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에 대한 이해
베니힌목사
대가(代價)란 무엇일까요? 그것을 이해하기 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습니다.
그것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시편 63편에서 다윗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 soul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언뜻 보았습니다. 그는 그것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그것을 갖게 되었습니까?
여기 성령님께서 나의 눈을 열어 주시고 쿨만 여사가 대가와 죽음에 대해 말한 의미를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다윗은 그의 (영)혼이 갈망하는 동안 그의 육체가 주님을 앙모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 이사야는 26장 9절에서 그의 영혼 spirit 이 주님을 <사모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육체는 주님을 앙모 longing 하며,
혼은 갈망 thirsting 하며,
영은 사모 seeking 합니다.
모세 때 제작된 성막에서 주목할 만한 것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성막뜰은 육을 상징하고 있고 성소는 혼을 상징하고 있으며,
지성소는 영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앙모하는 자는 성막뜰로 안내되며,
갈망하는 자는 성소로 인도되고,
사모하는 자는 지성소로 인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앙모하면 기도하게 됩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육체를 다루시며,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는 곳입니다. 고된 투쟁이 있는 곳이며 우리는 매일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야 하며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죄와 우리의 실패와 우리의 욕망
뿐입니다. 또 그곳은 우리 자신을 계속 반복하는 곳이기도 하며
하나님께서는 수백만 마일 밖에 계신 것 같습니다. 어떤 조그만 것이라도 성취되면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그곳은 잠을 자고 싶고, 쉬고 싶은 곳입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육은 조금 밖에 남지 않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즉시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릎을 꿇기 시작함으로
육의 죽음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으신 후, 여러분도 느낄 수 있지만,
그곳을 도약하여 넘게 되면 여러분의 기도는 사실이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으로 부터 강물이 흘러 나와서 여러분의 말은 의미를 갖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나타나시고 무언가 실제로 여러분에게 일어 납니다.
여러분은 울먹이기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도약은 반 시간이나 한 시간, 그 이상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필요로 하는 한 계속되며, 그것은 여러분과 주님의 위치, 또한 주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있는 우상과 죄에 대하여 다루실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 어떠한 <이삭(아브라함의 독자)>이 있더라도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결심을 보셨습니다).
여러분이 오랫동안 기도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1~2 분 후에 그곳으로 도약하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일상적이어야 합니다. 도약은 언제나 단 번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기도를 하기 까지는 매번 고된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20년 전에 죽었다고 해서 임재하심이나 기름부으심이 오늘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오늘 아침에 죽었기 때문에 오늘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쓰다 남은 것을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뛰어 넘게 되면 죄가 사라진 다는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죄가 없어졌다는 뜻은 여러분이 곧 도약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찾았고 주님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한편 주님에 대한 갈망이 오게 됩니다. 여러분의 혼은 주님을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 42편 1~2절에서 다윗은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고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우리의 혼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갈망하게 됩니다.
다윗의 상상은 완전했습니다. 사슴이 물을 찾는 이유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목이 말랐기 때문이며, 둘째는 다른 짐승들에게 쫓겼기 때문입니다.
그가 물에 접근하게 되면 그의 냄새가 사라진다는 것을 사슴은 알고 있습니다.
그는 안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갈망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혼을 만족시키고
우리의 적들이 우리를 대적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발견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또한 <주는 나의 은신처>(시32:7)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혼이 갈망하는 물을 여러분이 발견하게 되면 찬양이 여러분 속에서 터져
나옵니다. 여러분이 성소 안에 있다는 것을 여러분도 알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사무적이거나 일상적인 <주님을 찬양하라>, <감사합니다 주님> 하는 것이
없게 됩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부분에 대해서 주님께 감사하게 될 것이며
- 한 시간 전에 주님께 감사드리지 못했던 것 까지도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아름답게 될 것입니다.
시편 63편 2절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바라보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것은 대가의 세번째 단계에 오며, 사모하는 것과 자신을 죽이는 것이
기름부으심보다 먼저 와야 합니다. 이것은 영의 상징인 지성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장소에서 여러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노래도 부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받기만 합니다.
다윗은 시편 42편 7절에서 말했습니다.
주의 폭포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성막의 뜰 안에서는 나의 입이 하나님께 말하고 있었습니다.
성소 안에서 나의 혼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지성소 안에서는 나의 영이 말을 합니다
- 깊고 더 깊이. 이곳에서는 중단없는 기도가 샘솟듯이 있습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영광 속에 은혜 만을 입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은 목마르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은 마시고 있습니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하고 다윗은
시편 46편 10절에서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너무나 가득 차 있기에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단어가 부적당합니다. 여러분은 완전히 주님의 임재하심 속에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무엇을 하시든 여러분은 흥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더욱 아는 데에만 관심이 있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체험한 자들에게는 기름 부으심이 있었으며 그들은 하나님께서 신뢰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주님에게 제일 으뜸가는 자리를 드리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신뢰하시지 않으며
기름 부으시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이 매일 매일 지성소로 들어가게 되면 그것은 더욱 자연스러워 지고
빨라지게 될 것임을 여러분에게 확실히 말해 두고 싶습니다.
그곳으로 들어가기 까지 30분도 채 걸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5분 정도 일 수도 있겟지요.
나는 <주님>하고 부르는 순간 기름부으심이 그곳에 있었던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또한 여러분이 하나님의 임재 속에 더 오래 남아 있게 되면
임재하심은 여러분 위에 더욱 강하게 나타납니다. 아주 강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지성소에 처음 들어 갔다가 나와서 여러분의 아내에게 <여보, 당신>
하고 말하게 될 때 그녀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임재하심 속에 있었음을
여러 분의 말 속에서 알게 될 것입니다. 일주일 후쯤,
여러분이 주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낸 후에 나와서 말도 하기 전에 여러분의 아내는
영광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 사도 베드로가 길을 지날 때, 병자들은 그 그림자라도
자기에게 덮이면 나을까 하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행 5:15).
베니 힌 \"성령님의 기름부으심\" 중 일부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