어서 보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합당한 자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오늘 본문에서는 “온전한 사람”이라고 번역했고,
골1:28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고전14:20에서는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여기에서는 장성한 사람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사랑의 교회 원로이신 옥 한흠 목사님은 여기 나오는 ‘온전한 사람’을
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 제자라고 썼던 말의 다른 표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서신서로 오면서 갑자기 제자라는 말이 사라졌는데,
그 말을 대체하는 말이 바로 ‘온전한 사람’이라는 해석입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제자인 크리스천들은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온전한 사람’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굉장히 부담을 주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온전해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 말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들이 언제까지나 어린아이가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이제는 영적으로 온전한 사람, 장성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라지 않는 아이처럼 멈추어 있습니다.
그 모습은 이런 것들로 나타납니다.
기도에 있어 진전이 없습니다.
관계가 깊어지면 대화의 내용도 깊어집니다.
남녀가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눌 때는 “혹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있을까요?”
“혹시 눈치를 채셨는지 모르지만
저는 자매님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왠지 가슴이 두근거리고, 괜히 더 잘 보이고 싶고 그렇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연애로 결국 결혼하게 되었고, 20년, 30년을 살았는데도
‘저에게 시간 좀 내 주시겠습니까?’
‘제가 다른 자매들보다는 자매님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고 있다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제는 훨씬 더 깊은 대화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의 기도가 아무런 진전이 없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께 뭔가를 달라는 기도밖에는 할 줄 모른다면 자라지 않는 겁니다.
이제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묻고 순종해야 합니다.
내 욕심을 관철하는 게 아니라, 욕심은 내려놓고 주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어린 아이인 모습은 교회 안의 분열입니다.
끼리끼리 모임을 자꾸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만 친합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친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이런 태도가 바로 텃세를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본인은 자기가 텃세를 부리는 줄을 모릅니다.
새로 온 분들에 대해서 열린 자세로 환영하고 받아주지 않는다면
그분들은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곳이 될 것입니다.
속회 조직을 떼어 놓으면 아예 교회도 안 나오려고 합니다.
내게 어떤 직분을 맡겨주지 않으면, 뭐 이런 교회가 있냐고 난리를 칩니다.
모두 어린아이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어느 누구와도 친밀한 교제를 나눌 줄 압니다.
영적으로 어린아이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린아이는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언제나 주님이 내게 뭔가를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달라고 졸라댑니다.
교회도 언제나 자기에게 뭔가를 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짜를 바라는 거지근성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주기 시작합니다.
이미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크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기 시작합니다.
자기의 것을 나누려 하고, 베푸는 것의 기쁨을 알기 시작합니다.
영적으로 어린아이는 일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냥 조용히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은혜만 받고 가려고 합니다.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할 일들이 많이 있는데 남에게만 미룹니다.
“누군가 하겠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일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혹 이렇게 전도를 하기도 합니다.
“우리교회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잔디밭도 있고요. 식사도 맛이 있습니다. 목사님 말씀도 좋습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에 인도했으면 자기의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 제 친구를 교회에 데려왔습니다. 이제부터는 목사님께 맡깁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모두 목사가 맡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다른 아무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알지 못하노라”(고전1:14-16)
한편 행18:8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면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도대체 누가 새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까?
분명히 바울은 아니었습니다.
세례를 베푼 사람은 그리스보, 가이오 그리고 다른 영적 아버지들이었어요.
이들은 모두 바울이 가르치고 훈련시켜서 키운 제자들입니다.
이제 우리 성도들도 자신들의 믿음이 성숙해져서
다른 사람들을 성숙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르쳐 주고 모범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일을 위해서는 성도들이 훈련을 받아야 하고,
또 그런 사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초보단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15-16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몸의 각 지체가 자기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 잘 움직여질 때
그 몸은 자라게 되고 튼튼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훈련과 사역을 가리킵니다.
몸이 자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매일매일 잘 먹고, 운동을 하고 땀을 흘릴 때 건강하게 자라게 되는 겁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양분인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훈련받고 뭔가 자신의 재능과 은사에 맞는 사역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믿음은 점점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믿음은 자라납니다.
Joni Eareckson Tada는 이렇게 지적했다.
“고통 속에서만이 우리는 예수님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위대하게 쓰신 사람들은 한 결 같이 시련의 관문을 통과했습니다.
시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신다.”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우리가 그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십니다.
11-12절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직분을 주신 것은 자랑하거나, 명예로 여기란 것이 아니고
성도들로 하여금 봉사의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즉 사역을 위해 직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은 결코 계급이나 명예가 아닙니다. 봉사를 위한 직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떠난 후에 그들은 그 일을 계승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성장하고 하나님의 역사는 놀랍게 번져나갔습니다.
이 원리는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훈련받아야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목양성도들의 믿음은 자라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훈련을 잘 받아 좋은 사역자로 쓰임 받게 되길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