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것을 생각 하고 땅에 것을 생각 하지 말라는 의미는?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는?

 

 

 

   요한복음 3장 초반은 바리새인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께 찾아와 대화하면서 거듭남의 비밀을 깨닫게 되는 사건의 내용이다. 여기서 바리새인의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도 그 말씀을 삶 속에 익히고 적용하여 실천해 나가는 결단이 결여된 존재를 뜻한다. 진리의 터득은 앎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니고데모라는 이름의 뜻은 “한 발 앞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달아가는 존재”를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적용하고 익혀나가는 결단을 못하고 있는 중에서도 한 발 앞서서 익히고 적용하며 고난을 있는 상태인 밤에 찾아온 자가 바로 니고데모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을 삶 속에 적용하며 갈망하는 시기를 밤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진리를 깨닫는 차원에서 행동으로 옮기려고 하는 과정을 히브리적인 사고에서 밤이라고 의미하게 된다. 이 밤을 갈망하는 이들이 교회 안과 밖에 너무나 많이 있어 지금 시대가 깊은 밤인 것 같다.(롬 13;11~14)니고데모가 밤에 예수에게 와서 하는 말이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고백했다.

 

    히브리적인 개념으로 살펴보면 “선생님이신 랍비여! 하나님의 사상과 본체로부터 기초를 설정하여 가르치시는 분으로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생님과 함께 연합되어진 바탕 가운데서 선생님이 행하시는 표적들을 행할 자는 그 어느 누구도 없습니다.”라는 고백으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과 표적들은 하나님과 연합이 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것들로 깨달았다는 니고데모의 신앙고백이다.그런데 예수님께서 동문서답과 같은 답변을 하셨는데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전혀 볼 수 없게 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즉, 하나님과 연합하여 한 몸이 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표적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이다”는 뜻이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예수에게 말하기를 “사람이 늙으면(이미 나이가 들어 장년이 된 상태라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겠습니까?”라고 되물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 번 거듭나면 됐지 또 다시 거듭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늙으면”라는 단어가 육적인 나이가 먹은 상태를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이 생명의 지식이 되어 삶 속에서 익히고 적용하며 실천해 나가게 되면 영혼이 열매 맺고 번창하고 충만해져서 살이 찌도록 자라나는 상태가 늙어지는 상태다. 물론 장성한 어른이 된 상태에서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 다시 태어나는 줄 착각할 수 있는 내용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런 유치한 답변을 일관하지 않는 분인 줄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다. “거듭 난다”라는 단어가 헬라어로는 “아노뗀”이며 히브리어로는 “미르마으라흐”라는 단어인데 어근이 “알라”로서 그 의미는 ‘일어나다. 사다리로 올라가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채워지면 그 말씀을 적용하며 실천하기 위해서 창 28:10~19에 나오는 사건처럼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상태를 의미한다. 창 32:22~32에 얍복 강나루에서 천사와 씨름한 사건도 거듭남의 체험을 의미하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기름부음을 받게 되면 우리를 인도하는 과정을 통과하면서 육의 불합리한 속성인 혼돈과 공허와 흑암인 무지를 깨뜨려 소멸시키는 상태가 바로 얍복 강에서 씨름하는 사건이며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이다.

 

   육의 속성이 깨뜨려져 내려가는 만큼 영혼은 반대로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 올라가는 상태 즉 하늘의 생명으로 채워져 영혼의 열매를 맺고 많아져서 충만하여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상태를 일명 휴거라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사실을 휴거는 성경적인 단어를 취사선택한 것이 아닌 중세기 후반 라틴계 신학자들이 적용한 단어다.

 

  사람들 속에 마음의 땅 밑바탕에 거하고 있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인 무지가 육의 속성을 입고 태어난 불합리한 속성으로 여긴다. 사람들 안에 있는 이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뜨려져 소멸되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음을 기초로 하여 하늘 위에서 내려온 부활의 생명으로 일어나 하늘로 올라가 하늘과 하나로 연합된 마음의 땅으로 바뀐 것이 거듭났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즉 성경 전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인물들은 거듭남의 사건이며 반복해서 거듭나는 상태를 체험하는 인물로 등장하는 것이다. 이런 내용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양한 사건들과 인물들을 등장시킨 것이 하나님의 의도였음을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 것은 죽은 영이 산영의 반열에 들어서는 것이지 구원의 완성이 아닌 구원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구원은 미완료서 1회적으로 낳아지고 예수를 믿음으로 거듭나는 완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익히고 적용하여 반복되는 훈련을 받으며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그리스도에게 인도 받아 낳아지고 또 낳아지는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마태복음 1장의 낳고의 사상도 거듭남의 연속성을 의미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낳아지며 이삭처럼 낳아지고 야곱처럼 낳아져야 할 것이다. 아브람함의 순종의 신앙이 이삭의 겸손의 신앙으로 낳아지고 이삭의 겸손이 신앙이 야곱의 인내의 신앙으로 낳아지며 거듭나는 사건이 바로 마태복음의 1장의 사건이 되는 것이다.땅의 것이 하늘의 것으로 낳아지는 것이 거듭남으로 창세기 7장과 8장에 나오는 홍수사건도 우리 인간 마음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이루어진 무지의 땅에 있는 물을 바꾸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물이 인간 마음 전체를 뒤덮어 하늘의 물로 바뀌어져(낳아져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교환되는 것이 거듭남이다.

 

    땅에 속한 마음의 토대가 하늘에 속한 마음의 토대로 바꿔지는 것이 거듭남으로 골로새서 3장 2절의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 것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 육의 속성이 죽게 되면 하늘의 차원으로 이끌어 올려 져서 스스로 낳아지게 되는 문과 길을 가는 것이 바로 좁은 문으로 좁은 길로 가는 것이다. (마 7:13~14)

 

   하나님께서 내 안에 이루어가는 것으로 소유되어질 때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요, 거듭남이 되는 상태인 것이다.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거듭남은 계속되어지고 있으며 계속 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 선생이 말씀 중에 선 줄로 생각하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도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것이다. (고전 10:12)

 

   예수를 믿게 된 동기가 너무나 소중하여 몇 년 몇 월 며칠이라는 거듭난 날짜를 영적인 생일날로 여기는 분들이 있다. 거기에 초점이 된 종교단체도 있지만 그 날을 경험한 분들 가운데 오히려 예수를 믿지 않을 때보다 더 악하고 타락된 존재들을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초행길을 경험한 분들이 자주 그 길을 왕래하다보면 낯설지 않고 정든 길임을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늘나라를 자주 왕래하지 않는다면 즉 야곱이 꿈에서 사다리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천사를 본 것처럼 하늘나라를 자주 왕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천국을 가보고 간증하는 이들의 간증이 한번 보고 그렇게 극성스럽게 간증을 하는데 수십 번 수백 번 가본 사람들은 오히려 간증을 하지 않는다. 그 간증을 하려면 첫째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 얘기를 다 들어 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간을 할애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노아의 방주를 산 에다 지은 것은 교만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인간들의 사고의 최고봉에서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아왔다. 거기서 하늘나라 생명의 물을 만나 내려오면서 낮아지고 낮아져 밑으로 내려가는 것이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히브리인이라 존칭하는 이유다.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교만의 극치인 산꼭대기에 도달하여 이제 끝이다! 라고 생각하지 말고 영원무궁한 하늘의 것으로 채워져 또 다른 시작을 출발하며 위에 것을 생각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거듭남의 극치를 말한다.

 

   요단강도 혼자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그리스도에게 인도 되어지는 신앙의 앞선 자인 인도자가 있듯이 천국은 혼자 가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친히 오셔서 저와 여러분을 인도하고 있다. (요 14:2~7)많은 기독교인들 중에 위에 것을 생각해야 하는데 땅의 것을 너무나 많이 생각하고 있다. 이 땅에서 얻은 지위와 명예, 인기가 하루아침에 다 무너지고 없어져도 위에 것을 생각해야 한다. 욥처럼 깡끄리 재산과 아들과 소유가 없어져도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생각할 수 있는지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던 욥과 같은 유치한 인간들이 바로 나임을 직시해라. 인생 저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사건을 만나도 위에 것을 생각나는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거듭남이 시작이며 끝이 되는 것이다. 출처/두나미스 세계선교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