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ther
영적인 멀미를 극복하자
우리의 귀에 있는 달팽이관에는 세 가지 관이 있는데 수직관, 수평 관, 또 하나는 45도가 되어있는 관이다.
그래서 꽉 차있는 인파 액이 이 관에 있는 융털들을 건드리면서 우리 몸으로 하여금 균형을 잡게 해주는 것인데
멀미라고 하는 것은 너무 정신없이 막 움직이니까 잠깐 동안 평형을 잡는 달팽이관에서 혼돈을 일으키기 때문에
속이 매스껍고 머리가 아프고 또 여러 가지 혼돈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가운데 이런 멀미를 느끼는 순간들이 더러 있다.
높이 올라가는 때가 있는가 하면 아주 뚝 떨어지는 그런 순간도 있고, 성공의 순간이 있는가 하면 실패하는 순간이 있으며,
돈을 많이 버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돈을 다 잃어버리는 순간도 우리에게 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때는 기분이 우쭐하고 아주 좋지만,
욕을 먹고 사람들에게 질책을 받을 때는 우리 마음마저도 아주 혼돈을 일으키게 된다.
건강할 때가 있는가 하면 우리 몸에 병이 들 때도 있다.
이런 일이 반복해서 진행되면 우리 영적인 달팽이관에 문제가 생기므로 균형을 잡지 못하게 된다.
높이 올라갔을 때는 우쭐하게 되고 밑으로 떨어졌을 때는 낙심하게 되는 현상을 우리는 영적인 멀미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이런 복잡한 삶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멀미를 느꼈을까?
오늘 우리 주님은 지쳐있는 우리들에게 영적인 달팽이관을 바르게 해 주셔서 멀미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평안을 주기를 원하시고
맑은 정신으로 이 세상을 살 수 있는 지혜를 말씀을 통해 주시기를 원하고 계신다.
또한 앞으로 다시 우리는 세상 속에 수많은 복잡한 일들을 바라보며 나가게 될 것인데 이런 여러 가지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평형을 이루는 그런 귀한 지혜를 배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늪 같은 은혜인가,강 같은 은혜인가?
은혜의 강을 이루어 흐르게 하소서..
종은 울려야 종이고, 새는 지저귈때 새이듯 하나님의 사람은 항복이 될때 비로소 명품 성도이다.
그 은혜가 진짜 은혜이다.
십자가는 묵상하거나 끌고 가라고 주심이 아니다. 십자가는 꼭대기에 올라가 매달려 죽으라고 주신 것이다.
내 생각 내 유익 내 욕심을 매단채로 말이다.
소나기 같은 은혜속에 흠뻑 젖어 살건만, 아직도 왜 이대로 일까? 기막힌 말씀으로 날마다 감동하건만, 왜 아직도 나는 걱정덩어리로 살까?
그토록 사무친 기적과 응답을 경험하였건만, 왜 아직도 나는 단순하지 못할까? 그 이유는 늪같은 은혜 때문이다.
은혜는 흘러야 한다.
물이 흐를때 엄청난 동력의 전기를 만들어 낸다.
은혜도 흐를때 엄청난 영향력을 나타낼 수 있다.
머무는 은혜는 받을수록, 쌓을수록 영적 자만과 딜레마에 빠지게 만든다.
영적인 매너리즘의 뿌리도 늪같은 은혜 때문이다.
그래서 은혜를 말할때 강같은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다.
은혜를 흐르게 하려면 댓가를 치루어야만 한다.
강같은 은혜 안에 사는 사람은 편안하게 사는 것이 괴로운 사람이라는 말에 동의할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행동한다.
나는 그저 하나님 앞에만 서면 거룩한 바보일 뿐이다.
이런 성도가 보고프다. 그립다. 가슴저리도록 말이다. 그
런 거룩한 바보와 하루라도 함께 하고 싶다.
하나님의 젖가락은 거룩한 바보에게 머문다.
소유권도, 선택권도, 결정권도, 하나님의 주권 앞에 포기한 단순한 바보말이다.
하나님의 일은 거룩한 바보들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주여, 거룩한 바보로 살게 하소서.
믿음이란, 지식이나 경험이나 관념이 아니다.
믿음이란, 날마다 죽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기도보다 앞선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한다.
말씀보다 감각을 붙잡는 것은 하나님을 제한 시키는 최강의 바리케이트이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을 안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절반만 믿는 것이다.
믿음은 기도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생각하면 기도가 안된다.
믿음은 자연법칙보다 영적인 법칙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다.
가나안의 정탐꾼들을 보라.
여호수아와 갈렙만 빼고는 모두가 다 자연법칙을 영적인 법칙보다 우선순위에 두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두려워 했고, 많이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영적인 용어 속에는 부정적인 육의 말들로 충만하다.
자기들에게 다가올 손해를 마치 하나님의 뜻인양 포장하려 한다.
누가 진짜 바보일까?
여호수아와 갈렙이 정말 할 말이 없었을까? 그분들은 정말 편안함이 싫었을까? 아니다.
편안함보다 하나님이 더 좋았을 뿐이다. 늪같은 은혜에서 벗어나지 못함의 뿌리는, 하나님을 배제시킨 내 생각, 내 집착때문이다.
요즈음 성도들의 위기는 강같은 예배 후에 곧 늪 같은 생각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 대는 것이다.
천둥같은 아-멘 소리후에, 번개같이 갈라지는 인본주의 늪에 빠져 드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동일한 뜻은, 하나님의 주권 앞에 항복하는 것이다. 천국 갈때까지 이 훈련을 받는 것이다. 고난의 목적도 여기에 있다. 엉뚱하고 말도 안되는 배를 만드는 일에 120년 동안이나 한결같이 순종했던 노아처럼 되게 하기 위하여 말이다. 순종이란, 말도 안되는 일에 기쁨으로 항복이 되는 것이다. 성도에게 가장 무서운 일은, 댓가 없이 은혜만 받으려 함이다. 주의 종들에게 가장 무서운 생각은, 댓가 없이 귀한 종으로 쓰임받으려는 마음이다. 그런 은혜는 곧 늪을 이루어 웅덩이 되고 만다. 아무런 영향력도, 아무런 힘도, 아무런 쓸모도 없다.
얼마다 많은 성도들이 예배후에 걱정의 늪, 불안의 늪, 생각의 늪, 후회의 늪에 빠져 사는가? 게다가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를 앞당겨 늪을 이룬다. 늪이 일상이된 하나님의 사람들.. 늪을 오히려 즐기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렵지 않음에 서글프다.
촛불의 밝기는 어두워야 구별된다. 성도들의 받은 은혜와 믿음도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 시험앞에서 드러나게 마련이다. 강같은 은혜인지? 늪같은 은혜인지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장마비 같은 은혜와 축복을 조건없이 부어 주신다. 그리고는 반드시 때가 되면, 우리가 받은 은혜를 시험 하신다. 혹독하게 흔들어 보신다. 그 시험에 패스하지 못하면 우리는 재수, 삼수하게 된다. 마치 학생들이 공부한 후에 반듯이 시험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학생들의 실력이 시험에서 드러나듯, 하나님의 흔드심에서 우리의 영력은 들통이 나고 만다.
하나님은 가끔씩 예고 없이 오셔서 우리에게 이렇게 묻곤 하신다. \"내가 너를 위하여 만가지 은혜를 주었고 나의 독자까지 주었거늘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줄수 있느냐? 무엇을 할수 있는냐?\"
이때 많은 성도들이 침묵하거나 저항으로 반응한다. 하나님의 뜻이 옳지 않아서가 아니다. 내게 해가 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안맞기 때문이다. 내 맘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항복할수 없는 이유이다. 우리는 어쩌면 찬송가를 바꾸어야 할지도 모른다. 찬송가 431장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 옵소서\'괄호 열고 \'내게 손해가 되는 것은 빼고\'로 말이다.
힘센 맹수나 독수리들은 유난히 상처가 많다. 그만큼 무서운 댓가를 치루었다는 뜻이다. 진짜 영성은 얼마나 은혜를 사모하고 잘 받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주를 위하여 나를 포기할수 있느냐로 결정되는 것이다.
항복의 영성을 쉽다고 말하지 말라 순종의 영성을 가볍게 생각치 말라. 포기의 영성을 헛되이 말라 불가항력적인 은혜와 처참히 가루되는 시험을 통해서 만이 허락되는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이다.
은혜는 하루 아침에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항복은 보통 수십년이 걸려도 힘이 드는 분야이다. 마르다처럼 봉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마리아처럼 아무말 없이 자기의 옥합을 깨뜨리는 일은 아무나 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은혜의 자리에는 누구나 올 수 있다. 그러나, 은혜의 영향권 안에 들어오는 일은 아무나 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배는 누구나 드릴수 있다. 그러나, 순종은 아무나 할수 없다. 기도는 누구나 할수 있다. 그러나, 순종은 아무나 되는 일이 아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은 이때를 위함이 아닐까?
주님의 일(교회일)은, 누구나 즐겨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일은 아무에게나 허락된 일이 아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중요한 시점에 서있다. 은혜의 강으로 나갈 것인지, 아니면 은혜의 늪에서 안주할 것인지 말이다. 주를 위하여 편안함을 포기할 것인지, 나를 위하여 주를 포기할 것인지 말이다.
겟세마네 기도는 내 소원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포기하는 기도이다. 그래서 겟세마네의 기도는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그 기도는 피와 땀을 뿌리는 것이다.
믿음이란 내 뜻을, 하나님의 뜻 앞에 내려 놓는 것이다. 그것이 내 유익과 편안함일지라도...
우리가 여전히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 뿐이다. 항복해야 함을 알지만 순종해야 함을 알지만 포기해야 함을 알지만 항복이 안되고 하기도 싫은 것이다. 순종이 안되고 하기도 싫은 것이다. 포기도 안되지만 하기도 싫은 것이다.
우리도 때때로 순종한다. 그런데, 우리의 순종은 마음이 불편하여 안색이 변한다. 우리도 때때로 항복을 한다. 그런데, 우리의 항복에는 말이 많다. 우리도 때때로 십자가에 올라가 죽는척 한다. 그런데, 우리의 죽음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한다고 말하나, 실상 우리의 육은 하나님의 뜻조차 대적하려 한다. 이것이 늪에 빠져 날마다 허우적대는, 우리의 실존인지도 모른다.
순종의 size가 영성의 size라 말하지 않았던가? 이기적인 순종에서, 주님 중심의 순종으로의 전환만이 늪에서 강으로 헤어나게 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저 멀리 은혜의 바다로 나간 분들을 보라! 하나같이 불같은 시험과 주를 위하여 혹독한 댓가를 치룬 분들이다.
은혜란, 항복이 되게 하는 에너지이다. 은혜란, 내 맘에 안드는 사람, 내 맘에 안드는 일을 넉넉히 품게 하는 자원이다. 은혜의 바다는 아무나 갈수 있는 곳이 아니다. 마치 에베레스트산의 정상은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듯이 말이다.
늪에서 안주하고픈가? 절대로 항복하거나 순종하지 말라. 강같은 은혜로 풍성한 삶을 살고픈가? 그냥.. 십자가로 올라가 죽으라. 매일같이..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왜 안 변하는가? 왜 안 자라는가? 왜 늘 곤고한가? 썩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죽어야 살고 썩어야 열매 맺고 순종해야 해결되고 항복해야 이긴다는 것은 주오실 그날까지 변동없고 양보할 수 없는 진리이다.
내가 고꾸라져야 끝이 나는 훈련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주일이면 통과할 거리를 40년이 걸려 겨우 통과할수 있었다. 그 이유는, 거듭되는 불순종과 훈련과목을 이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성경에 보면 사자를 피하려다 곰을 만나고, 곰을 피하려다 뱀을 만난다는 말이 있다. 우리의 삶이 그럴 때가 많다. 사자를 만나고 있다면, 어떻게든 사자와 싸워 이겨야 하고 곰을 만났다면, 곰을 정복해야 한다.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사자와 곰을 피하면 반드시 뱀을 만나게 된다. 사자는 피할 수 있어도..
곰에게서 숨을 수는 있어도 하나님은 피할 수도, 숨을 수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깨뜨리시고, 훈련시키시고 사용하시기로 작정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당신의 일을 성취하시기 전까지는, 결코 쉬는 법이 없으시다.
예를들어 지금의 직장이 힘들고 맘에 안 맞는다고, 다른 직장으로 옮기려 하지 마라. 훈련시간만 연장될 뿐이며, 훈련강도만 높아질 뿐이다.
지금 주변에 있는 사람이 나른 힘들게 하다고 하여, 사람을 바꾸려 하지 말라. 당신이 변하면, 그 사람도 변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훈련을 위해 허락하신 그 사람을 바꾸면 평생을 후회하게 될 수도 있다.
지나고 보면, \'그때 그 사람\'이 천사였다는 사실을, 나중에 눈물로 깨닫게 될것이다. 그 직장이, 유달리 힘든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힘들게 하신 것이다. 그 사람이, 맘에 안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미운 짓(?)을 하게 만든 것이다. 그 장소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섭리하신 것이다. 힘들어야 훈련되지 않는가?
고통스러워야 꼭꾸라지지 않는가?
편한 풀밭이나, 쇼파에 누워 무슨 훈련이 되겠는가?
여기가 맘에 안드는가? 저기로 옮기지 말라.
그곳에 가면 만가지가 더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은, 사랑 많으신 분이시다.
우리가 죽겠다고 떼라도 쓰면, 하나님은 억지로(?)라도 응답은 하신다.
그리고 원하는 대로, 길을 여시기도 하신다.
그러나 형통이라고, 모든 것이 다~ 축복은 아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삶이, 축복이다.
요셉은 감옥에서도 형통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동행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나를 보라. 다시스로 도망할때 마침 배를 만났다고 했다.
그러나 마침 배를 만난 행운이(?)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는 통로가 될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막힘속에도,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수 있고 열림속에도,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수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여기서, 꼭꾸라 뜨리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 우리를 성화시키려 하신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항복하기를 원하신다.
제발 다른데로 가지 마라. 사람이나 환경을, 바꾸려 하지 마라.
내일로, 훈련을 연기하지 마라. 백배나 어려워지고, 훈련기간만 연장시킬 뿐이다.
지금, 거기서 죽는 훈련을 하라 말도 안되는 그곳에서, 순종을 배우라.
감당키 어려운 그 환경에서, 꼭꾸라 짐을 경험하라. 광야의 삶은, 나의 변화에 의하여 단축되기도 하고 연장되기도 하는 특성이 있다.
훈련은, 훈련생에 의하여 강도가 높기도 하고, 쉬워지기도 하는 것이다.
좋은 교인은 교회서 만들어 지지만
좋은 그리스도인은, 광야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다.
그런데 광야에서의 하나님은, 무정하시고 야속하시다.
\'봐\'주시는 법이, 없으시다.
그분이, \"그만\"하셔야, 끝이 난다.
어짜피 피할 수 없는 훈련이라면, 감옥을 천당으로 만들자.
어짜피 숨을수 없는 광야라면, 불평말고 찬송의 제사를 드리자.
그러면 홀연히 \"그만\" 하실 때가, 마침내 오지 않을까?
힘들고 어려울 때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존재인 자신을 세우자
사람이 자기보다 높은 자 앞에서는 비굴해 지면서 낮은 자 앞에서는 마음이 또한 교만해 지는 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성공 앞에 자만해 버리고 실패 앞에 낙심하고 좌절한다. 사람은 너무 낮은 곳으로 내려갈 때가 되면 쉽게 낙심하고 좌절하며 의기소침하게 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낮은 곳으로 내려가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 마음까지도 내려가게 갑니다. 자존심도 내려가고 모든 삶의 의욕까지도 함께 내려가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렇게 낮은 곳으로 통과할 때의 마음이 비참해 지고 낙심이 생긴다면 그것은 멀미를 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내가 낮은 곳으로 떨어지고 있을 때는 반대로 주님 말씀이 높음을 자랑하라고 말씀한다. 내가 정말 얼마나 존귀하고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하는 말씀이다.
파트타임 인생은 없다
옛날에 어깨걸이 양쪽의 물병 2개로 매일 물을 나르는 물지게꾼이 있었다. 그 2개의 물병 중 하나는 금이 갔다. 그래서 매일 물을 길어 주인집에 도착하면 온전한 물병은 물이 가득 찼는데 금이 간 물병은 물이 절반밖에 없었다. 그 일이 2년간 계속되면서 온전한 물병은 자신의 성취에 크게 만족했지만 금이 간 물병은 큰 수치심을 느꼈다. 어느 날, 자신의 일을 절반밖에 못하는 것에 대해 낙심한 금이 간 물병이 물지게꾼에게 말했다. “지게꾼님! 너무 부끄럽습니다.” 지게꾼이 물었다. “뭐가 부끄럽지?” 물병이 말했다. “당신이 주인집에 물을 지고 갈 때 금이 간 저 때문에 물을 절반밖에 가지고 가지 못해서 부끄럽고 미안해요.” 그때 물지게꾼이 부드럽게 금이 간 물병에게 말했다. “물병아! 오늘 주인집으로 돌아갈 때 길가에 핀 예쁜 꽃을 보라.”그날 주인집으로 돌아갈 때 물병은 길에 핀 예쁜 꽃을 보았다. 약간 기분이 좋아진 금이 간 물병에게 지게꾼이 말했다. “물병아! 돌아오는 길에 네 쪽 편에만 꽃이 핀 것을 보았니?” 물병이 대답했다. “네!”그때 지게꾼이 계속 말했다. “나도 네가 금이 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문제를 어떻게 이용할까 생각하다가 네 쪽 편에 꽃씨를 뿌려놓았단다. 그래서 시내에서 돌아오는 길에 네가 흘리는 물로 그 꽃씨에 물을 주었기에 2년 동안 나는 매일 주인의 탁자에 신선하고 예쁜 꽃을 놓을 수 있었단다. 만약 너의 그 부족한 모습이 없었다면 주인집이 그처럼 예쁘게 되지 못했을 거야.” 파트타임 직업은 있어도 파트타임 인생은 없다. 누구나 자기 역할이 있다. 비록 남보다 배움이 짧고, 재능과 자원이 없고, 심지어는 잘못된 과거와 허물이 있어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그를 통해 멋진 일을 이루실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각자의 사명에 충실한 것이다. 그처럼 자기 자리와 사명에 충실하면 결코 인생에 실패는 없다. 가장 아름다운 인생은 자기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을 위해 달려가는 인생이다. 없어도 괜찮고, 성공하지 못해도 괜찮다. 사명을 따라 살면 행복해진다. 사명은 사람을 용기 있게 만들고, 실패와 역경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든다. 사람은 꿈과 비전과 사명을 가진 만큼 강해지고, 담대해지고, 넉넉해진다. 물질이나 사람이나 권력을 따라 살지 말고 사명을 따라 살라. 이익과 자리를 계산하지 말라. 사명을 따라 살면 필요한 만큼 물질과 사람과 권력도 따라온다. 사명 안에 확고히 서있으면 나의 작은 몸짓이 큰 의미를 가진다. 보이는 열매가 적어도 답답해하지 말라. 내가 얻는 열매가 적다면 내 후손이 살아갈 길을 닦는 것이라 생각하라. ‘사명의 길’을 따르는 것은 ‘사망의 길’을 벗어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하나님이 평가하고 인정하시는 모습이 진정한 나의 모습
우리들 가운데는 지위가 낮아서 사는 맛이 나지 않고 내 인생의 낮은 지위 이것이 바로 나의 낮아진 비참한 모습이라고 착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좀 더 올라가지 못해서 불만이고 높은 사람 앞에서 주눅이 든다면 바로 그것이 멀미이다. 바로 그런 순간마다 내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 주님의 자녀인가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낮은 형제는 부함을 자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참으로 나는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내 모습이 아니고 하나님이 평가하는 모습,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그 모습이 나의 진정한 모습이다.
나의 수입이 나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귀하게 보시고,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가 하는 그 평가가 진정한 나의 평가다. 주안에 감추어진 놀라운 보배를 확인하고 우리가 가장 부유한 자임을 고백해야 한다. 가난과 함께 우리의 마음도 같이 내려가서는 곤란하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속에 감추어지는 부유함을 바라보자.
때때로 우리는 질병의 골짜기로 내려갈 때가 있는데 사람이 병이 들게 되면 비관적인 생각을 하게 되고 아주 비참해 지는 그런 마음을 경험하게 된다. \"나는 희망이 없어, 왜 이렇게 약할까?\" 그러면서 자기 마음과 자기 믿음마저도 같이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경험을 여러 번 하거나 그렇게 낙심하는 것은 멀미중의 멀미이다. 몸에 병이 들었다고 우리 마음과 믿음마저도 병이 들어서는 안 된다. 고난의 순간은 다시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런 모든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는 부한 자리를 자랑하며 하나님 앞에 낮은 자리에서도 참으로 우리의 신분과 우리의 삶이 존귀한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자신의 삶에 평형을 유지하자.
우리 삶이 항상 밑으로 내려가는 것만 아니고 때때로는 높은 곳을 통과할 때가 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높은 곳을 통과 할 때도 역시 멀미하지 않도록 처방해 주시고 계신다. 우리가 잘못하면 높은 곳에 설 때 멀미할 수 있다. 우쭐해지고 으쓱해지면서 영광을 자기에게 다 돌리고 하나님께 돌리지 않는 교만을 가지게 될 위험이 있다. 역시 나는 제일 재능 있는 사람이야 훌륭한 사람이야 높은 곳에 서서 자기가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은 바로 우리 인생의 멀미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주님 앞에 그 순간에 낮아지는 것이 그 순간에 균형을 잡을 수 있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균형 잡는 법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주님 앞에서 겸손히 낮아지는 것이 우리의 삶으로 하여금 높은 자리에서 겸손하게 유지할 수 비결이다. 재물이 많고 남들보다 더 풍성하고 부자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지만 재물 때문에 우리 마음이 같이 높아지면 그것은 멀미이다. 아무리 우리의 소유가 풍성해 져도 내 마음 같이 그 재물이 모두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함께 재물과 함께 올라가서는 안 되고 오히려 낮아짐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 나에게 물질을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바로 그 주님이 원하시는 겸손의 자리에 앉아 있을 때 우리 인생에 균형은 똑바로 평평하게 잡혀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올라가 있는 순간도 있지만 그러나 영원토록 올라가 있지 않을 것이다. 올라가서 우쭐거리지 말고 다시 땅을 발로 디디게 될 준비를 해야 한다. 다시 내려가도 괜찮을 수 있는 준비를 하면서 평형을 유지해야 한다. 내려갔다고 낙심하지 말고 올라갔다고 자만하지 않으며 언제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형을 이루자.
부한 자는 낮아짐을, 낮은 자는 높아짐을 자랑하는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어차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가치관, 같은 자랑, 같은 신앙, 같은 기쁨을 향유해야 한다. 그러면 남는 것은 그리스도 뿐이요,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혜뿐이다. 이것을 깨닫고 사는 사람은 늘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될 것이다.
순종은 영적 싸움
순종하는 삶 속에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능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부모를 향한 자녀의 순종이 그렇고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순종은 하나님을 향한 순종입니다. 바로 그 순종의 삶 속에 삶의 변화가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새 계명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 명령에 대한 순종이 바로 다른 모든 명령에 대한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나에게 큰 손해를 입힌 사람이나 원수처럼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그런 사람들은 사랑할 수 없다는 생각이 이미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마음을 먼저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은 가장 치열한 영적 싸움터입니다.
즉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사탄과의 싸움터인 것이지요. 사탄은 항상 마음의 세 가지 기능인 생각(지)과 감정(정)과 의지(의) 중에서 생각의 영역을 공격합니다. 즉, 죄 된 생각을 넣어 주는 것이지요. 그 생각이 행동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경고해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같은 죄 된 생각이 들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적해서 승리해야 합니다. 대적하기만 하면 사탄은 피하고 우리는 승리하기 때문이지요.
안타까운 사실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영적 싸움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적절하게 대적도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패해서 실패와 고통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이 싸움에 담대하게 나서십시오. 그래서 사랑의 마음을 선물로 받아 이웃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순종은 승리하는 삶의 비결입니다. 정말 순종만이 살 길입니다
고난의 기간은 성숙할 수 있는 기회 고난의 기간은 성숙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떠나 하나님이 새롭게 덧입혀 주실 때, 우리가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한 후에 가장 아쉬울 것은 우리 자신이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후회일 것입니다. 고난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세미처럼 되고 파김치처럼 되어 나오느냐? 아니면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빛나는 정금같이 나오느냐? 는 것은 고난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는 세상에서 반드시 배우고 가야 할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길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의 소유자로 만드시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폭이 넓어진다는 뜻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남을 비범하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의 능력은 고난의 풀무 불 가운데서 훈련하여 얻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의 능력을 가진 사람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이웃에게 조용하면서도 잔잔하게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아주 평범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사역의 관점에서 보면 비범한 사람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자신과 타인의 정신적 성장에 초점을 맞추며 관계를 맺어 갑니다. 이를 위하여 사랑의 수고가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한 사람을 성장시키는데 필요한 사랑의 수고, 즉 자기 헌신은 고난의 훈련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대장간에서 쇠를 풀무 불 가운데서 연단시켜 유연하고 부드럽게 하여 농부가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농기구들을 만들 듯이,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부르신 사람을 부드럽고 온유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마음대로 사용하시기를 소원하십니다.
따라서 고난이 하나님이 주신 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연단이라고 받아들인다면, 고난을 통하여 인내를 배우고, 하나님의 연단을 잘 받아 마침내 소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빨리 벗어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인 일수록 흔들리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환난을 당할 때마다 잘 견디는 훈련을 받을 때에 앞으로 그 어떠한 시련 가운데서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주간에... 사람의 육신은 너무 큰 소리는 들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육신은 너무 큰 빛은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의 육신은 너무 큰사랑은 느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영으로만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전심으로 찾고 찾으며 회개하며 상한 심령에 비취는 성령의 계시로만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느낌보다 먼저 그 사랑을 사실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내가 다 느끼고 이해하지 못할 지라도 영원히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그 큰 소리를 들으셨는지요? 그 큰 빛을 보셨는지요? 그 큰사랑을 느끼셨는지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생생히 보고자 원하고, 부활하신 그분의 몸을 만져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저는 양이 차지 않습니다. 주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외치지만 그들 곁에 가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똑같이 나와 빈곤한 사람들의 소리는 더 이상 내 맘에 감동이 없습니다. 저는 더 이상 예수님의 사랑이 ”네가 보아 온 것처럼 그렇게 시시하지 않다”라는 것을 보여줄 분을 만나고 싶습니다.
사람이 들을 수 없는 그 소리를 듣게 되면 과연 그대로 있을 수 있을런지... 사람이 볼 수 없는 그 빛을 보게 되면 또 어떻게 될 것이며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그 사랑을 느끼게 되면 과연 이렇게 있을런지... 슬며시 찾아왔던 고난은 슬며시 물러갈 것입니다.
우직하게 걸어가는 거북이의 그 우직함 후에 진정한 승리가 있습니다. 비행기에는 후진 기어가 없어 뒤로 물러갈 수 없습니다. 전투기는 전천후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
어떤 상황 앞에서도 명령만 떨어지면 그냥 치고 솟아오릅니다. 대나무는 4년 동안 뿌리를 내린 후에야 5년째 위로 뻗어 올라가는 속성이 있습니다. 충분히 밑으로 뿌리 내린 후에야 위로 뻗어 올라가는 속성이 있습니다. 독수리는 언제나 외롭지만 결코 약하지는 않습니다. 독수리는 언제나 높은 곳에 앉아 먼 곳을 응시하기 때문입니다. 독수리의 야무짐은 새끼들의 훈련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마치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훈련시키심과 동일합니다. 독수리는 본능적으로 새끼들이 안주하려는 순간에 편안한 둥지를 흩어 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땅에 머물려하는 새끼들을 억지로 창공으로 끌고 올라갑니다. 그런 후에는 매몰차게 낭떠러지에 떨어뜨립니다. 새끼들은 생각합니다. \'이제는 죽었구나\' 그러나 그 즈음에 어미 독수리는 급속히 하강하여 새끼들을 가슴에 품고 또 다시 비상합니다. 몇 번이고 반복함으로 마침내 독수리 새끼는 하늘의 왕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닭이나 철새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기필코 독수리로 키우실 생각이십니다. 폭풍우가 살을 에이고, 눈보라가 뼈를 후비는 날씨가 다가오면
모든 동물들은 각기 제 집으로 몸을 숨기지만 독수리는 오히려 폭풍우와 눈보라를 지치게 합니다. 독수리를 보면서 주님의 마음을 눈치 챕니다. 비행기를 보면서 하나님의 시나리오를 꿈꿉니다. 곧게 뻗어가는 대나무를 보면서 굽어 도는 삶의 여정에서 올곧아야 하는 천명을 추스려 봅니다. 거북이의 우직함과 대나무의 올곧음과 전투기의 전진성과 독수리의 속도 있는 강함을 삶의 지표로, 사역의 균형성으로 뿌리내리고 싶습니다.
새벽녘 아무도 모르게 소리도 없이 스르륵 다가와 이미 내 옆에 있음으로 존재해버린 서늘한 계절의 변화처럼 그냥 오늘도 아무 설명도 통보도 없이 스르륵 스며든 삶의 질곡들과 고난의 무게로 인하여 또 무너짐과 심해의 압력을 견뎌야 하지만 그냥 아무도 모르게 찾아왔던 고난이.. 언젠가는 그냥 아무도 모르게 슬쩍 떠나버릴 것을 알기에 크게 당황치 않습니다. 그냥 오늘 하루가 주어졌기에 거북이의 속도를, 때로는 소리없이 자라가는 대나무의 성숙을 때로는 비행기의 뒤로 갈 수 없는 속성을 때로는 폭풍우를 지치게 하는 독수리의 야성을 품으려 합니다. 이제는 땅에서도 하늘을 살려합니다. 대나무를 보면 30년을 준비하여 3년 일하셨던 주님이 생각납니다.
전투기가 날아가면 질풍처럼 주와 복음위해 달려갔던 바울이 생각납니다. 거북이를 생각하면 40년 광야 길을 한결 같이 걸어 같던 모세가 생각나고 칠년을 하루같이 여겼던 야곱이 아련히 보고파집니다. 그리고 독수리를 보노라면 평생을 악천후와 담대하게 싸웠던 다윗이 느껴집니다. 이제 대나무와 전투기 그리고 거북이와 독수리는 우리의 삶의 기초가 되었으면 합니다.
사실... 고난이 있고 없고야 무슨 큰 의미이겠습니까? 소유의 유무가 무슨 요동의 이유가 되겠습니까? 건강의 유무가 무슨 흔들림의 이유이겠습니까? 성패가 무슨 하등의 시험거리가 되겠습니까? 다만 꿈에도 소원이 있다면 다윗의 절규가 그리울 뿐입니다.
\'주여!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김재진님의 \'섬\'이라는 책에 \'배가 정박할 수 있을 때는 섬이다. 그러나, 배가 부딪혀 깨어지면 그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니라 암초가 되고 만다.\' 는 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고난과 가시들은 섬이 되기도 하고, 암초가 되기도 합니다. 시각과 사고의 교정 그리고 변화 그것은 우리가 진정 구해야 할 기도제목이며 은혜의 무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고난들을 암초가 아니라, 섬이 되게 하실 분은 우리의 요새시며 바위이신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암초를 섬으로 바꾸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굽어지지 아니하며 올곧게 뻗는 인생으로 겉 푸름이 아니라 속 푸름의 인생으로 살아내고 성숙했으면 합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애도하는 곳이 아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하는 곳이 아니다. 죽은 나무인 나와 살아있는 나무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곳이다. 나의 존재가 이루어 진 곳이다. 나의 믿음을 확고하게 하며 고정시키는 곳이다. 십자가에 많은 분들이 눈물을 흘린다.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것이라면 흘리지 말라. 나의 존재가 이루진 것에 대해 감동의 눈물을 흘리자.
인생의 거름―고난
땅속에 더러운 쓰레기를 파묻는다고 해서 땅이 금세 오염되는 것은 아닙니다. 토양에는 어느 정도 불순물들을 정화하고 분해하여 오히려 거기서 유용한 성분을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놀라운 능력을 가진 것은 비단 땅뿐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도 고난에 대한 자정능력이 있습니다. 땅이 쓰레기를 소화하여 비료로 삼듯 인간은 고난을 소화하여 성숙의 자양분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이 쓰레기를 소화해내지 못할 경우 쓰레기의 독성으로 인해 식물이 살 수 없는 죽은 토양으로 바뀝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난도 적절한 반응이 뒤따르지 않으면 영혼의 생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고난은 우리를 달아보시는 하나님의 저울이고 우리의 존재를 울림있게 만들어줄 깊은 공명통임을 인식하고 잘 견뎌내야 합니다. 고난을 견뎌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인내이며 그 인내의 원천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깊은 사랑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찬양을 낳는 고난의 돌
서양 속담 중에 “흐르는 냇물에서 돌들을 치워버리면 그 냇물은 노래를 잃어버린다”는 말이 있다. 흘러가는 시냇물의 아름다운 소리는 곳곳에 박혀 물의 흐름을 방해하던 돌들 때문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역경과 고난이라는 돌이 없다면 아름다운 감사의 찬양과 기쁨도 없다. 우리는 화니 제인 크로스비라는 이름을 기억한다. 그녀는 어려서 다른 사람의 실수로 맹인이 됐지만 아무도 탓하지 않았고 오히려 스스로를 행운을 창조하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일평생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았고 9000편의 찬송시를 남겼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찬송가 446장‘오 놀라운 구세주’역시 그녀가 남긴 찬송시다. 아무리 큰 절망과 고통이라 할지라도 믿음 안에서는 희망과 감격의 통로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만 한다면 아무리 어둡고 험한 길이라도 은혜로 점철된 기쁨의 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가진 사람은 1.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가진 사람은 행복의 주인공이 되지만, 고난에 굴복하고 희망을 품지 못하는 사람은 비극의 주인공이 됩니다.
2. 힘들 때 손 잡아주는 친구가 있다면 당신은 이미 행복한 사람이지만 그런 친구가 없다면 당신은 이미 행복의 낙선자 입니다.
3. 사랑에는 기쁨도 슬픔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행복하지만, 슬픔의 순간만을 기억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4. 남의 마음까지 헤아려 주는 사람은 이미 행복한 사람이고, 상대가 자신을 이해 해주지 않는 것만 섭섭하다고 한다면 이미 불행한사입니다.
5.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지만, 미움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6. 자신을 수시로 닦고 조이고 가르치는 사람은 행복의 기술자가 되지만 게으른 사람은 불행의 조수밖에 못 됩니다.
7. 웃는 얼굴에는 축복이 따르지만, 화내는 얼굴에는 불운이 괴물처럼 따라 다닙니다.
8. 미래를 위해 저축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의 주주가 되지만, 당장 쓰기에 바쁜 사람은 불행의 빚쟁이가 됩니다.
9. 불행 다음에 행복이 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행복의 표를 예약한 사람이! 고, 불행은 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의 번호표를 들고 있는 사람입니다.
10. 남의 잘됨을 기뻐하는 사람은 자신도 잘되는 기쁨을 맛보지만, 남의 잘됨을 두고두고 배 아파하는 사람은 고통의 맛만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고난 중에- 최 용 덕 -
당신의 인생 중에 이해할 수도 없는 엄청난 고난이 닥칠 때 당신은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뼈를 깎고 살을 에이는 고통 후에 아름다운 진주가
탄생되듯, 이 고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당신을 성숙시키기를 원합니다.
때론 남녘으로부터 불어오는 따스한 봄기운처럼 때론 한 여름 몰아치는 대노한 폭풍우처럼 그 시험은 당신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겨울은, 봄은, 어느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든 겨울나무들에는 실존의 깊이 같은 것이 있다. 한여름 그 무성했던 암자의 나무들도
삶의 디테일을 없애듯 잎을 모두 내려보내고 줄거리만 남겨놓은 채 조용히 자기내면을 응시한다. 자기영역을 긴장시키며 눈에 얼어붙은 저 가슴 저린 나무들이며,
몸을 낮춰 땅에 바짝 밀착하는 저 눈물겨운 풀들이며,
오직 안으로만 피고 지는 저 숨죽인 꽃들이며,
이 산하의 모서리란 모서리는 다 핧으며 허공을 단청하는 저 바람이며,
그 바람의 생채기를 핥으며 흔적 없이 날아다니는
저 풍경 같은 새들이며.....
모두 그렇게 속이 깊어가고 모두 그렇게 결이 단단해져 가도 있었다
겨울은 그 모든 것들로 하여금 스스로 실존의 깊이를 느끼게 하고
또 그 깊이로 하여금 자기 삶을 요약하게 한다.
응어리는 풀 수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우리는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광대하심을 묵상하고 찬양하기 보다는 오랜 시간동안 학습된 내용을 아주 자연스럽게, 사명인양(?) 복습하며 그 내용들을 조목 조목 곱씹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지고 잠겨진 응어리들을 다시 휘저어 하루를 엽니다. 마치 잠수부들이 심해에 들어가 가라 앉은 온갖 오물들을 끌어 올리듯 말이죠. \'이제는 더 이상 이런식으로 살아서는 안된다\'고 중얼거려 보지만 마음과 생각은 벌써 응어리 속에 집을 짖고 웅크리고 있습니다. 어제와 같지 않은 오늘을 기대하지만, 실상은, 오늘이 어제보다 더 심하기에 내일이 더 두려운지도 모릅니다.
때때로 가까운 지인들에게 오픈도하고 하나님께도 간구해 보지만 내면 속에는 변화에 대한 소망과 기대치가 거의 zero에 가깝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을 향한 기대보다는 운명으로 받아들이려는 극단적 패배주의가 더 깊이 다스리고 있는듯 합니다.
기막힌 영적성숙과 삶의 열매들을 목말라 하지만 성숙으로 향한 시계는 이미 과거의 응어리 앞에서 요동치 않음을 봅니다. 때때로 감동도, 기쁨도, 눈물도, 감사도, 헌신도...경험하지만 돌아선 자신의 모습에서 응어리의 흐느낌과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의 통증으로 순간마다 힘들어 합니다.
날아가는 새들을 자세히 보시면 상처없는 새가 없듯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중의 차이는 있겠지만 응어리는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분들은 응어리가 한이 되고 결국 병이 되어 누워 계신 분들도 있고, 어떤 분들은 응어리를 가슴에 묻은 채로 그럭 저럭 살아가는 분이 있고 어떤 분들은 응어리를 끌어 앉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우리의 응어리는 외부의 충격이나 상처, 감당키 어려운 일이나 상황에 대한 쓴 열매이지요.
사랑받고 싶은데, 버림받았고 인정받고 싶은데, 무시당하고 하고픈 말이 많은데, 말할 수 없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데, 숨죽여 살아야 되고 삶의 모든 가능성이 사라지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억울함과 분노를 누르고 살아야 될 때...의 쓴 감정들이 한 곳에 뭉쳐 응어리가 되고 그 응어리는 결국 인격형성과 신앙성숙에 장애물이 될 뿐 아니라
영육간에 병이 되어 결국은 극심한 패배주의와 열등감의 포로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계획하심\'보다 내 속에 강이 되어 흐르는 패배주의와 열등감을 더 신뢰하며 그 허상을 진상처럼 믿고 살아 갑니다. 내면의 응어리들은 대개 두 가지 형태로 표현되는데 하나는, 내면에 잠재적으로 흐르는 응어리이며
또 하나는, 입술로 표현되는 응어리입니다.
우리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이렇게 늘 지껄입니다. \'나는 안돼!\' \'내 기도는 안들어 주시는 가봐\' \'나는 안 사랑하시나봐\' \'나는 왜 이렇게 할 줄 아는 게 없지\' \'나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지\' \'나는 왜 이렇게 못났지? \'기도해도 안 되잖아\' \'누구를 봐, 평생을 나처럼 살잖아\' \'나도 아마, 비참하고 초라하게 인생을 마칠꺼야\' 이 지껄임과 속삭임이 있는 동안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아무일 도 하실 수 없을지 모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잠18;21) 우리의 말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열매가 되어 돌아 오기 때문에 우리의 말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의 인생도, 신앙도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61;1-3절을 통하여 주의 신을 우리에게 보내사 \'마음이 상한(응어리) 자\'를 고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지금도 절대 유효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까지 신실하시고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마음에 응어리\'를 품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심정이 아닙니다. 그 응어리가(미움,분노,억울함,원통함...) 어떤 것이든 말이죠. \"그때 그 일만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다른 것은 다 참고 용서해도, 그 일만은 그 사람만은 안되고 그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 땀이 흐르고 그 사람을 떠올리면 피가 거꾸로 돌고 그때 일을 생각하면 너무 후회가 되고 억울하고 내 살아 생전에는 용서 못할 것 같고, 해결 안될 것 같은 것\" 이런 식의 생각과 응어리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할 뿐 아니라, 영의 생각이 아닙니다. 이런 식의 생각과 응어리의 배후 조종자는 사단입니다. 응어리는 사단이 성도들을 넘어지게 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비밀병기입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응어리가 풀리지 못한 채 맺혀 있으면 잠깐 기쁠 수는 있으나, 오래 기쁠 수는 없으며 잠깐 감사할 수는 있으나. 오래 감사할 수는 없으며 잠깐 사랑할 수는 있으나, 오래 사랑할 수는 없으며 잠깐 용서할 수는 있으나, 오래 용서할 수는 없으며 잠깐 기도할 수는 있으나, 오래 기도할 수는 없으며 잠깐 뜨겁게 믿을 수는 있으나, 오래 잘 믿을 수는 없습니다. 응어리를 품고 사역을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게 마련이고,
응어리는 반드시 또 다른 응어리를 낳습니다. 이러므로, 응어리는 반드시 풀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우선과제 입니다. 응어리는 \'품고 사는 것\'이 아니라, \'풀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사건은, 우리의 응어리의 풀어짐의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응어리를 풀어야 할까요? 우리의 응어리를 풀어 주실 주님. 이 땅에 머무시는 분들 가운데 가슴에 바다만한 응어리들을 품고 사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는데, 주의 성령을 보내셔서 한분 한분 맺힌 응어리들을 풀어 주시옵소서. 숯덩이된 응어리위에 성령의 기름을 부으소서. 마음이 이래 저래 상하고 지쳐 있는 분들을 주 날개 아래 보듬어 주셔서 상처가 영광이 되게 하시고, 한숨이 노래가 되게 하소서. 능히 그렇게 하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IQ - EQ - SQ
구원은 회복입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본성이요, 바로 나의 본성입니다. 그럼 나의 본성은 무엇일까요? 나의 본성은 육이 아닌 영이라는 것입니다.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은 육적존재가 아니라 영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비람에서 깨어나기라고 했는데, 영성은 바로 깨어나서 본성으로 회복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나의 본성, 사람의 본성은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이땅에 태어났을 때 천사들이 합창을 합니다. 하나님께는 영광이고 땅에는 평화며 사람에게는 기쁨이라고. 그렇습니다. 이 노래는 하나님의 본성은 영광이고, 땅의 본성은 평화이며, 사람의 본성도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처음 전한 소식이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하늘 ------- 영광 사람 ------- 기쁨 땅 ------- 평화
기쁨은 기가 뿜어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 무엇을 하는 것, 결국은 다 기쁘기 때문에 하고 또 기쁘려고 하는 것이 아닐런지요. 그런데 기가 막힙니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쓰는 기(氣)라는 말을 살펴보면 어떨까 합니다. 기는 에너지지요. 힘입니다. 힘이 있어야 에너지가 있어야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가가 꽉 차야지요. 그런데 그 사람 기가 빠졌어 한다든가, 무슨 일을 할 때 김빠졌어 합니다.
기분 좋다. 기분 좋다는 말은 기의 분배가 잘 되었다는 말입니다. 기가 머리로 갈 것을 머리로 가고, 가슴으로 갈 것은 가슴으로 가고, 배로 갈 것은 배로 제대로 가서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이 기가 분배가 잘 되어 뿜어 나오는 것이 기쁨입니다.
그런데 이 기의 분배를 막아 기분이 좋지 않게 되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알아 그것을 제거하자는 것이 하비람 영성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기의 분배를 막아 기분 나쁘게 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뭐니 뭐니 해도 화, 분노일 것입니다. 다음에는 싫음, 원망, 탓,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불만 등등
그래서 그런 것들을 제거하여 기의 분배가 잘 되어 기분 좋은 삶, 나아가서는 기가 뿜어 나오는 나의 본성을 살도록 해야 합니다.
영성수련 복표는
1. 화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된다. 2. 싫은 것이 없는 사람이 된다.
3. 탓 . 원망이 없는 사람이 된다.4. 세상이 어떻게 할 수 없는 하늘(영)의 사람이 된다.
영성은 일상의 삶으로 깨어나서 나의 본성을 회복하여 구체적 삶으로 실현하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예수 믿고 천국 가자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천국을 누리고 살자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삶의 기술(The art of life)입니다. 요령입니다. 행복하게 자유하게 기쁘게 살 수 있는 기술을 배우고 익히고 터득하는 것입니다. 성경과 예수님의 삶 속에는 이런 고도의 삶의 기술들이 무궁무진하게 있거든요. 이것은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원래 주신 본성인 기쁨이 나오도록 되어 있었는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해서 기분이 좋아진 것이 아니라 수치심에 가리고 두려움에 숨는 삶으로, 즉 기분 나쁜 삶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바로 타락입니다.
무엇이 이렇게 했을까요. 생각입니다. 지식입니다. 앎입니다. 그러니 생각과 지식과 앎의 세계에 있는 한은 기분 좋은 삶을 계속 유지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에덴에서 쫓겨났다는 말은 아담인 모든 사람이 그럴 수 밖에 없는 의식 성장의 흐름을 아주 잘 표현해주고 있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나이 4살이 되면 거의 옳고 그름, 맞고 틀리고, 좋고 나쁘고의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악세계에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 다음에는 분명히 그 어떤 느낌이 달라 붙는데, 그런 생각을 하니 그런 느낌이 들어 기의 분배를 막아 기가 막히게 하고, 기의 분배를 잘 못해서 기분 나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는 자기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왜 자기가 우울한지 화가 나는지 짜증인지도 모른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비만 오면 기분이 나쁘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 비가 그 사람의 기분을 어떻게 나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은 비가 오면 그 어떤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생각 때문에 지금 기분이 나쁜 것인데, 자기 생각은 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비 때문이라고 합니다. 화 날 일입니까? 라고 묻고, 묻고, 물으며 하는 여행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어떤 생각이 있어 그 어떤 느낌이 일어난다는 것이 아닙니까? 남편이 바람피우면 안된다는 그 생각이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이지, 그 일 자체는 그 일 아니겠습니까? 또 생각은 바뀔 수 있는 것인데, 자기 생각은 만고 불변의 진리인양 붙고, 현실을 바꾸려고 애쓰고 있는 모습을 스스로 보게 하고 알아차리게 하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느낌은, 정서는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선택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생각은 선택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생각 다음에 느낌이 오니 결국은 그 정서도 내가 다스릴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느낌이 오고 나쁜 생각을 하면 나쁜 느낌이 옵니다. 잠언서 기자도 말씀합니다. 사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사람도 그러하다고 말입니다.
사람의 존재 차이는 없습니다. 정말 하나도 없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생각의 차이 밖에 없습니다. 생각을 내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면 그것이 자유요 해방이지 무엇이 자유고 해방이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의미와 가치도 자기가 결정하지, 그 누가 결정해준 가치와 의미에 자기 삶을 소모품으로 납품하는 허망한 삶을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일체 좋음의 본체인 하나님을 생각하면 좋은 느낌, 기분 좋음, 기쁨에 살 수 있는 자명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만나는 채널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사람의 의식 구조를 간단히 그림으로 그려보면 아래와 같이 그릴 수 있지 않은가 합니다. 가장 깊은 의식에는 영성세계가 있고, 그 다음에는 감성세계가 있고, 가장 겉 층에 지성세계가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지식중심 사회였기 때문에 IQ가 존중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의식세계가 깊어지고 과학의 발전이, 지식 중심 사회가 그렇게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게 된 것입니다. 그림을 보면 가장 깊은 곳에는 영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바로 이 영성세계가 열려야 하나님과 코이노니아가 일어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지식으로, 생각으로 알고 있는 것을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착각(?) 아닌 착각 속에서 살지 않았나 합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십니다.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시고 영원토록 살아계십니다.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설명을 기억하는 것이지요.물에 관한 글을 아무리 읽고 분석해도, 진짜 물을 아는 것은 어쩌면 먹어보는 것이 아닐런지요. 혀를 대고 마실 때 바로 그 물이 나를 살리는 것이지요. 하비람의 아침햇살 영성은 그러자는 것입니다. 그동안 누가 하나님에 관하여 말한 것을 지성세계에서 생각이나 이론, 논리나 학문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 말고 그 하나님을 내가 직접 먹고 마시자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이론이나 학문 생각들을 다 무시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아주 소중한 우리 인간들의 영적자산이요 문화요 문명이지요.
그림을 다시 보면 영은 어떻게 말로 글로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영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느낄 수 있는 길이 있지 않겠습니까? 영성세계와 그래도 가까운 것은 감성세계, 즉 느낌입니다. 정서입니다. 그러니 생각 세계로 하나님을 만나자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만나자는 것입니다.그동안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지식들이 별로 나의 일상에 빛과 힘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오히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내 삶을 무겁게 하고 짜증나게 했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생각으로 갖고 있는 한은 별로 나의 일상에 그리 힘과 빛이 되지 못합니다.그러나 하나님을 느끼면, 그 순간에 하나님의 영은 빛과 힘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비람에서 감성 깨우기를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삶은 바로 느낄 때 경험하는 것이거든요. 유명한 말이 하나 생각이 납니다. 내가 있어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있어 내가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메섹에서 경험이 있어 바울이 있는 것이지요. 갈릴리 해변에서 예수를 만나는 경험이 있어 베드로가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성과 이성과 감성과 영성세계를 주셨습니다. 오성세계를 바깥으로 내놓는 것이 과학입니다. 이성세계를 나타낸 것이 철학이고, 감성세계를 표현한 것이 예술이고, 영성세계가 보여주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四覽), 사체사지(四體四肢)가 되는 것입니다. 이 4가지를 하자는 것이 사람이고 인생이지 무엇이 인생이고 사람이겠습니까? 산다는 것이 바로 이 4가지, 과학 . 철학 . 예술 . 종교 밖에 그 무엇이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기독교 내지는 종교들이 미신(?)에 빠져 버린 것이 바로 오성과 이성과 감성세계를 무시하고 덮어놓고 영성세계만 열려고 하는데서 나오는 자연적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고등종교 일수록 과학과 철학과 예술의 문을 통해서 영적 세계를 이 땅에 펼쳐 놓는 것입니다.
영성을 지식화 한 것이 신학입니다. 영성을 축제화 한 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니 영성과 신학과 예배가 하나된 삶이 가장 안정되고 원만한 살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교회 내지는 신학교의 비극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신학도 있고 화려하고 멋진 예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있게 하는 영성이 빈곤해 있다는 것입니다. 본성으로의 깨어남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 사회는 IQ중심 사회에서 EQ중심 사회로 바뀌었습니다. 일반 상품들 조차도 인간의 감성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장사조차 안되는 상황입니다. EQ. 감성지수라는 말이 보통 일상 용어가 된지 오래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신학교와 교회는 여전히 하나님을 지식 내지는 이론, 학설로 배우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인간관계훈련이나 T그룹 내지는 상담공부를 통해서 오히려 자기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흔히 볼 수 있게 되고 말았습니다.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종교는 이미 죽은 종교입니다. 거듭남의 체험이 일어나지 않는 종교는 이미 생명력을 잃은 교회입니다. 여기서 남는 것은 가진 율법과 조항, 규칙, 체면들입니다.
IQ에서 EQ로 옮겨 왔다면 다음 세대는 자명합니다. SQ, 즉 영성 지수가 중심되는 사회가 오고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아니 이미 도래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반대학에서 감성공학과가 생기고 있습니다. 감성을 공학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영성도 막연한 것이 아니라 과학과 철학의 문을 지나 예술로 승화된 그런 영성문화의 시대의 출현을 간절히 기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신학과 교회의 적극적인 변화가 요청되고 있습니다. 기존의 패러다임 갖고는 정말 아닙니다. 사랑과 이해를 가르치고, 삶의 신비와 은총을 느껴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하는 기술들을 연마하고, 삶을 수련하는 변화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문화는 그 사회의 빛입니다. 문화를 낳지 못하는 종교는 자연스럽게 도태되게 되어 있습니다. 성숙한 정신문화를 이 땅에 제공하는 그리스도인. 기독교를 상상해 봅니다. 생각을 마음대로 다룰 줄 알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 줄 분별하는 사람을 출현시키는 교회를 그려봅니다.
자, 생각과 느낌의 틈새가 보이지요. 생각과 사실세계의 틈새도 보이지요. 틈새 안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은총을 맛보셨지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자유도 누리시고 계시지요? 그 틈새를 확장해 나아갑시다. 그 틈새를 명료화 해 나아갑시다. 그 틈새 만큼 나는 자유로울 것입니다. 그 자유로운 만큼 나는 화를 다스릴 수 있고, 싫음에서 벗어나, 원망과 탓이 없는 세상, 즉 생각과 느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하늘 사람, 즉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영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작은 것을 아름답게 가꾸는 영성 /나이 사십이 되기까지 하나님이 우주에 담아 놓으신 원리와 이치를 터득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 이유는 시대는 변해도 원리와 이치는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법칙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법칙을 깨뜨리면 법칙이 우리를 깨뜨립니다. 당장은 아니지만 서서히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가장 축복된 생애는 하나님의 법칙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속에 담긴 원리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불변하는 법칙 가운데 하나가 농작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농부이십니다(요 15:1). 그래서 농심은 천심입니다. 농작의 법칙은 심고 거두는 법칙입니다. 사람들은 정직하지 못해도 땅은 정직합니다. 땅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땅은 누구든지 심은 것을 생산해 줍니다. 좋은 씨앗을 심으면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씨앗을 심으면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많이 심으면 많은 것을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은 것을 거둡니다. 농작의 법칙을 묵상하면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아무리 노력해도 형통하지 못했다면 이전과 다른 방법을 사용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같은 방법을 시도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반복해서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면 그동안 시도한 것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조금만 변화를 주어도 큰 차이를 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 코치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세만 조금 바꾸어도 놀라운 결과를 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농작의 법칙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작은 씨앗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작은 씨앗속에는 우주가 담겨 있습니다. 영원한 미래가 담겨 있습니다. 작은 씨앗속에는 수천의 꽃들이 담겨 있고, 수천의 나무가 담겨 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열매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씨앗의 가능성을 아십니다. 잠재력을 아십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셨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작은 씨, 작은 만남, 작은 접촉, 작은 언어, 작은 격려, 그리고 작은 시도의 소중함을 압니다.
작은 씨앗의 소중함을 안 후에 중요한 것은 작은 씨앗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씨앗을 가졌다고 열매가 맺는 것이 아닙니다. 씨앗을 심었을 때 열매가 맺는 것입니다.
씨앗을 심은 다음에 중요한 것은, 심은 씨앗이 싹이 나고 순이 뻗어 날 때 그것을 잘 가꾸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문제는 작은 것을 가꾸는 것을 소홀히 하는 데 있습니다. 스티븐 코비는 “정원사가 없는 정원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정원사가 없는 정원은 잡초만 있을 뿐입니다. 정원사가 하는 일은 가꾸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가꾸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잡초는 일찍 뿌리를 뽑아 주어야 꽃나무는 건실하게 자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는 정원사가 되어야 합니다.
작은 물고기 한 마리를 가꾸면서 하나님의 영혼 사랑하는 마음을 배우고 있습니다. 작은 자 한 사람을 생명처럼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 있습니다. 한 마리 물고기를 잘 키우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작은 꽃나무를 잘 키우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작은 것을 가꾸는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착한 마음입니다.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가정을 가꾸고, 정원을 가꾸고, 관계를 가꾸기 위해서 성실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작은 것을 성실히 가꾸는 예수님의 영성으로 날마다 풍성한 삶을 누리시길 빕니다.
내 자궁으로 난 나라야
깨어나기까지는 고통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원하는 조건이 제아무리 잘 구비되고 환경이 바뀌어도 사람이 달라지지 않는 한 또 다른 원망과 불평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마음에 상처를 받고 한과 설움 속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들어 주고 받아 주고 그래서 공감이 이루어지고 자신이 이해를 받게 될 때는 좀 치유가 되어 새 사람으로 살 것 같지만, 조금만 다른 경우를 만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불평과 원망입니다. 옛날에 상처받았던 기억의 쓴뿌리까지 올라와 기억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깡통이 올라오고 콜라병이 올라오고 흙탕물, 구정물, 똥 오물까지 올라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것을 내가 정화시켜 보겠다고 애를 씁니다. 깡통을 골라 내고 콜라병을 찾아 내고 똥 오물을 퍼냅니다. 이것이 실패의 비밀입니다. 찾아 내고 골라 내어 내가 이렇게 살고 있노라고 간증하고 자랑하지만, 그래서 경건하고 자기를 잘 관리하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참 경건은 그렇게 해서 이루어질수도 없고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로워질 육체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치고 또 지치지 않았나 합니다. 심리학을 동원하고 상담 기법까지 동원하지만 부패한 마음을 고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여전히 목마르고 답답합니다. 남편을 다섯, 아니 쉰 명을 바꾸어 봐도 지금 사는 남편이 내 남편이 아닙니다.
인간 정화는 법이나 제도, 행사, 구호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 사람이 되는 것도 행동 몇 가지 바꾸는 결심으로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결심으로 된다면 지금 새 사람 안 된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종교는 개선을 말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을 말합니다. 새로 태어남을 말합니다. 거듭남은 기독교의 본질이요 핵심입니다. 정말 거듭났다면 그 후에는 저절로 거듭난 삶을 살지 않겠습니까?
고통 속에 사는 사람에게서 그 고통을 제거해 주는 일은 정말 중요하고 꼭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바로 그들을 거듭나게 하는 일입니다. 애벌레에게는 만사가 걸림이요 불평입니다. 그러나 나비에게는 오히려 그런 것들이 구경거리에 불과합니다. 기어가는 애벌레가 애처로워 앞에 있는 돌들을 치워 주고 바위를 빼주고 다리를 놔주고, 과연 그것이 지혜로운 삶일까요? 그러나 나비에게는 이런 일체의 것들이 다 구경거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십시오. 애벌레 앞에 있는 돌을 치워 주고 바위를 빼주는 일이 아니라 그 애벌레를 나비로 거듭나게 하는 일, 이것이 바로 하늘의 일입니다. 하늘의 일을 하는 것이 영성입니다. 영성은 관념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를 사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삶입니다. 영성은 거듭남이요 깨어남입니다. 깨어나기만 하면, 거듭나기만 하면 인간은 더 이상 고통 속에서 살지 않습니다. 남들은 고통이라 할지 모르지만 거듭난 사람에게는 은혜입니다. 일체가 은혜요, 신비요, 감사입니다.
반발이 없고 의문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운명조차도 없습니다. 운명은 삶의 태도입니다. 이제 삶의 태도가 달라졌는데 어떻게 정해진 운명이 있겠습니까? 거듭난 사람, 깨어난 사람, 영성 생활을 하는 사람은 더 이상 과거에 이끌려 다니지 않고 앞으로의 기대로부터도 자유합니다. 그래서 이제 나로서 마음껏 삽니다.
어머니 자궁으로 난 나는 내가 아닙니다. 내 자궁으로 난 나라야 진짜 나입니다. 태어나지 않은 나를 만나야 부활의 삶이 펼쳐집니다. 아브라함 이전부터 있는 나, 세상 끝 날까지 하나님과 함께 있는 나, 그 나로의 삶이 바로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영성은 깨어남 영성 생활은 다시 태어나서 삶을 축제로서 사는 일상 생활입니다. 모든 것을 기쁘게 감사로 사는 삶입니다. 여태껏 보던 대로가 아니라 새롭게 보고, 지금까지 듣던 대로가 아니라 \'정말은 어떨까?\' 하고 새롭게 듣는, 지금까지 전혀 살아 보지 않았던 다른 삶의 형태와 질을 살게 하는 것이 바로 영성 생활입니다.
어떻게 그런 새로운 눈과 귀를 가질 수 있느냐구요? 그것이 신앙의 신비요 영성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인간 이해였습니다. 내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당부까지 하셨습니다(요 3:3).
사람이 다시 나지 않고 사는 삶은 죽음이요, 꿈이요, 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잠 속에서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행하는 것과 같은 식의 삶입니다. 즉, 죄와 허물의 기운에 따라 사는 삶이라는 말이지요. 대개의 사람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잠들어 있는 줄도 모른 채 잠 속에서 하는 잠꼬대들을 고작 삶인 줄 알고 있습니다. 삶은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며 결혼해서 애기 낳고 집 사고 차 바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삶은 부분이 아니고 전체입니다. 삶은 사랑입니다. 삶은 신비입니다. 일체를 사랑으로 보고 은총으로 느끼고 나누는 영적 교제가 바로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삶은 영원합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일은 깨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분은 착각과 환상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 가지가지 중독에 걸려 방황하는 사람들을 깨우러 오신 것입니다. 깨어나십시오! 깨어나십시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만사 다 좋다, 좋은 세상이다 하는 사람입니다. 미움이 있고 다리가 무너지고 전쟁이 있을지라도 그런 상황과는 상관없이 좋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 사람들이지요. 미친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도달한 사람, 경지에 다다른 사람, 신비가 들입니다. 영성가들입니다.
다른 한 부류는 만사가 마땅치 않다, 세상이 못마땅하다는 사람들입니다. 마땅치 못하니 늘상 무엇을 하거나 어떻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입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어서 그때 가서 살려는 사람들입니다. 얼핏 보면 수지 맞는 인생을 사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이런 사람은 언제나 만족이 없고 불평과 불만 속에서 사는, 늘상 뭔가 부족해서 그것을 채우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부족한 적자 인생을 살게 됩니다.
만들어서 좋은 세상을 살겠다는 것은 잘 들여다보면 결국은 한 번도 좋은 세상을 살 수 없는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늘상 고쳐야 할 것이 있고 바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비가 오는 것도 못마땅하고 내일 해가 뜨는 것도 걸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 일만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도 그렇게 봅니다. 그냥 좋게 보아 주는 것이 없습니다. 그 사람은 다 좋은데 뭐가 나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손은 따뜻해서 좋은데 심장 고동 소리가 너무 커서 싫다는 식이지요. 세상을 좋게 만들어서 그때 가서 좋은 세상을 살려는 사람은, 영성에서는 잠자는 사람 내지는 착각 속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영성은 깨어남입니다. 깨어난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 거듭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깨어난 사람들의 특징 중의 하나는 남녀노소 막론하고 세상은 좋다는 것입니다. \'좋은 세상이다. 보기에 참 좋다\'란 말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좋으냐고 물으면 대답은 하나입니다. \'어떻게 내가 좋지 않을 수 있느냐. 나는 그 무엇 때문이 아니라 그냥 좋다. 세상이 소란하고 엉망진창일지라도 나의 좋음은 그런 바깥 것에 따라 변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나의 이 평안과 좋음은 원래부터 있었고 그래서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빼앗아 갈 수 없다.\' 이것입니다.
나는 그 무엇 때문이 아니라 그냥 좋다는 이 사실의 영성 세계가 열리는 것보다 더 큰 은총이 있을까 합니다. 이런 4차원(?)의 세계, 영성 세계에 있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기도가 있습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닌 당신의 필요대로 해 달라는 기도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드디어 믿음 세계에 들어간 것입니다. 필요한 것은 다 되어 있는 법이거든요.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서 그렇지요.
또 그런 원함에 따라 사는 세계를 넘어 필요에 따라 사는 삶을 터득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경지가 있습니다. \'나는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다 이루어 놓은 완성의 세계, 좋은 세상을 목표가 아닌 출발점으로 시작해서 사는 삶이야말로 바로 깬 사람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깨어나십시오. 세상은 한 번도 좋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원래부터 지금까지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었습니다. 잠자느라고 내가 못 본 것뿐이지요.
깨어나십시오! 깨어나 보면 삶은 온통 신비요, 은총이요, 사랑 자체입니다. 영성은 별것이 아닙니다. 일체를 좋게 보고 좋게 말하는 찬양하는 삶을 지금 여기서 살 수 있는 창조 원리를 깨닫는 것이 영성입니다.
영성은 깨어남입니다. 영성은 최고질의 삶을 살게 하는 삶의 원리입니다. 여기 있지만 여기 아닌 데 있는 사람, 그래서 여기 없지만 언제나 여기 있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
봄이 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들도 봄(見)맞이 하러 봄(春)을 찾아 나오게 되겠지요.자연의 온 피조물들이 출연을 학수 고대하며 기다렸던 지금 여기를 사는 하늘 사람(眞人)으로서의 탄생을 맛보았던 우리 모두, 지금은 어디 계신지요.
온 세상은 대립과 갈등, 심지어는 반목이 힘인 줄 알고 그 힘을 기르는 데 정열을 다 바치고 있습니다. 지구가 한 공동체로 함께 사는 삶의 모형에서 멀어져서 강한 나라는 더 강한 나라로, 부자는 더 부자로 만드는 국제 질서를 새로운 질서라고 선전하는 술수들이 난무하고 공해로 인해 물의 오염, 공기의 타락.......
행복을 추구한다고 하면서도 왜 사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말 내가 누구며 무엇이 아닌지를 모른 채 환상과 착각, 거짓과 두려움 속에서 오늘도 속도에 뒤쳐지지나 않을까 하는 조급함과 신음, 탄식으로 잠자리에 드는 이 그 얼마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나와 그대들을 택하시고 불러서 이 좋음의 세계를 보여 주시고 이런 세상의 한복판에 파송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화를 다스려 가고 싫음이 없으며, 정죄와 열등감을 넘어 이곳만이 아닌 여기를 사는,
그래서 지금 여기를 마음껏 누리며 사는 사람들, 세상 중력에 더 이상 이끌리지 않고
하늘의 영적 기운을 받아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그리스도인. 크리스찬 라이프 스타일(Christian Life Style), 그렇습니다. 영성은 삶의 태도입니다. 세상 풍속을 쫓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거룩한 산 제물로 써 주십시오\" 하고 자신을 내놓는 삶의 태도, 이것이 진정한 영적 예배요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형이 아닐런지요. 우리 주님은 일찍이 이런 삶을 보여 주시고 따라오라는 길을 내어 주신 것이라고 나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잘 듣고 잘 보고 서로 소리내어 알리며 마음껏 합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이 더 이상 이상(理想)이 아니고 지금 여기서 누구든지 실현할 수 있는 가능한 삶의 원리임을 실제로 우리가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이 순간도 깨어나지 못해 고통 속에서 사는 이웃들에게 이 살림의 소식을, 하늘의 기별을 전하시면 어떨는지요.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미래의 기대로부터 자유와 해방의 춤을 추고 기쁨의 노래 부르며 삶을 예술로서 사는 이 좋음의 세계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한 사람이라도 더 이 세계를 경험케 하는 일이야말로 진정 우리가 함께 해 나갈 일이라 생각합니다. 자, 함께 손잡고 마음 모아 해 나아갑시다.
향기 있는 사람
결혼한 사람들에게 상대를 배우자로 택하게 된 동기를 물어보면 대개는 그 사람이
자상하고 친절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향기 있는 사람, 기억에 오래 머물러 있는 사람은 화려한 옷에 진한 화장으로 치장한 얼굴이 아니라, 소박한 모습에서 배어 나오는 친절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입니다.
-생명의 삶 편집 ‘향기 있는 사람’ 중에서- 겉모습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즘
그렇기에 더욱 진실한 마음이 그리워집니다. 먼저 마음을 열고 손을 내밀어 보세요.
당신의 마음속 향기가 퍼져나가 세상을 아름답게 할 것입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주님의 향기를 전달하실 것입니다.
고통에 대하여
너희 고통의 대부분은 너희 스스로 고른 것이다. 그것은 너희 속의 의사가 너희 병든 몸을 고치는 쓴 약이다. 그러므로 그 의사를 믿어라. 그리고 그의 약을 잠잠히 가라앉은 맘으로 마시라. 그의 손이 비록 맵고 사정은 없어도 그것은 저 \'뵈지 않은 이\'의 부드러운 손의 이끎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져다 주는 잔은 비록 너희 입술을 태우지만 그것은 저 \'토기장이\'가 자기의 거룩한 문물로 적신 흙으로 된 것이다. (칼린 지부란 짓고 함석헌 옮김)
젊은이와 늙은이 \"젊은이로 남는 것과 늙은이로 되는 것, 어느 것이 더 나을까요?\"
\"늙는다는 것은 뒤에 더 많은 허물을 남기고 앞에 더 적은 시간을 두는 것이다. 젊음이란 그 반대인데, 어느 쪽이 더 낫겠는지를 그대들이 판단하라.\"
\'우리가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것\' 신은 절대 우리에게 이 인생을 받아들일 것인지 미리 묻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을 선택할 수 없으며, 그냥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가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 뿐이다.- 긍정적으로 사는 즐거움 (소노 아야코) 중에서 - 우리는 무엇이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와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입니다
마치 꽃을 키우듯 사랑을 시작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지키기란 쉽지 않습니다.
마치 꽃을 키우듯 물과 거름을 주고 햇빛을 쏘여야 합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말이 있듯이 사랑은 당신이 마음을 쏟은 만큼 깊어집니다. 아무 노력도 없이 사랑이 자라기만을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입니다. 사랑은 정직하기 때문입니다.- 문미화의《사랑단상》중에서 -
사랑도 마치 꽃과 같습니다.물도 주고 거름도 잘 주어야 잘 자라납니다. 하루만 물을 안줘도 윤기를 잃고 시들해집니다.어제만큼 오늘도 잘해 주고, 오늘만큼 내일도 잘 해줘야 늘 싱싱하게 자라납니다. 사람도 그러합니다
깜짝!자,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최신 의료시설을 갖춘 병원이 점점 늘어나는 것이 좋습니까?아니면 병원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좋습니까?의사나 의사를 가족으로 둔 사람이 아니라면 병원은 점점 줄어드는 것이 좋습니다. 병원이 줄어든다는 것은 아픈 사람이 줄어든다는 뜻이고 아픈 사람이 줄어든다는 것은 살기가 좋아진다는 뜻 아닙니까? 자, 한번 다시 생각해 보세요. 최고의 학문을 가르치는 학교가 점점 늘어나는 것이 좋습니까?아니면 학교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 좋습니까?선생님이나 교수를 해서 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학교는 점점 줄어드는 것이 좋습니다. 학교가 줄어든다는 것은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줄어든다는 뜻이고 배우는 사람이 줄어든다는 것은 안 배워도 먹고 살 만하다는 뜻 아닙니까? 배우지 않으면 먹고 살 방법이 없으니까 죽어라 배우는 것입니다.
-최신 의료시설을 갖춘 ooo병원 개원으로 한층 더 살기 좋아졌습니다.- 하고 쓴 어느 병원의 현수막 내용도 있습니다.
길은\"문자(文字)는 말(言語)에서 나왔고말은 침묵(沈默)에서 나온다. \"돌아감이 길의 움직임(反者道之動)\"이라고 했다(노자)길은, 그것이 참된 길이라면,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근원은, 그것을 색깔로 말하면 희다(素)고 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무식하기를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오직 사랑만이 덕을 세우나니\"(고린도 전서 8:1)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깨달아서 하나님을 더 잘 섬기면 얼마나 좋을까!
아아, 이 가인의 후손인 우리는 애초부터 구제불능! 쥐꼬리만한 배움과 눈꼽 만큼의 깨달음만 있어도 당장에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목에 기부스를 해버리는구나. 어찌할꼬 이 교만을, 이 아는 체를, 이 잘난 나를 어찌할꼬! 아버지! 많이 배우고도 겸손할 수는 정녕 없는가요? 그렇다면 저는 차라리 좀 못 배우고, 못 깨닫고, 좀 느리더라도 낮고 좁은 그 길! 겸손의 길을 택하겠나이다. 사람들이 가기 싫어하고 무시하고 우습게 여기는 그 길을
주님만 바라보며 걷겠나이다. 선물을 주기 좋아하는 사람 선물을 주기 좋아하는 사람이 되세요 선물이라고 하면 먼저 가치를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은 있지만 하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치 있고 귀한 선물도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조금만 이웃을 배려한다면 귀한 선물을 받은 기쁨보다 더 큰 즐거움과 행복을 줄 수 있습니다. 미소의 선물을 주세요. 만나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보인다면 요즘 같이 각박한 세상에서 더없이 값진 선물이 될 것입니다 미소를 받은 사람은 하루가 즐거울 것입니다. 인사의 선물을 하세요. 이웃도 모르고 사는 세상입니다. 잘 알지는 모르지만 안면이 있다면 가벼운 목례를 한다면 받는 사람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며 그 사람은 자기가 높임을 받아 마음이 기쁘고 다음에 볼 때는 먼저 인사를 할 것입니다. 휴대전화가 모두 있습니다. 짧은 문자 메세지이지만 감사의 선물, 격려의 선물, 유머의 선물을 하면 받은 사람이 짧은 시간이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샘솟을 것입니다 가끔은 이 메일로 사랑의 카드를 보내 준다면 그 사람도 나를 사랑할 것입니다.
칭찬의 선물을 주세요. 말이 천냥 빚을 갚는다고 했습니다 칭찬의 말은 그 사람으로 삶에 대한 의지가 생기도록 합니다 그 칭찬의 선물을 받은 사람이 성공을 한다면 칭찬의 선물을 평생 잊지 않을 것입니다.
선물을 많이 주세요. 친구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좋은 친구는 위급할 때 형제 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을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
하늘 같은 사람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 사람한테서 하늘 냄새를 맡아 본적 있는가. 스스로 하늘 냄새를 지닌 사람만이 그런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 류시화의《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다》중에서 -하늘은 늘상 맑고, 넓고, 열린 마음이다. 어떠한 구름조차 방해해도 언제나 그렇다. 그것은 우리가 간직하지 못한 스스로를
비춰 볼 마음의 거울을 지닌 탓은 아닐까. 딱 하루만이라도 하늘같이 살아보자.
어느 누구나 조용히 붙잡고 끝없이 이야기 나누고픈 하늘의 정감을 지녀보자.
마음은 구름의 산책이고, 행동은 태양의 열정이며, 생각은 별의 반짝임처럼 말이다.
시리도록 파아란 하늘에 하아얀 구름이 흐르지만 종일 머물지는 못하듯이
티 없는 맑은 하늘 보다 하얀 구름이 피어 날 때 그 푸르름이 살아나고 아름다움이 느껴지며하늘 같은 사람을 만나 딱 하루 만이라도 구름도 되어 보고 태양도 되어 보고
밤 하늘에 달과 별이 되어 볼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은 부질없이 스쳐가는 바람에 지나지 않겠지요. 일상에서 이따금 쓸쓸함에 생겨나는 그리움에 대한 흔적은 남질 않지만
하늘같은 사람이라면 마음에 남을 것 같은 바람이 생겨납니다.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글 나는 정직하자고 다짐하면서 꾀를 내도 합니다.
나는 떠난다고 하면서 돌아와 있고 다시 떠날 생각을 합니다. 나는 참아야 한다고 하면서 화를 내고 시원해 합니다. 나는 눈물을 흘리다가 우스운 일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나는 외로울수록 바쁜 척합니다. 나는 같이 가자고 하면 혼자 있고 싶고,
혼자 있으라 하면 같이 가고 싶어집니다.
나는 봄에는 봄이 좋다 하고 가을에는 가을이 좋다 합니다.
나는 남에게는 쉬는 것이 좋다고 말하면서 계속 일만 합니다.
나는 희망을 품으면서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나는 벗어나고 싶어하면서 소속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변화를 좋아하지만 안정도 좋아합니다.
나는 절약하자고 하지만 낭비할 때도 있습니다.
나는 약속을 하고나서 지키고 싶지 않아 핑계를 찾기도 합니다.
나는 남의 성공에 박수를 치지만 속으로는 질투도 합니다.
나는 실패도 도움이 된다고 말하지만 내가 실패하는 것은 두렵습니다.
나는 너그러운 척하지만 까다롭습니다.
나는 감사의 인사를 하지만 불평도 털어놓고 싶습니다.
나는 사람들 만나기를 좋아하지만 두렵기도 합니다.
나는 사랑한다는 말하지만 미워할 때도 있습니다.
흔들리고 괴로워하면서 오늘은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다음이 있습니다. 그 내일을 품고 오늘은 이렇게 청개구리로 삽니다..
삶은 선물입니다.
선물은 받는 것입니다.반갑게 받는 것입니다.그리고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열어 보는 것입니다.열어보면서 느끼는 설레임열어보고 나서 갖는 풍요로움
삶은 아름다움입니다.
봄은 봄으로 아름답고가을은 가을로 아름답습니다.
기쁨은 기쁨대로 아름답고 슬픔은 슬픔대로 아름답습니다.
근심걱정은 근심걱정대로 아름답고 고마움은 고마움대로 아름답습니다.
성공은 성공대로 아름답고 실패는 실패대로 아름답습니다.
삶을 아름다움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나누는 그런 사람만이 내는 향기가 있습니다.
사람됨의 향기 나됨의 향기
삶은 풍요로움입니다.
풍요롭다는 것은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족하다는 것은 나의 생각입니다.
생각을 넘어서 보면 다 있습니다. 원하는 대로가 아닌 필요한 만큼 다 되어 있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필요대로 하옵소서
삶은 아주 아름답게 다 되어 있습니다. 아주 아름답게 말입니다.
삶은 헌신입니다.
헌신은 다 주는 것입니다. 달라기 전에 스스로 주는 것입니다.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준비해서 하나하나 다 주는 것입니다.
흙에게서 받은 것은 흙에게로 바람에게서 받은 것은 바람에게로
물에게서 받은 것은 물에게로 불에게서 받은 것은 불에게로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은 자식에게로 선생님에게서 받은 것은 제자에게로 선배에게서 받은 것은 후배에게로 사회에게서 받은 것은 사회에게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은 하나님께로 그동안 소질과 재능인 나의 하늘씨앗을 심어 싹을 띄워 키우고 자라게 하여 큰 가지로 그늘이 되고 꽃을 피워 향기를 내고 열매를 맺어 먹이가 되고 나무능절로 성전의 기둥이 되고 이렇게 나의 나됨을 알고 느끼고 살게 해준 고마움과 감사함을 정성스럽게 드리우는 발길과 손길 삶은 이렇게 결국은 다 주고 가는 것입니다.
삶은 헌신입니다.
삶으로의 예배 우리는 지금 예배중
삶은 향기입니다.
향기, 향의 기운은 꽃의 만발에서 오는 삶의 절정에너지입니다.
삶은 꽃으로 피어나야 합니다. 삶은 향기로 피어올라야 합니다.
향기는 모습이 없습니다. 흔적이 없습니다. 받는 이로 하여금 행복하게 하고 미소 짓게 하고 생기 있게 하고는 아무런 자취 없이 사라지는 향기는 드리움입니다. 아무런 자취나 흔적 없이 다 주고 사라지는 헌신 헌신은 삶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천박한 영성과 진실한 영성 가끔 영성을 주장하면서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을 지나치게 나누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분들은 대개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보다 어디에 가든지 사람을 나눕니다. 그런 분들은 주님을 온전히 따라가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잘 나눠야 되는 줄 압니다.
그래서 교회와 가정을 나눕니다. 가정을 망가지게 해야 십자가를 잘 지는 것인 줄 압니다. 그렇게 나눔을 통해 나의 영성을 증명하려는 태도는 천박한 영성에서 생기는 태도입니다. 진짜 깊은 영성은 창녀 마리아에게도 손을 내밀었던 예수님의 영성을 따르는 영성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영혼은 무조건 깨끗하고 육신은 무조건 더럽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건전한 육신적인 삶은 영혼의 건강을 지탱하게 만들어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천박한 영성을 분별하여 그런 삶을 피해야 합니다. 천박한 영성이 무엇입니까? \"믿습니다\"고 하는 믿음이 지나쳐 병원에 가지 않고 병을 키우는 것은 천박한 영성입니다. 교회생활은 재미있게 하면서 가정에서는 남편과 자녀를 쫄쫄 굶기는 것은 천박한 영성입니다. 항상 산에 들어가 기도해야 기도발이 먹히고 기도하는 것 같다는 것은 천박한 영성입니다. 주일에 \'운전기사 일하게 하는 죄\'를 짓지 않게 버스를 안타겠다는 것은 천박한 영성입니다. 명절에 전혀 가족들과 어울리지 않는 방식으로 내 신앙을 증명하는 것은 천박한 영성입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가족도 사랑하고 세상 사람들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남편을 외면하고 교회 생활 잘하지 말고 남편도 챙기면서 교회생활을 잘 하려고 해야 합니다. 성경은 “피곤해도 남편이 요구하면 응해주고, 아내가 요구하면 응해주라”고 말합니다(고전 7:4).
바다의 아름다움을 보려면 이 바다의 엄숙함과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다른 것을 희생해야 한다. 쓸쓸함이라든가, 불편이라든가, 세찬 바람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 긍정적으로 사는 즐거움 (소노 아야코) 중에서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는가? 귀하고 값진 것일수록 비싼 댓가를 치러야 한다. \'십자가\'는 \'당신\'을 사랑한 사랑의 증거가 아닌가.
나의 자존심 선언
나는 나다.온 세상 천지에 나와 똑같은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부분이 나와 비슷한 사람은 있겠으나 나와 완전히 똑같은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나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은 나 혼자서 하기로 선택한 것이므로 진정 나의 것이다.
나는 나에 관한 모든 것을 소유한다. - 내 몸과 몸이 하는 모든 것; 내 정신과 그 속에 담겨진 모든 생각과 사상들; 내 눈과 그 눈들이 보는 모든 형상들; 노여움이나 기쁨, 좌절, 사랑, 실망, 흥분 그 어떤 것이나 내가 느끼는 감정들; 내 입과 거기서 나오는 공손하거나, 달콤하거나 거칠거나, 옳거나 그른 모든 말들; 그리고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나의 모든 행위들.
나는 나의 환상과 꿈과 희망과 공포심을 소유한다.
나는 나의 모든 업적과 성공, 실패와 잘못을 소유한다.
나는 나 자신의 모든 것을 소유하기 때문에 나 자신과 친밀하게 사귈 수 있다. 그렇게 하여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고, 나의 모든 면과 친해질 수 있다. 그렇게 해야만 다음으로 나는 나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일을 찾아 실현할 수 있다.
내 자신에게는 나를 궁금하게 하는 면이 있고 또 있는지도 몰랐던 면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을 친절하고 사랑스럽게 대하는 한 나는 용감스럽고 희망차게 나를 궁금하게 하는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고 내 자신에 대해서도 좀더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보이고 들리든, 무엇을 말하고 행동하든, 또 주어진 순간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건 그 모든 것은 나다. 이것은 확실하며 내가 그 순간 어디 있느냐를 상징한다.
나중에 나의 모습과 목소리와 말과 행동과 생각과 감정을 살펴보면 어떤 부분들은 알맞지 않다. 나는 그 알맞지 않은 부분을 버리고 알맞은 것만 간직하며, 버린 부분 대신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나는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할 수 있다. 나는 생존하고 남과 가깝게 지내고 생산적인 사람이 될 수 있고, 내 둘레의 세상 사람들과 일들을 이해할 수 있는 도구들을 가지고 있다.
나는 나의 주인이며 나는 나를 조절할 수 있다. 나는 나이며 나는 괜찮다.
- 버지니아 사티어의 \"삶의 목표\"중에서 -
☆ 시, 노래, 울림 ☆
\"우리가 어느 별에서\"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애타게 그리워하는가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했기에 이토록 아름답게 사랑할 수 있나
꽃은 시들고 해마저 지는데 저문 바닷가에 홀로 어두움 밝히는 그대
해뜨기 전에 새벽을 열지니
우리가 어느 별에서 헤어졌기에 이토록 밤마다 별빛으로 빛나는가
우리가 어느 별에서 잠들었기에 이토록 흔들어 새벽을 깨우는가
- 정호승 詩. 노래 안치환 -
나의 자존심 선언
나는 나다. 온 세상 천지에 나와 똑같은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부분이 나와 비슷한 사람은 있겠으나 나와 완전히 똑같은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나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은 나 혼자서 하기로 선택한 것이므로 진정 나의 것이다.
나는 나에 관한 모든 것을 소유한다. - 내 몸과 몸이 하는 모든 것; 내 정신과 그 속에 담겨진 모든 생각과 사상들; 내 눈과 그 눈들이 보는 모든 형상들; 노여움이나 기쁨, 좌절, 사랑, 실망, 흥분 그 어떤 것이나 내가 느끼는 감정들; 내 입과 거기서 나오는 공손하거나, 달콤하거나 거칠거나, 옳거나 그른 모든 말들; 그리고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나의 모든 행위들.나는 나의 환상과 꿈과 희망과 공포심을 소유한다.
나는 나의 모든 업적과 성공, 실패와 잘못을 소유한다.
나는 나 자신의 모든 것을 소유하기 때문에 나 자신과 친밀하게 사귈 수 있다. 그렇게 하여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고, 나의 모든 면과 친해질 수 있다. 그렇게 해야만 다음으로 나는 나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일을 찾아 실현할 수 있다. 내 자신에게는 나를 궁금하게 하는 면이 있고 또 있는지도 몰랐던 면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을 친절하고 사랑스럽게 대하는 한 나는 용감스럽고 희망차게 나를 궁금하게 하는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고 내 자신에 대해서도 좀더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보이고 들리든, 무엇을 말하고 행동하든, 또 주어진 순간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건 그 모든 것은 나다. 이것은 확실하며 내가 그 순간 어디 있느냐를 상징한다.
나중에 나의 모습과 목소리와 말과 행동과 생각과 감정을 살펴보면 어떤 부분들은 알맞지 않다. 나는 그 알맞지 않은 부분을 버리고 알맞은 것만 간직하며, 버린 부분 대신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나는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할 수 있다. 나는 생존하고 남과 가깝게 지내고 생산적인 사람이 될 수 있고, 내 둘레의 세상 사람들과 일들을 이해할 수 있는 도구들을 가지고 있다.
나는 나의 주인이며 나는 나를 조절할 수 있다.나는 나이며 나는 괜찮다.
- 버지니아 사티어의 \"삶의 목표\"중에서 -
언제나 그분이 함께 하심을 믿는다. 종종 아니 자주 그 분의 현존을 잊고 지내기도 하나, 그 분의 현존이 나의 기억이나 자각의 흐름 따라 함께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이 아니니, 내가 의식할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 언제나 그분이 함께 하심을 믿는다.
한때는 그분의 존재성을 확인할 방도가 없다고 현존을 불신하던 시절에 의심과 방황, 추락, 나약함, 이기주의, 독단 등의 중독에 빠져 내 스스로를 방치한 채 나를 흔들리는 세상 속으로 무작정 던져버렸던 때가 있었다. 우리가 사는 차원과 확인방식의 잣대로 이미 차원을 초월해 계신 그분을 확인하고 경험하기를 원했었기에…. 그런데, 어디 그분이 보는 것을 통해, 듣는 것을 통해, 만지는 것을 통해 경험될 분이던가?! 그분의 현존 방식은 \'이미 그리고 언제나\' 초차원적인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해 오셨는데 말이다.
그분에 대한 앎은 갈수록 희미한 앎으로 확대된다. 자꾸 알려하면 할수록……. 그래, 난 그분을 모른다. 갈수록 책제목처럼 \'오직 모를 뿐\'이란 것만이 알아진다. 째즈 음악은 듣는 게 아니라, 느껴야 하는 거라고 누군가 그랬지. 그래, 난 그분을 느낀다. 그리고 믿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오감이 맞닿아 열리는 느낌의 통로가 아닌, 감각차원도 초월한 - 순한 믿음에 근거한 - 그 무엇이니, 언어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분 안에 들어 온 나, 내 안에 들어오신 그분!- 얼마나 아름다운 접속이며, 조화로운 경험이던가! 한참을 이 경이롭고 아름다운 느낌 속에, 현상 속에 깊게 묻혀 본다. 그것은 끝없는 기쁨의 침묵이며, 소리 없는 노래이며, 움직임 없는 춤이다.
그리고, 다시 떠오름 내가 그분이 되어 사는 삶이 어찌 귀하지 않겠는가? 보는 눈길, 닿는 손길, 울리는 소리, 끌어안는 가슴, 가는 걸음걸음이 환희요 감사다. 가볍고 자유롭고 충만한 기쁨… 그리고 귀한 체험.
그분이 나를 사시니, 내가 힘겨워 할 일이 없다. 어딜 가도 혼자가 아니며, 든든하게 따뜻하게 날 지키시며 언제나 동행하시는 그분. 우리가 하나로 같이 맞이하는 일상이 그저 아름답고 복되구나.
다만,
′내가 행하나, 참 나는 믿음 속에 멈춤이며,
내가 말하나, 참 나는 만족 속에 침묵이며,
내가 커가나, 참 나는 완전 속에 이룸이며,
내가 원하나, 참 나는 풍요 속에 충만이다.
″내가 슬프나, 참 나는 환희 속에 기쁨이며,
내가 매이나, 참 나는 텅 빈 자유로움이며,
내가 싸우나, 참 나는 사랑 속에 평화이다.
내가 참 나로 거듭나 살아가는 무(無)의 향기로움!
우리들의 영혼의 부모
기쁨과 슬픔은 결코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우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우리의 심장이 기뻐 용솟음칠 때,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는 친구를 아쉬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슬픔으로 가득차 있을 때,
진정한 우정이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쁨은 슬픔 속에, 그리고 슬픔은 기쁨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온갖 노력을 기울여 슬픔을 피하려고만 한다면,
결코 우리는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희열을 의심하면, 고통 또한 우리에게 미치치 못합니다.
기쁨과 슬픔은 우리의 영적 성장을 도와주는 부모입니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 적합하다는 것,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는 것이 영적인 지혜입니다.
피하려고만 하고 넘어서려고만 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그렇게 도망만 다녀야할 것입니다.
맞아들이고, 바라보면 우리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기쁨도 슬픔도.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는 나,
영생이요, 부활인 여기에 있는 나를 만나는 것도
그렇게 베풀어진 모든 것을 통해 가능한 것이지요.
기쁨도 슬픔도 그것입니다.
기쁨과 슬픔, 희로애락을 알고 느끼며 사는 것, 그것이 행복입니다.
그것이 사는 것입니다.
전도서 3장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이 인생에게 주신 짐이며, 때입니다.
참된 우정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은 참사랑이 아니다. 참사랑이라면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은 그만큼 더 가까워져야 할 것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은 참된 우정이 아니다. 참된 우정이라면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은
그만큼 더 가까워져야 할 것이다. - 최인호의 수상록 《 문장 》중에서 -
참된 친구는 마음의 등불입니다.그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우정이라는
기름을 수시로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잠시 소홀해 꺼질지 모르는 등불을 지키려
이유나 변명 같은 이물질이 없어야 합니다. 참된 우정이라는 기름은 관심으로 일관된 순수하고 성실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보물을 주고, 형제는 의미를 주는데
친구는 보물도 주고 의미도 준답니다. 친구는 자신의 거울일테죠. 참된 친구 알짜 하나가 열 부럽지 않다고 했습니다. 참된 우정은 비교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이정도 해주니까 이렇게 해줘 ...참된 우정은 조건을 따져서도 안됩니다. 이렇게 해주면 그렇게 해줄께 ....참된 우정은 미래지향적이어야 합니다.함께 꿈꾸고, 함께 나아가야 할 참된 우정이
있기에 더욱 아름다운 오늘입니다. ....
가까이 다가서면 설 수록 진해지는 게 우정입니다.멀어지면 멀어질 수록 우정도 멀어집니다.그래서 멀리있는 친척도 이웃만 못하다는 말이 나왔습니다.가능하면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으로 생각과 마음을나누어야 우정도 좋은 친구도 오래 가는 법입니다.
신뢰와 믿음으로 뭉쳐진 친구 .... 정말 남부럽지 않지요.
참된 우정은 거창하지 않은 소박한 마음에서 시작되지요
그냥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가까이서 생각해주고
친구가 가는 길에 마음으로 잘 되길 빌어주고 ....
그리고 안좋은 일이나 좋은 일에 내일 같이 마음을 나누고
먹고 싶거나 어디 가고 싶구 우울해서 불러내도 언제 어디서
나타나고 힘을 주는 친구 ..그런 친구가 있다는 건 행복이지요.
우정이라는 기름 .... 마음의 등불에 열심히 공급하렵니다.
지금 이 시간
지금 이 시간이 가장 중요한 시간입니다.
지금 이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지금 이 시간이 가장 기쁜 시간입니다.
지금 이 시간이 가장 보람된 시간입니다.
지금 이 시간 자족(自足)하는 마음만 있다면
지금 이 시간을 생애 최고의 시간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다음에 행복할꺼야. 다음에 즐길꺼야
다음에 웃을꺼야. 다음에... 다음에... 하고 미루지 마십시오.
다음이란 영원히 오지 않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놓치지 말고 이 시간을 마음껏 누리십시오
잘 가는 사람은
나무 팔러 왔다가 매만 맞고 돌아가는 늙은이.
세상에 도무지 한 일도 없고 이루어 놓은 일도 없다.
모든 때에 모든 사람을 섬기기만 했거늘, 세상 천지 어디에 그의 명예나 빛을 낼 것인가? 그러나 \"잘 가는 사람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이현주 (목사)
강력한 생각
강력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란
강력한 의식의 흐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강력한 의식의 흐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란
강력한 의식의 흐름을 허용한 사람입니다.
강력한 의식의 흐름을 허용한 사람이란
모든 것을 포용하고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소유자를 말합니다.
<나를 통하여 이르는 자유> 게이트지음 리더스넷刊
마음 공부는 실존적인 자신과의 만남의 시간입니다.
자신의 의식과 영혼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보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얻은 지혜를 자신의 몸과 마음에 베푸는 시간이 온 것입니다.
개여울
당신은 무슨 일로그리합니까?홀로이 개여울에 주저 앉아서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이 있었겠지요.날마다 개여울에나와 앉아서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곧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김소월)
그 분! 그분하고 떠올리라고 하면 나는 몇 분이 떠오른다. 나는 그분들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고 떨린다. 그 중 한 분인 그분은 나의 삶에서 중요한 획을 긋도록 도와주셨다. 내가 삶 속에서 하루하루를 의미 없는 일과로 채워가며, 스스로를 생활의 권태 속으로 밀어 넣고 있을 때, 그 분은 신뢰에 찬 태도로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셨으며, 갈곳 몰라 어려워하는 내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 지지를 보내주셨다.
보이는 모습보다 보여지는 내면의 모습을 가꾸도록 일깨워 주셨고, 일상을 수련의 체험으로 여기도록 훈련시켜 주셨다. 내가 이미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달라진 생활 모습, 감정, 사고, 인식체계를 갖추게 되었을 때 성장하는 아이를 보는 듯한 기쁨으로 내 존재를 기뻐해 주셨다. 많은 다른 이들과의 인연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셨으며, 지금도 내 곁에서 소리 없는 질책, 사랑, 든든한 격려를 보내고 계신다. 행여 내가 지금의 이 상태에서 게으름을 부리며 일상 속의 예전 모습으로 되돌아가려 할 때, 그 분은 놓치지 않으시고 나의 나태를 지적해 주신다. 내 몸, 마음, 혼 구석구석 그분의 자취가 머물지 않은 곳이 없다.
아이가 영양식을 먹고 자라듯 나 또한 그 분이 기꺼이 내주신 보석 같은 삶, 사고, 지식들을 받아들이고 성장해 나가고 있다. 그와 나눈 체험들이 내 삶 속으로 스며들어와 그분으로 인해 달라진 나! 세상 속에서 당당한 빛으로서의 내 존재를 확인한다.
또 다른 그 분, 그 분은 어디에나 계시고 언제든지 계셔서 내가 그분 모습을 차마 뵙기 어려워 숨고 싶을 때에도 홀연히 계시는 분이다. 내가 내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고 방황할 때, 질투와 오만, 편견에 사로잡혀 나를 부정할 때에도 그분은 잠잠히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 나는 그런 그 분의 존재를 없는 듯 무시하며 세상 속 삶을 보퉁이 들고 방황하는 나그네처럼 전전하고 있었다.
내가 두렵고 절망스러울 때, 그래서 그분을 염치없이 애타게 부를 때 그 분은 내게 사랑과 위로의 눈물을 주신다. 그저 아무 말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시고, 마음의 위로와 평안, 안온, 긍정의 씨앗을 심어 주신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그 분의 존재는 뒤로 한 채 환하고 기쁜 순간에는 나를 자축하고 있다. 모두 내가 그분 안에 있는데도 그 모두를 내 공으로 돌리며 으스대고 있다.
또 많은 분들이 계시지만, 다른 한 분을 꼽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그 분을 뽑겠다. 그 분에게서 나는 더도 말고, 덜도 아닌 내 자신의 모습을 배웠다. 내가 흔들리고 지나치게 나를 비하할 때 그 내면에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 결여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을 대할 때도 눈치보게 되고, 자격지심이 생겨서 울적해지곤 한다. 특히 남과 비교하는 마음이 들 때면 한없이 열등감이 들고, 초라해진다.
그러나 그 분과 함께 있으면 나는 내 원래의 모습을 찾게 된다. 그 분은 나를 누구누구인체 하지 않는, 햇살의 모습으로 만나도록 도와주신다. 그분은 나 자신도 속으로 감추어져 있어서 보이지 않는 진정한 나의 모습을 만나도록 도와주신다. 난 그분께 감사드리고 싶다. 이 세상, 한 구석에서 살아가는 햇살을 세상 속의 환한 존재로 거듭나도록 도와주셔서…….
나의 그분들을 나는 존경합니다. 나의 그분들을 나는 사랑합니다.
나의 그분들을 나는 흠모합니다. 모두 내 안에 계시는 그분, 그 안에 있는 나. 하나되는 나와 그분…. 제가 찾아 가야할 궁극점입니다. -햇살-
다시 생각하는 글
모든 것은 영혼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받아들인 것은 감정으로 바꾸어야 한다.
마음속에 담은 것을 도자기처럼
- 사막의 도시 -
◆ 선물할 때는 인색하게 굴지 말자. 물건은 아끼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것에 인색하지 말라는 뜻이다. 선물은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외로움을 이어주는 다리다.
◆ 진리란 어느 날 문득 깨닫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노력했던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시각적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 바람과 모래와 별들 -
정원의<맑고 깊은 영성의 세계를 향하여>
책을 읽으면서 한 단원을 한 줄로 요약하였습니다.
1.진정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2.주님께서 그 길을 인도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3.주님께서 물으십니다.-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하여 즐거워하느냐?
4.하나님이 살아있는 것이 확실하냐? 그렇다면 너는 절망하지 말아라.
5.참된 휴식은 모든 것의 배후에 계신 분을 누리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6.근심은 대부분 아무 쓸데가 없거나 오히려 해를 일으킬 뿐입니다.
7.많은 사람들이 화를 내지만, 자신이 왜 화를 내는지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8.자신에 대하여 철저하게 절망한 사람은 오직 주님의 긍휼만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9.그분을 바라볼 때 사랑, 기쁨, 용서, 순결함, 평강의 물결이 멈추지 않고 흘러나옵니다. 10.부드럽고 잔잔하게 아이들을 가르치십시오
11.주님이 우리의 중심입니다.
12.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무든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13.영혼이 깨어나면 주님이 우리 옆에 계신 것이 보입니다.
14.우연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15.처음에는 우리가 주님을 부르고 구하지만, 그 다음에는 주님이 우리를 붙드시고 지배하십니다.
16.주님 외에 만족이 있다면 그는 아직 주님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17.프란시스코는 구걸해온 음식을 먹으면서도 주님의 사랑에 눈물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18.잔느 귀용은 그녀의 믿음 때문에 지하 감옥에서 10년을 보냈습니다.
19.어릴 때는 주님의 복을 받고 싶어하지만, 조금 자라면 그분을 위하여 피흘리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20.복음을 증거 하다가 잡혀서 채찍에 맞은 상처와 흔적은 보석보다 아름다운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21.주님 앞에 엎드려 온 맘을 다하여 목이 터져라 주의 이름을 부르면 천국이 임합니다.22.가장 아름다운 눈물은 주님과 함께 흘리는 눈물입니다.
23.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입니다.24.눈이 열리고 영이 일어나야 비로소 빛과 어두움을 구별하게 됩니다.
25.주님의 평화, 사랑, 향기, 순결함을 맛보면 주님의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쉽게 분별할 수 있게됩니다.
26.영혼이 발전할수록 다른 사람의 마음과 상태를 쉽게 느끼며 상대를 배려해 줍니다.
27.자신의 신앙이 남보다 조금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주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28.주를 바라보지 않는 이들은 끝없는 열등감과 우월감의 세계를 반복하여 돌아다닙니다.29.주님이 비추어 주시는 만큼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 수 있습니다.
30.아름다운 성품은 주님의 역사의 결과이지만, 도한 습관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31.사람의 말은 좌절과 낙심을 가져오지만 주님의 음성은 소망을 줍니다.
32.자신에게 실망하고 절망한 수준만큼 주님은 그에게 임하실 수 있습니다.
33.예배란 설교가 아니고 경배이며, 그 자리에 임재하신 주님께 영광과 존귀를 드리는 것입니다.34.우리는 오직 한 분, 그분의 요구만을 들어야 합니다.
35.부모가 변화되고 생명을 경험하는 만큼 자녀들은 변화될 수 있습니다.
36.우리가 보고 듣는 것은 우리 안에 들어와서 하나의 영적인 힘이 되어 우리에게 동일한 행동을 요구하게 됩니다.
37.주 안에 깊이 거하는 자는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이 세상에 살면서도 심령 속에서 깊은 행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38.영계의 낮은 어두움의 영역에는 불안, 분노, 절망, 미움이 가득하고, 영게의 높은 영역에는 감사와 기쁨과 사랑과 행복감이 가득합니다.
39.사랑 없음에 대하여 괴로워할 때 주님은 마음을 변화시켜주셔서 사랑하게 해 주십니다. 40. 눈이 열리고 영이 조금 자란다면, 무엇이 사소한 것이고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41.진정 목숨 걸어야 하는 소중한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42.어떠한 슬픔도 주님이 한 번 말씀하시면 그 슬픔은 끝이 납니다.
43.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영원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44.우리의 가장 중요한 한가지 일은 주님을 부르며 그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45.어떻게 주님을 알 수 있으며 그분의 뜻을 이루는 지에 대하여 근심해야 합니다.
46.자신의 기분에 너무 얽매이지 마십시오.
47.우리는 주의 말씀대로 아비라, 지도자라 여김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48.문제 해결은 사람 편에서가 아니라 주님 편에서 해결되어야 합니다.
49.잘못되었다고 말하지 말고, 그것보다 더 좋은 것, 바른 것을 이야기하세요.
50.자존심은 버려도 개도 안 물어갑니다
하나님의 퍼즐(puzzle) 맞추기 / 인생은 퍼즐게임과 같다. 조각이 모여, 작품을 이루고부분이 모여, 전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퍼즐 조각 하나 하나를 보면 대책도, 답도, 없어 보인다. 우리의 일상은 퍼즐 조각들을 들고, 우왕좌왕 안절부절이다. 그러나 침착하게, 조각조각을 하나씩 맞추다 보면 마침내, 기막힌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도, 동일하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 도무지 이해도 안 되고, 동의할 수도 없을 때가 너무 많다. 요셉에게 허락하신, 퍼즐조각을 보라. 욥에게 허락하신, 퍼즐조각을 보라. 모세에게 허락하신, 퍼즐조각을 보라. 그들에게서, 무슨 작품을 기대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퍼즐 조각 하나 하나를 보고 있노라면 기가 막히고, 벼랑 끝으로 추락하기 십상이다. \"이걸 가지고, 무엇을 하라 하시는가?\" \"하나님은 도대체 엉망 같아 보이는, 이 조각들로 무엇을 이루시려 하시는가?\" 의아하게 생각되어, 쉽게 퍼즐조각들을 내려놓고 낙망하게 된다. 그러나 인내를 가지고 퍼즐 조각, 하나하나를 맞추어 가다 보면 조금씩 하나님의 오묘하신 경륜의 윤곽이, 드러나게 된다. 희미하지만 높은 산도 보이고, 푸른 들판도 나타나고, 아름다운 집도 형체를 드러내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신바람이 나게 되고.. 무릎을 치게 된다. \"아~ 이래서, 그때 그러셨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전체 그림을 알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조각 그림만 보고 잇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조급하고 초조하고 안절부절 하는 것이다. 퍼즐을 맞추는 그 순간에는, 머리가 터질듯 아프고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하는 듯 했었지만, 하나님의 전체 그림이 나타나는 순간에. 퍼즐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안절부절하던 그 순간들이.. 이해되고 해석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요즈음 어느 때보다도, 힘들고 난해한 퍼즐 맞추기에 한참이다. 도무지 어떻게 맞추어야 하는지, 알 길이 없을 때가 너무 많다. 답이 없고, 대책이 없어 보인다. 하루하루를, 시간 낭비하는 것 같고 인생을 허비하는 것 같아, 여간 마음이 우울한 것이 아니다. 며칠 전 기도하시는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어머니에게, 목회를 못해 \'죄송하다\'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우렁찬 목소리로 나를 위로하며 격려해 주셨다. 아들아! 공사 중이다 공사 중..아직, \'건물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이며 공사 중일 때는, \'모든 것이 어설프고 엉망처럼 보여진다\'는 뜻이다. 나는 순간, 불끈 힘이 솟았다. 그리고 그렇게 나를, 위로하시는 어머니에게, 더욱 더 송구했다. 그렇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퍼즐 맞추기는 어려울수록 축복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공사 중은 오래 걸릴수록 견고하며, 힘들수록 특권이다. 아직 우리의 삶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 우리의 퍼즐 맞추기는, 진행형에 불과하다. 우리는 지금 한참 공사 중인 공사현장에 서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풀 수 없는, 퍼즐 맞추기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퍼즐을 풀고 계심과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공사를 진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잠시 후면 마침내, 근사한 빌딩을 보게 될 것이다. 잠시 후면 마침내, 기막힌 하나님의 걸작품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조각난 상처와, 실패와, 고난과, 절망과, 슬픔과, 고독과, 가난과, 질병들이 모여 결국은, 하나님의 작품을 만들어 낼 것이다. 기억하자. 조각난 퍼즐을 맞추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다. 주님이, 하실 것이다. 우리는 죽어도~ 하나님의 퍼즐을, 맞출 수 없다. 우리 삶의 퍼즐 게임은, 하나님이 종료하실 것이다. 우리는 그저 하루하루를 감사함으로, 영적 수위를 높이는 것이다. 우리는 왜 조급하여 안절 부절인가? 부분만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왜 느긋하시며 평온하신가? 전체를 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금의 모든(나쁜, 좋은) 조각들을 모아, 마침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상처를 영광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나도 사랑받고 싶은데 나도 잘하고 싶었는데..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강을 이룹니다\" 얼마 전 힘겹고 버거운 세상을 등지고 떠난, 어떤 여인의 유서 내용입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어디 한군데 마음 둘 곳은 없고, 누구하나 푸념 섞인 이야기 들어줄 사람 없고 어렵게 내민 손 외면당하며, 쌓여가는 빚 독촉에 차마 울지 못하고 눈망울로 말하는 아이들의 천진함은, 오히려 비수되어 마음을 할퀴고 맙니다. 스쳐가는 사람들 모두가 다, 비아냥거리며 힐끗 힐끗 쳐다보며 혀를 찰 때에는, 차라리 구름 되어 하늘을 날고 싶어집니다. 우리가 당하고 겪어야 하는 고통가운데서 사랑 받지 못하고, 거절당할 때의 고통이, 가장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 이미 상처 난 상처를 후벼 파이는 통증은, 차마 소리도 못 내어 통곡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소망이 있음은 그 상처를 아시는 분이 계시며, 뚫어지게 그 상처를 주목하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야곱의 첫째 부인인 레아의 상처를 싸매어, 태의 문을 여셨던 전능자 하나님 이십니다. 레아는, 남편의 사랑 받지 못하는 상처를 품고 사는 여인이었습니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그 상처도 힘들지만 자신은 버림받을 때, 동생 라헬이 야곱에게 사랑 받을 때의 초라함과 비참함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내가 힘들어서도 힘들지만 남이 형통함을 바라볼 때가, 더 큰 고통인 것은, 보편적인 우리의 죄 성이 아닐까요?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오랜 시간 먹지 않고도 살고, 병들어도 살고, 실직해도 살지만 사랑 받지 못하면, 이미 마음은 죽은 자와 방불합니다. 그만큼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으며 사랑받을 때, 가장 존귀한 인생을 사는 것이지요. 더우기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남편, 아내..)과 산다고 하는 것은 고문이며, 형벌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될 때.. 버림받았다고 생각될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열등생이라고 믿어질 때.. 오히려 하나님을 진지하게 찾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아내 레아가 그러했습니다. 남편인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할수록 레아는 점점, 그리고 조금씩 은혜의 사각지대에서 은혜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라헬이 남편의 사랑을, 흠뻑 받고 있을 그 시간에 레아는 아마도 기도실에서 울고 있었을 것이며 그때 하나님은 레아를 만나 주시고 계셨을 것입니다. 결국 남편의 사랑 받지 못함을 인하여,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수 있었던 레아는 마침내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응답은 남편의 사랑보다 백배나 더 큰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레아의 태를 열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사노라면 때때로 레아와 같은 고통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사랑도, 인정도, 못 받는다고 느껴지며, 나 자신도 나를 자학할 때 말입니다. 그러나 그 통증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면 하나님은 우리의 닫힌 태(응답, 비전, 축복..)들을 열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내 편 되어 주시라고 요청하기 전에 내가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속히, 사람에게 실망해야 하고 사람의 도움이나 사랑이 부질없음을 몸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갈증과 갈등은, 끝없이 사랑 받으려 하고, 인정받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안식과 평안은, 사람으로부터 처절하게 실망하는 순간에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속해야 되지요. 이러므로 상처가 클수록 영광도 크고 세상과 사람에 대한 실망이 클수록 하나님의 위로하심도 큰 것입니다. 레아는 마침내 유다를 얻었습니다. 레아는 유다를 낳고는, 더 이상 야곱의 사랑을 기대하거나 의지하지 않아도 될 만큼 영적으로 성숙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아들의 이름을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고 지은 것입니다. 우리는 상처와 절망 때문에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방탕할 수도 있겠지요. 그것은, 우리가 선택해야 할 문제입니다. 레아는 다행스럽게도, 상처와 절망을 끌어안고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모래가 그냥 있으면 모래에 불과하지만, 조개 속에 들어간 모래알은 진주가 되어 나오듯이 우리의 상처도, 그대로 놔두면 곪아 터지나 은혜로 감싸고 보혈로 덮으면, 진주 같은 신앙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구원은 거저 받을 수 있지만, 믿음의 성숙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심어야 거두고,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와 배신감은 하나님을 경험하고 유다(큰 믿음, 영적성숙, 비전성취, 축복)를,출산하는 좋은 자원이 됩니다. 남편에게 사랑받는 라헬보다는 남편(가까운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며 사느라, 천년 같은 하루일지라도 신랑 되신 주님의 신부되는, 레아의 삶이 진정 축복의 절정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사람의 존재보다 소유를 더 중요시하는 시대에 상처와 갈등은 레아만큼이나 쌓이게 됩니다.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레아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이 되기까지 미움과 시기로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 심장에 새긴 이름들입니다./한 해를 정리하면서 보고 싶은 사람들,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의 따뜻함이 전해지고 감사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봅니다. 세계 곳곳을 가보지는 못했지만 세계 곳곳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생각납니다. 이들과 함께 교회를 이루다가 공부 또는 새로운 사역 때문에 외국으로 보낼 때마다 그들의 미래에 손을 얹고 “하나님, 이들의 미래가 고속도로같이 뻥 뚫려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멈추어 서게 하시고, 이들의 앞길을 절벽이 막아설지라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 절벽을 기어오르던지, 터널이라도 뚫고 가게 하옵소서. 터널을 뚫다가 다 뚫지 못하면 그 다음 세대가 이어서 뚫을 수 있는, 목적이 뚜렷한 인생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이렇게 눈물로 기도하며 끌어안고 울었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함께 추위에 떨었던 기억, 함께 선교현장을 방문하면서 지치고 배고팠던 기억, 함께 땀 흘리며 일했던 기억, 함께 말씀을 붙들고 울며 영혼을 위해 기도했던 기억들로 충만한 형제자매들입니다. 우리의 젊음을 하나님께 드리자며 주님이 흘리신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을 들고 캠퍼스를 누비며, 그 복음에 담긴 뜨거운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다가 사랑 때문에 울고, 또 사랑에 실패하여 아파서 울고, 그래도 사랑하는 일을 다시하자며 서로를 붙들어 주던 형제자매들입니다. 이런 형제자매들이 곳곳에서 주님을 섬기며 교회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이 귀한 이름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 교회를 이루어 가는 과정 속에서 사랑으로 새겨진 이름들입니다. 이 이름들이 예수님 만난 후 살아온 제 인생의 발자취이며, 제 인생의 영광이며, 눈물로 감사할 이유가 있는 이름들이며, 저의 목회였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이름들을 가슴에 사랑으로 새겨 나가는 일이 또한 제가 목회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 혹은 목회의 전부일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서신의 맨 뒷장에 거의 동일하게 새겨지는 귀한 이름들을 여럿 발견하게 됩니다. 몇 글자로 표현되지 않았지만, “나와 함께 갇힌,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은, 내 사정을 다 아는, 사랑을 받는 형제, 나의 위로,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한...” 이와 같은 수식어로 표현된 이 이름들이 없었다면 바울도 존재할 수 없었던, 그래서 바울이 살아온 삶의 이유와 목적을 분명하게 밝혀주었던 이름들이기에, 이 이름들은 바울의 심장에 사랑으로 새겨졌습니다. 바울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써놓고 함께 했던 지난날들을 돌이켜보며 큰 감동과 감격으로 울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이름을 써내려갑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에베네도, 마리아, 루포, 누가, 두기고, 오네시모,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라 하는 예수, 아킵보... 바울은 자신의 생명과 같은 사람들이기에, 이 귀한 이름들을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담아 떨리는 마음으로 이 이름들을 성경에 기록했을 것이며, 또한 자신의 심장에 깊이 새겼을 것입니다.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들,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고, 죽기로 작정한 사람들, 이 이름들이 태초부터 꿈꾸신 하나님의 경륜이요, 교회입니다. 교회는 나의 심장에 새겨진 이름들입니다.
단련한 후에 풍성한 축복으로/ 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셔서 은처럼 잘 단련시켜 주셨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그물에 걸리게 하셨고 우리 등에 짐을 지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머리 꼭대기에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불 사이로, 물 사이로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풍성한 곳으로 우리를 데려오셨습니다. 내가 주의 성전에 번제물을 들고 들어가겠습니다. 주께 내 서원을 지키겠습니다.(시편 66:10~15)/ 우리의 삶은 항상 편안하고 순조롭지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힘들고 걱정스런 일을 당할 때도 있어요. 일이 잘 풀리고 기분이 좋을 때는 행복하다가도 갈등이 생기고 어려운 상황에 접하면 불평하고 불만스러워합니다. 상황이 안 좋아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긍정의 생각을 가져야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에머슨은 말하기를 \"인생은 시험이다\" 라고 했어요. 왜 그럴까요? 시련과 역경을 통과하면서 성장하고 성공에 이르게 됩니다. 사노라면 시험이 따릅니다. 고통이 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험이 오히려 축복으로 가는 과정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더욱 성장시키기 위한 연단의 과정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질병이 오기도 하고 실패도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과 시험과 연단이 축복으로 가는 통로임을 알아채야 합니다. 시편 119: 71절에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풍성한 축복으로 인도하실까요? 첫째, 주께서 시험하사. 단련하시기 위해서 시험하시는 거지요. 창세기 22:1절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시험하십니다. 그 시험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은 놀라운 은혜와 복을 주셨습니다. 사랑에는 아까움이 없습니다. 아까운 생각이 든다는 것은 사랑이 부족해서이지요. 아내사랑, 남편사랑, 친구사랑, 부모사랑, 자녀사랑. 하나님사랑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야고보서 1:12절에 보면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했습니다. 원망 불평보다는 감사해야 합니다, 찬송하며 기도하며 믿음으로 극복해가야 합니다.
첫째, 주께서 시험하사. 단련하시기 위해서 시험하시는 거지요. 창세기 22:1절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시험하십니다. 그 시험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은 놀라운 은혜와 복을 주셨습니다. 사랑에는 아까움이 없습니다. 아까운 생각이 든다는 것은 사랑이 부족해서이지요. 아내사랑, 남편사랑, 친구사랑, 부모사랑, 자녀사랑 .... 하나님사랑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 야고보서 1:12절에 보면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했습니다. 원망 불평보다는 감사해야 합니다, 찬송하며 기도하며 믿음으로 극복해가야 합니다.
둘째, 주께서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느니라. 시험과 시련 속에서 연단하시고 나를 끌어내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 시편 34:9절에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부족함이 없도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외하는 자에게 부족함이 없게 하십니다. 건강, 지혜, 힘. 풍성하신 것으로 믿음의 그릇에 따라 채우십니다.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목표를 향해 가야하는지를 끊임없이 바라보고 그것을 그리며 생각해야 합니다. 부자 되고 싶으면 부자 되는 생각을 하고 성공하고 싶으면 성공하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 에레미아 33:3절 부르짖으라, 말라기 3:10절 하늘 문을 열고 내가 복을 붓지 아니하나 보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도의 마땅한 도리를 행하며 말씀에 순종함으로 풍성한 복을 받아야 합니다.
셋째, 번제를 드려 나의 소원을 갚으리니.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사랑, 인도와 보호하심, 영원하신 언약을 믿고 진심으로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예배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심은 대로 열매를 거두게 되지요. 믿음으로 심고 사랑으로 심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은 인간의 약속보다 저 소중히 여겨야지요. 오늘의 시련과 역경은 나를 시험하사 연단시켜 강하게 하고 성장케 하사 축복하시는 과정임을 잊지 맙시다. 늘 기도하고 감사하는 생활이 되시길 바랍니다.
염려가 안 되는 은혜
어느 교회 여 집사님이, 늘 범사에 \'염려로 충만\'하시기에.. 하나님께서, 그 집사님의 \'염려꺼리\'를, 모두 다 없애 주셨다. 그랬더니, 그 여 집사님이 하는 말 \'염려거리가 없어, 큰 걱정이라고\' 또 염려하더란다. 아마, 염려도 은사(?)인가 보다. 염려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염려하기에 말이다. 염려라는 영어의 단어는, worry 인데.. 이 말은 그리스어 \'메림나오\'로써.. 염려의 어근은, 영어의 care 와 흡사한 의미를 갖고 있다. 원래 \'메림나오\'는, \'분열되다\' \'나뉘다\'의 메리조와.. 마음, 이해력을 의미하는, 누스의 합성어 이다. 그러므로 염려란, \'마음을 나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야고보서에 보면, 염려하는 자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말해서, \'염려한다\'는 말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안정되지 못하여.. 분열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염려란 말은, \'목을 조르다\'는, 뜻이 있다. 마귀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염려하게 함으로, 목을 조르는 것이다. 그래서 무능화, 무력화 시켜.. 결국 무장해제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실로 염려꺼리로 충만해 있다. 하루 한 날, 그냥 지나 가는 날이 별로 없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잘날 없다\'고, 부요하면 부요한대로..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성취하면 성취할수록,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염려의 수위는, 더 높게 마련이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우리의 염려 중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않을) 염려... 그러니까, 미래의 염려가 85% 나, 된다고 한다.
주님은, \'내일일도 염려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1년 후, 10 년 후의 일까지.. 미리 가불하여 염려를 한다. 어쩌면 우리는, 타고난, \'염려선수\'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요구 하시고 계신다. \'염려하지 않는 것이, 좋다\'가 아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의 건강과 풍성한 삶을 위함이다. 왜냐하면 염려는, 만병의 근원이며, 불행의 쓴뿌리이며스트레스의, 주범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염려를 안할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건강하고 풍성하게 장수할 수 있다. 그런데, 무슨 수로 염려를 안하고 살 수 있을까?주님은 불가능한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으신다. 좀 어렵기는 하지만, 얼마든지 길이 있다. 염려하지 않게 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심히 큰 능력이, 주께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믿음이 무엇일까? 믿음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믿음은 \'맡기는 것\'이다.
이러므로, 믿음 좋다는 말은, \'잘 맡긴다\'는 말이다. 반대로, 못 맡기는 것은, 지독한 불신앙 때문이다. 맡김의 대하여, 이야기 할 때면 나의 은사 목사님이, 못 견디게 생각이 난다. 이 목사님께서는,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집에 불이 나도, 한숨 자고 끄라\" 나는 예수를 믿은 지가 수십 년이 되었어도, 아직 그 말씀에 흉내도 못낸다. 그래서, 또 걱정(?)이다. 대체적으로 어른들은, 염려꺼리가 크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끄덕도 않고 잘도 잔다. 이유는, 아이들은 부모를 100 퍼센트 믿고, 맡겼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예배를 드려도, 염려가 맡김으로 변화되지 않는다면..
몇날 며칠을 금식 하며 기도 했어도, 염려가 평안으로 바뀌지 않았다면..
불철주야 주를 위하여 뛰고 달렸어도, 마음에 수심이 여전하다면..
아무리, 유명한 교회 큰 교회를 출석해도, 얼굴이 그늘이 가득하다면..
우리의 \'믿음좋음\'을, 무엇으로 설명 할수 있을까? 어떤 면에서 보면, 염려는 병의 일종인 듯 싶다. 내 맘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맡기고 싶을 때 맡겨지고, 염려하지 않아야 될 때..염려가 사라지면, 얼마나 좋을까? 노력으로, 결심으로, 의지로, 안 되는 것이 염려다. 우리의 대적 마귀가,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어떡하든지, 염려꺼리를 줄뿐 아니라.. 힘도 실력도 없으면서. 맡기지 못하게 한다. 이러므로, 큰 은혜 중에 은혜는. \'잘 맡기는 은혜\'이다. 상황은 여전히 어려운데, 염려가 안되는 것은,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하나님께, 이 은혜를 구하자. \'문제해결\'을 위하여도 힘써야 하지만, 걱정이 안되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도 몸부림쳐야 한다. 갑짜기, 옛 어른들의 말씀이 기억이 난다. 염려를, 붙들어 매라. 그런데, 어디에다 붙들어 매야 하는지는, 명확치가 않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네 모든 염려를, 주께 다 맡겨 버리라\"그렇다. 우리의 염려를, 주님께 붙들어 매야 한다. 단순히 염려를 하지 말라거나, 문제를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염려를 \'주님께 맡겨 버리라\' 하심이다.
그것도 몇 가지의 염려가 아니라, \'모든 염려\'이다.
믿음의 정의는, 염려를 주님께 맡겨 버리는 것이다.
나는 쓰레기를 버리고 올 때,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집 쓰레기는 거의.. 내가 버린다. 그런데, 한 번도 이미 버린 쓰레기를 아쉬워하거나.. 다시 가져온, 경우가 없다. 맡겨버리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다. 주님께 맡겨 버린 염려들로 인하여. 마음에 평안이 흘러야, 진짜 맡긴 것이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었으면 좋겠다. 걱정꺼리가 있어도, \'걱정이 안되는 은혜\' 말이다. 문제가 있어도, 잠을 푹~ 잘수 있는 은혜 말이다. 그러기 위하여는, 염려하는 체질에서.. 잘 맡기는 체질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하루 아침에는, 어렵겠지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으면, 홀연히 변화 될 수가 있다.
이제, 우리 모두에게 맡겨지는 은혜, 버리는 축복.. 더 나아가 걱정은 많은데 \'걱정이 안되는 은혜\'가, 더했으면 얼마나 좋으랴! 대중탕에 가보면, 카운터 뒤편에 이런 글이 씌여져 있다. \"귀중품은 주인에게 맡기십시요. 맡긴 것만 책임집니다.\" 그렇다. 우리의 염려와 귀중한 것들을, 우리 삶의 주인 되시는 주님께 맡기자. 주님은, 맡긴 것만.. 책임져 주신다. 집에 불이 나도 한숨자고 끌 정도의, \'절대 믿음\'으로 살아봤으면.. 얼마나, 좋으랴! \'절대 절명\'의 순간에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런 때에도, 나를 신뢰하느냐?\'이다. 당신은, \'걱정이 안 되는 은혜\'를 가졌는가?
중보기도의 힘/“나는 그 일에 어느 누구도, 어떤 일도 관여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기도를 잊고 있었다. 누군가의 기도에 연결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회심하는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다.” -체리 풀러의 ‘기도 입히는 엄마’ 중에서-우리는 너무도 쉽게 사랑을 포기합니다. 누군가를 향해 ‘결코 변화될 수 없는 사람’ 이라 말하며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발견하기도 전에 등을 보이며 손을 놓아 버립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주님을 알기 전, 우리 역시 ‘결코 변화될 수 없는’ 연약하고 상처 입은 사람이었음을 말입니다. 무너진 인간관계 속에 실망하며 좌절하고 계십니까? 그래도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선하신 때가 이를 때까지 눈물의 기도를 거두지 마십시오. 오늘 한 영혼을 향한 우리의 기도가 놀라운 구원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관점을 바꾸면 행복해진다./어려운 인생을, 우리의 힘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인생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12정탐군은, 똑같은 가나안을 정찰한 후에.. 열명은, 큰 성과 큰 사람을 보고.. 절망과 좌절을 느낍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보고 가슴 벅차 합니다. 관점의 차이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태산이, 평야처럼 보일수도 있고 평야가, 태산처럼 느껴질 수도 잇습니다. 태산이 평야로 바뀌는 것은, 기적이지만 태산을 평야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은, 은혜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하고 힘써도, 지하셋방이 고급 빌라로 변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하고 힘써도, 질병에서 놓음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하고 힘써도,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거나 실패한 삶이, 성공의 삶으로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죽을 만큼 노력하고 몸부림을 쳐도, 상황은 여전히 어렵고 현실은 여전히 막막하고,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우리의 오염되고 세속화된, 시각과 관점이 변할수 있다면 얼마든지,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느낄 수 있고 쓰레기통 같은 곳에서도, 기적을 기대할 수 있고, 사막에서도 샘물을 마실 수 잇으며,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최선의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크고 비밀한 은혜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청년은,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인하여 큰 실망과 좌절을 느끼며,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들 가운데 오셔서(임재), 말씀을 풀어 주셨고.. 그때.. 저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저들의 가슴은 뜨거워졌고, 저들은 새로운 희망과 설레임을 품고.. 떠나온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갑니다. 무엇인가, 달라졌는가요? 비관적인 상황인가요.절망적인, 현실인가요.아닙니다. 저들의 관점이, 달라진 것입니다.
주님이, 저들의 눈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최악의 상황을, 최선의 상황으로 볼수 있는, 시각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저들은 변화됩니다. 사람은, 시각이 바뀌면 변합니다. 사람은, 관점이 달라지면 새 사람이 됩니다. 사람은 눈이 열리면, 딴 사람이 되어 기적을 창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눈이 열린,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쓰레기통 같은 곳에서도.아우슈비츠의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카타콤 같이 형벌같은 환경 속에서도.. 절대절망의 순간 속에서도, 주체할 수 없는 감사와 기쁨을 가지고.. 꿋꿋하게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주와 복음을 위하여.. 매 맞음과, 고난과, 헐벗음과, 추위와, 불편함과, 감옥 같은 현실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이것이 진정한 기적이며, 영광이며 축복입니다. 이러므로. 눈이 닫힌 상태에서의, 기적이나 체험이나 은혜나 열심이나 수고나 노력은.변화를 일으키거나, 가슴 벅찬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일순간의 기쁨일 뿐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핍박자 바울이, 다메섹에서 눈이 열릴때.. 충성된 사도로 변화되지 않습니까?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기등등하여..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려 햇던, 바울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어두운 바울을 눈을 열어 주를 보게 하시니, 바울은 고꾸라지게 됩니다.그리고, 삶의 방향과 목적과 의미를 바꾸게 됩니다.
스데반을, 기억하십시오. 돌이 날라오는, 기막히고 참담하고 처절한 -- 저주같은 상황--가운데, 있었지만.. 주님은, 스데반 집사가 만난, 상황이나 환경이나 현실을 바꾸어 주신 것이 아니라..스데반의 눈을 열어, 주를 보게 하십니다.그때 스데반은.. \'자신이 얼마나 영광스런 사람인지\'\'자신이 얼마나 선택받은 주의 종인지\'\'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깨닫게 되고, 결국 주체할수 없는 기쁨과 감격 속에..주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이와같이.. 은혜는, 우리의 시각을 바꾸는 에너지입니다.이 땅과 세상에 고착되어 있는 시선을, 눈을 들어 하늘과 주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죽을 만큼, 힘든 시간을 보낼수 있습니다. 더 이상은 소망도 없고, 가능성도 없는.. 최악의 상황을 지날 수도 있습니다. 여기를 보아도, 저기를 보아도.. 기댈 곳도 의지할 곳도 없는, 그런 참담한 현실을 걷고 있을 수 있습니다. 사방이 막힌 사면초가를 통과하며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고, 아무리 힘써도 달라지지 않는. 동굴 같은 시간을 보낼 있습니다. 지구상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극한 외로움으로 나날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희망과 가능성이 있음은,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며.. 그 주님은 우리의 눈을 열어 하늘을 보게 하시며, 가능성을 찾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의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바꾸어 주시기도 하시지만
우리의 닫힌 눈을 열어, 영광스런 하늘을 보여 주시고 우리의 오염된 시각과 관점을, 정화된 시각으로 바꾸어 주사 가슴 벅찬 미래와 주체할 수 없는 현실을, 느끼게 해 주시는 좋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구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그 은혜만 받을 수 있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땅이 꺼져도 괜찮습니다. 언제든지..다시 솟아 날수 있기 때문이죠. 주여! 우리의 어두운 눈을 열어, 주를 보게 하소서!
내면세계가 건강해야 한다
우리는 실체보다는 상징을 더 숭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적인 것보다는 외적인 것에 더 이끌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외적인 것을 너무 좋아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뿌리 깊은 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외적인 것은 재미를 주지만 내적인 것은 깊이를 줍니다. 세상은 깊이보다 재미를 중시하지만 하나님은 재미보다 깊이를 중시합니다. 세상은 겉이 큰 것을 좋아하지만 하나님은 속이 큰 것을 좋아합니다.
옛말에 \"못 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는 말이 있습니다. 긴 시간을 두고 보면 교계도 못 생긴 목회자들이 지키고, 교회도 못 생긴 성도들이 지키는 것을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인들이 다 잘생겼지만 그래도 \"나는 하나님 앞에서만은 잘 생긴 존재가 아니다!\"라는 겸손한 인식과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외적인 화려함이나 인기에 이끌려 발 빠른 존재가 되기보다는 내면을 잘 가꾸고, 내면을 잘 살펴서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성도답게 산다!\"는 것은 \"내적인 삶을 중시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외적인 삶을 준비하는 것은 내적인 삶입니다. 그러므로 내면이 건강해야 합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에게 고독과 침묵의 시간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고독과 침묵의 시간은 우리의 내면세계를 건강하게 만듭니다. 고독과 침묵은 잘 활용하면 우리에게 큰 유익이 됩니다. 그러므로 고독과 침묵을 잘 훈련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훈련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는 고독이나 침묵과는 전혀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요새 인기 있는 음악을 보십시오. 고독과 침묵의 소리는 거의 들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고독과 침묵의 유익을 너무 모르고 있고, 그것들을 싫어합니다.
침묵이 들려주는 소리는 듣기 싫어하고 시끌벅적한 곳에 가야 만족감을 느끼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깊은 삶을 살려면 고독과 침묵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우리에게 고독과 침묵이 필요합니까? 지금 세상은 우리의 영혼에 도움이 되지 않는 여러 자극적이고 감성적인 소리로 우리를 공격해서 혼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소리들을 물리치고 고독과 침묵 속에서 실체와 진실에 더욱 접근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더 생각하도록 만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말씀하시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 환경을 이길 힘과 자신을 이길 힘이 생기게 됩니다.
성경 복음서를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홀로 있는 시간을 아주 많이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때는 지금처럼 그렇게 난잡한 때는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군중들로부터 떨어져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어떤 영적 지도자들은 텔레비전에 나오기를 좋아하고, 무대 체질이고, 대중성을 좋아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려고 \"나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다가 결국 \"나는 틀리다!\"는 것을 증명한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진짜 진리의 99%는 평범한 것에 숨어 있습니다. 특이한 것에는 대중성은 많아도 건강성은 적습니다. 하나님이 우주를 이끌어 가는 손길은 99% 자연적인 것을 통해 이끌어 가십니다. 어느 누구도 \"해가 서쪽에 뜨겠네!\"라는 말을 듣고 \"특이하다! 기적이다!\"고 하며 좋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초자연적인 것, 기적적인 것, 대중적인 것, 화려한 것, 특별한 것을 열심히 좇아 다니면 열심히 실패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때로는 조용한 곳에서 혼자 떨어져 살아 계신 하나님과 직접 대화를 하며, 평범한 것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평범한 것에서 감사거리를 발견하는 삶이 진정 복된 삶입니다. 그렇게 \'무대 앞\'에 서기보다 \'하나님 앞\'에 서기를 힘쓸 때 내 영혼이 풍성하게 되고, 나를 한 맺히게 했던 말도 교훈과 위로와 축복을 주는 말로 신기하게 번역되어 들리고, 내 육신을 공격하는 바이러스와 암 덩어리의 공격력도 급속히 약화되어 병도 낫게 될 것입니다.
\'자기 혼자 하나님 앞에 서서 나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마음과 마음을 터놓은 대화를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은 별로 없다면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예수님은 대중을 사랑했지만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모시려고 할 때 예수님은 뒤로 물러나 숨으셨고, 병자들을 치료하신 후에는 그들의 입에 마이크를 갖다 대고 간증을 유도하기보다는 그 기적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처럼 대중성 대신에 고독을 추구하셨던 예수님은 우리도 조용하고 비밀스럽게 드리고, 금식하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6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은 중요한 순간에 항상 혼자 따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혼자 광야에 가셔서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 40일 금식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은 온갖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으셨습니다. 고독한 광야는 예수님을 약하게 한 장소가 아니었고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강하게 한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주 고독과 침묵을 추구하셨습니다. 12제자를 선택하실 때에도 따로 가서 기도하셨고(눅 6:12-13), 사촌인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따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마 14:13).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고친 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 어느새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몰려오니까 예수님은 물러가셨고(눅 5:16), 5천 명을 먹이신 후에도 따로 산에 올라가셨고(마 14:23),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도 혼자 기도하셨습니다(마 26:36-48). 예수님에게도 그처럼 고독한 시간이 필요했다면 우리에게는 그런 시간이 얼마나 더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대개 인생의 중요한 변화가 있기 전에 고독하게 되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고독하게 되셨고, 사랑하는 동역자 세례 요한을 잃은 것에 대해 슬퍼하기 위해서 고독하게 되셨습니다. 또한 기적을 일으킨 위대한 사역 후에 오히려 고독하게 되셨고, 인생의 가장 극심한 어려움과 죽음에 처하시기 전에 고독하게 되셨습니다.
우리에게 고독과 침묵이 필요한 상황도 똑같습니다. 지금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습니까? 무엇인가 중요한 사건이 다가옵니까? 혹시 슬픔과 실망에 빠져 있습니까? 어떤 일의 성공을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셨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여러분들의 영적인 배터리를 충전하기 위해서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다가올 날들을 준비해야 합니다.
고독과 침묵의 유익이 무엇입니까? 새벽에 하나님과 홀로 대면하는 느낌을 가지면서 내적인 평화가 생기고, 조용한 가운데 성경을 보면서 지혜를 얻게 됩니다. 또한 매일 당하는 상황과 기도를 필요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고, 교회의 비전과 저의 비전과 세계 선교의 비전을 위해 기도하면서 미래를 희망과 소중한 예감으로 보게 하는 신비한 시야를 얻게 됩니다. 때때로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서 조용히 기도하면 생각보다 훨씬 가볍게 그 상황이 넘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도 가끔 지친 마음이 들 때가 있고, 드라이한 느낌이 들 때가 있고, 속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대략 4시간의 잠이 한번 풀어주고, 새벽에 교회에서 말씀과 기도 가운데 지내는 시간이 다시 한 번 그 마음을 풀어줍니다. 그러면 아침 해가 떠오르면서 울적했던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처럼 새벽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어떤 분들은 밤 시간에 그런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아무 때든지 교회에 와 혼자 조용히 기도하는데 그런 분들을 보면 \"저 시간이 저분을 작품으로 만들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처럼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조용한 곳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낙심과 좌절을 날려버릴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야 이야기가 그것을 잘 말해줍니다.
약 2800년 전 어느 날,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와 대결을 청했습니다. 제단에 제물을 올려놓고 각자 자기 신에게 기도해서 그 제물을 태우는 신이 진짜 신임을 인정하자고 했습니다. 먼저 바알 선지자들이 기도하는데 기도가 먹히지 않자 그들은 춤까지 추고 자기 몸에 상처까지 내며 난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아무 반응도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 엘리야가 제단에 들어서서 \"여호와여 응답하소서!\"하고 단순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물과 돌과 흙과 제단 옆 도랑의 물까지 태웠습니다. 엄청난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곧 왕비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엘리야는 두려움과 낙심에 사로잡혀 도망쳐서 호렙산 굴에 숨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장면에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 11-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크고 강한 바람 속에도 계시지 않았고,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고, 불 가운데서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들이 다 지나고 나서야 세미한 소리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세미한 소리가 낙심한 엘리야를 일으켰습니다. 진실한 성도는 그 세미한 음성을 통해 자신의 영혼이 채워지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의 가장 큰 위기는 이 세미한 음성을 못 듣는 것이 위기입니다. 하나님의 우주를 운행하시는 손길은 대개 조용하게 진행됩니다. 지금 우주가 하나님의 손길에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주의 일부분인 태양계도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나님의 손길은 대개 조용하게 움직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음성도 세미한 음성으로 올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만약 혼자 있는 시간이 없으면 어떻게 그 소리를 듣겠습니까? 하나님은 조용히 성경으로 말씀하시기를 즐겨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세미한 음성이 진정으로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는 음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수많은 소음 중에 있습니다. 우리의 감각은 끊임없이 보는 것과 듣는 것에 의해 압도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의 영이 새로워지고 신선하게 될 조용한 장소가 우리에게는 더욱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매일 당하는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선한 통제 아래에 놓여서 미래를 잘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까? 새벽이나 낮이나 매일 일정 시간을 그런 시간으로 확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시간은 전혀 방해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집에서도 조용히 성경을 보고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좋고, 시간이 될 때마다 교회에 나와 기도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리고 여행을 떠나는 것도 참 좋습니다. 새로운 환경이 얼마나 많은 메시지를 주는지 모릅니다. 조용한 숲에 들어가면 나무들이 말하는 것 같고, 산과 바다에 가면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참 많습니다. 얼마나 유익하고 중요한 시간인지 모릅니다.
사역의 현장에서 물러나 쉴 때 오히려 하나님이 가까이 하심과 하나님의 손길을 더 느낄 때가 많습니다. 우리에게 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 다시 우리를 조율하는 것이 바로 쉼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주일이 중요하고, 예배가 중요하고, 쉴 때는 쉬는 삶이 중요합니다. 여가 생활에 돈을 쓰는 것을 낭비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가가 없어서 건강을 망치면 5배, 10배의 돈이 들게 됩니다.
왜 여가생활을 합니까?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처럼 여가생활을 통해서 하나님 안에서의 내 삶의 목적이 뚜렷해지고,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추진력을 얻는 재충전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여가생활을 잘 가진 셈이 됩니다. 결국 여가생활이 필요한 가장 큰 이유는 삶의 현장에서 물러나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입니다.
기도원이나 수도원에 가서 금식 기도할 때 가장 큰 유익이 무엇입니까? 기도원에 있는 전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큰 유익입니다. 또한 아무 소리도 듣지 않는 것이 큰 유익입니다. 그곳에는 텔레비전도 없고, 라디오도 없고, 정신을 분산시키는 어떤 소리도 없습니다. 그렇게 며칠 있다 보면 하나님의 뜻이 보이고,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고, 내적인 평화와 힘이 생깁니다. 또한 믿는 교인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현재의 고난은 내일의 축복이 되고, 나의 고난은 자녀의 축복으로 변하여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이 확실히 믿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독과 침묵이 없으면 영적으로 자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혼잡하고 소음 중에서도 만나 주시지만 대개 조용한 장소에서 만나주시고 그분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독과 잠잠한 침묵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사야 30장 15절은 말합니다.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너희가 원치 아니하고.\"
오늘날 많은 믿는 사람들이 잠잠하게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가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사람과 현명한 사람의 차이는 현명한 사람이 10분이라도 더 침묵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항상 잠잠히 신뢰함으로 뿌리 깊은 나무처럼 뿌리 깊은 영혼과 내면의 깊이를 소유하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건강한 내면세계, 건강한 삶의 기초
내적 치유란 무엇인가
우리 인간은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신을 판단할 때 자기는 상처를 주는 가해자가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는 피해자라는 의식이 훨씬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상처를 주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상처받는 사람은 많으며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은 많은 것 같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실수나 잘못으로든지 누군가의 잘못으로 상처를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몸이나 육체가 상처를 입었을 때 크고 작은 아픔을 누구나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마음이나 인격이 상처를 받았는데 치료받지 않고 잊은 상태로 그냥 오랜 세월 흘러 가버릴 때 우리는 의식을 하지 못하고 살아가게 되지만 언젠가는 치유되지 않은 우리의 마음이나 치유되지 않은 우리의 인격이나 치유되지 않은 우리의 과거의 기억으로 엄청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러므로 외부에 나타난 우리의 몸과 육체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 못지않게 우리의 마음의 내적 치유를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내적 치유는 과거에 발생했던 좋지 못한 사건의 기억이나 어린 시절에 우리가 당한 상처 혹은 과거에 지은 특정한 죄 등이 감정적 혹은 정신적인 병의 원인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적 치유\'를 \'과거의 상처의 치유\'(Healing of Past Hurts)혹은 또는 \'기억의 치유\'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는 쓰라린 과거 기억을 포함한 정서적 심리적인 상처들은 우리 자신이 저지른 죄악 또는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죄악으로 인한 피해 때문에 생기게 됩니다. 이러한 과거의 상처들이 치유되며 속사람(Inner Man)이 과거의 감정의 노예로부터 해방될 때 회복됩니다. 따라서 과거에 받은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내적 치유(Inner Healing)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베티 탭스코트(Betty Tapscott)는 내적 치유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내적 치유는 속사람 즉 마음, 감정, 괴로운 기억, 꿈 등을 치유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도를 통한 과정으로서 그것을 통해 우리는 원망, 자기 부정, 자기 동정, 우울, 죄책감, 두려움, 슬픔, 미움, 열등감, 정죄, 무가치 등의 감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적 치유는 속사람의 치유로서 정신(Mind), 의지(Will), 마음(Heart)과 관련된 모든 부분의 영역의 치유를 포함하며 또한 우리의 감정(Emotions), 영혼(Psyche, Soul or Spirit)과 관련된 부분의 영역의 치유도 포함합니다, 한편 영적인 병은 우리가 행한 것에 의해 기인하지만, 감정적인 병은 우리가 당한 것 혹은 일어난 사건에 의해 발생합니다. 즉 과거에 우리가 이러한 상처는 나쁜 추억 혹은 연약한 혹은 상처받은 감정의 형태로서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또한 이러한 상처는 우리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문제 가운데로 몰아넣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내적 치유 정의를 종합적으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내적 치유는 해방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마음의 상처로부터 해방되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내적 치유는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내적 치유란, 상처받은 사람들이 받은 상처에 대해 올바르게 반응할 수 있도록 성경적이고 영적인 통찰력을 갖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셋째, 내적 치유는 과거의 사건을 재조명하는 것입니다.
재조명이란, 과거에 일어난 어떤 사건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넷째, 내적 치유는 바꾸는 것입니다.
내적 치유 사역에서는 환자의 과거의 부정적인 결과를 제거해주시고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여기서 과거의 사건 자체를 변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의 결과를 바꾸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내적 치유는 보통 한 사건 이상의 과정입니다.
우리의 기억들은 마치 양파 껍질처럼 여러 겹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양파의 겉껍질을 벗기면 다음 껍질이 있듯이 우리의 기억들은 겹겹이 연결되어 한 단계의 치유가 끝나면 다음 단계로 이어지게 됩니다. 때때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릇을 꺼내려면 먼저 찬 장문을 열어야 하듯 내적 치유에서도 문제에 맞는 과정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예들 들면 상처받은 사람에게 내적 치유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내적 치유는 각각 개인의 시간대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회적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내적 치유는 기억의 치유입니다.
보통 사건 자체는 한 번의 상처를 입히지만 그 사건이 계속 상처를 주게 됩니다. 실로 기억은 강한 힘이 있어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시간의 흐름이 어느 정도 기억의 고통을 무디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그것을 완전히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일곱째, 내적 치유는 용서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많은 영적 훈련들이 우리가 미처 인격의 깊은 부분을 변화시키기도 전에 급히 진행되곤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예수님의 임재와 용서와 무한한 사랑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상처받은 자아상에 새겨진 아픔의 흔적들을 치유 받은 경험의 과정은 고백과 용서이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내적으로 체험할 충분할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내적 치유의 참된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여덟째, 내적 치유는 접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던 과거의 시간에도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나게 하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그 때 엎질러졌던 우유까지도 해결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주인이시며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 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임재와 은혜를 받아들인다면, 과거의 고통스런 사건은 더 이상 현재의 우리를 속박하거나 상처를 주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내적 치유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역사하시는 주님의 원동력이며 적용 방법입니다. 원동력은 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적용 방법은 실제 사역 현장에서 성령님으로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적 치유란 주 예수님이 과거의 상처들을 해결하시도록 그 분께 의탁 드리며 그 상처의 부정적인 결과들을 치유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인격의 함몰현상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믿었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경우를 당하게 되면 자살을 생각한다고 하는데 그런 현상을 심리학적 용어로 인격의 함몰현상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땅 속에 빈곳이 뻥 뚫려 있을 때 시간이 지나면 지표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지반이 무너지는 현상이 가끔 일어납니다. 이것을 함몰현상이라고 하는데, 그때에는 지반 위에 있던 것까지 다 휩쓸려 맥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내면세계는 조종실, 정원과 같은 곳
인생의 경우에서도 그런 경우가 종종 발견됩니다. 왜 실패한 사람들이 그렇게 맥없이 쓰러지고 맙니까? 그 사람의 내면세계가 텅 비었기 때문입니다. 인격이란 두 가지 세계의 조화를 통해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외면세계이고, 또 하나는 더 중요한 내면세계입니다. 내면세계는 보이지 않지만 그 사람을 좌우하는 조종실과 같은 곳입니다. 신앙인에게는 그곳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도 이루어집니다. 이 두 가지 세계의 조화를 통해서 건강한 인격이 형성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부세계에 지나치게 매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허덕이고, 지쳐가고, 힘들어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내면세계는 황폐화되고 병들어 갑니다. 내면세계란 정원과 같은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곳을 끊임없이 가꾸면 아름다운 정원이 됩니다. 만약 그곳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게 되면 그곳에서 아름다운 천국이 펼쳐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없이 그곳을 가꾸지 않고 방치하게 되면 그곳은 쓰레기장이 됩니다. 내면세계가 쓰레기장이 되면 사람들은 자연히 외면세계에 더 몰입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외면세계에서 추구하던 것이 무너지게 되면 그것과 함께 그 사람 자체도 철저히 무너지게 됩니다. 오늘날 겉으로는 멀쩡한 것 같지만 내면세계가 텅 빈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욕구를 따라 철저히 외부적인 것을 추구하며 달려갑니다. 그러다가 마음의 평안을 잃고 자신도 잃어버립니다. 그와 같은 사람은 \"무엇인가 쫓기며 사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외적인 성공을 위해 뛰어갑니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바쁘다. 피곤하다.\" 그런 언어를 많이 사용하는 것은 쫓기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신호입니다. 그는 이미 자기의 주인이 자기가 아닙니다. 무엇인가 이끌려 다니며 쫓겨다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쫓기며 사는 사람이 바로 내면세계가 텅 빈 사람입니다. 물론 그들로 인해 인류 역사와 문명이 발전한 부분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본인의 내면세계는 텅 비어 있고 인격은 병들어 있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그처럼 쫓기며 삽니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인정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더 빨리 인정받음으로 자기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경쟁적이고, 건드리기만 하면 금방 폭발할 것만 같습니다. 이러한 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자기의 존재 가치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즉 나는 이 모습 이대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라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소명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똑같이 힘들게 살아도 그의 내면세계는 고요합니다. 그리고 균형을 잃지 않습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기초가 튼튼하기 때문입니다. 변치 않는 든든한 하나님과 관계하는데 삶이 무너질 일이 없습니다. 내면세계가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함몰 웅덩이 증상 (The Sinkhole Syndrome)
아마도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이 적어도 한 번 이상은 함몰 웅덩이와 같이 무너져 내리려는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 피곤으로 무감각해진 느낌, 실패감, 지금까지 추구해 왔던 목표에 대한 쓰디쓴 환멸감 등을 느낄 때 내부에서 무엇인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삶 전체가 끝없는 심연으로 빠져들어 갈 것 같은 붕괴 직전의 위기를 느끼게 된다. 이 점은 바로 내적 영역(inner space), 즉 내면세계(private world)에 문제가 있는 경우이다.
따라서 문제는 내면세계가 극도로 혼란되거나 약해져 있는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러한 함몰적 웅덩이 증상은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잇는 가능성이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두 개의 아주 다른 세계 속에 살고 있다.
1) 내적 영역(inner space) = 내면세계(private world) : 우리의 내면세계는 본질적으로 영적인 부분이다. 이 세계는 선택과 가치가 결정되는 중심부이며 고독과 성찰을 추구하는 곳이다. 이 곳이야말로 예배와 신앙 고백이 이루어지는 곳이며 세상의 도덕적, 영적 공해가 침투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곳이다.
2) 외면세계(outer world) = 공적 세계(public world) : 우리의 내면세계보다도 다루기가 더 쉽다. 이 세계는 측정할 수 있고 눈에 보이며 계속 늘려 갈 수 있는 세계이다. 외면 세계는 일, 오락, 소유 그리고 대인 관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성공이라든가 인기, 재물, 미모 등으로 쉽게 평가할 수 있는 우리 삶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이 공적 세계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많은 충성심과, 물질과 정력을 요구한다. 이러한 우리의 바깥의 공적 세계는 뚜렷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고, 또 아주 현실적이기 때문에 그 유혹과 요구를 거절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들은 우리의 관심을 끌고 행동하도록 하기 위하여 소리친다.
그런데 우리의 내면세계는 외적 세계만큼 큰 소리로 외치지 않기 때문에 도외시되고 무시된다. 이 내적 세계는 ‘함몰 웅덩이’처럼 무너져 내릴 때까지 쉽게 무시된다. 윌리암 바클레이가 인용한 오스카 와일드의 고백을 보자 : “나는 더 이상 내 자신의 주심이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내 영혼의 선장이 아니었는데 그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쾌락이 나를 지배하도록 허용했다. 무서운 수치감 속에서 내 인생은 끝나 버렸다.”
“나는 더 이상 내 영혼의 선장이 아니었다”라는 와일드의 표현은 내면세계가 흔들림으로써 삶이 무너져 버린 사람의 모습이다. 즉 인간사의 극단적인 단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내면적인 존재”를 무시해 버린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대의 가장 격렬한 전쟁터 중의 하나는 각 사람의 내면세계이다. 특히 자신을 실천적인 그리스도인이라 믿는 사람들은 이 싸움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내면세계를 갈고 닦아야 한다 :
“다른 어떤 위대함보다도 영혼의 위대함을 생각하고, 다른 것의 부함보다 마음의 부함을 생각하라.”
2. 조종실에서 보는 시각
배의 운명을 결정짓는 곳은 잠수함 내부에 있는 조용한 장소이다. 따라서 함장이 본능적으로 들여다보는 곳도 바로 그 곳이다. 그러나 승무원 중 누군가가 배의 안전을 돌보는데 소홀히 한다면 그 잠수함은 재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따라서 배가 부서져 가라앉아 큰 손실을 입게 된다. 내면세계의 ‘조종실’에 이상이 생기면 사람에게도 그러한 사고가 일어나는 법이다. 내면세계의 조종실에서 일어나는 사고는 신경 쇠약, 정신 파탄, 자아 붕괴로 나타난다. 그러나 조종실에 아무 이상이 없다면 배는 아무리 거친 환경이라도 이겨낼 수 있다. 사람이 실수를 하거나 실패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단련되고, 성숙한 성품을 갖게 되는 사실이다. 그러나 외부 압력을 견뎌 내기 위한 원천이 내부에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산산조각이 난다는 것은 단순한 실수나 실패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성경의 많은 이야기 중에서 갈릴리 바다에서 어느 날 오후 폭풍을 만났던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제자들이 곧 공포에 질린 채 마음의 평정을 잃었다. 그래서 배 뒤쪽에서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에게 달려와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그리스도께서 폭풍우에게 잠잠하라고 명하신 후 제자들에게 영적인 지도자로서의 개인적인 성장과 성숙을 위한 핵심적인 질문을 던지셨다. “너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즉 바꾸어 말하면 “왜 너희 내면 세계의 조종실은 질서가 잡혀 있지 않느냐?”
우리는 내면세계보다 삶의 외적인 부분의 온갖 소소한 데에 더욱 많은 관심을 쏟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의 내면세계는 우리가 어떤 외부의 폭풍이라도 헤치고 파쇄할 수 있는 힘을 얻어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데 말이다.
그러한 이유로 성경 기자들은 조종실로 가야 한다는 원칙을 믿고 있었다. 그들은 내면 세계를 발전시키고 유지하는 일이 최우선적인 것을 알고 또 그대로 가르쳤다. 창조주는 우리가 내면세계로부터 외면세계를 지향할 때 가장 능률적으로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만드셨다.
잠언의 한 기자는 내면세계의 원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 : 23)
작가가 조종실이라고 부르는 것이 여기서는 “마음”으로 표현되었다. 잠언의 기자는 마음을 근원으로 보았고, 그 곳으로부터 생명의 샘이 솟아나서 나와 다른 이들이 마실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마음의 순전함을 위태롭게 할지도 모르는 외부의 영향력으로부터 마음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삶에 질서를 가져오는 마음의 능력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마음을 강하게 하고, 계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 삶의 조종실인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신중하고도 훈련된 선택이 요구되어진다. 우리는 마음을 지키기로 결정해야 한다. 마음의 건강과 풍요는 거저 얻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음을 끊임없이 보호하고 지켜 갈 때만이 가능하다.
황금 새장에 갇혀서
사람의 내면세계를 탐험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시작하셨을 것으로 보이는 곳으로부터 시작했다. 즉, 부름 받은 사람과 쫓겨 다니는 사람(driven men)으로 구별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쫓겨 다니는 사람들의 증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1) 쫓겨 다니는 사람은 오직 성취함으로써만 만족을 얻는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삶을 오직 결과의 측면에서만 보며, 그 결과에 이르게 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따라서 성취 지향적인 사람에게는 도착만이 전부일 뿐 여행 자체는 무의미한 것이다.
2) 쫓겨 다니는 사람은 성취의 표상들에 집착한다.
그는 권력이라는 개념을 늘 의식하고 그것을 휘두르기 위해서 소유하려고 애씁니다. 쫓겨 다니는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평판에 비상한 관심을 갖게 됩니다. 쫓겨 다니는 사람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누가 알아 줄 지, 또 어떻게 하면 자기 분야의 높은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을까 하는데 관심을 둡니다.
3) 쫓겨 다니는 사람은 보통 절제되지 않은 팽창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현 상태나 종교적 활동에서 자신이 성취한 것에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영적인 면에서 끌려 다니는 사람입니다. 그는 더 능률적인 방법, 더 좋은 결과, 더 깊은 영적 체험들을 추구하면서 끊임없이 긴장하고 조바심 가운데 삽니다.
4) 쫓겨 다니는 사람은 전인적(全人的)인 인격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공이나 성취에 너무 골몰해 있기 때문에 이를 잠깐 멈추고 자문해 볼 시간조차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전진하려는 욕구 때문에 동기에 대해서 스스로를 속입니다. 즉, 그들은 가치와 도덕성이 현실과 적당하게 타협하게 되며, 성공의 지름길이야말로 삶의 방식이 되는 것입니다. 성공이라는 목표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윤리적 타락도 감수하게 되어 무서울 정도의 지나친 현실주의자가 되어 버립니다.
5) 쫓겨 다니는 사람은 사람을 다루는 기술이 서툴고 미숙합니다.
그들의 시선은 목적과 목표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목표 달성에 이용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들 주위의 사람들에 대해 거의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별 쓸모없이 보이면 어떤 일을 하게 될 때 그들은 장애물이나 경쟁상대로만 여겨 버린다. 따라서 쫓겨다니는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희생자의 행렬이 있기 마련입니다.
6) 쫓겨다니는 사람들은 아주 경쟁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일을 승패를 가르는 게임으로 봅니다. 그리고 쫓겨 다니는 사람은 당연히 자신이 꼭 이겨야 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유능해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7) 쫓겨 다니는 사람은, 반대나 불신에 부딪히게 되면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격렬한 분노를 품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분노는 물리적인 폭력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대신 인격을 모독하거나 수치스러운 모욕감을 주는 것과 같은 잔인한 언어적 폭력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8) 쫓겨 다니는 사람은 대개 비정상적으로 바쁩니다.
그들은 바쁘다는 평판이야말로 성공과 자신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증표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행동한다. 그래서 그들은 틈없이 꽉 짜여진 스케줄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인상적으로 보이려 합니다. 그들은 바쁜 것이 습관이요, 삶과 사고를 지배하는 방식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바쁘다고 투정하고 동정을 받기를 즐기면서도 사실상의 변화는 아마도 원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쫓겨 다니는 사람에게 그렇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는 화를 낼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는 그들에게 결정권이 있는 그러한 체제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러한 체제를 가진 사업계, 교회, 가정 안에서 사람들의 성숙은 성취와 축적을 위해서 희생되는 것입니다. 쫓겨다니는 목사들은 제일 크고, 제일 좋고, 가장 유명한 조직체의 장이 되려는 그들의 욕구 때문에, 수많은 부목사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을 일에 지쳐 쓰러지도록 혹사시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졌노라고 자처하고 교회에서 은혜스럽다는 평판을 받지만, 회사에서 인정머리 없을 정도로 가혹한 사업가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쫓겨 다니는 사람들은 외면적으로 굉장한 것들을 얻고 있었지만 내면적으로는 모든 것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내면세계는 무질서합니다. 그가 갇혀 있는 새장은 번쩍거리는 황금으로 꾸며져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덫입니다. 그 덫 안에서는 아무것도 견뎌내지 못합니다. 따라서 강력한 내면세계를 계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쫓기는 삶을 사는가?
그는 결코 ‘잘했다’는 말을 해주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난 유형의 사람이다. 인정과 칭찬이 결핍되었을 때에, 존경받는데 굶주린 사람들이 일을 더 많이 하고 성공한 인물임을 상징하는 것들을 더 많이 갖고 세상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됨으로써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구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유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성장 배경과 불안정감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추구는 공적인 세계에 국한된 것으로 개인적인 내면의 세계는 텅 비고 결핍된 채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2) 과도한 성취욕의 또 다른 원인은, 어린 시절 체험한 심각한 상실감이나 수치감에 있습니다. 그들은 친밀한 부모의 사랑과 정서적인 친근감의 결핍 상태에서 자랐기 때문에 많은 군중에 둘러 쌓이는 보상적 경험을 추구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내면세계에 질서를 잡음으로서 사랑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하지 않고, 외면적인 차원에서 그것을 추구하려고 선택하였습니다.
3) 쫓겨 다니는 사람은 또한 극도의 수치심과 안절 부절함 속에서 보냈던 성장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4) 어떤 사람들은 그저 쫓기는 것이 생활 방식이 된 그런 환경에서 자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은 오직 이기고 모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부모가 그러했고 그렇게 하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 중의 누구라도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면 이렇듯 쫓겨 다니는 것이 우리의 생활 방식임을 섬짓 발견케 될 것입니다. 우리는 탁월한 그리스도인의 명성을 얻기 위해, 아니면 어떤 극적인 영적 경험을 얻기 위해서, 또는 섬기는 사람이기보다는 사실상 사람 위에서 군림하는 그런 부류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쫓겨 다니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가정주부도 쫓겨 다니는 사람일 수 있고 학생도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쫓겨 다니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쫓겨 다니는 사람에게 남아 있는 희망
쫓겨 다니는 사람이 과연 변화될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그러한 변화는 쫓겨 다니는 사람 자신이, 부르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충동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한 발견은 눈먼 상태에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빛을 찾는 데서 비롯됩니다.
과도한 성취욕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동기와 가치관들을 가차 없이 파헤치기 시작해야 합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과의 몇 차례의 대면에서 그래야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과도한 성취욕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은, 오늘날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들의 충고와 비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은 겸허하게 자기를 낮추고 지금까지 추구해 왔던 것들을 포기하는 자기 훈련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5.부름 받은 사람으로서의 삶
그리스도께서 뽑으셨던 부름 받은 사람들은 기대치 않았던 지방 출신이지만 가장 독특한 자질을 발휘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부르심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대개 질서로운 내 면 세계 안에서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1) 부름 받은 사람은 청지기임을 의식한다.
요한은 아무것도 소유하려 하지 않았고 대중의 인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청지기의 일이란 그저 주인이 와서 취할 때가지 주인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적절히 관리하는 것일 분입니다. 쫓겨 다니는 사람 사울과 부름 받은 사람 요한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전자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권을 소유한 존재로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후자는 그리스도께서 무리를 인도하러 오셨을 때 그 무리들을 그 분께 돌려드리는 것이 너무도 기쁠 뿐이었습니다.
2) 부름 받은 사람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너희에게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더냐”라고 요한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즉 요한은 자신이 어떤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안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어떠한 환상에 빠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자기 인식은 이미 그의 내면세계 안에 구축되어 있었습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내면세계가 무질서한 사람들은 자기의 정체성에 대하여 혼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개 역할과 사람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과 자신이 누구이냐 하는 것의 차이점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3) 부름 받은 사람은 요동치 않는 목적 의식을 갖고 있다.
“신부를 차지하는 사람은 신랑입니다. 신랑의 친구(요한 자신을 가리킴)는 옆에 서서 신랑의 음성을 기다리다가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 크게 기뻐합니다.”(요 3 : 29) 들러리의 존재 이유는 그저 신랑 옆에 서서 모든 관심이 신랑에게만 집중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만약 결혼식 진행 중에 들러리 선 친구가 갑자기 관객을 향해서 노래를 부르거나 재미있는 얘기 거리로 관객을 웃기기 시작한다면 그는 아마도 바보 취급을 당할 것입니다. 따라서 들러리는 자신에게 시선을 전혀 집중시키지 않는 대신, 모든 시선이 오직 신랑과 신부에게만 집중되도록 할 때 자신의 소임을 가장 훌륭하게 성취해 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많은 무리들이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것을 보는 것이 그가 받아야 할 보상의 전부였습니다.
4) 부름 받은 사람은 확고한 위탁을 이해한다.
요한은 부름 받은 사람으로서 위탁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을 캐묻던 사람들에게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요 3 : 30)고 말했습니다. 쫓겨 다니는 사람은 결코 요한이 말한 것처럼 대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쫓겨 다니는 사람은 더 많은 시선을 모아야 하고 점점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재산을 차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5) 평안과 기쁨
다른 사람들은 요한이 실패자로 끝나 가고 있는 것에 대해 초조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군중이 떠나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요한이 실로 만족해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요한 시대의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요한은 깊은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의 자기 평가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내면세계에 근거한 것으로 그 곳에서 비로소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가치가 형성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름 받은 사람이 되어
가장 버림받은 곳, 광야에 있던 미미한 존재인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요한에게? 그것은 근원적으로 하나님께서 요한을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광야에서였을까? 광야는 고통과 고독과 고난을 의미합니다. 누구라도 이러한 것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광야는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살기 어려운 곳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메마름을 극복하고 사는 법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그가 요단강에서 외칠 때 그의 말을 듣게 될 사람들의 영적 고갈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인간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의지하는 법을 배우기 마련입니다. 그런고로 광야는 요한에게 판단력과 지혜의 독립적 기반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부름 받은 사람의 특징은 요한의 청지기 의식, 정체성 의식, 자신의 역할에 대한 폭 넓은 이해 그리고 그 역할에 대한 확고한 위탁입니다. 바로 이러한 속성들이 내면의 세계를 잘 세워서 그것으로부터 생명의 샘이 흘러나오도록 하는 사람의 특징들입니다. 사울 왕의 생애와 요한의 얼마나 다른가! 따라서 우리들은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면서 사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요한이 될 것인가를 매일 씨름해야 합니다.
6. 누구 내 시간 본 사람 없어요?
어디다 두었는지 모르겠어요!
이 세상에는 시간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린 사람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훈련이 없이는 그 누구도 탁월한 인물이 될 수 없으며, 그러한 인물이 되었다 해도 자기 훈련이 없이는 그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탁월한 능력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시간을 관리할 능력이 없다면 결국엔 만사 실패로 돌아갈 것입니다. 가정이나 교회, 회사에서 부름 받은 사람의 경우에도 그런 결말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무질서의 증후군
제일 먼저 우리가 착수해야 할 첫 단계는 시간 사용에 대한 가차없는 자기비판입니다. 현재 우리의 상태는 무질서한가, 그렇지 않은가? 저자는 자신의 무질서한 생활의 특징인 몇 가지 증후를 예를 들었습니다.
일단 무질서한 상태에 접어들게 되면 내 책상이 흐트러져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무질서 상태를 보여 주는 증후는 내 차의 상태에서도 나타납니다. 즉 차의 안팎이 더러워집니다. 우리의 내면세계의 질서를 잡는 일은 강한 정신적인 인내와 이러한 인내의 열매인 지적 성정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억압된 우리의 사회에서 정신적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대개 쉽사리 인간의 영혼과 인간관계를 파괴시키는 사상과 제도의 희생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생각하는 훈련을 하지 않고, 또 일생 동안 계속되어야 할 지적인 성장에 자신을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에 희생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음의 정원에 질서를
영적으로 무질서하다는 것은 때때로 내적 평온의 결핍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요함이란 사실상 단지 무감각이나 공허함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기대에 결코 미치지 못한다고 느끼면서, 평정을 찾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공통된 염려는 영적인 힘을 유지하고 일관성 있는 태도와 욕구를 꾸준히 지니는데 있어서의 무능력에 있습니다.
정원을 일구듯이
내면의 세계의 정원이란 하나님의 영이 오셔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지혜를 주시며, 칭찬하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시며, 격려해 주시고 방향을 제시해 주시고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곳이다. 이 정원이 질서 정연한 모습일 때 그 곳은 고요합니다. 그 곳에는 번잡함과 소음과 혼란스러움이 없습니다. 내면의 정원은 섬세한 곳이라서 잘 가꾸어지지 않으면 어느 사이엔가 가시덤불들이 자라날 것이다. 하나님은 난잡하게 어지러워진 정원을 거닐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소홀히 내버려 둔 내면의 정원이 공허한 이유인 것입니다. 내면세계의 영적 차원에 질서를 잡는 것은 바로, 영적인 정원을 가꾸는 작업입니다. 그것은 조심스럽게 영적인 터를 일구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예배 처소를 만들어 놓고, 때때로 그 곳에 찾아가 하나님과의 부드럽고 겸허한 사랑의 교통을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하나님과 그러한 친근한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보다 많이, 어떤 이는 보다 적게....... 그 분은 우리의 능력을 알고 계십니다. 지금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리지 못하는 풍성한 삶
어떤 사람이 호화 여객선을 타고 세계 이 곳 저 곳을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비싼 배표를 사느라 돈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2주일 동안 먹을 치즈와 과자부스러기, 캔 몇 개를 준비해서 배에 탔습니다. 그런데 돈이 많아 보이는 다른 사람들은 식사 때마다 뷔페를 즐기기도 하고 고급 음식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습니다. 배가 목적지에 도착한 후 선장이 인사를 합니다. \"행복한 여행이 되셨는지요?\" \"네, 좋은 구경을 하기는 했습니다만 돈이 모자라서 치즈 조각, 과자부스러기, 캔 몇 개로 식사를 하느라고 배가 많이 고팠습니다.\" 그때 선장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합니다. \"이 배 안의 모든 뷔페와 엄청난 음식들이 당신의 배 삯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단 말입니까?\"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이 청년처럼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될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당신의 사명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아름다운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생명을 얻고 거기에 프리미엄으로 더 풍성한 삶을 얻는 것 -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우리의 인생은 새롭게 시작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새로운 탄생이고 새로운 출발이요, 거듭남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한 우주와 또 다른 한 우주의 만남으로 비유할 수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는 것은 한 우주가 그 본래 우주의 있어야 할 자리를 찾는 것이고, 그가 있어야 할 가장 편안하고, 적절하고 빛나는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질병을 일으키는 정서적인 요인 중에서 흡연에 버금갈 만큼 심각하게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요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회적인 소외 즉 고독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의 전인 건강은 본질적으로 관계성에 기인합니다. 즉, \"다른 사람들과 대체로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아니면 좋지 못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하는 문제는 그 사람의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성공과 실패의 여부도 바로 얼마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사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인생은 만남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환경과 만나고 사람들과 만납니다. 행복을 만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행을 만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공을 만나기도 하고 실패를 만나기도 합니다. 슬픔을 만나기도 하고 기쁨을 만나기도 합니다. 무엇인가 순간순간마다, 시시각각으로 만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이 세상입니다.
잘 만나 축복을 받은 사람은 복 중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특히 사람에게는 인복(人福)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역경과 환난, 시련과 고통을 당했어도 사람을 잘 만나면 그 어려운 환경에서 헤치고 나와 승리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훌륭한 부모를 만나고, 좋은 남편과 아내를 만나고, 진실한 친구를 만나고 대행자가 될 수 있는 스승을 만나는 것은 큰 복입니다.
그러나 더 큰 복은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고, 주님을 구세주로 만나고, 성령의 역사하심과의 만남입니다. 은혜 있는 교회를 만나고, 생명이 넘치는 교회,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를 만나고, 또 능력 있는 교회의 지도자를 만나는 것도 성도에게는 가장 값진 축복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 날마다 수많은 만남을 통해 관계를 형성해 갑니다. 잠시뿐인 만남도 참으로 많지만 친구들은 5년, 혹은 50년 관계가 지속됩니다. 결혼하게 되면 부부가 50만 시간을 함께 살며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또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는 죽을 때까지 그 관계가 지속됩니다. 그런데 오래 지속되는 관계나 길을 가다가 스치는 관계나 이례적인 만남이나 모두 우연이 아닙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만남은 신비로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목회자를 만나고 교인들을 만나고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된 섭리 가운데에서 되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준비된 만남, 계획된 만남뿐 아니라 예기치 않는 만남도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만남과 마주침의 차이/ 진정한 만남은 상호간의 눈뜸입니다. 영혼의 진동이 없으면 그건 만남이 아니라 한때의 마주침입니다. 그런 만남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끝없이 가꾸고 다스려야 합니다. 좋은 친구를 만나려면 먼저 나 자신이 좋은 친구감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친구란 내 부름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우연히 만나 우연으로 끝나면, 그것은 마주침입니다. 우연처럼 만났으나 필연으로 이어지면, 만남입니다. 그 필연은 그냥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남이 가져다주지도 않습니다. 오랜 자기 준비와 기다림 끝에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만남은 필연이며,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는 위대한 창조의 순간입니다.
만남이란 서로 마주 보는 두 사람이 한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의 사이에는 깊은 웅덩이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만남\'을 가지려면 누군가가 상대방이 있는 쪽으로 훌쩍 웅덩이를 뛰어 넘어가야 합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자기 자신을 무한정으로 확대시켜 가는 신비스러운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무한정으로 확대시켜 주며 결코 후회 없는 만남! 꼭 만나야 할 분! 자신을 보석처럼 빛나게 하실 분!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