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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직면한 사람들 눅10:25-37
경북 김천시 황금동에 김씨라는 성을 가진 한분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분은 사랑하는 아내와 일남일녀의 자녀를 두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작은 회사에 다니는 김씨는 성실하게 일하였고 검소하게 산 덕분에 비록 작은 평수의 아파트나마 마련할 수 있었고, 가족들과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김씨는 야근을 하고 밤늦은 시간에 집으로 향했습니다. 골목 어귀를 지나갈 때 어떤 사람이 담벼락에 비스듬히 누워 신음 중인 것을 보았지만 힐끗 쳐다보고 그냥 무심히 지나쳤습니다. 집에 들어가 보니 학원에 다니는 아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가끔 늦는 날도 있기에 그런가보다 하고 큰 염려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2시가 넘어도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그제야 부랴부랴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밤을 하얗게 새운 김씨는 신 새벽이 되어서야 아들의 거처를 알 수 있었습니다. 어떤 병원에서 아들이 응급실에 있으니 빨리 오라는 연락을 해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전날 밤 담벼락에 기대어 신음하던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아들이었다는 거예요. 자기를 포함해 길을 가던 많은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에 오랜 시간 방치되었다가 방법대원의 도움으로 겨우 병원에 실려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의사는 <조금만 더 일찍 병원으로 데려왔으면 살수도 있었는데> 말끝을 흐립니다. 그 말을 들으며 김씨는 죽어 가는 아들을 붙잡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습니다. 자신의 무관심이 부른 아들의 죽음이었습니다. 참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미국 뉴욕에 있는 킹 카운티 정신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환자 대기실에 있던 어떤 분이 의자에서 쓰러져 바닥에 눕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병원 직원이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1시간 동안 방치된 이 환자는 결국 병원 안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병원 측에서는 부인했지만 결국 CCTV 화면을 통해서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결국 우리 자신을 죽게 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다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의 말씀을 본문으로 택했습니다. 오늘의 초점은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레위인과 제사장에게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행자는 그만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큰 상처를 입고 거반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그러나 그는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그렇게 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상처를 치료해 주고 여관에까지 데려다 주면서 그를 치료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하신 후에 그 율법사에게 묻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대답은 뭐죠?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그렇습니다. 자비를 베푼 사람이 이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 주변에는 진정한 이웃이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도와줄 사람보다는 나를 도와줄 사람만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율법사가 그랬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에게 이 강도만난 사람은 그저 골치 아픈 존재에 불과합니다. 괜히 그 사람 도와주었다가 나만 위험에 처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피해서 지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요? 우리는 매일 수도 없는 사람들과 스쳐 지나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형편과 사정이 어떤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이런 노래의 가사가 있습니다.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바라나. 공허한 그 눈빛은 무엇으로 채우나 모두 자기 고통과 두려움 가득. 감춰진 울음소리 주가 들으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 알게 되리. 주님의 사랑.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스쳐 지나가는 그 사람들 모두에게 주님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모두 한결 같이 문제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육신의 질병, 불의의 사고, 사업의 부도, 가족과의 사별 혹은 이혼 등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온갖 힘을 기울여보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쉽게 극복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포자기하고 실의에 빠져 절망과 좌절로 세월을 낭비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인생을 끝내는 참으로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재환, 최진실. 그들은 모두 구원 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만나게 되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우리와 같은 신앙인들입니다. 아니 그들은 일반 신앙인이 아니라 예배를 집례하거나 돕는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큰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강도 만난 이웃에게 관심하지 않았습니다. 은혜는 받았으나 그냥 스쳐 지나가 버린 비정한 예배자였던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그렇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예배는 잘 드렸는데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너무 무관심하지 않은가요? 그렇다면 우리는 제사장과 레위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입니다. 죽어가는 영혼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그러면서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들에 대해서 애통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그냥 무관심하게 스쳐 지나가 버릴 뿐입니다. 난 그들과 상관없다고 합니다. 난 못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가졌던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이웃들은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싸매주어야 할 상처가 있습니다. 우리의 도움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 속에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무관심하다면 이는 바로 죄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때로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만나기도 합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느라고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은 경우가 생깁니다. 열심히 하느라고 했지만 모두를 만족시키지는 못합니다. 섭섭한 사람들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말을 듣기도 합니다. 어떤 말은 타당하고 어떤 말은 억울한 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목회하면서 저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골치 아픈 교인이 아닙니다. 입이 있다고 함부로 비판적으로 말하는 교인이 아닙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바라볼 때, 안타까운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대충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내 마음에 끓어오르는 간절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그냥 종교인이 되고 만 것입니다. 직업적인 목사가 되고 만 겁니다. 아무런 감동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의 가장 큰 위기인 것입니다. 저도 때로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아도 세상에서 피곤하고 지친 영혼들인데 너무 부담 주는 것 아닌가? 들어서 편하고 좋은 말씀으로 전하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굳이 전도하라고 부담을 주는 설교하지 말고 점잖은 설교만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들기 시작할 때, 제 목회의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교인들이 느낄 수도 있지만, 더 많은 경우 느끼지 못합니다. 제가 아닌 척 너무나 잘 위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 저의 목회의 가장 커다란 위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목회자의 위기만이 아닙니다. 모든 신앙인들의 위기이기도 합니다. 봉사도 하고, 기도도 하고, 찬양도 하고, 교사도 하고, 속장도 하고 다 합니다. 새 생명 큰잔치를 위해서도 나름대로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한 영혼을 향한 주님의 안타까움이 없다면 그것이 위기입니다. 초대 교회의 어느 교부가 거리를 지나가다가 거리에서 몸을 팔며 남자들을 유혹하는 창녀를 보았습니다. 그 창녀를 보면서 이 교부가 두 가지 때문에 울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저 창녀는 몸을 팔아서 돈을 벌기 위해서도 저렇게 애를 쓰는데, 나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저렇게 열심이었는가? 또 하나는 더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 여인을 보고도 안타까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교부는 그 자리에서 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주여 내게 저 한 영혼, 죽어가는 영혼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전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전도하다 보면 자존심도 상하고, 손해도 보아야 하고, 용기, 시간도 내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그를 향한 긍휼의 마음이 없다면 누가 이런 일을 좋아하겠습니까? 누구도 이 일을 하기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지나가고 싶습니다. 전도지를 들고 아파트 문을 두드리면서도 그 집 문이 열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그렇게 기도할지도 모릅니다. 주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지만 우리 안에 주님께서 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면 쉬워집니다. 그러면 전도하다가 욕을 먹는 일이 생긴다고 해도 두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게 한 영혼을 살리는 일인 동시에 나를 살리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이 영적 무감각에서 어떻게 살아날 수 있습니까? 한 영혼을 긍휼히 여기며 그들에게 관심을 가질 때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로 일컬어지는 선다싱이라는 유명한 신앙인이 있습니다. 그가 눈이 많이 내린 어느 추운 겨울날 산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참을 걸어가다 보니 한 사람이 추위에 쓰러져 있습니다. 자기 앞서 가던 사람은 그냥 스쳐 지나가 버렸습니다. 선다싱은 이 추운 겨울날 나도 힘든데 어떻게 이 사람을 메고 가겠나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나를 살려주신 주님 생각을 하니 그냥 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들쳐 업고 갑니다. 업고 가다 보니 힘들어서 땀이 많이 났습니다. 그 열기에 등에 업혀 있던 사람도 몸이 따뜻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업고 가는데, 앞서 간 사람이 쓰러져 있습니다. 가서 보니 얼어 죽어 있습니다. 혼자 가다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선다싱은 그 쓰러져 있는 사람을 업고 간 덕에 자신도 산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원리도 똑 같습니다. 우리가 영혼을 살리는 일에 헌신하지 않으면 그 사람만 죽는 게 아닙니다. 나도 죽습니다. 나도 무관심에, 또 게으름에 죽어갑니다. 형식적인 신앙인, 비정한 신앙인으로 죽어갑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을 사랑하고, 영혼을 살리는 일에 헌신하지 않는 교회는 죽습니다. 새 생명 큰잔치는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우리의 영적 무관심과 완고한 우리의 영적인 모습을 깨우는 것입니다. 아무 것에도 관심 없이 그냥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신앙생활하지 않았습니까? 매 주일 예배에는 참석했지만 뭔가 빠져 버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까? 산 자 같으나 죽은 자로 신앙생활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영적으로 깨어납시다. 죽어가는 영혼을 바라보며 나도 살아납시다. 함께 사는 역사가 이번 새 생명 큰잔치를 통하여 우리에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