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장 강해) 복된 교회와 성도

 

  {마태복음 11장 강해}  복된 교회와 성도

 

 

본문: 마태 11장1-30  /   설교자 권 다니엘 목사

2009년 10월 8일 주일말씀 Cell:1-703-371-4613

 

 

 

주성령교회 (예수교장로회 국제연합총회) UP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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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사역의 방법


마 11:1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첫째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자기의 몸을 내어주려 오셨으며, 둘째는 33년간의 지상생활을 통하여 올바른 삶의 방법을 가르치시고 친히 그 삶의 방법의 본을 보이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방법과 가르침의 실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명령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본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명령\'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실 수 있었을까요?
1) 예수님은 창조주요 구속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게서는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지만 단순한 인간은 아니십니다. 그는 창세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와 위엄과 능력을 소유하신 분으로써 태초의 천지 창조 사역에 동참하신 창조주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천지 창조 후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들을 피로 값주고 사신 구속주이시기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2) 생명을 살리는 명령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처럼 인간에게 명령을 내리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고 해서 그 명령을 맹목적으로 자기의 권위만을 내세우기 위해 내리시는 분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단지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일과 생명을 가진 자들이 공의롭과 평화로운 상태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주어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어느곳에서도 예수님 자신의 편안함과 육신적인 쾌락 등을 목적으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사실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사역 역시 명령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죄에서 떠날 것을 명하신 명령, 말씀대로 살 것을 명하신 명령, 그리고 회개할 것을 명하는 명령 이러한 명령이 우리의 사역에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가르치고 전도하셨습니다.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이미 10장에서 열두제자에게 가르치신 것을 본문은 \'명령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당신의 사역을 감당할 사람들이기에 명령하신 것입니다. 반면에 이제는 제자들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직접 일반 군중들에게 가르치시며 전도하시기를 시작하셨습니다.


1)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에서 가르침은 구원의 도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구원의 도를 포함하긴 하지만 여기에서는 구원 얻은 자들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방법에 더 비중을 두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입니다. 흔히 성도들은 기독교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으로만 만족해 하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7경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되어지는 일과 이웃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만으로 만족해 하며 세상과 이웃에게는 무관심한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 얻은 기쁨 이상으로 구원 얻은 자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과 이웃에 대하여 가질 태도에 대해 구체적으로 명백히 가르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가르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구원을 가르치며 생명의 도를 가르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제자의 삶입니다.


2) 전도하셨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빛된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것은 비단 그러한 삶이 구원 얻은 자로서의 마땅한 삶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삶을 통하여 우리의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구원의 문이 열려지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처럼 전도란 성도에게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최후 최대의 유언이며 명령입니다. (마28:19)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의 전재산과 재능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전생애까지라도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미 앞서 말씀드린대로 우리의 삶이 세상에 빛된 삶이 될 때 세상을 향해 우리의 메시지는 매우 힘이 있을 것이며, 설득력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빛된 삶을 살며 전도하는 생애가 되시길 바랍니다.

3. 떠나가셨습니다.


\'거기를 떠나가시니라\'. 예수님께서는 한 곳에 머무르시면서 그 곳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오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가르치고 전도하기 위해서 직접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다니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유언을 통해서 그의 제자들에게 세상을 향해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우리의 있는 장소에서 빛된 삶을 살아야 할 뿐 아니라 주님의 원하시는 그곳에, 그리고 우리를 필요로 하는 그곳에 가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구원의 도를 전해야 합니다.




1. 예수님으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 (마11:6)


복 음


마 11:4-6
본문의 세례 요한은 잠시 절망에 잠긴 것 같습니다. 그는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그의 사역을 감당했고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으며, 한때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는 칭찬을 받기도 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요한은 의심과 나약함으로 가득찬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불의한 자에 의하여 옥에 갇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가운데 있으며, 메시야로 오신 예수께서는 진정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제자를 예수께 보내어 그의 의문을 제기하도록 했을 때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바로 본문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본문을 통하여 자신이 메시야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1. 소경이 보며


인류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장님이었습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그러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선악과가 자신들을 하나님처럼 만들어 줄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을 때의 인류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알지 못했고 때문에 그를 십자가에 매어달았습니다. 성경을 보는 눈, 영원한 세계를 보는 눈이, 가까운 곳이 아닌 멀리 보는 눈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소경이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 나아가기만 하면 모두 눈을 뜨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앉은뱅이가 걸으며


성한 다리를 갖고 있기에 죄를 범하는 자가 많은 세상입니다. 그러기에 의롭고 선한 것에는 앉은뱅이요 절름발이인 것이 또한 인간세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그의 복음이 없었다면 오늘도 인류는 여전히 애굽에 머물러 있으며, 그곳의 소득에 만족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가나안을 향한 행군이 시작되었고 우리 안에서 천국이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불의와 죄를 수수방관해서는 안됩니다. 의와 진리의 기수로 복음을 들고 분연히 일어서야 하며 힘차게 행군을 해야 합니다.

3.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소외된 사람들이 문둥병자입니다. 모든 사회와 인간과 단절된 사람 또한 문둥병자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거룩한 성전에 참여할 수 없으며, 신의 임재와 은총, 그리고 축복을 누릴 수 없는 자가 바로 문둥병자입니다. 어쩌면 인류가 처한 환경이 문둥병자와 그리도 똑같습니까? 하나님과 단절된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신의 은총과 그의 축복에의 참여는 커녕 저주 안래 놓여 있는 영원한 멸망이 우리의 종착역이 되어 버린 것이 바로 인간이 처한 환경이 아닙니까? 그런데 메시야가 오셨습니다. 우리의 구세주가 오셔서 우리의 병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으며, 그의 풍성한 은혜와 자비는 우리의 소망과 힘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기쁜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4. 귀머거리가 들으며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말씀과 진리가 이해되어지고 그로 인한 기쁨이 충만합니다. 주를 찬양하는 온 우주와 자연의 합창소리를 우리는 날마다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에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요 그의 메시야 됨의 증거입니다. 우리는 예전엔 이 놀랍고 기쁜 소리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사탄의 유혹과 저주가 우리가 듣는 전부였습니다. 때문에 근심과 불안, 고뇌와 절망이 우리의 삶의 전부였고 이기심과 시기, 그리고 탐욕이 우리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주를 영접함으로 그의 자녀가 되었으며, 참 자유한 자요 하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5.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가난한 자가 설 땅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들은 살기 위해 멸시하고 귀찮아 하는 따가운 눈초리와 무시당함과 억눌림에 익숙해야 합니다. 그들은 근거없이 모든 부도덕과 사회악의 원인으로 부당하게 지탄을 받아도 항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 가난한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애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귀중한 자식을 생명을 걸고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빼앗겨야 했고 무거운 중노동과 난폭한 감독관 밑에서 시달려야 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가난한 자에게 전해진 복음의 소식을 애굽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해방자 모세 그는 모든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원의 소식을 듣고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바로에게 말했습니다. \'내 백성을 애굽에서 내보라고\'. 오늘 우리 또한 더 이상 가난하기 때문에 설움받고, 가난때문에 소외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에게 벅찬 소망과 기쁨이, 그리고 부요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권세있는 자, 부요한 자,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는 자들에게가 아니라 가난하기 때문에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복음이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은총 앞에 우리는 마땅히 감사해야 하며 영광을 주께 돌려야 할 것입니다.






2. 회개 하고 새로워진 성도 (마11: 20 -24)


주님의 책망과 심판
마 11:20-24


1. 책망의 성격


1) 책망은 회개하지 않는 곳에 행해집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첫 선포 말씀은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마음과 생활을 다시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고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전도하러 간 주님의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굳어진 죄들로 말미암아 자신들에게 선포되는 주님의 말씀을 져버렸던 것입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그 고을들이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가장 많은 이적들을 행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길을 반성하고 죄된 생활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마음이 완악해 갔습니다. 따라서 에수님은 그 고을들을 책망하시면서 무서운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마치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모으려 했어도 원치 않았던 예루살렘을 향해 황폐해 버려질 것을 예언한 것 같이 말입니다.(마23:37,38)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항상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두어야 하며, 죄된 생활에 대해 책망을 들을 때는 속히 회개하여 심판을 모면해야 할 것입니다.


2) 책망은 교만에 대한 질책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며 이적이 행해졌는데도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고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즉 회개하지 않고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며 스스로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 왕이 하늘에까지 높아지려는 거만함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가 경고했던 말씀을(사14:13,15)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많은 권능을 행한 가버나움을 향한 심한 책망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즉 절대로 높아질 수 없다는 말씀을 함으로 스스로 높아지기를 원하는 가버나움을 향해 질책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은 교만해져서 하늘에까지 높아지려는 사람들은 음부, 즉 지옥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고전10:12) 왜냐하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이기 때문입니다. (잠16:18) 따라서 믿는 성도들은 마음을 겸손히 함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3) 책망은 주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는 고라신과 벳세다를 책망하시면서 이 고을들에 행한 권능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두로와 시돈이 벌써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팔레스틴 지역에 있는 고라신과 벳세다를 이방 지역에 있는 두로와 시돈에 비교한 것은 대단한 특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그들에게 자극을 줌으로써 돌아오도록 하기 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아비가 그 아들을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듯(잠23:14) 주님의 책망은 그들이 열심을 내어 회개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계3:19) 따라서 주님의 책망이 우리 믿는 자들에게 임할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채찍으로 알고 달게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 된 모습을 버리고 사랑의 주님께로 달려가라 할 것입니다.

2. 책망에 따라오는 심판


본문을 보면 주님이 많은 권능을 행한 고을이 회개치 않음을 보시고 책망하시면서 무서운 심판을 예고하셨습니다. 고라신과 벳세다는 바벨론에게 침략당해 온갖 어려운 심판이 있을 것이며, 교만으로 가득 찬 가버나움은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려 쓸어버린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더 견디기 어려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책망을 하실 때 심판도 함께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잇는데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고 버린 사울 왕을 책망하면서 왕이 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선포한 것(삼상15:23), 요나가 니느웨의 악함을 책망하면서 무너짐을 선포한 것(욘3:4),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거부한 예루살렘을 책망하시면서 멸망을 선포하신 것(마3:37,38) 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책망이 임할 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2) 그러나 회개하면 심판을 모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행하고 주님께로부터 책망을 받을 때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마음ㅇ르 향하면 심판을 모면할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많은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하고 선지자를 통해 책망을 받고도 회개하지 않았을 때 망국의 슬픔을 갖게 되고 온갖 압박을 열방 국가들에게 받았지만, 요나를 통해 책망받은 니느웨가 왕으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들이 악한 길에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욘3:10) 이처럼 우리들도 주께로부터 책망받을 때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여 주게로 마음을 돌리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건지실 뿐 아니라 우리르 향한 재앙을 거두어 주십니다.













3. 계시를 받는 성도(마11: 25 -27)


하나님의 계시
마 11:27
계시란 \'감추어진 것을 드러낸다\'는 뜻으로 비밀스런 내용들을 특정한 경로를 통하여 보연 준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을 통하여 계시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그 내용은 자신임을 밝히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이제 이러한 계시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계시의 정의


1) 감추인 것을 드러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휘장으로 못 보게 가리운 것을 휘장을 걷음으로 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은 인간이 알려고 노력한다 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알려 주셔야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보이지 아니하고 드러내지 않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 인간에게 나타내시고자 특별하고도 일반적인 수단을 취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배려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며 무엇보다도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지혜도 터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자연이나 역사를 통한 일반적인 계시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만물이나 세계역사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계시를 분명히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이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계시를 가지고는 완벽하게 하나님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을 분명히 밝히시기 위해 특별한 계시를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3)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시며, 그의 모든 사역이 예언되고 성취되며 성취되어질 것을 기록한 성경입니다.
우리는 자력으로 하나님을 완전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를 찾아오시어 자신을 계시해 주셔야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계시 자체이십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완전한 하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며 그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또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모습과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원하시는 성도는 성경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우리는 성경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2. 완전한 계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1) 하나님의 위임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본문에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모든 능력과 영광을 부여하셨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권능과(마9:2)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능력을 소유하셨으며(마28:18), 모든 인류를 다스리는 권세(요17:2)와 심판의 권위(요5:22)를 가지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에게는 매우 힘이 되고 위안을 주는 것이 됩니다.


2)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믿음으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참빛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요1:10)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요1:12)

3. 계시의 목적


1)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다면 하나님을 알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에 대해 보눔ㄴ에서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아보려고 노력을 하였습니다. 철학을 통해서, 도덕을 통해서, 그리고 여러 종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도달하려고 하였지만 그들은 실패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과 탐구로 드러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오직 스스로의 계시를 통하여서 인간에게 나타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를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호사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인간들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다면 인간은 영원히 멸망받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의 용서도 알 수 없었거니와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한 모든 구원의 계획과 방법을 성경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방법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에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4. 주님의 멍예 를 메고 따르는 자 (마11:28 -30)


예수님의 초청


마 11:29,30
초청이라 함은 손님을 청하여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초청을 받은 사람은 대개가 기쁜 마음으로 이를 수락하여 초청을 해준 사람에게 예의를 표하는 것이 그 관례입니다.

1. 내게로 오라


1) 예수님의 초청


우리는 직위나 신분이 높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합니다. 그것은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데 세상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들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은 누구든지 그에게로 나오는 사람을 모두 기쁘게 맞이해 주십니다. 자신이 죄인이든, 가난한 자든, 병든 자이든, 누구든지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그에게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시기에 이러한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초청은 신분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아무런 재제나 제한이 없는 초청으로 오늘도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2) 예수께로 나가는 자는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범죄한 인생은 죄의 와중에서 스스로 헤어나오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계속 범죄함으로 결국은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롬6:23) 이러한 인생의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모든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즉 율법으로는 죽음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을 위하여 예수께서는 친히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대속적인 사역으로 인하여 우리는 죄와 그 형벌이 주는 고통에서 해방되었고 아울러 영원한 안식을 약속받았습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안식은 값없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그것은 너무도 고귀한 것이라 도저히 값을 매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서만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영원한 안식을 원하십니까? 그러시다면 예수게로 나오십시요. 그리고 그를 영접하십시요. 그러면 즉시 그의 평강과 위로는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2. 나의 멍에를 메라


1) 예수님의 멍에는 하나님과 우리를 향한 사랑의 멍에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에게 자기가 지신 멍에를 지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멍에는 어떤 멍에입니까?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여 기쁘게 짊어지신 멍에입니다. 하나님께는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40:8)라는 심정으로 멍에를 기쁘게 지셨으며, 우리를 향하여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하시면서 멍에를 지셨습니다. 우리도 예수께서 지신 멍에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메고 그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회심이후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그의 생애를 바친 것도 그가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멍에를 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충직한 소는 그 주인을 위하여 멍에를 맵니다. 성도들은 그들의 주인인 예수님을 위하여 멍에를 메야 하며,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신 이웃을 위해서도 기꺼이 멍에를 매야 할 것입니다.


2) 우리가 메는 멍에는 예수께서 함께 매어주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28:20) 이 말씀은 우리가 매고 있는 성도의 멍에에도 적용됩니다. 멍에는 힘이 들고 괴롭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멍에는 예수께서 함께 져 주시기 때문에 힘이 들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멍에는 쉽고도 가볍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초대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인생들에게 가장 복되고 은혜로운 초청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내게 배우라


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학생이 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그는 모든 규칙을 준수하고 선생님으로부터 학문을 배워야 합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와 찬송, 교회 생활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는 일입니다. 그를 배우는 일처럼 값진 일은 없습니다. 배운다는 것은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열심히 배웁시다. 그러면 그의 인격과 성품, 희생과 봉사, 그리고 사랑까지도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우리는 예수께로 배운 바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배움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고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서 지키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마28:19,20) 성도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니에 대해 가르쳐야 합니다.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배운 바 모든 진리를 빠짐없이 가르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앞장서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