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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사살 왕이 큰 연회를 베풀고 술을 마시고 있을 때 그의 눈에 커다란 손이 나타나 벽에 글을 쓰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마도 이 환상은 왕 이외에는 아무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도 보였다면 혼란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 글자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입니다. 이 알 수 없는 글을 해석한 사람이 다니엘이었고 이 일이 있던 그날 밤에 벨사살 왕은 죽임을 당하고 62세의 고령인 메데 사람 다리오가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귀향시킵니다. 우리는 이런 환상을 일컬어 ‘영서’(靈書)라고 부르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런 영서라는 현상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서도 부정적입니다. 80년대에 영서를 쓴다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했으며, 특히 시한부 종말론자들 가운데에서 왕성하게 나타났습니다.
벨사살 왕이 본 환상의 글자는 예언적인 환상인데, 다니엘이 이를 풀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예언적인 기능들이 환상은 물론 방언을 통해서 주어지며, 특별히 영서라는 것은 신약성경의 어느 곳에도 없으며, 구체적이 아니더라도 그럴 것으로 추측이 되는 상황도 역시 없었습니다. 따라서 영서를 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경계를 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벨사살 왕이 보았던 것과 비슷한 환상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쓴다는 표현은 올바르지 못합니다. 벨사살 왕이 본 글자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단어의 뜻은 긴 내용을 지닌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이 이 단어 하나씩을 풀어서 설명하였는데 왕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오늘날 환상과 방언은 예언의 주된 수단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물론 환상은 상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방언은 통역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방언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을 뿐이지 그 말 한 단어 마다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영의 소리와 천사의 음성과 성령의 뜻을 담아내는 방언은 의미만 모를 뿐이지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천상의 언어입니다. 즉 많은 물소리처럼 들렸던 천사의 소리와 우뢰 소리처럼 들렸던 성령의 음성들은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 느껴지는 모호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우뢰 소리로 들릴지라도 그 소리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계 14:2, 요 12:28~29). 축사를 할 때 거세게 반항하던 사람이 어떤 방언을 듣는 순간 꼼짝하지 못하고 잠잠해집니다. 다른 사람의 방언에는 별로 반응하지 않던 귀신이 어떤 방언을 들으면 괴로워서 나뒹굽니다. 그리고 제발 그 말을 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방언 가운데 어떤 음절은 강한 능력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간혹 성령께서 어떤 음절의 방언을 말하도록 지시하시고 그 의미를 일깨워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간혹 일정한 구절을 계속 반복하게 하고 그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방언의 단어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배우게 됩니다. 다니엘이 쓰여진 글씨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성령의 가르침이 임했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예언인 것입니다. 우리는 방언 통역을 통해서 예언을 받게 됩니다. 통역되지 않으면 전혀 알 수 없는 내용을 통역하게 됨으로써 귀중한 의미가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방언 가운데 일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경우 그 단어에 대한 의미를 알게 됩니다.
짧은 기도문 형태의 몇 마디의 단어로 구성된 방언인데 의미와 목적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치유와 축사와 보호 등과 같은 능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방언을 하게 함으로써 능력 사역을 더욱 강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몇 음절의 방언을 계속 반복하여 말하면서 그 가운데 의미가 떠오릅니다. 그러므로 이 방언의 문장은 어떤 때에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축사사역을 행할 경우 강력하게 반복되는 방언으로 인해서 귀신이 꼼짝하지 못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 때 사용된 방언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익숙하게 자주 사용하는 방언의 단어들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주로 사용하는 방언의 단어는 보호와 간구와 명령의 의미 이외에 천사를 불러오거나 성령의 기름부음을 구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우리가 말로 기도하는 것과 방언으로 기도하는 가장 큰 차이는 사단의 방해에 대한 것입니다. 말로 하는 기도는 누구나 다 알아듣지만 방언으로 하는 기도는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영의 기도는 하나님의 영만 아는데 사단이라고 해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의 기도는 마귀의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한 기도 방법입니다. 어떤 방언을 지속적으로 계속할 때 귀신은 두려워서 떱니다. 천사들이 찾아온 것이지요. 귀신들린 사람이 마치 무언가를 보고 놀라듯이 구석으로 피해 숨으려고 합니다. 축사자 주변으로 다가오는 천사들을 보고 어쩔 줄 몰라 괴성을 지르기도 합니다. 이 경우 그 방언은 천사를 부르는 내용을 담은 방언인 것입니다.
치유를 위해서 준비하며 기도할 때 간혹 그 환자를 위해서 어떤 방언을 계속할 것을 가르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환자에게 가서 치유기도를 할 때 그 방언만 계속 나옵니다. 외운 것도 아닌데 그 방언만 계속하게 되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 환자에게 다양한 증상들이 나타나면서 치유가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일상으로 하는 방언 가운데는 짧은 기도문이 들어있음을 알게 됩니다. 통역을 위한 방언일 경우 이는 예언이 되는 것인데, 이럴 때 그 가운데 몇 가지 단어는 반복되며, 주로 명령적인 내용을 담습니다.
방언은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여러 가지 신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어떤 방언을 말하면 몸이 뜨거워지고 그 방언을 듣는 사람도 역시 뜨거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는 방언을 자주 지속적으로 반복하여 기도합니다. 이런 반복적인 기도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말로 하는 기도 가운데 ‘집중기도’가 있습니다. 이 기도는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예수기도’ ‘깊은 기도’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은 기도문을 외우듯이 계속 반복하는 것입니다. 개신교에서는 별로 익숙하지 못하지만 가톨릭에서는 이런 유형의 기도문들이 많습니다. 여러 사람이 합창하듯이 계속 일정한 톤으로 반복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집중하게 되고 깊은 영적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방언기도를 통해서 집중기도로 얻는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루할 것 같은 기도문을 계속 반복하는 기도를 ‘렉시오 디비나’라고 부르는데, 우리는 이런 기도에 익숙하지 못하지만 방언기도에는 익숙합니다. 방언 역시 일정한 톤과 단어를 가지고 오랫동안 계속하는 기도형태입니다. 이런 방언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의지적으로 집중하려고 하면 할수록 어려워집니다. 방언기도가 내 영의 기도 수준에 머물면 답답하고 지루하게 여겨지고 끊임없이 솟아나는 잡념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기도주체가 바뀌어 천사나 성령의 기도가 되면 우리는 집중할 수 있게 되며, 그렇게 되면 다양한 영적 경험들을 얻게 되며, 특히 통역을 동반하여 예언적인 기도가 이루어집니다.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기도문을 외면서 의지적으로 집중하려고 해서 고안된 기도 형태가 집중기도인데, 오늘날 우리는 그런 수고를 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방법이 방언기도이며, 그래서 방언 가운데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단어에 집중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임한 방언의 주체에 따라서 다른데 내 영이 기도할 때의 방언은 지루하고 답답한 것이 특색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 가운데 영의 신호를 담은 방언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영을 받아들이는 신호로써 주어지는 단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 영의 호소를 통해서 영적 주체가 바뀌게 되며 성령의 충만함이나 기름 부음이 임하게 됩니다.
방언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이 언어는 사역자의 사역폭을 넓힐 뿐만 아니라 성령의 기름부음을 이끌어내는 주요한 도구가 됩니다. 우리는 영적 사역을 할 때 분위기가 중요함을 압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무데서나 마구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분위기가 만들어진 곳에서 일어나며, 그러기 위해서 집회에 다양한 수단들이 동원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제한을 받지 않고 역사하실 수 있도록 찬양과 경배를 통해서 성령이 임하기를 구합니다. 대부분의 사역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의 역사를 이끌어내는 일을 몸에 익히게 되며, 그래서 몸짓으로 역사를 이끌어냅니다. 이것이 사역자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이런 능력이 있는 사역자에게서는 성령의 역사를 강하게 이끌어냅니다.
방언은 영의 주체가 역사할 수 있도록 자극하는 것(stimulator)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저 역시 이 부분에는 아직 익숙하지 못해서 몇 가지 단편적인 것만 알고 있을 정도인데, 이 자극하는 것으로 영적 찬양(트힐라), 율동, 기도, 부르짖음, 방언의 언어들 등이 있습니다. 영의 어떤 역사를 이끌어내야 할 것인지에 따라서 취할 신호가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지식이 필요합니다. 방언에 국한해서 설명하면 어떤 독특한 언어에 따라서 영의 역사가 달라진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습니다. 영적 싸움이나 예언, 치유 등과 같은 사역을 행할 때 조금만 주의를 기우려 방언에 관심을 모으면 그 속에서 어떤 신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성령께서 어떤 방언을 말할 것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요구가 없더라도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성령께서 우리의 방언을 바꾸어주며, 지속적으로 어떤 독특한 방언을 계속 말하게 하십니다.
무질서하고 마구잡이처럼 보이는 방언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면밀히 관찰해보면 방언의 언어를 파악할 수 있으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방언 통역과는 다른 부분으로써 방언을 신호체계로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이 경험들이 쌓여 지식의 폭이 넓어지면 타인의 방언을 듣고 그 신호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방언에는 일정한 패턴과 유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단어는 다를지라도 억양과 감정의 높낮이를 통해서 일정한 의미를 파악할 수는 있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방언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살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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