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목회
I. 들어가는 말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들은 남녀노소 상관없이 모든 상황과 여건들 속에서 근본적으로 치유 받아야 할 존재들임을 인식하게 된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도 치유되어야할 부패된 인간을 대상으로 진행된 \\\'하나님 나라\\\'의 회복 사건이었으며 조물주와 피조물에 대한 사랑의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인간의 부패된 존재를 전인 치유하기 위한 한편의 완벽한 드라마였다. 따라서 복음을 들고 사역하는 목회자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사역 즉 구속 사역을 위탁받아 수행해 나감을 의미한다.
지금과 같이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교회도 여지없이 변화를 요구받고 있는 것이 하나의 거대한 물결로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을 잘 분석하고 대처하지 못한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영적 정신적 전인적인 도움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통전적인 구원사역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이에 13조는 이번 연구를 통해서 치유와 목회에 대한 것을 살펴보고 그 신학적 의미와 현실의 문제점과 미래의 변화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서의 치유목회 제시를 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 1장에서는 치유목회에 대한 목회적 정의, 2장에서는 치유에 대한 고찰로 구약 및 신약에서의 치유고찰과 교회사적인 흐름에서의 치유고찰 그리고 3장에서는 치유목회의 실재로 치유목회의 방법들과 위험요소를 살펴보며 4장에서는 치유목회의 흐름과 전망으로 20세기의 흐름들과 21세기를 향한 비전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II. 목회의 정의와 범위
1. 목회의 정의
목회는 교회에 봉사하는 일로서 실행하는 모든 행위를 가르킨다. 즉 설교, 성례전, 집행, 교회의 관리 운영, 평신도 지도, 교육의 모든 것을 망라한다. 이러한 목회에 대하여 개인 영혼의 성장과 발달, 치유, 구원을 중요시하고 이에 대하여 특별한 배려를 강조하는 관점이 있다. 이것을 \"영혼을 돌보심이라\"고 한다. 특히 이러한 목회는 근대에 이르러 두드러졌지만 근원은 이미 예수의 목양자로서 목회자의 이미지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다. 인간을 돌보는 일은 각 시대를 통하여 목회의 불가결한 요소로 계승되었다.
목회는 인간의 영혼을 돌보아 주는 일이다. 그런데 목회가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 인간의 영혼은 인간 속에 있는 영적인 것뿐만 아니라 성서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마련인 몸과 영혼과 정신이 하나가 된 인격적인 전인으로서의 영혼인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있는 존재라는 인식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목회는 하나님을 위한 전인의 성화를 과제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목회는 일방적으로 인간을 돌보아주는 일로 끝나버릴 수는 없다. 개인을 돌보는 일로 즉 영혼을 돌보아주는 일 뿐만 아니라 개인을 하나님의 나라로 불러들이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목회는 삶 전체를 보살피는 일이 되어야 한다. 즉 개인의 죄를 용서하고, 병을 고치며, 사회와 가정을 보살피는 목회를 말한다.
그러므로 균형 잡힌 목회는 전인적인 인격 형성을 목표로 해야 하며, 개인적인 필요는 물론 사회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고, 구속적인 면과 더불어 치유적인 면 모두를 갖추어야 한다.
2. 목회의 기능
목회의 기능은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각 시대마다 문화적, 심리적, 종교적, 지적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되면서 그 기능이 결정되어 왔다. 전통적으로 목회의 기능은 네 가지를 분류한다.
1) 치유의 기능
치유한다는 말은 \\\'온전하게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온전은 재생성과 같은 말이다. 치유는 손상된 어떤 기능이 완전히 작용하도록 원상 회복시켜 주는 것이며, 방향이나 스케줄의 기능적인 손상을 입었던 것의 완전성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목회에서의 치유는 정신적인 것뿐만 아니라 육체적, 영적인 모든 면에서의 완전성을 의미한다.
목회에 있어서 치유는 궁극적으로 회복과 성장이라고 볼 수 있다. 치유는 결함, 왜곡, 침해, 결심 등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고쳐서 결함, 침해, 왜곡이 생기기 이전보다 더 발전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능이다. Hiltner는 치유를 기능적으로 전체성을 회복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손상되고 파괴된 인간들을 전체성의 상대로 되돌아가도록 돕는데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이전 상대보다 차원이 높은 영적 통찰력과 복지를 성취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결국 목회에서의 치유는 단지 질병으로부터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적인 성장까지를 목회에서의 치유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전인적으로 인간이 치유될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이다.
2) 지탱의 기능
지탱이란 함께 서서 도와준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죽음과 같이 전체 상황이 변경될 수 없거나 변경할 수 없는 상태에서 행해지는 목회의 기능이다. 지탱기능은 보조기능인데 온전하던 것이 깨어지고 훼손을 입어 완전한 회복이 불가능할 때 행하는 용기와 격려의 목회기능이다. 지탱의 목회는 충격과 상실이 클 때와 돌이킬 수 없는 훼손과 몰락의 과정에서의 두 경우이며, 하나님과 교인들 전체를 대신해서 함께 서 있다는 표적을 주기 위해 하는 목회로서 실제상의 관계를 갱신하는 확인 격려의 목회이다.
3) 인도의 기능
요한복음 10장 4절에 목자가 양을 내어주고 앞서가면 양들이 목장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따라온다고 했다. 이는 목자가 어려움이나 부딪혀 오는 문제를 먼저 해결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인도한다\"는 의미도 있다. 즉 인도의 기능은 여러 가지 가능성 중에서 가장 적절한 행동과 결단을 선택하도록 돕는 지혜이다. 여러 가지의 사로 다른 생각들과 행동들 사이에서 한가지 생각이나 행동만을 선택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그가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에 관한 지혜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목회의 한 기능이 인도목회이다.
4) 화해의 기능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역사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소원해진 곳에 다리를 놓기 위해 화목제물이 되셨고 이 직책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사역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화목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하며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화목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즉 화해 목회는 인간 자신이 파괴해버린 간계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통, 사귐의 관계로 회복시키는 것이며, 인간 상호 간에 소원해진 상태를 고쳐 교통과 사귐의 관계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중심 사역임과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회복되어지면 나로부터 화해의 물결이 흘러나오게 되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회복은 나와 그와의 관계 회복을 가져오고 하나님과 그와의 관계도 회복되어진다. 그렇게 됨으로 개방적인 나와 개방적인 사회가 되어진다.
이로 볼 때 예수의 화해 사역을 대신 진 오늘의 교회는 그들의 모든 관계성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성육화 시킴으로 많은 사명을 이룰 수 있다. 즉 이 말은 그리스도인은 인간 관계의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화해의 복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나와 하나님, 나와 이웃, 나와 자연에서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 관계를 화해의 관계라 말할 수 있다.
3. 치유목회의 신학적 근거
1) 치유와 질병에 관한 견해들
(1)물질적인 견해
이 견해는 인간의 신체는 의료적이고 물질적인 수단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인간의 질병은 물질에 관련된 다른 문제와 마찬가지로 취급될 수 있다고 본다. 환자는 본질적으로 신체 기관들과 생리적 과정들의 집합체이며, 이것은 물질적 수단에 의해 통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적인 과정을 통하여 역사하시며,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치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발휘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잇다. 의학과 심리학의 새로운 재발견은 병균과 바이러스와 같은 자연적인 악들과 정서적인 문제들을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질병을 인간의 지성과 정열을 기울임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자연적이고 물질적인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물질적인 견해는 인간의 질병이 육체적인 면에서만 이해되어진다고 하는데에 문제가 있고, 영적, 정서적인 차원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지 못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치유의 차원에 있어서도 유기적인 연관이 있는 영적인, 정서저긴 온전성의 회복을 기대하기 어렵고, 실제적으로 이간의 능력과 지성을 초월하는 질병의 멍에를 벗을 수가 없게 된다. 성서에서는 인간의 의술과 과학이 도와줄 수 없는 병자들이 기도로서 자유케 되고 치유되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질병의 치유에 있어서 자연적이고 물리적인 면만을 주장하는 것은 성서적으로나 실제적으로도 한계가 있으며, 부분적인 진리일 수밖에 없다.
(2) 하나님의 훈계적인 선물로서의 이해
많은 신자들에게 있어 기도를 통한 많은 질병의 치유가 일어나긴 하지만 그것은 예외적인 은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질병을 위한 치유로서 기도하는 것이 특별한 효과가 있다고 믿지 않는다. 오히려 질병은 구속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기회로 여긴다. 그래서 질병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겁쟁이이며, 안락한 기독교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견해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의 결론을 나타낸다.
먼저 질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질병은 하나님이 어떤 이유에 의해 주시거나 또 허락하시는 것일 수밖에 없다. 또한 질병이란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질병을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이중적인데 첫째, 그것은 인간이 회개하도록 죄를 지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요, 둘째, 그들의 인내를 시험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와 주장은 질병이 세상에 내려진 하나님의 저주이며, 절대로 축복이 아니라고 하는 성서의 주장을 왜곡시킨다. 이같은 태도는 치유에 대하여 소망을 갖지 않는 태도로서 잘못된 견해인 것이다. 그것은 치유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며, 많은 치유의 기대를 막는 것이다.
(3) 고전적인 성령 사역자들의 견해
고전적인 성령 사역자들은 그들의 치유에 관하여 가르칠 때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치유되기를 원하신다고 하나님 말씀의 약속들을 들추어낸다. 이러한 견해의 극단적인 경유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지금 치유되기를 원하신다고 측량하는 것이다. 치유를 위해 병자들의 입장에서 요구되는 유일한 것은 오직 믿음이라고 믿는다. 예수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가르치며 이것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약속대로 우리는 치유되고 그 치유로 인해서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성령 사역자들의 태도는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실패와 난관에 빠지고 만다. 즉 어떤 경우에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치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전적인 성령 사역자들은 이러한 태도로 그들의 치유집회에서 많은 치유를 일으키고 있지만 동시에 치료되지 못한 몇 사람들은 죄의식으로 가득 차고 상처를 입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III. 치유의 대한 고찰
1. 어원적 고찰
치유라는 의미의 히브리어는 와 로서 는 의사가 상처를 고치기 위하여 사용하는 \"긴 붕대\"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 이것은 구약 예레미야 8장 22절, 30장17절, 33장 6절에 사용되었다. 는 치유, 고침 (구약 예레미야 14장19절, 역대하21장 18절), 또는 원기 회복이라는 뜻으로도 쓰였다. (잠언 4장 22절, 12장 18절) 이 밖에 동사로 쓰인 단어는 , , ( 와 함께 쓰임) 등이다. 이것들 가운데서 가장 많이 쓰인 것은 인데, 이것을 다시 세분해 보면 다음과 같은 뜻으로 나누어서 살펴 볼 수 있다. \\\'상처를 고치다\\\', \\\'치료하다\\\'. (창세기 22장 17절 , 욥기 5장 18절), \\\'본래 대로 회복시키다\\\' (역대하7장15절, 시편 30편 3절) \\\'위로하다.\\\' (예레미야 8장 11절, 에스겔 34장 4절).
신약 성서에서는 과 가 중요하게 사용되어 지고 있다.
은 \\\'섬기다\\\', \\\'기꺼이 돕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이것은 \\\'치료하다\\\'라는 뜻으로 쓰일 때 육체의 치료만이 아닌 영혼의 치료까지를 포함한다. 이 단어의 특징은 봉사하는 사람과 봉사를 받는 사람과의 인격적 관계를 나타낸다고 하는데 있다. 은 의사들도 제공하는 봉사 뿐 아니라 실패하지 않는 참된 치료를 묘사한다. 이에 비해 는 \\\'섬기다\\\', \\\'봉사하다\\\'라는 의미는 가지지 않고 \\\'치료하다\\\'라는 의학적 의미만 가지고 있다.
2. 구약성서의 치유 고찰
구약성서에서 최초의 치유 사역의 모델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사건으로 인한 하나님의 가죽옷을 입히시고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시면서 찾아 오시는 하나님을 들 수 가 있다. 이는 타락한 인간에 대한 전인격적인 치유의 모습을 나타내주고 있다. 즉 영적으로 두려워하는 아담에 대한 사랑의 접근이고 벌거벗은 수치에 대한 가죽옷으로서의 치유의 모습을 볼 수 가 있다. 죄로 인하여 단절 되었던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회복이고 이에 대한 치유 주체자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가 있다.
인간의 죄는 창 2:17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는 말씀처럼 인간의 타락성으로 인한 현 인간의 실존은 계속해서 치유를 받아야 할 존재이다.
이것은 영적인 죽음 또는 질병으로까지 확대해서 볼 수 있는데 하나님이 직접 이 관계를 해결하셨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의 집단으로서 상대하셨던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와 가르침에 대한 개별적인 체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의 집단으로 상대하는 과정에서 결정되는 일이 많았다.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이차적인 것이었다. 즉 개인으로서는 선하다 할지라도 민족 전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는 일이 흔히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라합과 룻과 같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될 수 있었던 예외가 있기는 했으나,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이 아닌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들\\\'이 었으며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 소망이 없는 자들\\\'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정제성은 개인의 육체적인 질병이나 건강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애굽에 포로로 잡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이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불순종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재앙과 질병을 내리게 하셨다. 한편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할 경우에는 건강을 허락해 주셨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육체적인 건강은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구약에서는 이 질병과 치료가 하나님의 왕적 권위와 많은 관련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택하신 지도자에게 많은 권위를 위임하시고 그를 비방하는 자들에게 질병으로 벌을 주시기도 하였다. 그 예로 민수기 12:1~15 미리암의 문둥병 이 일은 모세가 그의 아내 십보라가 죽은 후 구스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자 미리암은 모세를 비방하게 된 것에서 일어났다. 이시기로 인하여 미리암은 심한 문둥병에 걸렸고 격리되었지만, 모세의 간구로 미리암은 치료되었고 아론과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모세의 처가 이방 여인이라고 할 지라도 동등하게 여기심을 알게 되었다.
둘째로 왕하 20:1~11 히스기야는 왕 (B.C. 729-687 동안 유다를 통치)의 병 치유- 701년에 예루살렘이 앗수르 군대의 침공으로부터 기적적으로 구원된 사건 직후, 히스기야는 종기로 인하여 \\\'병들어 죽데 되었다\\\' (1절)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에게 히스기야가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치유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앗다. 그 대신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1절)\\\' 히스기야는 자기가 행한 선한 일들을 열거하면서, 하나님 앞에 슬픈 눈물로 자비와 치유의 역사를 간구했다. (3절)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어 주셨으며, 이사야에게 \\\'너는 돌아가서 히스기야에게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 네 날을 십 오년을 더할 것이라고 이르라\\\'고 하셨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 치유의 약속을 해 주셨다.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신다.
치유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용서하심이 나타나 잇는 뚜렷한 징표였던 것이다. 이것은 성서의 역사를 통하여 면면히 흐르고 있는 사랑인 것이며, 하나님은 치유하시기 원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볼프(Wolff)는 \"하나님만이 질병과 치료의 주인이시다. 이것은 성서의 일관된 확신이다. 구약성서는 자연적인 치료와 지적인 치료를 근본적으로 구별하지 않았다. 인간의 처방과 응용이 서로 부합되거나 부합되지 않거나 간에 본질적으로 일관된 사상이 있다. 즉 환자는 자기의 병을 통하여 직접이든 간접이든 병과 치료를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폰라트 (Von Rad)는 구약성서의 하나님을 치유의 하나님으로 보고 있으며 (출 15;26), 하나님의 호의를 불신하고 의사들의 충고를 받으면 불신앙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하였다. (대하16;12)고 주장하고, 하나님만이 나를 치유 할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욥5:18,시30:3, 103:3, 왕하 12:8)
이상과 같이 구약성서를 살펴본 결과 치유의 주체자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가 있고, 그 분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개입하심을 알 수 가 있다. 치유의 최초의 모델은 아담의 범죄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치유로서 예방과 실제적인 치유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3.신약성서의 치유 고찰
1) 예수님의 치유 고찰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고난 당하는 이들을 보시고 고치셨으며, 또한 그런 고난당하는 자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특히 병든 자들이 많이 모여 들었는데 예수님은 그들을 만나주시고 고치시며 구원하셨다. 마 9:35~38절에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그 행적 중에서 중요한 일로 \"모든 성과 촌을 두루 다니시면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 방황하는 자들을 가르치고 구원하는 일이었다\". 예수의 치유를 고찰하는 데는 예수께서 치유해 주셨던 가장 보편적인 질병이 어떤 것들이었는 지를 아는 것이다. 예수께서 치유해 주셨던 가장 보편적인 질병은 신약성서 시대에 일반적으로 귀신 들림으로 묘사되었던 정신 질환 등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질병의 언급은 마태복음 8:28~32, 마태복음 15:22~28, 마가복음1:23~27과 다른 복음서들에 기록된 이 구절의 병행 절들과 누가복음7:2과 예수께서 그이 제자들에게 치유의 권능을 부여해 주셨던 것에 관한 여섯 군데의 기사들과 많은 사람들이 치유에 관한 많은 기사들 중에 아홉 군데를 찾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치유해 주셨던 정신 질환 중에는 간질도 있었다. 마가복음 9:17~27절에 따르면 이 질병에 걸렸던 작은 소년이 있었는데 예수의 제자들은 그 소년의 질병을 치료해 줄 수 없었다. 또한 예수께서 치유해 주셨던 다른 육체적 질병들도 귀신들림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 질병들은 육체적인 원인으로 인한 것들이기보다는 오히려 심리적인 원인으로 인한 것들도 많았다. 예수는 문둥병도 치유해 주셨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께 왔던 사시에 관한 기사가 있는데, 예수께서 그들의 문둥병을 치유해 주신 사실을 알수 있다. 문둥병자로 알려진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치유 기사는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풍병자나, 다른 불구자들에 대한 많은 치유 기사를 찾을 수가 있다. 질병을 앓고 있던 두 여인을 치료하셨고, 열병으로 움직이 못하던 사람들을 치유하셨다. 예수는 안식일에도 수종 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죽은 사람을 살려내셨다. 이와 같이 예수는 개인의 치유에 관한 이 모든 기사들 외에도 수 많은 사람들의 치유에 관하 기사들이 그 질병에 관한 자세한 언급이 없이 여러 곳에 제시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의 치유 목회의 특징을 살펴 보면, 첫째로 누가가 증언하듯이 예수의 치유사역의 상당히 많은 부분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의 치유사역의 사역 중에서 치유 사역의 중요성을 알 수가 있다. 두번째로 치유에 있어서는 항상 그의 사랑과 자비가 나타난다. 즉 불쌍히 여기셨다는 표현 속에서 발견 될 수가 있다. 세번째로는 예수의 치유는 전인 치유라는 점을 볼 수가 있다. 즉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사역이셨기 때문이다. 네번째로 예수의 치유 사역은 즉각적이고 온전하게 이루어 졌다. 다섯번째로 예수의 치유 사역은 영적인 세력인 사단과의 싸움에서의 승리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구시대와 새시대의 권세자 사탄의 통치의 종말을 구하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을 강한자 사탄보다 더 강한 자로 밝히고 있다. 자신의 공생애 활동을 통하여 귀신의 우두머리 사탄의 권세가 땅에 떨어진 것을 알리고 있다. 여섯번째로 예수의 치유 사역에는 하나님 나라 ( ) 의 선포와 연관 되어 있다. 새 시대 즉 메시야를 통한 하나님의 왕적 통치의 개시선언이다. 하나님의 왕적 통치는 사탄에게 사로 잡힌 인간의 해방과 치유와 죄용서로부터 시작된다.(막2:1~12) 일곱번째로 그의 치유의 기적은 심리적 영향이 아닌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영적인 능력이었다. 예수의 치유 사역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여덟번째로 예수는 귀신을 내�고 병자들을 치유함으로서 자신의 공생애 활동 속에서 하나님의 종말적 구원의 권능이 역사하고 계심을 드러내고 있다. 예수의 치유 이적 선포는 구약에서부터의 이미 선포된 하나님의 인간 회복 의지의 성취 사건이다. (겔34:10~16, 사42:6~7, 61:1~3)
2) 사도들의 치유 고찰
예수와 함께 치유를 경험했던 사도들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신약성서의 서신에 기록된 치유하는 관습은 사도행전을 보면 잘 나타난다. 초기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교가 받아들여지는 곳이면 어디든지 치유가 이야기되었다. 사도들의 치유 사역은 오순절 이후에 평생 동안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치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베드로와 요한 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을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켰다. (행 3:6~10)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이러한 치유 사역을 행했다. 바울이 여러 설교 할 때 치유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사람들 발견하였다. 바울은 그에게 일어서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이일로 사람들은 바울 일행을 신으로 알고 제사지내려 하였다.(행14:8~18) 베드로는 8년 동안 병상에 있는 애니아라는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초대교회의 치유 사역의 특징을 보며는 첫째로 치유는 초대교회의 일상적인 부분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둘쨀로는 초대교회는 치유의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증언하였다. 치유는 항상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이름ㅇ로 행하여지곤 하였다. (행3:6,16, 19:11~13). 초대교회의 치유사역에는 언제나 성령이 임하셨으며, 사람들에게 넘치는 기쁨을 가져다 줌은 물론 복음전도와 교회 성장의 계기가 되곤 하였다. (행 2:43,46~47; 3:8; 4:21; 5:14; 8:6~8)
John Wimber는 초대교회가 성장하게 된 요인으로 치유, 축사, 죽은자의 부활, 돌연한 장소이동, 자연이나 음식을 통한 기적등을 포함하는 표적과 기사들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세번째로는 초대교회의 치유 사역은 예수그리스도의 살아 계심을 극적으로 증거하는 것이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 가운데서 능력으로 역사하시곤 하였다.
4. 교회사에 있어서의 치유 사역
1) 고대 교부시대의 치유사역
사도시대에는 치유의 행위가 \\\'하나님의 계시\\\'라는 측면에서 혼란의 여지가 없었으나 교부시대에 들어 오면서 혼란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초대 교회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귀신을 �아내고 병자를 치유하고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전인치유의 능력을 주신 것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 같다. 그리하여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로마 황제에게 보낸 그의 \"변증\"에서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변증에 덧붙여 치유에 대해서 기록했으며, 오리겐은 이교를 논박하기 위하여 쓴 그의 논문 \\\'켈수스에 대항하여\\\' 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악령에 대항하여 그들을 추방하는 비법을 기록하고 있다. 키프리안은 세례가 때로는 질병을 고치는 수단이 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고대 교부들의 변증을 통하여 당시의 치유의 사역이 얼마나 활발하였는가를 알 수 가 있다. 어거스틴도 히포의 감독으로서의 그의 저서 \\\'The Confession of St. Augustine\"의 제 9권 7장 16절에서 치유의 기적에 관하여 글을 쓰고 있다.
2) 중세의 치유사역
중세 시대에 대표적인 신학자로 토마스 아퀴나스를 들 수 가 있는데, 그는 구체적으로 치유에 관하여 말하지는 않았으나 영적인 실체들 안에서 행해진 기적(귀신추방)과 사람들에게 행해진 기적(육체적인 질병)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며는 중세의 암흑기라고 하지만 치유의 맥락은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수가 있다. 특히 성프란시스등은 기적적인 치유 목회를 한사람으로서 절룸발이, 중풍, 귀신들림, 벙어리, 문둥병 등을 치유 하였다.
3) 루터와 칼빈의 치유에 대한 견해
당시에 마틴 루터가 치유 사역을 부인한 것처럼 보이는 거은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가 비성서적으로 치유 사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존 칼빈도 치유 은사들은 복음 전파를 놀랍도록 하기 위하여 시작을 위해 사도시대에 국한 된 것으로 말하기도 하였지만, 이것도 로마 카톨릭에 대한 반감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저서 [기독교 강요] 에서 로마교의 병자들이나 임종을 앞둔 자들이 성체를 받는 병자성서를 크게 반박하면서도 기름을 붇는 행위는 치료의 도구가 아니라 상징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루터도 친구 멜랑히톤의 죽음을 보고서 야고보서의 치유 사역게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한 것처럼 보이고, 칼빈에 있어서 치유 사역도 그 첫 걸음을 회개하는 것에 둔 것으로 보아 단순히 병고침의 은사를 활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적인 치유를 시사하는 목회 활동의 범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공관 복음서 주석을 보며는 그는 우리의 모든 질병들이 하늘로부터 오는 의약품으로만 효과적으로 치유된 다고 믿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핵심적 견해는 복음 선포로 말미암아 구원의 자리로 잇는 것을 온전한 치유로 이해하고 있다.
4) 종교개혁 이후의 치유사역
종교개혁 이후로도 치유 사역은 계속되고 있는데, 모라비안 교도들, 퀘이커 교도들, 에드워드 어빙, 복음주의적 계약 교회등의 신앙 단체들에게서 많은 치유 기적은 일어난다.
웨슬레이는 많은 하나님의 기적들을 증거하였는데, 이는 기도를 통하여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을 자신의 일기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 일례를 든다면 차 마시는 것이 습관이 되어 두통이 심했고 잠든 상태와 같았다 한다. 이 문제를 놓고 그는 기도 할때 조금도 불편함이 없어졌다고 자신의 경험들을 말하고 있다. 즉 그는 하나님의 치유를 현실적으로 믿고 적용하고 가르친 사람이었다.
Blumhardt는 초기 교회 이후 기적들이 사라진 중요한 이유를 인격적 성령이 부재 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예수는 승리자\"라는 표어를 내걸고 목회에 전념하였다. 당시 26세인 디투스라는 여인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인하여 마비와 발작 증세를 일으키며 상태는 악화되자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는 그녀가 완전 치유된 놀라운 경험을 하고 이것을 시발점으로 각성운동을 전재 하였다.
III. 치유목회의 실제
1. 치유목회의 방법에 대한 고찰
1) 믿음을 통한 치유
믿음의 통한 치유의 방법은 신약성서에서 쉽게 고찰된다. 예수께서는 백부장의 하인의 질병을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하셨다. 또한 누가복음 18:42절에서는 예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심으로 믿음을 통한 치유를 제시하고 있다.
힐트너는 신자가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을 믿을 때 영적, 육적인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다고 했다. 이는 예수의 사역에서 볼 수 있듯이 믿음은 치유의 핵심이며, 이는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뢰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지 않는 것은 마치 환자가 의사를 불신하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치유를 받기를 원한다면, 믿음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2) 기도를 통한 치유
기도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과의 대화의 통로이자, 치유의 방법이다. 맥너트는 임상적인 연구결과 기도한 사람의 75%가 완전한 치유를 받았거나, 병치유에 있어서 긍정적인 결과를 발견한 사실을 발견하고 기도의 능력에 대해서 주장하였다. 그는 기도의 응답의 문제에 대해서 일반적인 이해를 요구하기보다, 기도의 치유함을 받은 사람의 특별한 감정을 중시한다. 즉 기도로 인하여 치유함을 받은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감정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시각과는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힐트너도 크리스천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을 믿고 그것에 주의하면 뚜렷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보다도 더욱 힘이 되어 그의 곁에 서서 싸워 주셨고, 현재에도 싸우고 계시며, 앞으로도 싸워 주실 것을 믿을 때 영적으로 육적으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고 하였다.
신약성서에서 기도를 통한 역사가 일어났듯이 기도에 의한 치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이는 믿는 자들에게 일어나는 특별한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3) 안수를 통한 치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병고침의 안수에 비해 성경 속에서의 안수의 범위는 훨씬 넓다고 하겠다. 신명기 27장 18절에서는 모세가 후계자를 임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때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안수를 통하여 지도자로 세우게 된다. 또한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축복을 아들에게 안수를 통해서 전해줌을 창 48장 14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어린이를 축복할 때 안수를 하셨고(마19:15), 사도행전에서는 일곱집사를 임명할 때도 역시 안수를 거행하였다(행6:6).
이러한 넓은 범위에서 안수의 영역에서 치유를 통한 안수는 특별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맥너트는 안수 그 자체가 능력을 가진 기도라고 말했다. 신약성경에서의 예수는 말씀선포를 거치지 않고, 단순히 안수만으로 사람을 치유하시기도 하였다. 실제로 뉴욕대학에서 간호원들이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안수의 효과에 대해서 연구하였는데, 이 연구에서 환자들의 회복능력은 간호원들이 안수할 때 증진된다는 증거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안수의 효과는 특별한 방법으로 환자의 생명력을 일깨워주며, 다시금 원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안수는 단순한 손만짐과는 다른 것이다. 안수 자체가 맹신되어서는 절대로 안되지만, 오늘날에도 성령의 능력을 통한 안수에 의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부인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4) 고백을 통한 치유
회개는 기독교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기초가 되는 중요한 본질이다. 회개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며, 회개를 통해서 더욱더 하나님께 의지하게 된다. 물론 회개는 자신의 결단으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를 발견하게 되고, 죄를 발견한 인간이 죄의 삶에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을 향하도록 결단하는 것 이 양자 모든 것이 중요한 것이 회개의 현장이다. 투니어는 \"기독교적 고백과 회개는 가장 숙련된 정신 분석학적 의술 못지 않게 정신적인 해방감을 준다\"고 말함으로 고백을 통한 치유와 해방감을 강조하고 있다.
회개를 통해서 크리스천들은 정신적 해방감을 얻게 될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성령에 의한 치유함을 얻게 된다. 요한 1서 1:9절에서 \"만일 우리가 우리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며\"라고 말함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오셨으며, 회개를 통해서 회복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5) 예배를 통한 치유
예배는 \"worship\"이라는 그 어원적 의미처럼 \"최고의 가치를 최고의 분께 올리는 행위\"이다. 이는 인간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가치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말하며, 예배의 현장에서도 우리는 치유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
윌리암 템풀은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으로 양심을 자극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실하심으로 마음을 채우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생각을 정화시키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마음을 열어놓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이기적인 마음에서부터 벗어나, 진실함과 아름다움의 마음으로 변화되고, 회복의 순간을 맞게 된다. 특히 치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예배와 기도를 위한 시간이다. 예배는 성령의 임재와 치유에 대한 믿음을 통해 치유가 일어날 수 있는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 그분의 영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심으로 우리를 치유하신다.
6) 말씀을 통한 치유
투루나이젠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으며, 죄로 인하여 파괴된 사람은 말씀에 의해 회복된다\"고 말했다. 말씀은 우리를 회복시키고,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하게 만든다. 치유목회에 있어서 실제적으로 말씀은 그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말씀 그 자체가 능력이 있으며, 말씀으로 인하여 치유의 역사가 놀랍도록 일어나게 된다.
실제적인 적용에 있어서 네러모어는 성서를 사용함에 있어서 많은 성서 구절을 사용하는 것보다 몇구절을 몇 개월이고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것이 환자에게 깊이 새겨져서 유익하며, 이때 되풀이하는 단순한 방법이 중압감을 주지 않고 영적 충동을 일깨워주며, 성서를 잘 검토하여 환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한 뒤에 적용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환자가 단순한 성경책의 내용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게 하는 것이면, 이를 통해 성서와 환자의 치유적 관계가 이루어지게 된다.
2. 치유목회의 위험요소들
치유목회는 기독교의 치유사역에서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때로는 목회적 위험요소로 등장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신학자 폴 히버트는 지적하는 그 위험요소를 몇가지로 정리하였다.
첫째로, 체험에 바탕을 둔 신학을 들 수 있다. 바른 기독교적인 토대는 바른 신학위에 설립된다. 하지만 치유목회에 있어서의 약점은 체험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매우 주관적이고, 상황적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가치관의 정립을 혼란케 하고, 때로는 성서적 권위에조차 도전하는 위험을 가지기도 한다.
두 번째는 자기 중심성의 문제이다. 치유목회는 자기중심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약점들 때문에 때때로 치유목회자들사이에 문제를 가져오기도 하고, 때로는 그 신비적인 현상 때문에 사회적인 문제를 가져오기도 한다.
셋째는 진상과 소문과의 혼동의 문제이다. 치유목회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은 실제적인 현상들과 다르게 과장되거나, 신비적으로 확대되는 경우들이 있으므로, 이러한 위험성들을 주의해야 한다. 또한 만셀 패티슨이 말했듯이 기적적인 치유를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느낌을 가진지 한두 주일도 안되어 다시 의사에게 되돌아간다는 것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넷째는 새로운 기독교마술이라는 점이다. 마치 옛날의 연금술사처럼 무조건 치유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맹신은 바른 가치관을 무시한 채 마술적인 현상으로 변질될 수 있다.
다섯 번째는 세속주의 강화의 측면이다. 치유목회는 신실한 신앙적인 측면으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오히려 세속주의로 강화될 수 있으며, 이러한 점은 사회적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결국 목회자는 치유를 통한 목회에 대한 부담감이 가중되고, 바른 목회상을 가질 수 없게 된다.
마지막으로 지도자를 찬양하는 문제이다. 치유목회는 목회자의 카리스마가 중시되지만, 이는 오히려 하나의 지도자를 우상화시킬 수 있는 위험적인 요소가 있다.
이러한 치유목회의 위험성들을 인지한다면, 바른 치유목회의 상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V. 치유목회의 흐름과 전망
1. 20세기 치유사역의 흐름
20세기 들어오면서 성령의 역사는 가시적인 현상으로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더욱 기적적인 체험들에 새로운 관김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을 치유 사역 또는 치유목회에 능력목회 등으로 불렀다.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은 신학적인 논란이 제기 되었었고 일정한 흐름을 갖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제 1 물결 (오순절 운동)
미국에서 시작된 오술절 운동은 찰스 파함목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볼수 있다. 그는 감리교 목사로서 1900년에 미국 캔자스주 토페카 시에서 성경학교를 시작했는데 그 목적은 기독교 신앙체험을 부흥시키는 것이었다.
이 오순절 운동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과 구분되는 중요한 교리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방언이다. 특히 성령세례를 강조하고 그 첫 육체적 표적이 방언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육체에 성령을 부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이라 믿는다. 방언이 진실한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요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필수 적인 증거라고 한다. 이들의 기본 신학과 방법론 그리고 사역의 범위를 살펴 보기로 한다.
기본 신학
오순절 운동의 기본 신학은 치유를 통한 속죄와 병자의 믿음을 강조한다. 초자연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병의 원인을 대부분 사단의 역사로 본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령세례와 방언을 특히 강조한다. 어떤 경우에는 구원의 필 수 조건으로 비치기도 하였으며 이로 인한 무리가 많았다. 그럼에도 20세기 들어와서 오순절 운동은 전 세계로 확산에 진전을 보여 주었다.
방법론
방법론에 있어서는 치유부흥사나 목회자를 통해서 치유가 되며 기본적인 치유방법은 지식의 말씀 안수기도 중보기도 금식기도 등이다. 병자의 믿음을 강조하고 감정적인 표현들에 관심이 많다. 대부분 예배의 분위기가 요란스러우며 기도도 통성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집중적인 광고 전략을 중요시 한다. 이러한 점에서는 상당히 현대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흠이 될 것은 없다고 본다.
사역의 범위
20세기 치유의 사역을 열어 큰 성장을 가져 왔으며 저 소득층에 집중 전도한다. 치유 부흥사들의 생활이 본이 되지 못함으로해서 치유사역을 거절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런한 원인은 자신의 경험만을 생각함으로서 윤리적 신학적인 면을 소홀히 했기 빼문일 것이다.
한국에서의 제 1의 물결
한국에서의 제 1의 성령의 물결은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의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볼 수 있다. 성령께서 충만히 임함은 미국의 오순절 운동과 비슷하나 다른점은 방언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성령운동은 큰 회개를 중심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성령 운동은 1950년 길선주, 김익두 목사를 통해 일어 났으며 회개 운동과 치유의 역사도 많이 일어났다.
한국에서의 미국식 오순절 운동은 1953년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가 결성되고 1973년 제 10회 세계 오순절 대회가 서울에서 개최 됨으로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여의도 순복음 교회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었다.
제 2 물결 ( 은사운동 )
1960년 4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밴나이스 성마가 성공회 교회의 목사 데이빗 바�신부가 예배도중 교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5개월 전에 자기가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을 고백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은사운동은 성령세례와 방언의 은사를 강조 하지만 방언이 성령세례의 필수 조건이라는 오순절 운동 보다는 부드러운 입장을 취한다. 공중 예배에서의 방언도 절제를 요구하며 방언을 받은 후에 자기의 교단에서 계속 활동한다. 은사운동에 속한 사람들은 오순절운동의 사람들 보다는 개방적이다.
특히 알코올 음료수 영화관 출입 끽연 유흥 간은 것이 그리그도인의 성화와는 별 상관이 없다고 간주 하고 있다. 이러한 점이 보수적인 교단이나 오순절주의자들에게 이해 하지 못할 문제가 되고 있다. 도덕적 윤리적 문제에 대한 상반된 이해로 갈등이 되고 있다. 아마도 은사운동의 주요 인사들이 가톨릭 계통의 사람들이기 때문이어서 이러한 문제가 대두되는 것으로 본다.
a) 기본신학
치유는 구원의 한 부분이며 통전적인 치유를 강조한다. 기본 치유 방법으로 종유 교회성사 성찬 세례 결혼등을 강조하며 성령세례를 강조한다.
b) 방법론
치유는 훈련된 개인이나 팀 사역을 통해 하며 치유수련회 특별집회 교회와 가정에서 한다. 기도를 강조하며 지식의 말씀 안수 등을 통해 치유 한다. 오순절 운동과 정확한 구분은 쉽지 않으나 오순절 운동이 동적이라면 그에 비해 덜 동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c) 사역의 범위
가톨릭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으며 교육 수준이 일반적으로 높은 자들이다.
d) 한국에서의 제 2 물결
한국 개신교에 은사운동이 끼친영�은 극히 미미하다. 세계적인 은사 운동자들이 가톨릭을 통해 내한 했지만 별 영향을 주지 못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들은 새로운 형태의 예배 생동감 있는 음악 소그룹 활동 제자 훈련 기독교 공동체 형성 기도 성경공부 명상 금식등에 기여한 바가 크다. 은사운동은 신오순절운동이라고 불리운다. 이 운동은 눈에 뜨이게 영향력을 보여 주지 못했으나 신앙을 지적으로 성숙하게 하는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제 3 물결
제 3 물결의 태동자는 존 윔버이며 제 3물결 이라는 용어는 피터와그너 (Peter Wager) 교수가 처음으로 만들었다.
그가 성경을 공부하는 중에 중보기도의 은사 신유 축사 예언의 은사 행정, 영분별 지식의 은사 등 여러 가지 은사가 나타났다.
제 3의 물결은 성령세례 보다는 성령충만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성령 세례는 거듭날 때 단 한 번 경험 하는 것으로 그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인 체험 이라고 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본다. 방언은 영적인 은사이다. 하나님이 주신 27가자 은사 중 하나라고 와그너는 생각하나다. 방언은 성령 충만한 자들에게 나타날 수 도 있고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와그너는 이러한 특징을 제 1. 2의 물결과 근본적인 차이는 아니며 하나의 부차적인 교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기본 신학
그들은 하나님의 신학을 강조하며 표적과 기사를 통한 능력전도 능력 치유를 강조 한다. 성령 충만의 목적을 전도의 목적으로 보며 교회 분열을 조작하지 않는다. 전인 치유와 윤리적인 면을 강조한다. 특정인이 아닌 누구나 치유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고 믿는다. 특히 가정 내에서의 치유를 강조하며 매일 매일의 기도를 중요시 한다. 소그룹이나 전교회적인 기도도 강조한다. 치유가 일어나는 특별한 방식이나 의식 절차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치유는 하나님께서 하시고 우리는 그분께 처방전을 써 드릴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한 이러한 점은 오순절 운동이나 은사운동의 문제되는 교리를 보완한 것이다.
방법론
그들은 찬양을 부르며 치유사역을 공개적으로 실행한다. 몇 단계의 치유과정을 통해 치유한다 윔버는 5단계로 정리하고 있다. 상담 진단을 통한 결정 기도 방법의 선택 기도를 행함 기도후의 지도등이다. 이를 통해 보면 치유의 단계가 상당히 논리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치유되어야 할 내용에 대한 진단이라든지 기도후의 처리등에도 관심을 쏟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윔버는 지식의 말씀도 강조한다. 이러한 주장이 제 3의 물결에 강점으로 보인다. 과학의 도움도 받는 것을 서슴치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특징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자체이다. 이러한 운동들이 전향적인 신학적 전환을 꾀함에도 계속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치병에 대한 강조이다.
사역의 범위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이에 동조하고 있다. 세미나를 통해 지도자를 잘 훈련시키며 훈련된 사역자들이 주도하고 있다. 개인 사역이 중요하나 그리스도 몸 전체인 협동적인 사역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견해는 상당히 바람직하다. 특히 교회 성장 학자들이 이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제 3의 물결
한국에서도 미국과 때를 같이 하여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신학적인 면에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미국에서의 제 3의 물결은 복음주의 신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면 한국에서는 종교개혁 사상과 개혁주의 신학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즉 한국에서 이 물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넓은 의미에서는 복음주의자들이나 세분하면 개혁주의자들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전인치유를 강조한다. 제 3의 물결에 대한 깊은 고찰은 좀더 시간을 두고 진행 시켜야 할 것이다. 아직은 시작의 단계인 것으로 보이나 오순절 운동이나 은사 운동이 보여준 신학적 윤리적 약점을 많이 보완한 운동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에서는 상당한 호응이 기대 되지만 운동으로 그 칠 위험이 있고 일반적인 목회 방법과 큰 차이를 얼마나 보여 주는지에 대해서는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이외에도 전통적인 복음주의자들의 견해가 있으나 신유의 은사가 사도 시대에 중지되었다고 보는 자들이므로 여기서 더 깊이 있게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존 칼빈에게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20세기 세기 치유사역의 흐름을 고찰해 보면서 그 흐름들이 많은 영향을 교회에 끼쳤으며 지금도 영향을 주고 있음을 감지 할 수 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해 여러 가지 환기를 가져온 것도 긍정적인 기여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세월이 흐르면서 불합니한 점들이 여과되고 보다 성서적인 운동으로 발전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이를 테면 특정 은사에만 강조점을 두던 경향이 전인 치유의 경향으로 수정 보완되고 있으며 한 가지 은사가 아닌 모든 기적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한 과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제 3 의 물결에 대해서도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동조하고 있는 신학적인 성숙함을 보여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주의 해야 한다.
즉 질병이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다는 사실과 그런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유익을 베푸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질병는 종종 그 사람의 건강에 대해 경종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생활 방식을 경고한 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질병이 하나님의 섭리는 아니지만 하나님은 질병을 통해 일하신다는 신비를 충분히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신 불신간에 인류가 공통적으로 담당한 공통의 몫을 나누며 살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이해와 더불어 모든 치유를 하나님의 은혜의 빛 아래에서 이해해야 한다. 기적적인 치유만을 강조한다면 넓은 안목에서 위험에 빠질 우려가 있다. 또한 기적은 다른 종교에서도 일어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되며 사탄도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 성서의 지적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치유는 병고침이나 기적적인 사건에만 초점을 맞추어서는 아니되며 전인치유의 입장에서 치유목회를 논해야할 것이다.
치유의 영역을 영의 치유 내적 치유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 귀신들림과 정신질환의 치유로 나누어 볼 때 병고침 이나 기적은 주로 육체나 귀신들림의 치유에 한정되는 것이므로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오히려 성서가 말하는 치유의 우선은 근본적으로 영의 치유에 있음을 간과해서는 아니된다. 이러한 치유목회에 대한 바른 성서적 인식이 분명할 때에 이원론에 빠지기 쉬운 치유사역의 함정을 극복 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이단의 올무를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울러 성령의 사도행전적 기적과 치병의 역사가 사도시대를 끝으로 마루리 되었다는 견해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하나님은 엣날이다. 지금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분이시라는 말씀을 그분의 섭리와 자유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 한다면 오늘날도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은사의 나타남은 크게 위험한 것이 되지 아니한다. 오히려 성력의 역사를 간구하고 성력의 적극적인 도우심을 사모함은 마땅하다 다만 계속 언급해 온 것처럼 일 부분을 전체인양 호도하거나 배제한 외골수적인 은사운동은 오히려 더 큰 위험을 안고 있다는 철저한 인식이 요청되는 것이다. 더구나 교회성장에만 집착된 목회자가 이와같은 편협성에 빠지면 교회성도들을 잘못 인도하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2. 21세기 치유목회의 전망 - 치유목회의 바람직한 방향
스테반 힐(Stephen hill)은 치유의 잘못된 개념을 몇 가지로 살피고 있지만 그에게도 편중된 오류를 발견할 수 있다. 이를 테면 무슨병이든지 고침을 받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무슨병이 든지 고치시기를 원하신다는 시103:3의 말씀을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언급이 내세우고 있는 주장등이다.
이러한 견해는 자기 체험에서 비롯된 오해로서 작금의 치유 사역을 하는 이들의 극단적 주장과도 매우 상통하는 내용이다. 바로 치유사역의 함정이 여기에 있다. 위와 같은 잘못된 주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질병이 치료되지 않는 것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으며 하나님이 주신 자유보다는 오히려 영적 부자유함에서 놓이지 못하고 계속 율법주의의 노예적 상황 속에 있게 되는 것이다. 치유사역은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의 확실한 계획을 가지고 질병의 치료를 행사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적 질병의 치유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 것이 근본적인 목적이 아님을 알아야한다. 인간의 질병은 모두 극복된 날이 있으며 그렇나 구원을 이루신 것이 십자가 사거임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질병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실 이중 국적 속에서 살고 있음을 이해하자 못하면 치유사역은 계속 큰 오류를 범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치병에 의한 치유사역이 마치 모든 목회의 전부인양 이해됨에서 오는 환원주의가 해소되지 않는 한 목회 현장은 끊임없는 혼란을 되풀이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치유를 위한 치유가 인위적인 방법으로 또는 자기 욕심적인 수단으로 전락될 때 밀어 닥칠 복음의 혼합주의를 대단히 경게 해야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우려와 함께 바람직한 치유목회의 방향을 몇가지 제시 하고자 한다.
첫째 치유사역은 치유목회의 한 과정이며 보편적인 치유사역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마치 치유는 특정닌이 특정한 방법으로 하는 것이라는 경향은 매우 편협한 것이다. 성경은 언제나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테면 말씀 가르침의 은사를 특별히 받은 사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성서를 가르치고 배워야할 의무가 성도들에겐 부여되어 있음을 성서는 분명히 하고 있다. 전도의 은사도 마찬가지이다. 특별한 전도의 은사를 행하는 이들이 있긴 하지만 전도 명령은 만인을 향한 명령인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치유도 보편적으로 성도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됨의 권세이고 또한 특별한 치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도 있음을 모두 인정해야 한다. 신약의 그리스도인은 만인이 제사장이며 만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왕적 권위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된다. 그럴 때에 치유사역이 치유목회의 한 과정이며 치유사역이 목적이 되는 잘못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치유목회는 전인치유의 입장에서이해 되어져야한다. 치유사역만을 강조하게 되면 치유부흥사나 치유 그 자체를 중시하고 높이는 경우가 있어짐을 주의 해야 한다. 질병이 치유 되었다고 해서 성서가 말씀하시는 구원이 이루어 졌다고 생각하는데에 무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보여 주셨던 것처럼 인간 자체를 사랑하신 모범을 따라 가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은 영혼과 몸 즉 전인인 것에 있음을 유념하여야 한다. 치유가 이러한 궤도에서 벗어날 때 전혀 다른 종교가 되어버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셋째 치유목회에는 윤리성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며 그의 피조물인 인간도 인간적인 존재이다. 이것이 우리의 즐거움이며 희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치유병만을 강조하는 치유사역은 많은 경우에 윤리적 잡음을 일으켜 왔다. 이는 본말이 전도된 오해가 불러 일으킨 불행임을 심각히 깨달아야 한다. 병고침이 하나님의 뜻이지만 그리고 그러한 치유의 능력을 부여해 주신 것이 사실이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시기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인식이 분명할 때 목적만 있고 과정은 무시되는 비윤리적인 장애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치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방편임을 명심해야 한다. 즉 치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주께로 인도하는 전도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 3의 운동이 치유와 전도를 관련짓는 것은매우 가치 있다고 판단된다. 예수님의 치유도 하나님의 나라와 직결되어 있었다. 물론 동정심이 발동된 경우도 있었지만 예수님의 치병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고 그 능력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미치고 있는 것이다.
다섯째 치유목회는 편협성을 탈피하고 통전적인 목회의 시각에서 이해 되어져야 한다. 육신의 질병이 치유된다고 해도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치유가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한다. 오히려 인간이 떠 받혀지고 그에 따라 타락해 버리는 모습을 우리는 흔히 보아 온 것이다. 바로 역사가 주는 생생한 증언인 것이다. 목회가 어느 특정 분야에 치중되면 다양한 회중의 욕구를 채워 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그어 논 구역 안에 계신 존재가 아님을 항시 명심해야 한다.
여섯째 하나님의 치유와 섭리를 다루기 위해서는 분별의 신학을 알아야 한다. 필요가 있다. 징조와 기사가 기독교에 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파키스탄의 이슬람 성자로 알려진 바바 파리드는불치의 병들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희안한 기적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치유목회를 치병에만 초점을 맞출 때 생기는 엄청난 위험이 있는 것이다. 과연 하나님의 역사와 사탄의 역사를 어떻게 구별해야 할 것인가 대두 된다. 이러한 구분을 단순히 체험에만 의존하게 된다면 우리는 영적 분별력을 상실하게될 것이고 결국은 사탄의 세력에게 이용당하는 실수를 범케 되는 것이다. 몇가지 분별의 기준을 살필 수 있다.
우선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있느냐의 문제이고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는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가 그 운동의 지도자들이 교회내의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있는 행동을 보여 주는가 관계된 사람들이 성령의 열매를 증거하는가 그 교훈과 훈련이 우리를 영적 성숙으로 이끄는가 그 진리들이 다른 질리들과 균형을 이루는가 또한 그 주장들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통일을 추구하는가 등을 들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일곱째 고난과 죽음의 신학적 견해가 분명해야 한다. 누구에게나 고난과 죽음이 있는 것이고 그것이 결코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 연약과 고난을 거부하는 신학이 죽음을 부인하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이 세상과 맞을 수 있다. 하더라도 성경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고난과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통하게 하는 막대기가 되며 새로운 세계로 출발이 되는 것이므로 의미있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VI. 나오는 말
우리는 치유목회에 대한 정의와 역사적 고찰을 통해서 오늘의 자리매김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교회는 개인적인 치유사역으로 많은 열매를 거두어서 개인과 사회에 대해서 크고 작은 열매들을 거두어 들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의술의 발달과 여러 가지 상황에 의해 이러한 개인의 치유의 사건은 사라지고 지금의 시대는 더욱 예측하기 어려운 다양한 시대가 되었다.
21세기는 계속적인 과학의 발달과 물질의 풍요로 생활에 편리함을 더욱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정신적인 방황과 계층간 세대간 지역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본다. 이제는 치유목회가 편협한 체험적 시각에서 다루어지는 치유의 개념을 넘어서 통적적이고 전인적인 치유를 필요로 하며 이에 대한 대안을 미흡하게 나마 제시하려고 했다.
분명한 것은 21세기의 목회는 치유목회 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치병에 관심에서가 아니라 전인적이고 통전적 의미에서 치유목회가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이나 그 분의 위임 명령은 결국 전인 치유에 있었으며 그러한 사실에 대해 확실한 믿음을 견지해야 하는 것이 기독교를 바르게 지키는 일이며 또한 목회를 감당할 목회자의 올바른 통찰력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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