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원 리포트

 

박사원 리포트/ 제목: 삼위일체론적 코이노니아 교회론/ 담당교수: 이신건 조직 신학 교수 /

09-25-2009/ 제출자 : 주덕장


  먼저 이렇게 귀한 제목으로 공부 하게 하신 미주 평양 신학교 위에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또한 이신건 교수님께 심심한 감사를 전합니다.


교회를 \'코이노니아\', 즉 친교, 교제, 사귐, 교통으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자명한 것이며, 그렇기에 새롭거나 남다른 것이 결코 아니다. 비록 코이노니아의 개념은 압도적으로 바울적인 어법으로 나타나지만,그 개념의 뿌리와 의미는 성서 전체에서 매우 포괄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1991년의 캔버라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의 성명서(코이노니아로서의 교회 일치: 은사와 소명)도 하나님의 경륜의 넓은 틀 안에서 코이노니아의 개념을 사용했다. 즉 이 개념은 창조세계와 인류를 위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예수는 아버지와 자기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 사이의 밀접한 관계성을 보여주었다. 예수와 그의 아버지와 성령 사이의 신적인 사귐의 신비로운 삶은 인격적이고 관계적이다. 즉 그들 사이에서 흘러 나오는 주고받는 사랑의 삶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신적인 삼위일체의 삶(곧 사귐) 안에 다양성이 함께 융화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갈라놓을 수가 없고, 또한 일치도 그저 획일적인 것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눔의 삶은 삼위일체적인 삶에 뿌리를 두고 있고 또 그것을 반영하고 있다. 교회는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획과 조화를 이루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택함받은 자녀들이 성령의 도움으로 성부와의 사귐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들의 의지가 강하게 영원한 성자의 활동과 관계될 것이다. 이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으로써, 그분의 삼위일체적인 삶이 모든 코이노니아의 원형이요 근거이다 교회의 독특한 사명은 이 코이노니아를 실천해내는 일이다. 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 신앙의 분리는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분리할 수 없다는 신앙은 오로지 삼위일체 신앙의 틀 안에서만 주장될 수 있다. 


  그리하여 삼위일체론적 교회 이해는 교회론을 그리스도론과 성령론으로부터 발전시킬 것을 요구했고, 교회를 그리스도가 성령의 능력으로 다스리는 곳, 즉 성령의 사귐으로 이해하도록 제안했다. 그렇지만 이 문서는 하나님의 영으로서의 성령과 예수의 영으로서의 성령을 구분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으며, 성령의 위격적 주체성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하지 못함으로써 아직까지도 교회를 삼위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충분히 조명하지 못하는 결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산티아고의 토의문서는 삼위일체론적 교회론에서 큰 진보를 보여주고 있다고 보겠다.


  하나님의 백성은 일차적으로 신학적 실체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부름을 통하여 형성된 거룩한 백성이다(신 7:6, 14:2, 21, 26:19, 28:9 등). 교회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과 부름을 전제로 하며, 이 부름은 개인의 모든 행위에 선행하여 온 백성을 상대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개인으로 구성된 백성의 공동체 전체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친교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히브리적 표현은 \'계약\'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생활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계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을 통해 규정한다. 계약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친밀한 교제를 규정하고 백성의 삶 전체를 규정한다. 계약은 야훼의 공동체 창조 의지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계약 안에서 사는 자야말로 의로운 자, 선택된 자, 거룩한 자, 경건한 자이다. 계약은 이스라엘 종교의 공통 분모이다.


  코이노니아라는 말로 표현되는 하나님과 믿는 이들의 관계, 그리고 믿는 이들 사이의 관계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고후 5:17-28; 요 15:1-11 참조) 있다는 다른 말로도 쓰여졌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에게서 세례받은 이들은 그분과 하나가 되고 서로 한 몸이 된다(롬6:4-11; 고전 12:13).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 안에서 함께 듣고 주님의 만찬에 참여함으로써(고전 11:17-26), 그들은 그분 안에서 삶을 나누고 코이노니아의 선물을 받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다(고전 10:6-17).


  코이노니아로서의 교회는 그 자체 공동체의 고난뿐 아니라 그밖의 모든 고통에 참여할 수 있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 고통이란 가난한 자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 또 한계상황에 있는 자들을 변호하고 보살피며, 인간 사회 안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한 모든 노력에 힘을 보태고 인류의 심령에 산 희망을 유지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온 세계의 섬김 곧 디아코니아와 코이노니아는 서로 분리될 수가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교회의 코이노니아적 특성을 삼위 하나님의 독자적 위격의 활동 안에서 삼중적인 측면에서 조명해 보았다. 이것을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역사(歷史) 안에 있는 교회의 코이노니아적 삶으로 규정지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사귐 안에 있는 공동체적 존재이다. 


  예수는 자신의 삶과 사역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기까지 순종한 그 일을 통하여 자기 자신과 자기의 거처가 되어 주시는 아버지(요 15:10)와 자기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 사이의 밀접한 관계성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언제나 모든 것을 그분의 삶 속에 포함하고 감싸주는 그런 친교의 삶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친교의 삶은 삼위일체적 삶을 반영하고 있고, 교회는 성서에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획과 조화를 이루도록 부름받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마땅히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의 코이노니아의 관점에서도 조명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신론적 교회론과 그리스도론적 교회론 및 성령론적 교회론을 삼위일체론적 코이노니아 교회론 안에서 제한하고 동시에 보완해야 한다. 모든 일방적 혹은 배타적 교회론이 삼위 하나님의 신비하고 풍성한 사귐 안에서 극복되고 또한 상호 교통될 때에만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삶도 삼위일체적 삶을 반영할 수 있으며, 또 정체성을 잃지 않는 가운데서도 개방되고 풍성한 코이노니아적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코이노니아 안에 있는 교회의 삶을 설명하기 위하여, 앞장에서 언급한 각 교회론을 상호 관련시키려고 한다. 이 논문의 관심은 교회론에 있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의 코이노니아보다는 그것에 뿌리를 두고 있고 또 그것을 반영하고 있는 교회의 삶에 주로 초점을 맞추어 기술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백성\' 개념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더불어 시간적(구속사적) 연속성을 갖기 때문에 교회의 역사적 특징을 잘 드러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 개념은 공간적 일치성을 갖기 때문에 본래적인 의미에서 역사성을 갖지 못한다. 전자는 옛 계약과 새 계약 간의 관련성, 종말론적 방향을 분명히 드러내는 데 유용한 반면, 후자는 그리스도와의 역사적 일치성을 수직적인 공간의 표상으로 전이시키기 때문에 교회의 일치성을 드러내는 데 유용하다. 만약 \'그리스도의 몸\' 개념이 \'하나님의 백성\' 개념에 의해 보완되고 견제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쉽사리 교권적(성직계급적 법적) 표상이나 신비적 표상으로 떨어진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는 교회의 종말론적, 미래 개방적 성격은 희미해져 버리고, 그 결과 교회는 자신을 이상적인 \'완전한 사회\'로 간주하고 배타적 집단으로 군림하게 된다. 이것은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까지의 가톨릭교회의 자아상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개념은 \'그리스도의 몸\' 개념보다 교회 구성원의 자발성, 인격성, 책임성 등을 잘 드러낸다. 우리가 \'몸\' 개념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인격성을 잃기 쉽고 지체들 간의 차이성도 간과하기 쉽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 개념과는 달리 \'하나님의 백성\' 개념은 오직 유비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에, 계급적 질서를 직접 도출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모든 신앙인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교회의 성직화는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신약성서의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안에서 가능하게 된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몸\', 그와 더불어 하나의 운명과 생활의 공동체로 묶여진 \'몸\'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삶과 교훈, 운명과 결속되지 않은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의 특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몸\' 개념은 교회의 가장 심원한 내용적 충만을 표상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 개념은 교회의 세상(세속)성을 지시하는 반면에, \'성령의 피조물\'로서의 코무니오 상토룸은 교회의 초월성(자유)을 보존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는 일차적으로 보이지 않는 교회(ecclesia invisivilis)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고, 성령의 활동 가운데서 소집, 갱신, 보전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교회는 \'보이는 교회\'(ecclesia visivilis)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행함 가운데서 드러나고, 성령의 활동은 구체적인 지상적 역사적 형태 안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백성과는 동떨어져 있는 초지상적 단체가 아니라 세상 한복판에 있는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도성을 찾아 방랑하며 유랑하는 백성이다. 그런 면에서 그것은 항상 잠정성, 종말론적, 미래적 개방성을 갖는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 안에서, 이 세상을 통과하면서 이 세상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또한 항상 세상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의 조건, 제약에 매여 있고, 세상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성령의 피조물\'로서의 교회 개념은 \'하나님의 백성\' 개념의 세속화(세속주의적 오용)를 저지하고 억제한다. 즉 그것은 세속적 패권주의, 이데올로기 포로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그것은 교회의 잠정성, 허약성을 일깨우고 보완한다.


                                                   박사원생 주덕장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