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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중심을 이동하라 마태복음16:13-20
지난 주 우리는 새 포도주를 담기 위해서 새 부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세상은 변화되고 있고, 우리는 거기에 잘 적응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을 담을 새 부대를 준비해야 합니다. 오늘은 무엇을 담을 것인가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즉 새 포도주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제 새 시대에 낡은 포도주가 아니라 새 포도주를 담아야 합니다. 새 포도주는 무엇입니까? 전1:9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라고 했는데 이 세상에 새 것이 어디 있습니까? 사실 새 포도주라기보다는 참 포도주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회복해야 할 참된 모습은 무엇입니까? 그 중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오늘은 한 부분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때 우리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바다 끝에 가면, 낭떠러지가 있어서 물이 쏟아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다 멀리 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 때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도 몰랐고, 만유인력의 법칙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생각을 잘못했던 것입니다. 또 전에는 지구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태양을 비롯하여 모든 별들이 다 지구를 중심으로 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지구가 중심인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원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중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내 생각대로 판단하고 내 마음 대로 움직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면 그것은 옳은 것이지만, 내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틀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런 면은 마음에 들지만, 저런 면은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들었다, 안 들었다 합니다. 항상 내 생각, 내 느낌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 잘못입니까?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무엇이 참입니까? 무엇이 진리입니까? 우리는 모두 진리를 찾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13절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사람들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14절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대답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도 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잘못 본 것입니다. 엄청난 오해입니다. 이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15절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 시몬 베드로가 위대한 대답을 했습니다. 16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대답에 대하여 예수님은 흥분하셨습니다. 1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절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절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절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그러면 무엇이 예수님은 이렇게 흥분하게 한 것입니까? 베드로의 고백이 사람에 의해서 알게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예수님에 대한 가장 정확한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고백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우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고백인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퀴리오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소문자로 쓰면 당시 노예들이 자기 주인을 가리킬 때 쓰던 말입니다. 그러나 대문자로 쓰면, 이 말은 로마 제국을 통틀어 오직 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즉 로마의 황제 가이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 말을 예수님께 사용을 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만이 우리의 최고의 권세자이시며 으뜸 되시는 분이십니다. 모든 것 위에 만유의 주인이십니다 하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지금 자기의 눈앞에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그 예수께 ‘당신은 로마의 황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당신만이 우리의 진정한 통치자이십니다.’ 이런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니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예수님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 때문에 비록 박해를 당하고 순교를 당하게 될지라도 이 고백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정말 내 인생의 주인이 예수님이라고 고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분이 나를 향하여 품고 계신 뜻이 무엇인지 묻고 거기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힘들어도 고달파도 그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종처럼 부리려고 하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이 지나치게 내 중심이지는 않습니까? 예배도 내 중심이 아닙니까? 내가 은혜 받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고, 내 맘에 드는 방식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고.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라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위하고 있지 않습니까? 알라딘의 요술 램프처럼 그것을 문지르면 내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가져다주는 그런 예수님이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그런 식으로 예수를 믿는다면 칼 마르크스의 지적처럼, ‘종교는 대중의 아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아편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바가 있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이루어드려야 합니다. 우리에게서 고난이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고난을 통해서도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새로워져야 한다면 어떤 점에서 새로워져야 하겠습니까? 이제는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중심이 이동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십니다. 구심점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부흥되기를 원합니다. 왜 부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예배당을 채워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러자고 큰 예배당을 지은 것이 아니니까? 우리가 드린 헌금이 얼만데? 우리가 예배드리기가 너무나 허전하니까?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전도해야 하고 부흥돼야 합니다. 예수님이 영혼구원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일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일을 하라고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해야지, 우리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시기 때문.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어도 내 마음에 드는 것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예를 들어 눅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이 말씀에 대해서는 우리가 쉽게 아멘을 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구절(33절)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이런 말씀에는 쉽게 ‘아멘’하지 않습니다. 내 맘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이 말씀에는 쉽게 ‘아멘’합니다. 그러나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주님의 멍에를 메라는 말씀에는 ‘아멘’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성경은 더 이상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것을 온전히 지켜야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무거운 짐에서 해방되는 것도 필요하지만 주님이 지워주시는 사명의 멍에를 메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평화와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 숨겨져 있는 또 한 가지 중요한 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주인이시면 우리는 종이라는 것입니다. 종은 아무런 자유가 없습니다. 그냥 주인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 우리는 주님의 종입니까? 예수님이 주인이시고 우리가 종입니까? 혹시나 우리가 주인이고 예수님을 종처럼 부리고 살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수도 없는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종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너라’하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눅9:59) 이때 우리 같으면 뭐라고 말할 것 같습니까? ‘물론이지요. 왜 제가 하필이면 이런 때 당신을 부르게 되었는지 용서하십시오. 부친의 장사를 지내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이지요. 장사를 지내고 오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 않으십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눅9:60) 예수님이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눅9:61) 이 때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눅9:62) 예수님은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에 대한 복종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종은 오직 주인을 수종드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밭에 나가서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종에게 주인이 수고했다고 상을 차려 주는 법이 없습니다. 주인은 하루 종일 놀고 먹었어도, 종은 부엌에 들어가서 주인의 음식을 준비합니다. 함께 겸상을 하지도 않습니다. 주인이 음식을 다 드실 때까지 잔심부름을 합니다. 주인의 식사가 마치면 그 다음에 부엌에 들어가서 음식을 차려 먹습니다. 그렇게 하였다고 해서 종이 칭찬을 받거나 사례를 받습니까? 아닙니다. 종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 것입니다. 그것이 종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종이 맞습니까? 우리에게 변화가 필요하다면 먼저 여기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니고 종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주님께서 사시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눅6: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우리가 주님께 말로만 주님이라고 부르면 안 됩니다. 그분을 진정으로 주님으로 섬겨드려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내 마음대로 조정하려고 한다면 그런 노력을 이제는 내려놓아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조정하시도록 그분께 우리를 맡겨드려야 합니다. 내 중심으로 생각하던 데서 하나님 중심으로 중심이 이동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도, 시간도, 물질도 모두 내 마음대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주님이 오라고 하시면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한 가장 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면 살면 됩니다. 이것이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 중심을 이동하십시오. 여기서부터 여러분의 삶에는 진정한 변화가 올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