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포기할수 없었다

 

생수의 강 - 6월 21일 -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누가복음 1장 5절~7절)

■ 누가복음 1장 5절~7절
(5절)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절)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절)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오늘 본문에는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가 등장합니다. 남편 사가랴는 아비야 반열에 속한 제사장으로(대상24:1-19), 제비뽑기를 통해 대제사장이 되었고(눅1:9), 부인 엘리사벳 또한 아론의 자손으로(눅1:9) 그 부부는 당시 유대사회의 명문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었습니다(눅1:6). ‘칼빈(Calvin)’은 ‘계명’은 도덕적(롬7:8-13), ‘규례’는 의식적(히9:1) 면을 강조하는 단어로 봅니다. 그만큼 이 부부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얼마나 말씀대로 의롭고 진실된 삶을 살았는지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부에게 벗길 수 없는 멍에가 있었는데, 바로 아이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눅1:7). 오늘날이야 검사를 통해 원인을 알 수 있고, 의술을 통해 웬만한 불임문제는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아니 요즈음 젊은 부부들 사이에서는 자식을 두지 않으려는 풍조까지 만연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성세대들은 자식이 결혼하면 그 순간부터 은근히 손자가 태어나길 손꼽아 기다립니다. 일면식도 없는 어떤 장로님이 제게 둘째 아들 결혼 주례를 꼭 좀 맡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큰 아들이 결혼할 때 본 교회 목사님께 주례를 받았는데 수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어서 TV통해 설교를 듣는 중, ‘저분에게 둘째 주례는 꼭 부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가족들이 찾아와 간절히 부탁하기에 주례를 해 준 적이 있습니다.

이천년 전 유대사회는 좀 더 특이해서 저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렸고, 그 메시야가 자신의 가문에서 탄생하기를 은근히 기대했습니다. 때문에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을 최대의 불행이요, 죄에 대한 형벌로 이해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오경에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말씀이 나오기 때문입니다(레20:20-21; 신7:14).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더군다나 제사장가문에 자녀가 없었으니 이 부부는 이를 큰 부끄러움으로 생각했습니다(눅1:25).

혹시 이들이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를 지키며 흠 없이 살았던 동기도 혹시 이 아이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열심히 믿음으로 살고, 충성하면 하나님이 분명히 태를 열어주실 것이다. 그 옛날 사라, 리브가, 라헬, 한나의 태를 열어주시던 하나님께서 분명히 우리 가정에도 아이를 주실 것이다.’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한 것은 아닐까요? ...

그러나 여전히 자식이 없었고, 그들은 늙어갔습니다(눅1:7; 창18:11). 그러자 주변 사람들은 이 부부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숙덕거리며 ‘애기를 낳지못하는 부부’라고 불렀습니다(눅1:36). 얼마나 가슴에 큰 상처가 되었을까요? ...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늙어가면서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확신은 저들에게도 자리를 잡았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아이를 낳게 되리라는 기쁜 소식을 전할 때에도(눅1:13-14) 냉소적인 반응을 보입니다(눅1:18, 20).

그런데 저들 부부에게 또 다른 확신이 하나 있었습니다. 앞의 확신에 비하면 그야말로 겨자씨만한 확신입니다만(마17:20; 왕상18:44; 마14:17),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눅1:13)” 사가랴는 아이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제 늙고 아내의 경수도 끊어진지 오래지만 그에게는 ‘기도하면 응답되리라’고 믿었고, 이 믿음을 붙잡고 직분을 감당했습니다(눅1:8). 예배하며(눅1:9) 기도했습니다(눅1:13). 그 자그마한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었고 그들은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을 낳았습니다(눅1:57).

만약 누군가가 아들 요한을 안고 젖 먹이는 사가랴 부부를 찾아가 “어떻게 그 상황에서도 기도할 수 있었소?”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잖아요\"

비단 사가랴 뿐만 아니라 부모에게 고통, 슬픔이라는 뜻의 이름을 받았던 야베스(대상4:9-10), 지중해 깊은 바다,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했던 요나(욘2:1-10), 엔게디의 막다른 굴속에서 사울의 추격을 받으며 간절히 부르짖었던 다윗(시142:1), 태가 닫힌 상태에서 서원하며 통곡하며 부르짖었던 한나(삼상1:5, 11),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인생의 마지막을 불꽃같이 살았던 삼손(삿16:28), 벽을 마주보고 기도하여 15년의 생을 연장 받았던 히스기야(왕하20:1-6), ...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잖아요\"

사랑하는 여러분!
운명과 예정은 분명 존재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운명대로 굴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 속에 우리의 기도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비록 내 안에 불신의 큰 확신이 있더라도 내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작은 확신, 믿음을 붙잡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태를 열어주사 세례 요한을 품에 안겨 주실 것입니다(눅1:37; 애3:19-22). 하나님은 자신이 뜻하신 대로 모든 것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누구도 이를 방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예정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 ‘벽암록(碧巖錄)’에 나오는 말로 어미닭이 알을 품고 있다가 때가 되면 알 속의 병아리가 안에서 껍질을 쪼기 시작하는데 이를 ‘줄’이라 하고, 이때 어미닭이 그 소리에 반응해서 바깥에서 껍질을 쪼는 것을 ‘탁’이라고 합니다. 이 줄탁의 시작은 알 속의 병아리가 그 연약하기 그지없는 부리로 먼저 시작해야 합니다. 병아리의 ‘줄’이 있어야 비로소 바깥 어미닭의 ‘탁’이 시작됩니다. 줄이 없으면 탁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구멍을 뚫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병아리의 ‘줄’이 아니라 어미닭의 ‘탁’입니다.

기도는 바로 ‘줄탁동시’와 같습니다. 현재 처한 캄캄한 굴 속에서 내가 먼저 ‘줄’ 해야만 하나님이 ‘탁’ 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먼저 ‘줄’ 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가 캄캄한 굴을 뚫고 나아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십니다. 때문에 성경은 끊임없이 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렘 29:12; 33:3). 비록 상황이 어렵고 소망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작은 확신을 가지고 먼저 ‘줄’ 하면 ‘탁’ 하고 반응하시는 하나님을 마침내 만나게 될 것입니다. ‘탁’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 권 다니엘  목사(주님의영성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