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적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14-23)
**동방에 한 부유한 상인이 있었는데 사업차 외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밀 두 통을 두 친구에게 각각 한 통씩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미안하지만 이것을 좀 맡아주게, 곧 돌아올 테니 보관만 해주면 되네.”
그 후 몇 달 뒤, 그 상인으로부터 일이 잘 되어 더 늦을 예정이라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러자 ⓐ한 친구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곧 온다는 사람이 어떻게 된 거야? 보관만 해달라고 했으니 그냥 둬 버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그 친구가 돌아올 때쯤이면 못쓰게 될 텐데. 뭘!”
또 다른 ⓑ한 친구도 생각을 했습니다.
“일이 잘 되었다니 기쁘긴 한데..... 이 밀을 어쩐다? 그냥 두면 못쓰게 될 테고, 이 친구는 언제 올지 모르니 어쩐다지? 아! 밭에 심는 게 좋겠군!”
그 후, 그 상인은 몇 년이 지난 뒤에 고향으로 돌아왔고, 두 친구에게 밀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한 친구는 묵은 냄새가 풀풀 나는 밀통을 가져 왔습니다.
그것을 보고 상인은 그 친구를 나무라지는 않았지만 민망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친구는 그 상인을 데리고 들판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곧 추수를 기다리는 밀밭을 가리켰습니다. 그러자 그 상인은 뛸 듯이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자넨 정말 신실한 나의 벗일세, 밀을 그냥 묵혀도 나는 아무 말 못했을 텐데. 이렇게 경작을 하다니! 정말 멋진 친구일세!”
그리고 그 상인은 말하기를 “그 밀을 수확하거든 한 통만 나에게 주고 나머지는 경작한 자네가 모두 가지라 이 모든 밀은 모두 자네 것 일세”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상인이 기뻐한 것은 밀을 많이 얻게 되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때문이라면 밀을 한 통만 달라고 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친구의 성실한 태도가 그를 기쁘게 한 것입니다.
*히브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명사(名詞)보다 부사(副詞)를 좋아하신다.”
이 말은 일의 결과보다는 일을 해나가는 동안, 얼마나 열심히 했는가를 본다는 뜻입니다.
밀을 많이 거두었다는 것보다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던 그 태도를 보시는 것입니다.
위 본문에서도 한 달란트는 중요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가 가지고 있지 아니한 능력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소유하고 있는 능력을 충분히 사용하도록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달란트가 다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노력에 있어서는 누구나 다 같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10달란트이든, 5달란트이든, 아니 1달란트이든 이 모두가 ‘작은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인간 편에서 상대적으로 아무리 크고 위대해 보이는 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도토리 키재기식으로 초라해 보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맡은 일이 무엇이든지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 ‘최고’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모든 성도는 재능이나 권세, 돈, 지식, 건강 등에 있어 크거나 작거나 다양한 달란트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다양한 달란트들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유익하게 하여 복음을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고’가 된 사람을 칭찬하시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일에 자기의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칭찬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책망은 한 달란트라도 그것을 사용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게 내려진 것입니다.
이 책망 받은 자에게 내려진 형벌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 25:29-30]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한 달란트를 가졌다 하더라도 노력하면 그는 점차 더 많이 가질 수 있지만,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그 있는 것까지 잃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재산, 건강, 재능 등을 잘 보존할 뿐만 아니라 더 풍족하게 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복음 사업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사용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것을 복음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사용하여 더욱 풍성케 되는 축복과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마음속에 간사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요 1:46-51]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면서 일단 의심하고 거절하였지만, 결국 빌립의 “와 보라”는 말에 예수님께로 나갔습니다.
예수께서 자기에게로 나오는 나다나엘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간사한 것이 없다”는 것은 ‘진실하다’는 것입니다.
‘진실하다’는 것은 마음이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진실하고 청결한 나다나엘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보게 된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당신이 무화나무 아래 있을 때 내가 이미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 32:2]에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유대인들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를 평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왕상 4:25,미 4:4).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명상(기도)하는 것이 그들의 습관이기도 했습니다.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와 말씀을 묵상하며 이스라엘의 구원과 메시아의 도래를 위해 기도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께서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나의 꿈을 이해하는 분이 여기 있구나! 나의 기도를 아시는 분이 바로 여기에 있구나! 나의 가장 사적(私的)이고 은밀한 갈망 즉, 내가 결코 감히 입밖에 내지 못했던 갈망을 통찰하고 계시는 분이 여기 있구나! 말할 수 없는 나의 영혼의 탄식을 풀어줄 수 있는 분이 여기 있구나! 이 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 약속하신 기름부음을 받은 자 그 분임이 틀림없다.”
나다나엘은 자기의 심중을 통찰하시고 이해하시고 만족시켜 주시는 분에게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뿐만 아니라 육신의 생활까지도 꿰뚫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내용은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라는 사상을 가진 것입니다.
나사렛은 지리적으로는 갈릴리 지역으로 예루살렘 북쪽 91km, 갈릴리 호수 남쪽 24km, 해발 433m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마을은 예수님 당시 작고 보잘것없는 고립된 마을이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무식하고 성질이 괴팍하며 다른 도시의 문화적인 주민들과는 비교가 안 되고 결코 자랑할 만한 것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의 풍속도 추잡하고 저속한 것들이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나사렛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곳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생활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공생애(公生涯) 기간에 이곳에서 이적을 행하셨고, 천국 복음을 증거하셨습니다(마 13:54). 그렇지만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를 배척 했습니다(마 13:55-56).
그러나 ‘나사렛’이란 단어는 ‘거룩’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나사렛 마을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무엇이나 외형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너희가 만일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13)
오늘날 우리에게도 소위 달동네가 있는데 그들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수준과 인격이 낮다하여 그들을 무시하는 실수는 없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도 하나님의 경건한 자들이 성장하고 있으며, 그곳은 곧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며, 하나님의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마음이 깨끗해지는 거룩한 역사(役事)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참 기독교인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참 기독교인이 되어 축복과 영광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겸손한 믿음과 말씀만 의지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마 8:5-13]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으려면 백부장과 같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①예수님의 칭찬을 받은 백부장의 믿음은 겸손한 믿음이었습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8절)의 말씀은 지극히 황송스러워하는 태도로서 바로 그의 겸손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백부장은 당시 백명의 로마 군사를 거느린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오만한 태도를 보일 수 있었으나, 예수님 앞에서 더할 수 없이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라고 했습니다.
겸손을 갖춘 믿음의 생활로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②예수님께 칭찬을 받은 백부장의 믿음은 말씀만 의지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이에 덧붙여 하는 말(마 8:9)은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번거롭게 오실 필요 없이 말씀 한마디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이 한 마디가 건전한 신앙생활의 핵심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야말로 신앙생활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경이로운 것이라 하더라도 말씀에서 벗어났다면 그것은 사특한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건전한가 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말씀에 근거하여 살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말씀에 근거한 신앙생활로 하나님께로부터 칭찬받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 주님께 값비싼 감사의 행위가 있는 사람입니다.
[마 26:1-13] “.....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요 12:1-8] “.....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위 본문에 마리아가 노동자의 1년 임금에 해당되는 값비싼 나드 향유 한 병을 깨뜨려 예수께 부은 사건은 예수께 대한 마리아의 사랑과 존경의 표시입니다.
마리아는 평소에 예수님의 교훈과 말씀에 항상 귀를 기울였으며(눅 10:39),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훌륭한 스승으로 여겨왔습니다.
또한 마리아는 자신의 오라버니 나사로에게 생명을 주신 기적과 축복을 인하여 자신이 소유한 최고의 것으로 예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과 존경을 표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오빠를 살려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사랑과 헌신을 합시다.
마리아의 이러한 아름다운 사랑의 섬김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하시고 칭찬하시며 축복하시었습니다.
[마 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예수를 은 30냥에 팔아먹을 가롯 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5)”하면서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을 비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신본주의적 사고방식과 평가, 그리고 가롯 유다의 인본주의적인 사고방식과 평가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은 돈으로 계산하며 비판할 수 있는 정도여서는 않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위해 아낌없는 헌신과 사랑을 쏟아 붓는 사람에게 칭찬하시고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경배 찬양] 주의 강한 용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