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원인을 찾아서

예배의 원형을 찾아서

요한계시록4:1-11

 

   어느 주일날 아침 어느 집에서 아들을 깨우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아들아, 얼른 일어나라. 오늘 주일이지 않니? 교회에 예배드리러 가야지”

그러자 아들이 피곤한 듯 기지개를 켜면서 말합니다.

- ‘어머니 오늘 하루만 예배 안 드리면 안 될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예배를 안 드리다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일어나”

- ‘오늘 이상하게 피곤하고 꾀가 나네요.’

“아니, 평소에 안 그러던 사람이 오늘 도대체 왜 그래? 이유가 뭐야?”

- ‘사람들이 저를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고,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어요.’

“별 소리를 다하네. 안 돼! 3가지 이유 때문에 안 돼!

첫째는 예배는 사람들 보러 가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예배는 기분에 따라 드리는 게 아니라, 교인의 의무이기 때문이고,

셋째는 가장 중요한 이유인데, 그건 네가 우리 교회의 담임목사이기 때문이야”

 

   웃자고 만든 얘기이겠지만,

오늘날 예배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대변하고 있는 얘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에게는 기도를 길게 하는 것이 가장 힘든 시간이랍니다.

그래서 ‘기도 견디기’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때로는 ‘설교 견디기’라는 말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예배는 어떤 것입니까?

지겹고 따분해서 견디는 수준입니까?

아니면, 흥분되고 감동스러워서 기다려지고, 끝나면 아쉬운 수준입니까?

 

   예배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신이 이제까지 살아왔던 방식대로 사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예배도 자신이 드려왔던 방식대로 드리면 편하고 자연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예배는 어떠한 형식으로 드리느냐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어떠한 정신으로 드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배신학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형식은 얼마든지 변화를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순서를 앞에 두는가, 뒤에 두는가는 예배신학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 두든, 뒤에 두든 신학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도 있습니다.

예배 신학적 관점의 차이에 따라서 순서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또 어떤 순서를 넣고 뺀다고 해서 예배가 되거나 안 되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독문이나 사도신경 암송 순서가 다른 형태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예배 순서 안에 주기도문을 넣을 수도 있고, 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삼위영가를 부를 때 십자가를 향해 서는 것은, 십자가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고

그 시간 다시 한 번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모으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우리교회에 처음 오는 분들이 이런 부분에 대해서 마음에 불편함이 있으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선교적인 차원을 더 중시할지, 예전적인 차원을 더 중시할지 고민해 봐야 합니다.

요점은 너무, 형식의 차이 때문에 예배드리는데 불편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예배 중에 복음성가를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힘들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일단은 모르는 곡을 부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예배 중에는 복음성가는 부르면 안 된다고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복음성가냐에 따라 부를 수도 있고 곤란한 경우도 있습니다.

찬송가 안에 있다고 해서 모두 예배 찬송으로 적절한 것도 아닙니다.

복음성가든 찬송가든 어떤 순서에 부르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배의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찬양과 경배의 순서가 있고,

지은 죄에 대한 참회와 고백의 시간도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선포도 있는 것이고,

또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표로 봉헌하는 시간도 있고, 결단의 시간도 있습니다.

또 성도들 간에 사랑으로 교제하는 시간도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으로 교제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이 시간이 결코 쓸데없는 시간이거나 불필요한 시간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에서도 모일 때마다 떡을 떼며 서로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교제 시간에는 서로를 격려하고 축복하는 찬양을 부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예배는 질병을 치유하는 시간을 넣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상으로 파송할 때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하시는 내용으로 부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매사에 유연성을 가집니다.

내가 해 왔던 방식이나 전통만을 너무 고집하다 보면 유연성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매번 형식을 바꾸면 무질서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둘은 똑같이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신학적인 이유와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담임목사인 제가 가지는 신학적인 입장은

예배를 좀 더 축제적인 차원에서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예배에는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그분과 만나는 사건이 일어나는 감격적인 예배를 원합니다.

물론 그런 사건은 꼭 들고 뛰는 요란함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고 고요함 자체가 언제나 예배의 깊이를 보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는 예배가 되길 원합니다.

인간에 의해서 주도되는 예배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예배입니다.

그분이 울게 하시면 울고, 웃게 하시면 웃고,

춤추게 하시면 춤추고, 잠잠하게 하시면 조용히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성령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는 예배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축제로 시작해서 고요함으로 끝낼 수도 있고,

엄숙하고 경건하게 시작했으나 기뻐 뛰며 춤추는 것으로 마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것은 마땅한 일이며,

우리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며, 신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예배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늘 보좌에 하나님이 앉아 계시는데,

그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아 있습니다.

보좌 앞에는 일곱 등불이 있고 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각각 여섯 날개를 가지고 날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런 광경을 상상해 볼 때,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지존하신 분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지존하신 분이십니다.

감히 근접할 수 없는 위엄과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예배는 그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시96:8)

이제 하나님의 보좌에서는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있습니다.

네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이십사 장로들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계신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면서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신비하고 거룩한 예배의 광경은

너무나 웅장하고 거대하면서도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입니다.

그 찬양의 소리가 얼마나 우렁찰 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계5:11에 보면, 천천, 만만의 천사들이 보좌에 둘러서서 찬양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의 찬양의 내용은 주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죽임 당하신 어린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여기서 드리는 예배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그 예배의 모습을 닮아서

우리도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 앞에 나아가, 그 지존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분 앞에 엎드려 절하고,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높이는 겁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를 발견하고

우리의 부족과 허물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때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용서해 주시는 주님의 은총을 입고

감사하며, 기뻐 뛰고, 춤을 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올바른 삶을 살겠노라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감사와 헌신의 표시로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드리는 마음으로 예물을 봉헌하고

성도들 간에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세상을 향해 파송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이렇게 높고 위대하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에게 걸 맞는 존귀와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경배는 대충 아무렇게나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주님께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을 불러도 목소리를 높여 힘차게 찬양해야 합니다.

붕어처럼 입만 뻥긋해서는 안 됩니다.

배에 힘을 주고, 마음을 모두어서 힘차게 찬양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 가운데에도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이 임재하신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나아가 그분을 만나 뵙고

그분을 높이며 경배하는 신령한 예배가 우리의 예배 가운데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예배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최고의 특권이며 영광입니다.

이런 예배를 드리는 자는 놀라운 감동과 흥분을 감출 수 없을 것입니다.

예배의 결과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우리에게는 기쁨과 평화입니다.

역대하30장에 보면, 히스기야 시대에 오랫동안 지키지 못했던

유월절을 지키고 난 다음에 그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5f ‘이스라엘 모든 회중과 이스라엘 땅에서 나온 나그네들과

유다에 사는 나그네들이 다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큰 기쁨이 있었으니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로부터 이러한 기쁨이 예루살렘에 없었더라.’

예배를 바로 드리면,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 가운데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올 때 이런 예배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나오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성경에, 예배에 해당하는 단어는,

크게 라트레이아(λατρεια)와 프로스쿠네오(προσκυνεω)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라트레이아(λατρεια)는 봉사를 뜻하는 말로 삶의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섬겨 드리는 것입니다. 직장과 학교와 가정에서죠.

이 세상을 거룩하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프로스쿠네오(προσκυνεω)는 의식적인 예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예배당에 모여서 함께 찬송하고 기도하며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런데 프로스쿠네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솨하(שׂחה)인데 이 말은

“하나님께 경배하고 엎드려 절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의식적인 예배, 즉 프로스쿠네오를 제대로 드린 사람은

세상에 나가서 예배자의 삶으로 드리는 예배,

즉 라트레이아를 제대로 드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의 예배가 모두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와 세상 속에서 예배자로 살아가는 봉사의 삶입니다.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의 삶은 송두리째 달라질 것입니다.

 

내 맘과 내 뜻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소원과 뜻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예배의 회복이 우리 목양교회에서 일어나게 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