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귀한 자가 누구인가?
빌립보서 2:25 - 30
저는 목사로서 여러 사람들의 장례식을 집례하게 됩니다.
어떤 장례식은 제 자신이 은혜를 많이 받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장례식은 힘들고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어디에서 이런 차이가 생길까요?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공통점은 고인의 삶과 연관이 됩니다.
존귀한 삶을 살았던 분의 장례식은 은혜가 되고, 집례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그분의 삶에 대해서 아무런 할 말이 없는 분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분에 대해서 좋지 않은 얘기는 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런 분의 장례를 치르고 나면 마음이 무겁고 아픕니다.
제가 여러분의 장례식을 집전한다면, 할 말이 있는 삶, 존귀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한번 살다가 가는 것이기에 一生이라고도 말합니다.
잘 살았든, 잘못 살았든, 지나간 과거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오직 미래만 바꿀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를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연습이 없습니다. 한 번 밖에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며 살고,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겠습니까?
무엇이 그 사람의 삶을 존귀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 사람의 소유 때문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보여 준 삶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 사람의 삶을 다르게 만듭니까?
그것은 그 사람의 인생관과 가치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다운 가치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리스도가 보는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미래를 보고, 나를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보는 관점이 달라요. 그래서 똑같은 것을 보아도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과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성한 자존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신성한 자존심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존귀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기에 세상에 살면서 존귀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멸시받거나, 천대를 받거나, 업신여김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고귀한 삶을 사신 것처럼, 우리는 고귀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가 존귀한 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자입니다.
1. 희생적인 삶이 존귀하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참으로 고귀한 인생을 살다간 두 분을 만나게 됩니다.
그중에 한사람은 바울이고, 또 한사람은 에바브로디도라고 하는 집사입니다.
이 사람들이 존귀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사도 바울이 로마의 옥중에 있을 때
빌립보교인들이 정성껏 모은 헌금을 들고 찾아 간 사람입니다.
그 길은 대단히 먼 길이었으며, 얼마나 지쳤는지,
낯설고 물 설은 로마의 감옥에서 바울을 돌보다가 그만 병석에 눕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걱정을 합니다.
자기를 염려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종, 사도 바울을 보살피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고
자기를 여기에 파송한 빌립보 교인들이 자기의 소식을 들은 것을 알고 걱정을 합니다.
27절에 보면, 에바브로디도는 병들어 죽게 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30절 낭독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였다”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렀다. 자기의 일을 위해서가 아니다.
주의 종 바울을 돌보는 일이 그리스도의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주의 종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까지 돌보지 아니한 에바브로디도 집사에 대하여
바울은 한없이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29절 -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하게 여기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에만 매이면 희생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타당한 일만 하게 되지, 뭔가 역사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희생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존귀한 자가 된 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합리성을 뛰어넘는 희생적인 헌신 - 이것이 사람을 존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역사에 길이 남는 위대한 사람들은 모두가 다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존재를 주님께 드릴 때 존귀한 자가 됩니다.
어머니의 위대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 어머니의 이름은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군대에서 훈련을 받다가 힘들어 하는 시간에 어머니를 외치게 합니다.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 어느새 눈에는 눈물이 고입니다.
고통 중에 생각나는 이름은 어머니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를 위해 희생하신 어머니의 사랑 때문입니다.
고려장 때 어머니의 자식 사랑
에바브로디도란 말은 매력이란 뜻입니다. - 끄는 힘.
25절 -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
에바브로디도는 정말로 매력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이런 매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바로 주의 일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목양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다운 매력을 가지기 바랍니다.
2. 섬기는 삶이 존귀하다.
에바브로디도는 사도 바울을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했다(30절)
섬기려고 했기에 그는 존귀히 여김을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역사에서 존귀한 자들은 모두 남을 섬긴 자들입니다.
예수 삶의 중대한 가치는 섬김에 있었습니다.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도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12:26)
인간이 살면서 보람을 느껴야 합니다.
보람이란 섬기는 정신적 가치에 대한 만족감입니다.
남을 섬기는 희생의 대가로 얻어진 정신적 보상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일을 할 때 진정한 보람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 다미앤은 몰로카이 섬의 문둥이들을 섬겼습니다.
그들을 섬기기 위하여 그는 스스로 문둥병자가 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존귀한 자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 앞에는 Saint, 거룩할 聖자를 붙이는 것입니다.
음식 만들고, 서브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즐거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설거지 하는 일은 가장 굿은 일인데 그 일은 잘 안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기쁨도 없고, 칭찬받는 일도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그 일을 말없이 하는 자야 말로 존귀한 자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자입니다.
우리 생애에 있어서 가치 있는 일은 그리스도의 일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섬기는 일입니다.
여자는 세월이 가면 여자로서의 값은 떨어집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세월이 갈수록 그 가치의 고귀성이 남아 있습니다.
왜? 섬기는 자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아내들의 마음에는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존귀한 것입니다.
3. 순종하는 삶이 존귀하다.
현대인들, 지식인들이 가장 실천하기 힘든 덕목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순종일 것입니다.
순종은 미련한 일로 여겨집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교회에 순종했고, 사도 바울에게 순종했던 집사였습니다.
한집에 공부를 많이 한 며느리가 무식한 시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의 말씀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말씀이 잘못되었다고 말씀드리게 되면 말대꾸한다고 야단을 맞습니다.
스트레스를 받은 채 친구 집에 놀러 갔습니다.
그 집도 마찬가지로 이치에 맞지 않는 시어머니가 계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친구는 “예, 어머니” 하면서 순종하더랍니다.
“너는 주변도 없니?
어떻게 이치에도 안 맞는 시어머니 말씀을 그렇게도 잘 듣니?”
그 친구의 말 “내 순종은 이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
이치에 맞아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명령이 순종하라고 하기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 친구가 존귀하게 보여 졌습니다.
“너는 어쩌면 그렇게도 위대하냐?” “나도 예수 함께 믿고 싶다”
내가 내 자신에 대하여 고귀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내게 지불된 값이 있습니다. -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고귀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한줌의 흙으로 끝난다면 얼마나 허무한가?
4. 그리스도를 모실 때 존귀하게 됩니다.
우리가 존귀한 존재가 될 수 있는 비결은 존귀한 예수님을 모실 때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셔서 그 예수님을 나타낼 때 우리가 존귀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존귀하게 우리 안에 모셔야 합니다.
바울은 나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리라. 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돈을 벌어도 그 돈으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해야 합니다.
주일날은 존귀한 날,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 -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믿고 그리스도께 대한 강한 매력을 느끼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나귀 등에 타셨습니다.
사람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 예수여’를 외쳤습니다.
그 때 나귀는 존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태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모시고 사는 것이 우리가 존귀해지는 비결입니다.
주님을 높이는 생애가 될 때에 우리가 존귀해집니다.
-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위대한 그리스도인은 위대한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다.”
존귀한 분을 만났기 때문에 존귀한 삶의 변화를 체험해야 합니다.
그분에게 매력을 느끼며 그 인격을 본받게 되는 것입니다.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 세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한 나무 - 나는 큰 나무가 되어 예루살렘 성전의 들보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경배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노라.
한 나무 - 나는 큰 나무가 되어 큰 범선이 되어 로마를 향해 가는 유람객들을 태워
그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노라.
한 나무 - 나는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산에 오를 때마다 그늘 아래 땀을 닦으며 나를 바라볼 때마다 하늘을 바라볼 수 있기를 원했노라.
드디어 나무는 잘려지기 시작했고 한 나무는 베들레헴 땅으로 가서 말구유가 됩니다
또 한 나무는 잘려져서 갈릴리 바다로 가서 작은 돛단배가 되었습니다.
또 한 나무는 잘려져서 예루살렘 영문밖에 죄인들을 처형하는 십자가가 됩니다.
저들 나무는 탄식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전 들보가 되기를 원했는데 말구유가 되고 말았구나.
나는 큰 범선이 되기를 원했는데 냄새나는 생선 잡는 작은 어선이 되고 말았구나.
나는 큰 나무되어 사람들이 하늘을 보도록 하기 원했는데
어찌하여 더럽고 추악한 죄인을 처형하는 저 피 묻은 나무가 되었는고.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기 예수가 강보에 싸여 그 잘려진 나무로 만든 말구유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큰 범선이 되기를 원했던 나무는 이제 작은 어선이 되었지만
그 배에 예수님이 올라타셔서 하늘의 복음을 전할 때 존귀한 나무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 십자가로 잘려진 그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가 달리는 위대한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비록 잘려지고 조각난 나무들이었으나 그리스도를 모셨기에
역사에 길이 남는 존귀한 존재의 나무로 바뀌어졌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우리의 사업, 명예, 인생이 조각나고 다 부서진 조각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이 조각에 그리스도를 모실 수 있다면
우리의 생애는 찬란하게 빛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젊음을 다 낭비해 버렸고, 우리의 건강이 다 사라져 버렸다고 할지라도
한 조각 우리의 남은 생애가 있다고 한다면 거기에 예수님을 모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지난날의 모든 물질의 풍요가 다 사라져 버리고
이제 지극히 적은 것이 남았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예수를 담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존귀한 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부서진 조각들을 탄식하지 말고,
지나간 날의 찬란한 꿈을 다 잃어버렸다고 탄식하지 말고
우리의 생애의 남은 곳에 예수를 모셔 존귀한 자로서의 삶이 이루어지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