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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양을 찾아서 누가복음15:1-7
1983년인가 TV에서 사람을 찾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이 노래가 배경 음악으로 깔리면서 수십 년 만에 헤어졌던 가족들이 서로 만나 얼싸안고 우는 장면 말입니다. ‘왜 헤어지게 되었냐?’고 물으면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 갔다가 잃어버렸다는 사람도 있고, 잠시 기다리라고 해 놓고, 영영 나타나지 않아 결국 버림받았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친척 집에 잠시 가 있으라고 해 놓고 영영 찾아주지 않아서 잃어버린 이야기 등등. 그 동안에는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 몰랐다가 TV가 전국에 보급이 되고, 경제적으로 형편이 나아지면서 서로 찾을 수 있게 됐죠.그 프로를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어떠셨나요? 아마 여러분 중에도 아이들 한번 쯤 잃어버렸던 경험있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저도 아이들을 두 번쯤 잃어 버렸다가 찾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는 순간적으로 앞이 캄캄하고 하늘이 까매지는 것 같았습니다. 당황이 되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우선 뛰쳐나가서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갈만한 곳은 다 찾아다닙니다. 한번 가보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두 번 가보고, 세 번 가보고 찾을 때까지 찾아다녔습니다. 경찰서에도 연락해 놓고, 미아보호소에도 찾아가 봅니다. 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이고 하나님, 한번만 도와주십시오. 우리 아이 좀 찾게 해 주십시오. 앞으로 신앙생활 잘 하겠으니 한 번만 눈 딱 감고 도와주십시오.” ☺☺ 왜 그렇게 찾죠? 내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는 겁니다. 남의 집에 아이가 없어졌다고 해도, 찾기는 찾습니다. 그런데 얼마 정도 찾다가 포기하고 돌아갑니다. 안타깝지만 내 자식이 아니니까, 그렇게까지 애절하게 찾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친 엄마와 아빠는 그럴 수 없습니다. 포기할 수 없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비유입니다. 실제 사건이라기보다는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세 개의 비유가 연달아 나오고 있습니다. 말씀하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동일합니다. 그런데 왜 세 번이나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만큼 간절함이 배어 있는 것입니다.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그 비유의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왜 이 비유를 하셨는지 먼저 찾아봅시다. 1절을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일반적으로 세리와 죄인들은 이렇게 우르르 몰려다니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몰래 다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그들로 하여금 사람들의 눈치를 살필 겨를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한꺼번에 몰려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왔다고 표현할 만 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놀랍게도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을 주의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던 그 사람들도 생명의 말씀을 듣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영생의 진리가 무엇인지 관심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필요하고, 또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전하지 않아서 그렇지 사실 세리와 죄인마저도 그 심령 깊은 속에는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겁니다. “119새생명큰잔치”를 위해서 누구에게 전도를 하려고 하시나요? 나처럼 고상하고 부유하고 안정되고 내가 어울릴만한 사람? 물론 그런 사람도 전도해야 합니다. 우선 내 가족부터, 내 친구부터. 그러나 예수님 주변에는 세리와 죄인들이 몰려왔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들이 예수님의 중요한 제자들이 되었다는 사실도 기억하십시오. 내가 손가락질하고 비난했던 사람 바로 그 사람에게 예수님이 필요할 수 있어요. 예수님이 그 사람을 가까이 하고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거룩하다고 하면서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비난했습니다. 거룩한 사람들은 거룩한 사람들끼리만 지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통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또 누구든 변하여 새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사야55:6-9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죄인은 멸망은 받아야 하고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제 우리는 전도의 대상자를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부터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전도에 앞서 기도하는 일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한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는 그 자체가 영적인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누구를 전도대상자(VIP)로 삼을지 기도하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그 마음의 문이 열려지도록 성령님께서 역사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마음이 담긴 비유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어떤 사람에게 양이 일백 마리가 있습니다. 많은 거죠. 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를 잃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아흔 아홉 마리나 있는데 뭐, 그까짓 거 한 마리쯤이야.’ 하고 포기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닌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양이 본래 내 양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잃은 상태이지만 본래는 내 양입니다. 전도자의 마음에 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목자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전도대상자는 본래 우리와 같은 무리에 있었어야 하는 양인데 지금 잃은 것입니다. 은전에 대한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내 돈이었는데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부지런히 찾는 것입니다. 세 번째 소위 탕자의 비유라고 불리는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아버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집을 나가서 허랑방탕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탕자가 되었지만 본래는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지금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는 눈이 이렇게 잃은 양으로 보여 지길 바랍니다. 다음으로 전도자가 가져야 하는 것은 잃은 양의 형편과 사정을 살피는 마음입니다. 잃은 양,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양은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대로 내버려 두면 맹수에게 잡혀 죽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두는 목자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잃은 양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때 찾아 나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 찾는 TV 프로를 보면, 엄마 아빠를 잃은 후에 그 아이가 혼자서 얼마나 힘들고 어렵게 살아왔는지 고생한 이야기를 들으면 눈물이 납니다. 부모를 잃었다는 것, 가족을 잃었다는 것, 혼자가 되었다는 것은 비참한 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의 영적인 상태는 비참한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 부자로 살고,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해서 영적으로는 평안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는 비유에서 탕자가 제 발로 아버지를 찾아 돌아옵니다. 비록 거지꼴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아들이 돌아왔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뻐하고 잔치를 벌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마음이요, 목자의 마음입니다. 본문 5-6절을 읽어보십시오.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목자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아버지는 잔치를 벌입니다. 이것이 전도자의 마음입니다. 내가 기도하며 전도한 사람이 교회에 오는 날, 구원받는 날, 그날은 잔칫날입니다.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큰 아들은 어떻습니까? 큰 아들은 화를 내고 있습니다. 28절을 보면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왜 화가 나 있습니까? 29절에 보면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잘못했네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큰 아들은 생각합니다. 자기는 아버지를 잘 섬기고 명을 어기지 않는 효자라고. 그러나 사실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네 동생 좀 찾아와라’입니다. 다른 것에 순종하고 명을 어기지 않은 것은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진짜 마음은 잃은 아들을 찾는 것입니다. 혹시나 우리가 큰 아들과 같은 마음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일마다 예배드리죠, 헌금도 정성껏 최선을 다해서 드리죠, 교사로 찬양대원으로 봉사하죠. 그만하면 하나님 잘 섬기는 거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나가서 전도하라”고 하십니다. 본문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7절입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하나님의 관심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도 하나님과 일치해야 합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이제 복음을 들고 나가야 합니다. 전도는 나가는 것이 능력입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